2019.7.3  통권 203호     필자 : 문석윤
[오늘의 중국교회]
중국 신학의 건설 - I. 종교 문제
- 1920년대 반(反)기독교운동에 대한 중국교회의 대응 -

 

I. 종교 문제

 신중국(新中國)의 정체성을 수립하고 그 의의를 모색하려 할 때, 반드시 토론되어야 했던 중요한 문제가 곧, 종교가 담당할 역할은 무엇인가? 신중국에 도대체 종교가 필요한가? 종교 자체의 본질은 무엇인가? 하는 것이었다. 오사신문화혁명(五四新文化革命) 시기에 종교 문제는 많은 중국 지식인들의 주의를 끌었다. 그들은 종교의 본질과 그것이 국가의 전도(前途)에 미치는 영향 관계에 대해 적극 연구하고 토론하였다. 그들에게 그것은 신중국이 따라야 할 모범들과 방향을 정하는 일에 속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들은 자신들이 국가의 미래의 주역으로서 신중국의 운명과 방향이 자신들의 손에 달려 있음을 자각하였다. 진영첩(陳榮捷)이 묘사한 대로 “대중들이 중국 종교의 몸이라고 한다면, 지식인들은 그 마음이다.”1) 이 시기에 각양의 다양한 형식의 종교 사상들이 분출하였으며 1920년대 반기독교 활동들의 이데올로기적 기초가 놓여졌다. 중국교회 내에서도 어떤 기독교인들은 기독교의 본질과 그것이 중국 사회에 대해 가지는 적합성에 대해 다시 생각할 필요가 있다고 느꼈다. 그들은 근대 중국인의 마음에 적합한 방식으로 하나의 신종교(新宗敎)를 건설하여 국가를 발전시키고 사회를 개혁하는 데 도움을 줄 수 있기를 희망했다.
 

1. 종교에 대한 물음: 중국에 종교가 필요한가?
20세기의 반종교적 활동들은 처음에는 유교를 향했었다. 일찍이 1898년, 강유위(康有爲)는 그것이 민족을 구원할 수단이 될 것을 희망하면서 청(淸) 황제에게 유교를 국교로 삼을 것을 건의하였다.2) 1912년 민국 초기에는 진환장(陳煥章) 등의 지도 아래 상해(上海)에 공학회(孔學會)가 설립되었다. 1913년 2월 강유위는 유교운동의 기관지로서 《불인(不忍)》이라는 잡지를 창간하였다. 그는 1916년에는 정부에 “모든 나라의 백성들은 어떤 형태의 종교를 가지고 있으며, 오직 토인과 야만인은 어떤 종교도 가지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만약 중국인들이 유교의 창시자(공자)를 숭배하지 않는다면 중국은 자신을 종교가 없는 나라요 토인과 야만인의 나라임을 인정하는 것이 될 것입니다.”3)라는 건의를 하였다.
 

그들은 여러 방면에서 비판을 받았다. 종교 단체들은 이러한 조치를 민국 헌법에 천명된 종교자유에 대한 압박으로 보았다. 신문화 운동의 지도자들은 유교도들이 민족 근대화의 방해물인 구시대의 유산에 여전히 집착하고 있다고 반박하였다. 당대의 인기 있는 풍자 작가 노신(魯迅)은 그의 《광인일기(狂人日記)》에서 모든 유교 도덕을 천수백 연간 중국인들에 의해 자행된 무의식적 식인주의(食人主義)라고 조롱하였다. 오사운동 시기에 가장 영향력이 있었던 잡지 《신청년(新靑年)》의 편집인인 진독수(陳獨秀)는, 유교는 종교적 체계가 아니며 국교(國敎)로 받들어져도 안 된다고 주장하였다.4) 유교의 재기(再起)에 대한 공격은 빠른 속도로 종교 일반에 대한 반대로 확산되어 갔다.
 

최초의 조직적인 반종교 활동들은 신문화운동의 주력(主力)이었던 소년중국학회(少年中國學會)와 관련되어 있었다. 소년중국학회의 목적은 자신을 “과학적 정신의 지도 아래 젊은 중국을 창조한다는 이상을 실현하기 위해 사회봉사”에 헌신하는 것이었다.5) 1920년 8월, 북경에 있었던 학회의 집행위원회는 회원자격을 일체의 종교적 신앙이 없는 사람에게로 제한한다는 파리 지부 이황(李璜) 등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이러한 조치는 학회 구성원 내부의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저명한 극작가인 전한(田漢)은 종교자유는 국가 헌법에 규정되어 있으며 종교적 신념은 결코 사회의 발전과 문화적인 교류를 방해하지 않는다고 말하면서, 그 결정에 항의하였다.6) 반대하는 이들이 많아지자, 소년중국학회는 1921년 7월 남경(南京)에서 열린 회의에서 전년의 결정을 취소하였으며 종교 문제를 장래에 다시 토론할 문제로 남겨 두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쟁론은 이것으로 종결되지 않았다. 이황의 지도 아래 프랑스에 있었던 일부 회원들이 파리의 대학교수들에게 다음 질문들에 대한 답변을 요청하는 편지를 썼다.
 
(1) 인간은 종교적 동물인가?
(2) 오래되었든 새롭든 종교가 살아남아야 할 어떠한 가치가 있는가?
(3) 신중국은 여전히 종교를 필요로 하는가?7)
 

그들은 모두 부정적인 응답을 하였다. 소르본(Sorbonne)의 중국사 교수 마르셀 그라네(Marcel Granet)는 한 국가가 어떤 종교를 세우는 것은 부자연스러우며, 다른 국가들의 종교를 모방하는 것은 더욱 유효성이 없다고 언명하였다. 전통 중국 사회는 결코 농후한 종교 의식을 가지고 있지 않으며, 그 민족정신이 종교 교의나 미신적인 전설들로부터가 아니라 도덕 원칙과 인간관계에 기초하고 있는 비종교적 사회라는 것이다. 유명한 소설가 바부스(Henri Barbusse)는 중국에서의 선교 사업들은 중국에 유익을 가져다주지 못했으며 단지 상업적이고 정치적인 세력을 확대시키는 수단에 불과하였다고 비판했다. 그는 또한 중국의 구원을 위해서는 중국 젊은이들이 반드시 독립적이고 자주적이어야 하며 동시에 세계의 새로운 사조들과 연합 일치하는 쪽이 더 낫다고 충고하였다.8)
 

소년중국학회는 계속해서 일련의 강좌를 개최하고 북경과 남경에서 국내외의 저명한 학자들을 초청하여 종교 문제를 토론하였다. 초청된 학자들의 견해는 둘로 나뉘었다. 종교 반대자들에는 왕성공(王星拱), 이석증(李石曾) 그리고 버트란트 러셀 등이 포함되었으며, 종교 옹호자들은 양수명(梁漱溟), 도효실(屠孝實), 주작인(周作人), 유백명(劉伯明), 육지위(陸志韋) 등이었다. 이들 강좌에서는 대립되는 관점들이 다양한 배경으로부터 그리고 다양한 정도의 철학적 정교성을 지니고 표현되었다. 이전에는 이만큼의 지적인 객관성과 깊이를 가지고 종교 적이 거의문제가 토론된 적이 거의 없었다. 그들의 입장과 의견들은 20년대의 반기독교운동에 기초를 놓았으며 지식인들이 종교 문제에 대한 자신의 입장들을 표현하게 되는 지적인 분위기를 형성하였다. 반기독교운동의 사조를 명확히 이해하기 위해서 우리는 반드시 먼저 당시 종교 문제에 대한 이들의 여러 견해에 대해 분석해 볼 필요가 있다.
 

1) 감정을 종교의 기원으로 보는 입장
어떤 학자들에 의하면 종교의 기원은 기본적으로 인간 존재의 감정적 소질에 있다. 양계초(梁啓超)는 종교를 개인의 신앙으로 보고 그러한 신앙에는 두 가지 특징이 있다고 하였다. 첫째, 그것은 이성이 아니라 감정의 산물이다. 둘째, 그것은 목적이지 수단이 아니다. 왜냐하면 “사람은 신앙을 위해 다른 것을 희생할 수 있지만, 다른 것을 위해 신앙을 희생할 수는 없기”9) 때문이다. 그리고 “어떤 이데올로기에 절대적 신념을 가지고 있는 사람에게 그 이데올로기는 그의 종교가 된다.”10) 이러한 관점으로부터 본다면 로마 가톨릭 교회의 많은 명목상의 그리스도인들이 실제로는 어떠한 신앙도 가지고 있지 않은 반면, 마르크스주의를 믿는 자는 그 자신의 종교를 가지고 있는 것이 된다. 반종교운동 자체도 만약 그에 참여하는 사람이 이 목적에 자신을 헌신한다면 하나의 종교라고 할 수 있다.
 

양계초에게 종교는 두려움과 낙담의 때에 의지처와 위안을 찾는 인간의 연약함에 기인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적극적인 ‘애정의 결정체’이다. 그는 “오직 정감이 치열하게 달아오를 때만 위대한 일이 성취될 수 있다. (…) 인류의 진보는 인류의 치열한 정감에 의해 가능하게 된 성취들에 의존해 있다. 그러한 치열한 정감은 나는 달리 이름 붙일 수 없어 종교라고 부른다.”라고 말했다.11) 양계초는 중국 인민들이 어떤 형태든 삶의 고상한 이상들과 사회의 개혁을 위한 도덕적 수단을 제공할 종교적 사유를 가지는 것이 중요하다고 확신하였다.12)
 

감정의 작용을 중시하는 것은 또한 북경대 총장(1916-26)이자 반기독교운동의 옹호자인 채원배(蔡元培)의 미육(美育) 철학의 중심사상이기도 하였다. 채원배는 인간의 감정적 본성이 종교와 매우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고 생각했다. 〈미육(美育: 미학교육)으로 종교를 대신하자〉라는 글에서 그는 중국 종교의 역사에서 예술의 발전이 감정적 표현을 길들이는 수양의 한 형태가 되었다는 사실을 지적했다. 다만 다양한 종교들은 쉽게 충돌과 혼란을 야기 시킬 수도 있지만, 회화․음악․조각․시사(詩詞)의 창작과 감상, 곧 예술적 아름다움에 대한 감흥은 종교적인 차이를 초월한다. 그러한 미육의 훈련은 인간의 고상한 본성을 살찌우고 이기적 욕망들을 소멸하게 한다. 더욱이 아름다움에 대한 감각은 보편적인 감정이며 모든 이의 마음속에 온축되어 있는 것으로서 모든 이에게 다가설 수 있으며 그래서 모든 사람들이 궁극적 실재, 생명 속의 가치와 의의를 추구할 수 있도록 돕는다.13)
 

채원배는 종교를 도덕과 교육의 영역에서 분리시켰으며, 중국 지식인들의 정신적(영적) 수양에서 미육이 그것을 대체할 수 있다고 주장한 것이다.14) 이러한 이론은 “인문주의와 자연주의를 중시하는 중국의 전통적인 철학 사상과 일치하는데, 왜냐하면 미육의 훈련(예술을 통한 교육)은 초자연적이거나 초인간적인 어떠한 것도 고려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15) 채원배의 견해는 중국 사회에서의 종교의 역할을 철저하게 감소시키는 것이었으며 논리적으로 그것을 완전히 제거하는 데로 나아가는 경향을 보인 것이었다.
 

2) 초월의식을 종교의 기원으로 보는 입장
당시 어떤 이들은 다른 각도에서 종교 문제에 접근하였다. 그들은 인간의 마음 내부에 시공간의 한계를 초월하려는, 즉 금세의 세속적인 삶의 제약을 초월하고자 열망하는 내재적 경향성이 있다고 생각하였다. 종교의 본질은 바로 이러한 내재적 초월의식이라는 것이다.

동남(東南)대학 교수 유백명(劉伯明)은 인간의 본성에는 천부적인 종교 본능이 있어서 현실과 이상 사이의 부조화의 모순을 해소하는 것을 돕는다고 주장하였다. 그는 “만약 인간이 현실세계에 대해 매우 만족했다면 자연히 어떠한 종교도 없었을 것이다.”라고 말하면서 영적인 가치들 -그것은 수 세기 이래의 인류의 성취이다-의 객관적 존재를 옹호했다.16) 종교에 대한 플라톤적인 정의를 채용하면서 유백명은 강한 도덕 언어로 감각의 세계와 관념의 세계 사이의 분열을 지적했다. 후자는 전자가 본뜰 모범이 되어야 한다. 인간 삶의 목적은 현재 존재하고 있는 질서, 자연 현실의 세계에 노예적으로 예속되는 것이 아니라, 인생의 질곡을 초탈하여 정신 이상(理想)의 가치를 추구하여 더 높은 영적 실재의 영역에로 자신을 해방시키는 것이다. 이러한 가치는 객관적인 것이며, 그것의 근거는 결코 물질 혹은 자연계에 있지 않고 인간 마음의 공동의 정신적 지향에 있다. “이러한 이상이 있기에 비로소 우리는 사회에 공헌할 용기를 가지게 되며 인류의 진화를 구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17) 
 

유백명의 관찰에 의하면 인간은 언제 종교를 필요로 하는가? 그것은 곧 일시적인 삶에 불만족을 느끼는 때이며 그것을 초월하여 그와 다른 정신의 영역에로 진입하고자 하는 욕망에 이끌리는 때이다. 유백명은 채원배의 미육에 관한 주장에 대해 비평하여, 예술이 비록 일시적으로 마음속의 충돌을 경감시켜 사람들로 하여금 산수(山水)나 음악에로 마음을 쏟게 할 수는 있지만, 인생에 더욱 높은 가치 관념을 제공하는 정신(精神)상의 대상은 결여하고 있다고 말했다.
 

종교의 정의(定義)를 구하면서 북경대학교 교수 양수명(梁漱溟)은 “모든 종교의 공통적 조건은 무엇인가?”라고 물었다. 만약 거기에 어떤 대답도 없다면 우리는 오직 다양한 종교적 현상을 가질 뿐 하나의 종교 개념은 가지지 못할 것이다.18) 그의 견해에 의하면 종교의 형성은 반드시 두 가지의 조건에 부합하여야 한다. 첫째, 종교의 기능은 사람들로 하여금 정서와 의지의 방면에서 안위와 격려를 얻게 하는 것이다. 이렇게 위로하고 고무하는 일은 원시 종교이든 근대 종교이든 모든 종교에 불가결의 것이다. 그것은 모두 동일한 임무를 가지고 있는 것이니, 곧 사람들이 생활을 유지하여 가고 사회의 질서를 보존하며 아울러 희망과 용기를 가질 수 있게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종교는 ‘문화적 필연’, 즉 인류 문화의 필수품이라고 말할 수 있다. 둘째로 종교는 이지(理智)의 영역을 넘어서는 내용을 담고 있다. 그것이 말하는 관념과 그것이 낳은 경험은 반드시 신비한 색채와 신령의 도움을 가지고 있어서 소망과 신앙심의 기초를 이룬다. 양수명은 자신의 이러한 정의가 객관적인 증거와 귀납적 방법에 기초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양수명의 종교에 대한 필요는 결코 인간 마음속의 치열한 감정의 충동이나 혹은 죄의식의 해소, 그리고 생명의 의미에 대한 추구 등에 놓여 있는 것이 아니다. 결국 그것은 일종의 “참으로 초탈하고 참으로 세상을 떠나고자 하는 (眞超脫, 眞出世)” 인간의 갈망에 기인한다. 마치 불교에서 말하는 것과 같이, 생로병사(生老病死)라고 하는 일체의 고통스러운 삶의 순환과 제약으로부터 벗어나서 진여(眞如)와 열반(涅槃)의 경계 속으로 들어가려는 것이다.19) 유백명은 그러한 양수명의 사상은 또한 생명 중의 이상과 현실의 충돌을 묘사하는 것이요, 불교적 방법에 의거하여 금세를 떠나 불생불멸의 이상(理想) 영역에로 들어가고자 하는 것으로 이해하였다.20)
 

당시 영향력 있는 종교비평가였던 도효실은 종교 신자는 아니었지만 20년대 반종교운동 속에서 객관적인 각도에서 종교를 연구하였으며 종교에 대해서 호감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인간의 경험으로부터 종교 현상에 대한 분석을 시작하였다.21) 그가 보기에 종교는 결코 윤리 규칙이 아니다. 칸트(Kant)와 같은 이는 인류의 도덕적 의무를 어떤 경험적 동기에 의한 것이 아니라 지고지상의 권위의 명령(정언 명령)에 의한 것으로 보고, 그에 근거하여 이지로써 감정을 조정할 것을 강제한다. 그러나 불행을 피하고 복을 얻고자 하는 욕망에 의해 추동된 종교 신앙인들은 종교를 도덕 법칙으로 간주하는 그러한 이론에 반대할 것이다. 또한 종교는 헤겔적인 의미에서의 형이상학인 것도 아니다. 왜냐하면 중세 기독교 신비주의에서의 엑스터시나 선불교에서의 명상과 같은 다양한 종교적 경험들 속에는 개념적 지식이 결여되어 있기 때문이다. 도효실은 슐라이어마허의 ‘절대적 의존의 느낌 (feeling of absolute dependence)’이 비록 완전히 옳은 견해라고 할 수는 없지만 인간의 내면의 정조(情操)를 중시하였다는 점에서 종교의 성질을 탐구하기 위한 보다 실제적인 출발점이 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22)
 

도효실에 의하면 올바른 접근은 인간의 내적인 체험에서 종교적 본성을 찾는 것이다. 그는 인간은 천부의 영성과 창조력을 가지고 있으며, 그의 활동은 단지 환경의 영향에 의해 발생하는 기계적인 반응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주체적으로 원칙을 두고 환경을 개조하며, 존재의 속박으로부터 힘써 출구를 찾고 힘써 해방을 찾을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인간은 자연적 실존의 제약들로부터 자유롭고자하는 내적 욕구를 가지고 있으며, 변화하는 경험을 설명하기 위한 변하지 않는 원리를 찾고자 하는 타고난 충동이 있다. 도효실은 그 원리가 영원불변한 것은 아니며 시간의 흐름에 따라 그에 적응하여 늘 새로워지며 환경과 시간의 개조를 받는다는 것을 인정하였지만, 절대와 궁극적인 진리를 향한 성향 자체는 부정할 수 없다고 주장하였다. 종교는 곧 인간이 억압 속에서 해방을 찾는 것이며, 상대적인 것 속에서 절대적인 것을 찾는 것이고, 자기 자신과 그 초월적 실재(transcendent reality) 사이의 연합을 추구하는 것이다. 종교의 가능성은 제약과 해방 사이의, 그리고 상대적인 것과 절대적인 것 사이의 긴장에 놓여 있다. 도효실에 따르면 모든 종교들의 최종적인 목적은 자아와 초월적 실재를 연합하는 것이며, 그것은 이성적인 분석을 넘어서 직접적이고 주관적인 경험(곧 직각(直覺))을 산출한다.23) 그러한 경험 -구체적이고 직접적인-은 가치판단에 종속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것은 그 자체가 궁극적이기 때문이다.
 

위에서 서술한 세 사람의 학자들은 모두 종교의 본질이 초월에의 내적인 경향성의 한 형태이며, 각 개인의 마음속에 자리 잡고 있는 그러한 경향성은 마땅히 잘 양성되고 인도될 필요가 있다고 주장하였다. 세상의 어떠한 사회도 모두 종교의 훈도를 필요로 하며 중국 인민들에게 있어서도 마찬가지이다. 그들의 논점은 인간 삶에서의 보편적 효용성으로부터 특정한 사회적 환경에로 옮아갔으며, 개인적인 필연성으로부터 문화적 필연성에로 옮아갔다. 과학의 지식은 인간 삶의 물질적 조건을 개선시킬 수는 있지만 인생의 문제들을 감소시킬 수는 없다고 그들은 주장했다. 고난이 닥쳤을 때 인간에게는 종교에 의해 제공되는 안위와 격려가 반드시 필요하며, 마음속에는 세속 생활의 번요(煩擾)함을 초탈하고자 하는 소망이 항상 있다. 그리고 그러한 열망은 이지 혹은 감정에 의해 부인될 수 없다. 종교는 희망의 확신을 위해 신비적이고 초월적인 차원을 끌어 들인다. 그로 말미암아 그것은 사회질서와 문화 정신을 유지하는 하나의 역량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형식으로 종교의 가치를 인정한 학자들은 한편으로는 중국인들에게 종교의 도움이 매우 필요함을 강조하였으며, 다른 한편으로는 또한 당시 사회에서의 종교의 기능을 지적하였다. 다만 그들의 문제점은 민족적 위기에 대응할 수 있는 실현가능한 방법을 설계하는 데 실패했다는 데 있다. 그들의 대부분의 노력은 모두 개인적인 차원의 권면과 격려였으며, 전체성을 결여한 계획으로서 그 방향에서 개인주의적인 것이었다.
 

3) 구원의 길로서의 과학
신문화운동의 구호는 ‘과학(科學)’과 ‘이성(理性)’이었다. 종교가 지성을 넘어선 것이라는 생각은 ‘신청년’들의 기본적인 정신과는 반대 방향을 달리는 것이었다. 일반 청년 지식인들은 모두 힘을 다해 과학과 이성이라는 구호를 외쳤으며, 전통의 종교 신앙에 대해서는 통렬한 공격을 가하였다. 그들은 종교는 과학에 합치하지 않으며 이성에 반하는 낡은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많은 중국인들의 마음속에서 서양의 과학적 정신은 이제 중국 전래의 유교 전통을 대체하였다.
 

과학의 인기는 신문화운동의 가장 논리 정연한 대변인 호적(胡適)24)에 의해 잘 표현되었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지난 30년간 우리나라에서 비할 바 없이 존엄한 지위를 거의 얻게 된 이름이 있다. 지식이 있든 없든, 보수적이든 진보적이든 어떤 이라도 거기에 대해 불경하거나 경멸하는 태도를 감히 취할 수 없다. 이렇게 나라 안에 일반화 된 숭배가 어떤 가치를 가지고 있는 것인가 아닌가 하는 것은 또 다른 문제이다. 그러나 우리는 적어도 민족의 개혁운동이 시작된 이래로 그 자신을 근대인이라고 여기는 어떤 사람도 그 이름을 공공연하게 비방하지는 않는다는 것은 말할 수 있다. 그 이름은 바로 과학이다.25)
 

호적은 존 듀이(John Dewey)의 실용주의(Pragmatism)와 토마스 헉슬리(Thomas Huxley)의 회의주의(불가지론), 그리고 찰스 다윈(Charles Darwin)의 진화론의 열렬한 제자였다. 그에게서 과학적 방법은 진리를 추구하기 위한 정확한 접근법이며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한 유일하게 적합한 방식이다. 그는 “우리는 신(神)이 전능하다고 쉽게 그리고 가볍게 인정해서는 안 된다. 그러나 과학적 방법이 전능하며 인간에게 무한한 미래를 가져다줄 것이라는 것은 확실하게 믿어야 한다.”26)라고 했다. 연구 과정에서 사실들과 증거에 대해서는 합당한 신뢰가 주어져야 한다. 우리는 가설들을 형식화하는 데에는 대담해야만 하며, 그들에 대한 경험적 증거들을 찾는 데 있어서는 주의 깊어야 한다(大膽假說, 小心求證). 서양의 과학적 성취들에 고무되어서 호적은 과학의 가치를 거의 신성(神聖) 존귀한 지위에까지 높였다. 과학은 단지 물리적 우주, 자연계의 현상의 해석에 제한되는 것이 아니라 동시에 인간 삶의 모든 영역에까지 모두 광범위하게 활용되어 인류의 행복을 증진시킬 수 있다고 믿었다.
 

호적과 유사한 주장을 한 이가 북경대학교의 저명한 과학자였던 왕성공(王星拱)27)이다. 그가 소년중국학회(少年中國學會)에서 행한 연설은 이후 1920년대에 반기독교운동을 지지한 지식 청년들에게 매우 큰 도움을 주었다. 그에 의하면 종교를 받아들이기 어려운 가장 큰 이유는 그것의 이론(주장)들이 증거로서 입증될 수 있는 방법이 없다는 사실에 있다. 종교들은 논리적인 탐구를 수행하기보다는 신학적 주장들을 주장하면서 종종 삶의 문제들에 대한 포괄적이고 극도로 단순화 된 답변들을 제시하려고 시도한다. 인생과 사회의 문제들에 대해 다만 단순하게 신령(神靈)의 은전(恩典)을 기구(祈求)할 뿐 합리적인 사상으로 해결 방법을 모색하지는 않는다. 이러한 교조적 접근, 피세적(避世的)이고 막무가내의 태도는 지적으로 책임 있는 태도가 아니다.28)
 

왕성공은 ‘알 수 있는 것’과 ‘알 수 없는 것’ 사이에 건널 수 없는 심연이 있다는 것을 받아들이기를 거부하였다. 그에 의하면 알 수 없는 것이라고 주장된 것은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는다. 예를 들어 신, 귀신(鬼神), 천사(天使) 등과 같은 것은 경험상에서 증명할 수 없는 것들이다. 시간이 경과함에 따라 인류의 지식은 필연적으로 증가할 것이며, 인생에서 알 수 없는 것으로 여겨졌던 것들도 점차 명료하게 이해되어 진다. 과학상의 발견들이 점점 많아질수록 종교의 영역, 그 범위와 기능도 자동적으로 축소되어 간다. 왕성공은 종교가들이 말하는 주관적이고 신비한 경험이라고 하는 것들이 실은 과학적 방법의 평가를 거칠 수 없는 것이며, 따라서 우리가 신뢰할만한 관념과 지식을 제공하여 줄 수 없다고 비판하였다. 그는 “종교의 태도는 곧, 연구를 거치지 않고 증명을 거치지 않고 신종(信從)한다는 태도이다. 나쁜 점이 많고 좋은 점은 적다.”29)라고 지적하였다. 이것은 의심할 바 없이 종교적 체험의 유효성에 대한 심각한 도전이었다.
 

과학의 도래(흥기)는 당시 사람들로 하여금 중국 전통의 가치와 생존 가능성에 대해 의심하게 했다. 신문화운동의 영향 아래에서 그들은 분분하게 일어나 종교를 비판하였으며 일체의 종교가 모두 미신에 속한 것이며 낙후된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신청년(新靑年)〉의 편집자 진독수는 현대 사회에서 신과 영혼 등의 존재들은 불필요한 잉여이며, 다만 인간들이 허구적으로 만들어낸 상상에 지나지 않는다는 점을 강하게 주장하였다. 과학의 중요한 기능은 수 세기간 중국인들을 현혹해 왔던 신화들과 전설들을 부서뜨리는 것이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만약 신들과 하늘과 땅의 영들의 존재가 정확하게 증명될 수 없다면 모든 형식의 종교는 단지 기만적인 우상들에 지나지 않는다. 아미타불(阿彌陀佛)은 거짓이고, 여호와도 거짓이며, 옥황대제(玉皇大帝)도 거짓이다. 일체의 종교가들이 존중하고 숭배하는 모든 종류의 신들, 부처들, 신선들, 귀신들은 다 쓸모없으며 사람들을 속이는 우상들이므로, 모두 파괴되어야 마땅하다.30)
 

중국의 젊은 지식인들의 마음속에서 과학은 점차 ‘신성한 암소(우상)’가 되어 갔다. 그들은 과학이 위기에 처한 국가의 운명을 변화시켜 중국에 새로운 희망을 가져다주고 신기원을 열어줄 것을 기대하면서, 즉 중국 민족이 과학을 통해 구원될 수 있으리라고 상상하면서, ‘과학만능(科學萬能)’과 ‘과학구국(科學救國)’의 기치를 올리고 구호로 외쳤다. 이러한 과학에 대한 존경과 숭배의 추세 속에서는 종교의 존재 가치는 더욱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수년래 서양에서 일어났던 과학과 종교 사이의 논쟁이 당시 중국의 학술계에서 주목되었으며 중국에도 수입되었지만 그 논의의 깊이와 넓이에서는 서양에 미치지 못하였다.
 

1920년대에 폭발한 반기독교운동 중에서 적지 않은 지식 청년들이 과학의 입장에서 종교 신앙에 대해 적극 비판하고 공격하였다. 예를 들어 1922년 3월 21일, 비종교대동맹(非宗敎大同盟)이 북경에서 보낸 전문(電文)에서, 종교는 “분열을 일으키고”, “속이며”, “위선적”이라고 말해졌다. “그 가르침의 해독이 날로 심해지니, 진리는 파묻히고 말았다. 그 사악한 논설이 횡행하니 인도(人道)는 빛을 잃었다. 우리나라는 과거에는 종교가 없는 나라였으나, 근대에 이르러 그 해를 입음이 날이 갈수록 심해져 가고 있다.”31) 비종교대동맹이 설립된 목적은 “양심(良心)의 지각(知覺)에 의지하여 인류에 장애를 가져오는 안개를 몰아내고, 과학의 정신에 근본을 두고 인류의 진화의 광화(光華)를 토해 내는 것”이며32), 어떠한 정치적 사회적 배경을 가진 사람이라도 회원으로 가입하여 나라 안에서 종교가 전파되는 것에 합력하여 저항하는 것을 환영한다고 하였다. 그것이 종교에 대해 적개심을 가지는 이유는 같은 날 발표된 비종교대동맹의 선언문에 명료하게 표명되어 있다.
 

“우리는 인류 사회를 위해 종교의 해독을 제거할 것을 서약한다. 우리는 인류 사회에 미친 종교의 독성은 혹독한 홍수들이나 사나운 짐승들보다 천배 만배 더 나쁘다고 생각한다. 종교의 존재는 인류의 복지를 위협한다. 인류가 있는 곳에는 어떤 종교도 있어서는 안 된다. 종교와 인류는 함께 있을 수 없다.”33)
 

선언문은 계속해서 종교의 교의들, 종교 신앙의 활동들은 인간의 사유를 속박하고 개성을 말살해 왔으며 전쟁을 야기해 왔고 미신을 제조하여 인간의 인간성을 착취해 왔다고 말했다. 종교의 허구적 본질은 과학의 심판 아래 폭로될 것이다. “종교는 그것이 과학과 화해할 수 없기 때문에 어리석으며, 그것이 인간의 길과 완벽하게 모순되기 때문에 악한 것이다.34)

피와 살을 가진 모든 사람은 응당 종교를 추방함으로써 진리를 지지해야 한다. 근대 사회에서 종교는 이미 시대에 맞지 않으며, 그것은 역할은 과학과 철학에 의해 완전히 대체되었다.

우리는 이러한 종교에 대한 일체의 비난과 조롱들에 다분히 감정적 요소들이 섞여 있었음을 쉽게 알아차릴 수 있다. 우리를 가장 놀라게 하는 것은 이 비종교대동맹의 선언문과 전문에 서명하고 찬조를 표명한 사람들 중에 저명한 학계의 지도급 인물들이 적지 않게 포함되어 있었다는 사실이다. 당시의 한 교회 지도자가 반종교운동의 추세를 정관(靜觀)하고 다음과 같이 평한 바 있다. “이 새로운 운동의 입각점은 과학이 전능하다는 생각에 기초하고 있다. 따라서 그들은 모든 종교들은 비과학적인 미신이며, 인간의 이성적 능력을 박탈하고 인간의 자유를 속박하므로 인간의 진보에 대한 가장 큰 장애라고 생각한다.”35)
 

그렇지만 종교에 대한 과학의 공격을 뒷받침했던 과학의 우월성 또한 도전받지 않은 채로 있지는 않았다. 당시 1차 세계대전의 전화를 겪은 유럽을 여행하고 나서 귀국한 양계초는 자신의 감상을 《구유심영록(歐遊心影錄)》이라는 책을 써서 남겼다. 거기에서 그는 서구 문명이 강조하는 물질주의적이고 기계론적인 세계관은 결함이 있는 것으로 근대인의 요구에 적응할 수 없다고 증명되었다고 주장하였다. 서방 국가들은 이제 ‘과학의 전능성에 대한 꿈’으로부터 깨어나야 한다. 과학문명은 바로 붕괴의 위기에 직면하고 있기 때문이다. 중국의 유구한 정신문화는 장차 전쟁으로 고통 받고 있는 (유럽) 대륙에 구원의 메시지를 제시할 수 있을 것이다.36) 양계초의 말 속에는 중국인들이 더 이상 과학만능을 숭배하는 길로 달려가지 말 것을 권면하는 뜻이 들어 있었다.
 

양계초의 주장은 1923년에 발생한 과학과 현학(玄學: 형이상학) 대논쟁의 서곡이었다.37) 그 논쟁의 중심적 주제는 과학이 우리에게 하나의 합리적이고 완전한, 생명력 있는 인생관을 능히 제공할 수 있는 것인가 아닌가 하는 것이었다. 논쟁의 발단은 장군매(張君勱)가 1923년 2월 14일 북경 청화(淸華)대학교에서 행한 연설에서 과학이 결코 인생관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으며, 내재 정신의 가치를 가볍게 여기고 무시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한 데 있다.38) 다른 학자들, 예를 들어 장동손(張東蓀), 양계초 등은 모두 그 전후로 글을 지어 정신 가치의 중요성과 과학의 한계에 다만 대해 강조하였다. 반대로 과학의 가치를 고취한 다른 일군의 학자들, 예를 들어 정문강(丁文江), 진독수, 호적, 왕성공, 당월(唐鉞) 등은 오히려 과학의 길이야말로 인생의 진리를 탐색하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하고, 현학에서 인생의 궁극적 문제에 대해 담론하는 철학은 감각 지식의 기초를 결여한 것으로 다만 구상(構想: 상상)과 공담(空談: 공리공담)에 불과한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길고 길었던 토론은 마침내 종결되었다. 1923년 해가 저물 무렵, 연관된 모든 중요한 저작들은 《과학과 인생관(科學與人生觀)》이라는 제목의 책 속에 모아졌으며, 그 책은 중국 학생들에 의해 광범위하게 읽혀졌다. 이 논쟁의 약점은 이 책의 서문에서 호적이 지적한대로, 과학을 이용한다면 어떠한 인생철학이 나타날 것인가 하는 것을 탐색하는 노력이 부족했다는 것이다.39) 많은 학자들이 그러한 가능성에 대해 이러저러한 주장들을 폈지만 실제로 과학적인 인생철학을 수립하려고 시도한 이들은 거의 없었다.
 

펼쳐진 주장들의 양과 질을 자세히 살펴보면 논쟁의 결과, 과학쪽이 승리하였다고 공정하게 말할 수 있다. 신중국(新中國)에서 과학의 지위는 결코 의심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렇지만 일반의 중국 지식인들은 이 논쟁을 통해 종교와 현학에 대한 자신들의 인식을 증가시킬 수 있었다. 이제 다시는 종교에 대해 멋대로 경시하거나 가볍게 논단할 수 없게 되었다. 동시에 교회의 지도자들도 또한 그를 전후하여 각성되었으며 이 과학과 종교의 충돌 문제에 대해 정면으로 응시하게 되었다.
 

반종교운동의 사조와 활동 속에서 중국교회는 마치 폭풍 속에 흔들리는 갈대와 같이 서있었다. 좌우로 몰아치는 바람 속에서 곧 꺾여 버릴 것만 같았다. 이 거대한 적을 직면하여 비록 기나긴 역사 배경과 서방 문화의 전통을 가지고 있다고는 하지만 기독교는 끝내 흔들리지 않고 서 있을 수 있을 것인가? 중국 기독교인들은 어떤 방식으로 기독교가 당시 국가의 필요에 적합한 종교 신앙이라고 변호할 수 있을 것인가?



미주    
1) Wing-tsit Chan, Religious Trends in Modern China (New York: Columbia University Press, 1953), pp.218-219.
2) 陳獨秀, 〈駁康有爲之總統總理書〉, 《新靑年》 제2권제2기 (1916.10). 이글은 Kiang Wen-han의 The Chinese Student Movement 에 번역되어 있다.
3) Chow Tse-tsung, "The Anti-Confucian Movement in Early Republican China", The Confucian Persuasion, ed. A. F. Wright (Stanford: Stanford University press, 1960), pp. 288-292; 또한 Hsiao Kung-ch'üan, A Modern China and a New World: K'ang Yu-wei, Reformer and Utopian, 1858-1927 (Tokyo: University to Tokyo Press, 1975).
4) Ibid.
5) 張欽士(Neander C. S. Chang) 編, 《國內近十年來之宗敎思潮》 (北京: 燕京華文學校出版, 1927). p.183.
6) 田漢, 〈少年中國與宗敎問題〉, 《國內近十年來之宗敎思潮》에 수록, pp. 51-58.
7) 李璜이 프랑스 학자들에게 보낸 통신은 《國內近十年來之宗敎思潮》, pp. 147-148.을 보라.
8) Ibid., pp.148-154.
9) 梁啓超, 〈評非宗敎同盟〉, 張亦鏡 編, 《批評非基督敎言論彙刊全篇》(上海: 美華浸會, 1927), p.252.
10) Ibid., p.253.
11) Ibid., p.257(267?).
12) 梁啓超, 〈論宗敎家與哲學家之長短得失〉, 《飮冰室合集,文集》(Reprinted ed., Taiwan, n.d.) 冊4, 9:44-50. 양계초는 불교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왜냐하면 그는 불교의 정신과 교리가 중국 인민들의 도덕성에 적합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비록 중국에서의 기독교 선교사들의 업적에 감명 받았지만 그는 기독교에 대해서는 중립적 비판의 역할을 택했다. 〈論佛敎與群治之關係〉, ibid., 10:45-52.
13) 蔡元培, 〈以美育代宗敎說〉, 《新靑年》 3.6 (1917년 8월1일) 또한 《國內近十年來之宗敎思潮》, pp.1-9에 재수록됨.
14) 蔡元培, 〈理信與迷信〉, pp.5-8.
15) Wing-tsit Chan, Religious Trends in Modern China, p.222.
16) 劉伯明, 〈宗敎問題演講之五〉, 《國內近十年來之宗敎思潮》, pp.136-146. 원래 《少年中國》(2.11. 1921년5월)에 수록.
17) ibid., p.146.
18) 梁漱溟, 〈宗敎問題演講之四〉, 《國內近十年來之宗敎思潮》, pp.110-112. 《少年中國》(2.8. 1921년 2월)에서 가져옴.
19) 梁漱溟, 《東西文化及其哲學》, pp.90-110. 강중기 역, 《동서 문화와 철학》(2005, 솔출판사) 참조.
20) 劉伯明, 〈宗敎問題演講之五〉, p.142.
21) 屠孝實(1893-1932)은 저명한 교육가였다. 1921년 청년중국협회에 의해 후원된 종교 토론회에서 행한 그의 연설은 종교에 대해 우호적이었다. 그는 어떤 특정 종교의 신자는 아니었지만 反기독교운동 속에서 객관적인 목소리를 내었다. 屠孝實, 〈宗敎問題之三〉, 《國內近十年來之宗敎思潮》, pp.92-100. 《少年中國》(2.8. 1921년 2월)에서 가져옴.
22) Ibid., pp.95-97.
23) 屠孝實, 〈科學與宗敎果眞不能兩立麽〉, 《生命月刊》 3.1 (1922년 9월): pp.1-11.
24) 호적의 삶과 업적에 대해서는 Jerome B. Grieder, Hu Shih and the Chinese Renaissance (Cambridge: Harvard University Press, 1970) 참조. 기독교에 대한 그의 입장은 胡適, 〈基督敎與中國〉, 《生命月刊》2.7(1922년 3월) 참조.
25) 胡適, 〈科學與人生觀序〉, 汪孟鄒 編, 《科學與人生觀之論戰》 (上海, 1923; reprint ed., Hong Kong: Chinese University of Hong Kong, 1973), pp.2-3. 한성구 역, 《과학과 인생관》 (2016, 산지니) 참조.
26) 胡適, 〈我們對於西洋近代文明的態度〉, 《東方雜誌》 제23권제17기 (1916): pp.73-82. D.W.Y. Kwok, Scientism in Chinese Thought, 1900-1950 (New Haven and London: Yale University Press, 1965), pp.96에 번역되어 있다.
27) 王星拱은 1889년 安徽에서 태어났다. 1908년에서 1917년까지 영국에서 공부하였으며 1917년에서 1926년까지 北京大에서 교수생활을 하였다. 1927년 그는 南京의 國立中央大學의 과학 교수가 되었으며, 國立武漢大學의 총장이 되었다. 《科學方法論》과 《科學導論》이 그의 대표작이다. 
28) 王星拱, 〈宗敎問題演講之一〉, 《國內近十年來之宗敎思潮》, pp.59-68. 또한 王星拱, 《科學方法論》 (北京, 1920; reprint ed., 臺灣: 水牛出版社, 1966), pp.141-154을 참조.
29) Ibid., p.72.
30) 陳獨秀, 〈偶像破壞論〉, 《新靑年》 5.2 (1918): 89. Kwok, Scientism in Chinese Thought, p.71에 번역되어 있다. 또한 〈科學與神聖〉, 《獨秀文存》 4책 (上海, 1922; reprint ed., 上海, 1933), 2:5.
31) 《批評非基督敎言論彙刊全篇》, p.11.
32) Ibid., p.28.
33) Ibid., p.30.
34) Ibid., p.29.
35) 王治心, 《中國宗敎思想史大綱》 (上海: 中華書局, 1933).
36) 梁啓超, 〈歐遊心影錄․節錄〉, 《飮冰室文集 前集》 (上海, 中華書局, 1936), 5.23:38. 이종민 역, 《구유심영록》 (2016, 산지니) 참조.
37) 논쟁에 대한 훌륭한 요약으로 Kwok, Scientism in Chinese Thought, p135-60을 보라. 또한 그 주제에 대한 당대의 검토로서 Lo Chih-hsi, 《科學與玄學》 (上海, 商務印書館, 1927)을 참조.
38) 장군매는 과학은 외부 세계에 의해서보다는 내면세계에 의해서 더 많이 지배되는 인생철학(인생관)의 문제들에 해답을 줄 수 없다고 주장하였다. 과학적인 가치들보다는 정신적인 가치들이 고려되어야 하는 것이다. 장군매는 張東遜의 지지를 받았으며, 어느 정도까지는 梁啓超, 林宰平의 지지도 받았다. 반면에, 丁文江은 과학의 충분함을 주장하였다. 그는 감각 지각이 지식의 유일한 기초이며, 궁극적 실재도 그를 떠나서는 알 수 없다고 주장하였다. 정문강의 입장에 동조한 이로는 陳獨秀, 胡適, 王星拱, 唐鉞, 任叔永 등이 있었다.
39) 胡適, 〈學與人生觀序〉, pp.12-13.

 




사진 | 바이두 

문석윤 | 경희대학교 철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