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5.3  통권 201호     필자 : 김종건
[중국기독교회사]
루지에리의 중국선교

 

루지에리의 마카오 도착
사비에르와 발리냐노가 중국선교 사업을 위한 적응성 선교전략을 수립하였으나 그들은 결국 중국 내지에 들어가지 못함으로써 적응성 선교전략의 실행이라는 역사적 임무는 예수회 선교사 미켈레 루지에리(Michele Ruggieri, 羅明堅)에게 주어졌다. 

루지에리의 중국식 자(字)는 복초(復初)로, 1543년 이탈리아 나폴리 왕국의 스피나졸라(Spinazzola)라고 불리는 조그만 마을에서 태어났다. 그의 일생은 대체로 3시기로 나눠 볼 수 있는데, “(1) 예수회 가입 이전과 가입 후 고아(Goa)로 가기 전까지(1543∼1578), (2) 고아로 간 이후 10년간의 원동 선교기(1579∼1588), (3) 이탈리아로 돌아온 이후 1607년 5월 11일 세상을 떠날 때까지 19년의 생활(1589∼1607)”이다. 
 

루지에리는 나폴리에서 민법과 교회법을 10년 동안 공부하고 2개의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그 후 스페인 왕국 부흥에 많은 기여를 하였고, 29살이던 1572년 예수회에 가입하여 로마 성 안드레아 대학에서 수련하였으며, 이듬해(1573년)에는 로마대학에 들어가 신학을 공부하였다. 루지에리는 공부를 하던 중 선교에 헌신하기로 결심하고 1577년 여름 인도선교의 명령을 받은 뒤 루지에리는 교황 그레오리(Greorius) 13세를 친견하였다. 그리고 1578년 초 신부로 서품을 받은 뒤 파시오(P. Pasio), 마테오 리치, 루돌프 등과 함께 리스본항을 출항하여 7개월 후인 1578년 9월 13일 인도의 고아에 도착했다.
 

고아에서 아직 배우지 못한 신학 3과목을 신학원에서 공부한 뒤 성회장인 로드리고 빈센테(P. Rui, Rodrigo Vicente)의 명에 따라 말라바르(Malavar)로 가서 일하던 중, 중국에 도착한 발리냐노가 신부 한 명을 파견해 달라고 요구했고, 루지에리가 천거되었다. 루지에리가 1579년 4월 12일 성회장의 명령서를 받고 중국으로 떠나 1579년 7월 마카오에 도착했다.
 

이미 36세였던 루지에리는 온갖 어려움을 무릅쓰고 중국 언어 문자 학습에 매진하여, 2년여 만에 한자 15,000자를 알게 되고 점차 중국 서적을 볼 수 있게 되었고, 중문 소책자의 번역을 시도하기도 하였다. 중국어를 학습한 지 만 3년이 되면서 타인의 도움을 받아 기독교 교리를 알리는 소책자 즉 《천주십계(天主十戒)》, 《성현화서(聖賢花絮)》, 《고해지남(告解指南)》, 혹은 《신조(信條)》, 《요리문답(要理問答)》 등을 편찬했다. 이러한 기초 위에 루지에리는 4년 동안 시간을 쏟아부어 체계적으로 기독교 교리를 소개하는 중국어로 된 책 《신편천주실록(新編天主實錄)》을 집필하였다. 이 책은 《천주성교실록(天主聖敎實錄)》이라고도 불리는데, 이것은 “유럽인이 중국어로 쓴 최초의 교리요강으로서, 1584년 11월 광주(廣州)에서 초판이 인쇄되었다.”1)
 

바쁜 학습과 그의 중국어 공부를 질시하는 현지 선교사들 사회에서 고립감을 느낀 루지에리는 동반자가 될 신부로 마테오 리치 파견을 청원하였고, 발리냐노의 협조를 통해 마테오 리치가 고아로부터 마카오로 합류하게 되었다. 이로부터 그는 루지에리의 유능한 조수로서 뿐만 아니라 창조적으로 적응성 선교 노선을 실행해 나간 걸출한 대표 인물이 된다.
 

루지에리의 광주 체류 승인 취득
루지에리가 마카오에 온 지 2년째 되던 1580년 12월 초, 광주에서 무역을 할 수 있게 허용된 포르투갈 상인을 데리고 여러 차례 광주로 들어가게 되었다. 당시 규정으로는 일 년에 두 차례(10월, 6월말) 2-3개월 동안의 무역 기간 동안만 포르투갈 상인들이 광주로 들어가는 것이 허용되었다. 하지만 저녁이 되면 성내에 머물지 못하고 필히 상선으로 되돌아가 밤을 보내야 했다. 중국 관료층과의 유대와 호감을 증진한 다음 루지에리는 네 번째로 광주에 왔을 때 관아에 요청하여 광주 성내에 거주하는 특별 허락을 받아내었다. 그는 중국어 공부와 더불어 중국 문화와 풍습에 대한 학습도 열심을 다하였다. 또 그는 마카오에 있던 서양 상인들에게 무릎을 꿇거나 엎드려 절하기 등 중국 예절을 가르쳐 상인들의 태도가 달라졌으며, 이로 인해 루지에리 신부에 대한 중국 관료들과 저명인사들의 신임이 높아진 결과 가능해진 일이었다.
 

겸손하게 예의를 갖추고 상대의 말과 얼굴빛을 살펴서 의중을 헤아리는 능력 이외도 루지에리는 중국 관원과 교제를 통해 우의를 발전시키는 데 효과적이었던 2가지 수단을 갖고 있었다. 즉 중국 언어와 문자를 대강이나마 소통할 수 있는 능력과 서방에서 가지고 온 신기한 선물들이었다. 루지에리는 중국 어문을 대강 알고 있었던 까닭으로 만력 9년(1581년) 광주에서 잠시 체류하는 동안 중국어로 된 소책자를 편찬 발행했는데, 중국학자들도 이를 높이 평가했다. 예수회 선교사들은 시계를 중국 백성들의 사랑을 얻는 중요한 수단으로 삼았다. 시계를 선사하면서 명조(明朝) 관원들의 호감과 지지를 얻는 방법은 루지에리가 처음 광주를 몇 차례 방문하는 가운데 이미 시작되었다. 이것은 분명 중국선교 사업을 발전시키는 데 상당히 성공적인 전략이었다.
 

루지에리의 조경 거류지 획득
신임 양광총독 진서(陳瑞)의 추방 조치에 따라 마카오로 철수하게 되었을 때, 발리냐노의 제의에 따라 루지에리 등 일행이 1582년 5월 총독 아문이 위치한 조경(肇慶)으로 가서 좋은 원단, 멋진 옷, 크리스탈 거울 등의 예물을 총독에게 진상하여 종전과 같이 무역할 수 있게 허락을 받아냈다. 총독이 시계 등 서방 기물에 대해 관심이 높음을 확인한 뒤 1582년 12월 18일 루지에리와 발리냐노 등 일행 네 명이 마카오를 떠나 27일 조경에 도착했다. 그리고 30일에 총독 진서를 접견하는 자리에서 두 사람은 정교한 시계와 베니스산 프리즘 몇 개를 그에게 증정했다.
 

진서는 시계가 자동으로 시각을 알리고 장침과 단침이 시간을 가리키는 것을 보았다. 더욱이 그것이 투명한 유리 프리즘을 통해 굴절되어 다채로운 색상이 반사되자 놀라움과 기쁨은 말할 수 없었다. 선교사들은 바로 이와 같이 총독의 환심을 얻어서 정성스런 접대와 아낌없는 승낙을 받아냈다. 루지에리는 서양 과학을 중국에 잘 소개하는 동시에 중국의 각종 유익한 점을 잘 배우고 익혀 유럽에 전할 수 있게 주택을 한 채만 하사해 달라고 요청했다. 총독은 성내 큰 사찰 천녕사(天寧寺)와 가까운 조용한 곳의 건물에 머물도록 배려해 주었다.
 

루지에리와 그 일행들은 이곳에서 조용하고 편안한 가운데서 4∼5개월 동안 지내면서 공개적으로 미사를 올렸다. 관원과 현지 인사들과 술잔을 나누고 교제하며 지부가 주최하는 생일연회에도 참석하면서 꿈같은 희망을 가지고 영구적인 거류 허가를 얻어내기를 기대했다. 잦은 왕래 가운데 총독은 서방 물품에 대한 정교함에 매우 놀라워했고 선교사가 귀신을 내쫓을 수 있다는 명성에 대해서 깊은 찬사를 보냈다. 더구나 선교사가 전해 준 서방 문화에 대해 점차 관심을 나타냈다.
 

1583년 새해 첫날 총독은 부하를 이끌고 천녕사를 찾아와 ‘천후(天后)’의 상에 참배했다. 이 때 마침 이 절에 머물고 있던 루지에리는 일부 관원들로부터 ‘서방에서 온 현자’를 찬양하는 시 몇 수를 선물로 받았다. 그러나 선교활동이 본격적으로 진전될 수 있다는 희망에 부풀어 있던 만력 11년(1583년), 총독 진서가 뇌물 관련 죄를 얻어 관직에서 물러나게 되면서 어려운 상황을 맞게 되었다. 그는 루지에리 등에게 즉시 떠나도록 요청하면서 서명한 증명서를 주면서 광주 해도부사(海道副使)에게 가면 집과 교회당을 지을 부지를 제공해 줄 것이라고 하였다. 루지에리는 배로 광주에 도착한 뒤 해도부사를 찾았으나 때마침 그가 자리에 없었고, 수비대는 상륙조차 허용하지 않았다. 루지에리 일행은 마카오로 복귀할 수밖에 없었다.
 

루지에리의 두 번째 조경 방문은 비록 실패로 끝나고 말았지만 이 기간 동안의 적응성 선교전략은 새로운 단계로 나아가게 되었다. 이것은 중국 황제의 백성임을 밝히고, 중국 승려 복장으로 바꿔 입겠다고 분명히 밝힌 것이었다. 루지에리 등에게 복장을 바꿔 중국인이 되어야 한다는 총독 등 중국 관원들의 요구는 중국 전통의 민족융합 또는 동화정책의 반영이었다. 루지에리 등이 선교사 복장을 기꺼이 중국 승려 복장으로 바꾼 것은 아무런 생각이나 준비 없이 한 것이 아니라 무엇보다도 선교사들이 중국인으로 바뀌어야 궁극적으로 기독교가 중국에서 뿌리를 내릴 수 있다는 확신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1583년 3월 후임 양광 총독 곽응빙(郭應聘)이 부임한 뒤 진서의 서명 문서를 찾아 마카오로 온 관원들과 함께 광주로 가서 거류지 배려 요청을 하였으나 성사되지 못하였다. 오히려 신임 총독은 외국선교사에게 중국어를 가르치고 백성의 정세를 누설하며 선교사의 성내 거주 요구를 선동하는 중국 통역관들은 엄벌에 처할 것이라고 공지하였고, 루지에리 일행으로서는 중국 내지에 거점을 세우려는 일체의 희망이 사라지는 낙심천만의 상황을 맞게 되었다.

그러나 뜻밖에도 루지에리가 마카오로 돌아와서 암담한 가운데 있은 지 일주일도 되지 않아 조경지부(肇慶知府) 왕반(王泮)이 파견한 관리가 마카오로 와서 신임 총독이 승인한 한 통의 서신을 전하였다. 그 서신의 내용은 예수회 선교사들을 다시 조경으로 초청하고, 아울러 4년 동안에 걸쳐 요구해 온 교회당과 주택을 지을 부지를 마련해 주겠다는 것이었다. 사비에르와 발리냐노의 노력에 이어 루지에리의 4년에 걸친 노력이 성사되는 감격적인 순간이었다.



미주    
 [프] 費賴之 著, 馮承鈞 譯, 〈羅明堅傳〉(《入華耶穌會士列傳及書目》, 上冊), p. 29.

 






김종건 | 대구한의대학교 기초교양대학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