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3.4  통권 199호     필자 : 김종건
[중국기독교회사]
발리냐노의 동방선교

 

발리냐노와 마카오
 

사비에르 사후 20여 년 동안 예수회의 중국선교 노력은 맹목적이면서 무질서한 정황이었다. 이러한 상황을 일변시켜 마침내 선교사절단이 성공적으로 중국 내지로 들어가도록 기획하고 조직한 사람은 인도 교구 예수회 사무를 감독하던 신임 시찰원 발리냐노(范禮安, Alessandro Valignano)였다.
 

발리냐노는 1539년 2월 20일 이탈리아 남부 나폴리왕국 아브루치(Abruzzi)주 치에티(Chieti) 출신으로 파도바(Padova)대학에서 법학 박사학위를 받고, 치에티의 카살레(Casale)수도원 원장을 거쳐 추기경 아르테푸스의 조수로 바티칸 교황청에서 여러 해 동안 일했다.
 

1566년 발리냐노는 로마에서 예수회에 가입하였고, 1571년에는 성 안드레아 초(初)학원 원장이 되어 젊은 마테오리치에 대한 시험을 맡게 되면서 그 인연으로 마테오리치의 후견인이 되었으며, 이후 마체라타 학원의 원장도 지냈다. 1573년 5월 발리냐노는 예수회 제4대 총장 메르쿠리안(Everard Mercurian)에 의해 인도에서 일본에 이르는 예수회 전 교구 사무를 주관하는 시찰원 겸 부주교로 임명되었으며, 1574년 3월 23일 발리냐노는 41명(일설에는 38명이라고도 함)의 예수회 선교사를 이끌고 리스본을 출발하여 9월 6일 인도 고아(Goa)에 부임했다.

이후 발리냐노는 동방선교 일선에서 32년 동안(1574. 9. 6∼1606. 1. 20) 예수회의 선교 직무를 담당했다. 그동안 인도 교구 시찰원 17년(1574. 9. 6∼1583. 4. 7, 1587. 4∼1595. 9. 24), 인도 교구 대주교 4년(1583. 4. 7∼1587. 4)을 지냈지만 중국·일본 교구 시찰원으로도 11년(1595. 9. 24∼1606. 1 .20) 동안 사역하였다.

이 기간 동안 인도와 동남아시아 각 지역을 시찰하였고, 특히 가장 오랫동안 머물렀던 지역은 일본과 마카오였다. 발리냐노는 3차례 일본을 방문했으며(1579. 7. 25∼1582. 2. 20, 1590. 7. 21∼1592 .10 .9, 1598. 8. 5∼1603. 1. 15), 6차례 마카오에 머물면서 교무를 처리하였고(1578. 9. 6∼1579. 7. 7, 1582. 3. 9∼12. 31, 1588. 7. 28∼1590. 6. 29, 1592. 10. 24∼1594. 11. 15, 1597. 7. 20∼1598. 7. 14, 1603. 2. 10∼1606. 1. 20), 특히 마카오 체류 중 1606년 1월 20일 신장 질환으로 생을 마감했다.  

 

 

중국선교를 위한 준비

일본과 특히 중국의 교무는 발리냐노가 심혈을 기울였던 최대 관심 사업이었다. 발리냐노는 고아에 부임한 뒤 우선적으로 선교 기구를 정비하고 선교사를 증파하였다. 이를 위해 발리냐노는 실제 상황을 조사하고 이해하는 일부터 착수했다. 발리냐노는 여러 차례 중국을 다녀온 선교사들을 통해 중국선교 관련 정보를 수합하였다.

발리냐노는 고아로 부임하던 도중 모잠비크에서 리베이라 신부를 만났는데, 그가 중국으로 밀입국하려다 연금되었던 사정과 무력을 사용해서라도 중국을 귀의시키자는 그의 주장을 듣기도 했다. 고아에서는 테세이라(戴賽辣, P. Texeira) 신부를 만나 중국 사정을 문의했지만 낙심한 그에게서 중국 문호 개방 방안에 대해 아무런 조언도 얻지 못하였다.

1578년 7월 이후 발리냐노는 처음으로 마카오로 와서 10개월간 머물게 되었는데 이곳에서 비로소 중국 형세를 상세히 알아 볼 수 있게 되었다. 이때 사비에르 임종을 지켜봤던 안토니(安多尼)를 통해 사비에르의 중국선교를 위한 노력의 과정들을 자세히 듣게 되었고, 중국 문헌 자료들을 입수하여 중국에 대한 보다 구체적인 접근을 할 수 있게 되었다.

일본에서 교무를 진행하다가 1582년 두 번째 마카오로 와서는 무엇보다도 다양한 중국 서적을 적극 수집하여 여러 명의 통역관의 도움을 받아 그것을 열독하는 데 집중했다. 이를 통해 중국의 역사, 지리, 언어, 풍습, 의약, 건축과 일상생활, 그리고 사회 의례에 대해 상당한 이해의 폭을 넓히게 되었다. 이러한 연구에 근거하여 그는 예수회 총장의 지시에 따라 찬술한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전기》에서 중국 현황을 거의 완벽하게 설명할 수 있었다.

이러한 조사연구를 거치면서 발리냐노는 중국내지선교에 상당한 어려움이 따를 것으로 인식하게 되었다. 그는 “마카오학교의 창문을 통해 중국땅을 바라보면서 큰 소리로 ‘바위야! 바위야! 너 언제 열리려나’고 외쳤다.”1)라고 한다.


발리냐노의 중국 이해

힘든 이 임무를 이루려면 반드시 사비에르 신부의 정신을 계승하면서도 선교방식에는 큰 변화가 있어야 한다는 인식을 깊이 하게 되었다. 당시 선교사들 가운데는 사비에르 신부 생전의 공헌에 관해 비난하는 현상이 나타나고 있었으나, 그는 중국 문화를 인정하려고 한 사비에르의 정신을 특별히 칭송했다. 그는 중국 진입이 가장 절박하면서도 고귀한 사명이이라고 건의하면서 중국선교를 위해서는 과거 다른 나라에서와 같은 방법을 피하여야 함을 강조했다.

중국선교를 위해 발리냐노가 요구한 것은 과거와 같은 선교방식의 문제점에 대한 반성이며 중국 문명의 우월성에 대한 인식에 기초한 것이었다. 마닐라나 마카오에서의 선교 관행으로는 세례 입교한 중국인들이 이름, 복장, 풍습까지 모든 면에서 포르투갈인이나 스페인인이 될 것을 강요하고 있었다. 그는 동인도교회 상층부 인사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마카오 성 바오로 학원에서 예수회 이름의 단체를 조직하고, 중국인은 원래 중국의 모습대로 두고 서양의 선교사들이 ‘중국화’하여야 한다고 주창했다.

발리냐노가 중국 문명의 우월성에 대해 어떻게 인식했는지에 관해서는 그가 편찬한 《프란치스코 하비에르*전》에 잘 나타나 있다. 그는 이 책의 서두에서 중국이 동방에서 가장 중요하고 풍족한 곳이라고 하면서 유럽을 능가한 면모를 7가지로 정리하였다. (1) 한 황제가 다스리는 단일 국가로서 가장 광활한 국가, (2) 인구가 가장 많은 국가, (3) 전 세계에서 가장 풍요로운 국가, (4) 어떤 국가도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생산과 물산이 풍족한 나라, (5) 산천이 장엄하고 번영을 위해 앞장 선 나라, (6) 백성이 세계에서 가장 근면한 나라, (7) 지금까지 발견된 나라 중 가장 평화롭고 통치가 잘되는 나라 등으로 열거했다.

서양법 박사학위 소지자였던 그는 특별히 마지막 항목인 정치제도 부문에 대해 보다 더 큰 관심을 갖고 중점적으로 고찰했다. 그 장점으로 (1) 관원이 되려면 반드시 과거 시험을 통과해야 하며, 그 과정에서 학술이 중시되고, 각 도시의 장서(藏書)가 풍부하고, 자연철학, 윤리철학, 과학 일반에 대해서도 관심이 미치게 되는 점, (2) 보편적인 질서가 바르게 세워져 있어 지금까지 세계에서 본 정부 형식 가운데 가장 정연한 점, (3) 정책이나 법령의 집행이 엄격하고 신속한 점, (4) 어떤 장애물을 제거할 때에도 항상 신중하고 평화적인 수단을 채택한다는 점, (5) 황족을 지방으로 분산 배치하고 관료 중심 통치를 통해 봉기를 예방한다는 점 등을 들었다.

발리냐노의 중국 문명의 우월성에 대한 인식과 국가 통치 성과에 대한 연구는 서방 기독교가 중국에서 어떠한 작용을 할 수 있는가라는 문제로도 이어졌다.

우선 발리냐노는 중국이 “하느님과 그 성스러운 종교”에 대한 인식을 갖고 있지 않았기 때문에, 설령 힘써 질서를 갖추고 조심스럽고 신중하게 통치하였다고 하더라도 여전히 많은 심각한 혼란이 발생하는 것을 막기에는 부족하였고, 이것이 국가 통치상의 결함을 유발한 심각한 원인이었다고 지적하였다. 때문에 만일 중국인이 서방 종교 즉 “하느님 참 진리의 광명”을 받아들인다면 중국 민중은 더욱 선량하고 경건하게 변할 것이라고 보았다. 그는 “총명하고 성취가 있고 예술 연구에 헌신적인 이 민족이 똑같은 학식과 품덕을 가진 유명한 외국인이 와서 그들과 함께 거주하자고 하면 쉽게 동의하게 될 것이다. 특히 그 외래 손님이 중국어와 한자에 능통한다면 더욱 쉽게 그럴 것이라고 이해할 수 있다. 그렇다면 그들의 정치체계에 기독교가 도움이 되고 손해를 끼치지 않는다고 한다면 이 민족은 어느 날 기독교를 기쁘게 영접할 가능성은 더욱 높다”2)라고 지적하였다.

이와 같이 발리냐노는 이미 중화 문명이 유럽과는 다른 또 하나의 찬란한 문명임을 분명히 알고 있었으며, 나아가 국가 체제와 통치 제도 측면에서는 중국이 유럽보다 월등히 앞선다는 것을 인식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서방 종교를 전하는 과정에서 다른 국가에서와 같이 현지 문명을 대신하거나 말살할 것이 아니라 중국에서는 오히려 문명을 존중하고 중국의 언어와 문자에 정통한 토대 위에서 학술 교류, 도덕규범의 상호 교류, 그리고 기독교가 중국 문명에 보탬이 되는 효과를 전함으로써 중국선교의 목적을 이루고자 하였다. 즉, 동방 민족 특히 중국에 대해서는 이교도 민족들의 문명과 풍습 습관을 ‘전면타도’하는 방식을 채택해서는 안 되며, 오히려 새로운 민족들에게 맞는 전도 방법을 선택하여야 한다고 보았다. 이러한 그의 관점은 이후 예수회의 중국선교가 본격적으로 전개되는 과정에서 중요한 영향력으로 작용하게 된다.



미주          

1) [프]費賴之 著, 馮承鈞 譯, 〈范禮安〉(《在華耶穌會士列傳及書目》 上冊), p. 20.
2) 何高濟等 譯, 《利瑪竇中國札記》 上冊, p. 142.


* 첫 호에 언급되었듯이 사비에르의 이름 표기는 그의 출신지 바스크어로는 프란치스코 샤비에르(Frantzisko Xabier), 스페인어로는 프란치스코 하비에르(Francisco Xavier)이다. 라틴어 표기로는 프란치스코 사베리오, 영어로는 프란시스 자비에르로 할 수 있다. 본고에서는 네이버백과사전, 두산동아대백과사전에 근거하여 프란시스코 사비에르(Francisco Xavier)로 표기하였다.

 


 

 

김종건 | 대구한의대학교 기초교양대학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