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나라 제의(祭儀)논쟁과 금교(禁敎)정책 16세기 말 예수회 선교사 마테오 리치의 토착화선교정책: 마테오 리치(Matteo Ricci)가 중국에 올 무렵 유럽은 종교전쟁으로 인하여 전야(全野)에 황폐화가 되어 있었다. 예수회가 반(反)종교개혁을 단행하면서 ‘오직 신과 교황’이라는 미명하에 적극적인 선교활동을 전개하였다. 그 당시 중국은 명(明)나라 말기이었지만 아직도 황실은 건재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마테오 리치를 중심으로 한 예수회 선교사들의 중국에 대한 인상은 나쁘지 않았다. 그들은 중국의 고전들을 유럽 언어로 번역하여 열심히 유럽에 소개하였다. 그리하여 중국의 고전들이 유럽의 계몽주의에도 영향을 끼치게 되었다. 그 당시의 선교사들에게는 현대선교에서처럼 느끼는 동서양 간의 제도적 갈등은 없었다. 오히려 동서양 간의 문화적 갈등이 주를 이루었다. 특히 공자를 모시고 조상을 제사(尊孔祭祖)하는 것에 대해 유럽에서 건너온 여러 수도회들 사이에 의견들이 분분하였는데, 결국 그것이 18세기의 제의(祭儀)논쟁으로 번졌다. 강희제(康熙帝)까지 나서서 공자와 조상에 대한 제사는 종교가 아니라고 설명도 하였지만 교황청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제의에 있어서만큼은 중국으로서도 양보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것은 민족과 국가의 근간을 흔드는 것이기 때문이다.
1704년 교황 클레멘스(Clement) 11세는 중국의 제의금지 명령을 내렸다. 그리고 1715년 강희제는 마테오 리치의 선교방식을 따르지 않는 모든 선교를 금지하였다, 그래서 중국에서 기독교는 세 번째로 소멸된다. 당(唐)나라 경교(景敎, 약 2백년간)가 멸불(滅佛)사건으로 자취를 감추고, 원(元)나라의 예리커원교(也里可温)도 원나라의 패망과 함께 중국에서 뿌리를 내리지 못했다. 그리고 청(淸)나라의 금교(禁敎)정책으로 인하여 기독교는 물론 서양인들의 입국도 허락되지 않았다. 그러나 1939년 로마 교황청은 중국 신도들의 조상제사 금지를 해제하였다. 북경 중화세기단(中華世紀壇)의 중앙 홀 벽에는 지난 수천 년간 중국 역사와 문화 발전에 공헌한 100명의 사람들을 그린 벽화가 걸려 있다. 그중에 두 명의 외국인이 있는데 한 사람은 마르코 폴로(Marco Polo)이고, 다른 한 사람이 바로 마테오 리치이다.
제국주의 전개와 개신교 선교시대 영국은 중국과 무역 불균형으로 은이 대량으로 유실되는 것을 막기 위해 아편무역을 보호하기 위하여 아편전쟁을 일으킨다. 결국 청나라는 패배하고 남경조약(南京條約)을 체결하고, 미국도 “영국이 차린 밥상에 숟가락을 올려놓는” 격인 망하조약(望廈條約)을 체결한다. 사실 이런 조약을 체결하는 과정에는 선교사들이 거의 개입해 있었는데, 외교관이나 상인들은 선교사들만큼 중국을 깊이 알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영사재판권은 브리지먼(Elijah Coleman Bridgman, 裨治文)이라는 미국의 첫 중국선교사가 자국인들을 보호하기 위해 제안되었던 것이다. 그 후 제2차 아편전쟁으로 맺어진 천진조약(天津條約)에서는 미국선교사 사무엘 윌리엄스(Samuel Wells Williams, 卫三畏)가 내지선교를 합법화하기 위한 조항으로 종교관용 조항을 넣어 내지선교를 합법화하였다. 이들은 미국 기독교 부흥을 경험한 사람들로 중국 복음의 문을 여는 것을 하나님의 축복으로 감사하였지만 이것이 정치적, 군사적 강압에 의해 이루어졌고 중국을 약탈하는 과정에서 이루어졌다는 것은 역사의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중국의 입장에서는 민족적 치욕이었고 후에 ‘선교사는 제국주의의 앞잡이’라는 빌미를 제공하게 된 셈이 되었다.
기독교가 중국 내륙으로 들어오면서 문화적 충돌과 이익 갈등을 빚으면서 많은 교안(教案)이 발생하였고, 중국 정부의 무능이 백성들의 기독교에 대한 대립 감정을 더욱 심화시켰다. 그중 가장 큰 교안은 의화단(義和團) 사건이다. 그들은 가는 곳마다 교회당을 불태우고, 선교사를 죽이고, 북경에 있는 외국 영사관까지 공격하였다. 결국 의화단은 열강 8개국 연합군에 의해 진압되었고, 청 정부는 경자배상금(庚子賠款)을 내게 되었고, 선교사들은 그 일부를 중국의 교육을 위해 다시 투입하였다. 그리하여 1900년 이전에 2천여 개의 기독교 학교가 1919년 이후에는 약 7천5백여 개 정도가 되었다.
서구화가 된 ‘신지식인들’ 형성 아편전쟁의 패배 이후부터 중국 지식인들은 각성하기 시작하였다. 웨이위안(魏源)은 사이제이(師夷制夷) 즉 “서양을 배워서 서양을 이기자”라는 중국 근대화의 논리를 제안하였다. 그런데 그들이 원하는 서양을 배우는 길도 선교사들이 제공하게 된다. 그리하여 기독교는 서구식 학교, 서구식 현대병원, 신문 발행과 유학생들 파견 등에 앞장서면서 중국의 근대화 발전에 큰 기여를 하였다. 중국 근대화에 주요한 역사적 과정이었던 양무운동(洋務運動), 유신변법(維新變法), 그리고 신해혁명(辛亥革命)의 주력들은 거의 직간접으로 모두 기독교의 영향을 받았다고 할 수 있겠다. 서양선교사들은 중국의 기독교 지식인들뿐만 아니라 사회 지식인들도 길러낸 셈이다. 물론 그 당시 중국 문화 보수주의자들도 큰 세력으로 여전히 남아 있었다. 그들은 조상들의 안녕을 위해 철도건설을 반대하는 등 서구화의 물결에 저항하였다. 중국 서구화의 물결은 신문화운동에 이르러 한층 고조되었다. 이들은 ‘타도공가점(打倒孔家店)’을 외치면서 자신들 문화의 뿌리인 유교를 타도하는 운동을 전개한 셈이다. 결국 중국은 서구화가 된 지식인들로 사회의 주류를 이루게 된 것이다.
서구화가 된 신중국 지식인들의 ‘반서구운동’과 ‘기독교 토착화운동’ 서구화가 된 지식인들이 서구 반대 운동으로 돌아서는 결정적인 계기가 된 것이 1919년의 5·4운동이다. 1918년에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1919년 1월 파리에서 회의를 열고 베르사유조약(凡爾賽和約, Treaty of Versailles)을 체결한다. 중국은 승전국임에도 중국의 산동(山東)반도가 독일에서 일본에 넘겨진다. 이에 중국 지식인들은 분노하고 제국주의와 봉건주의를 반대하는 애국운동이 본격화가 된다. 서구의 주요 국가들은 자유 민주주의 국가이다. 그래서 중국은 그들과 싸워서 이기는 사상이 필요하였다. 그것이 바로 사회주의이다. 사회주의는 유럽에서도 자본주의 비판 담론으로 선진 담론이었다. 그리고 마르크스의 집단주의와 이상주의는 중국의 문화적 틀에 적합한 것이었다. 그 당시 중국의 많은 지식인들이 사회주의를 받아들이면서 기독교는 제국주의의 앞잡이 일뿐만 아니라 자본주의 첨병(馬前卒) 역할을 한다고 생각하였다. 그런데 설사가상으로 1922년 청화(靑華)대학교에서 세계기독교학생동맹(World Student Christian Federation)이 제11차 연례회의를 하면서 북경(北京)대학교를 중심으로 약 5년간의 중국 반기독교운동을 촉발시켰다.
그러나 그 당시 중국 기독교인들 가운데서도 훌륭한 중국 지식인들이 형성되어 있었기에 나름대로 반기독교운동에 대응할 수 있었다. 그들은 기독교가 중국 문화와 사회의 관계를 잘 처리하지 못했음을 반성하게 되었다. 그들은 기독교 자체가 가지고 있는 서양 문화의 특징들에 주목하면서, 기독교 토착화운동을 전개하였다. 그들은 기독교가 중국에서 전파되고 성장하려면 중국 문화와 사회와 결합되어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그중 가장 대표적인 사람이 조자신(赵紫宸)과 오뢰천(吴雷川)이다. 조자신은 중국 문화와의 대화에, 오요종(吴耀宗)은 사회주의와의 대화에 더 치중하였다. 그들은 이 작업을 통해 중국 기독교가 중국 문화를 더 풍성하게 하고, 사회를 변화시키고, 나라를 구하는 일에도 기여할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조자신은 인격구국론을 제기하면서 기독교는 제도적 개혁보다도 유가의 정신인 인간의 마음을 건설하고 완벽한 인격을 구성함으로 나라를 구할 수 있다고 하였다. 그러나 오레천은 1930년대에 들어서면서 그 시대 중국 지식인들이 추구했던 사회주의와 기독교는 같이 갈 수 있음을 역설하였다. 오요종도 사회주의와의 대화에 적극 임했다. 오늘의 삼자애국운동이 바로 이 역사의 연속선상에 서 있는 것이다. 결국 기독교 토착화운동의 내면 정신은 민족주의이었다. 한국 기독교의 경우는 민족주의와 결합하면서 제국주의(일본)와 맞서 싸웠기에 기독교가 제국주의 침략 세력의 한 부분이라는 인식이 없었다. 오히려 미국이 일본에서의 한국 해방을 돕고, 산업화와 민주화 과정에서도 기독교가 한국 사회 발전과정에 큰 대립이 없이 순기능을 발휘할 수 있었다
류샤오펑(劉小楓)의 한어(漢語)신학 한어신학(漢語神學)은 이러한 중국 역사와 신학적 맥락에서 이해하는 것이 좋다. 또 그렇게 할 때 한어신학이 갖는 독특한 의미도 발견할 수 있다. 한어신학의 대표주자인 류샤오펑 세대는 ‘신중국’ 건립 이후에 출생하여 어려서부터 마르크스주의를 진리로 신봉하고, 문화대혁명을 겪고 개혁개방을 경험하면서 중국 근현대사에 대한 새로운 성찰로 나갔다. 왜 진리와 이상이 현실을 파괴하는가? 우리가 믿은 것이 진리가 맞는가? 진리는 있는 것인가? 진리가 없다면 어떠한가? 등 생명의 의미에 대한 실존적인 고민을 하게 되었다. 그러고 나서 내린 결론은 인간은 진리가 없이 온전한 삶을 살 수 없다는 것이다.

사진 | 바이두 인간은 허무에서 고귀한 삶을 영위할 수 없다고 판단한 것이다. 그래서 그는 진리 사냥을 떠난다. 중국의 고전들, 러시아 문학작품들, 더 나아가 서구의 근현대 사상들을 섭렵한다. 그는 현대성 문제를 허무주의로 생각하고 그 근원을 찾는다. 류샤오펑은 허무주의는 서구에서 기독교의 세속화로 시작되었다고 판단하였다. 중국 전통문화에는 허무주의가 없지만 중국이 서구화가 되면서 지식인들에게는 ‘서구의 병’인 허무주의가 생겨나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는 그것을 오히려 역으로 기독교에서 허무를 극복할 수 있는 정신적 자원을 얻을 수 있지 않을까 반문하였다. 그러는 가운데 그는 진리를 발견한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사건’이다. 그는 그리스도의 사건이 현대의 허무주의를 극복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① 현대철학에서는 가치/사실의 이분법이 작동한다. 현실에는 사실만 있다. 인간은 참 가치를 만들 수 없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성육신을 통해 가치=사실이 되었다. ② 그리고 류샤오펑이 그리스도의 사건에 주목하는 것은 그의 고난이 갖는 의미 때문이다. 그는 십자가가 고난을 저주가 아닌 의미 있는 곳으로 바꿔 놓았다고 하였다. 고난은 부정적인 것이라기보다는 가치 생성의 어려움을 보여준다고 말한다. 헬라의 비극과 소크라테스의 죽음과 같은 것도 비극의 가치를 잘 보여주는 것이라고 한다. 류샤오펑은 고난에 대한 긍정을 통해 “승자는 왕이 되고 패자는 역적이 된다.” (勝者爲王, 敗子爲寇)라는 논리를 뒤집은 셈이다. 이는 그의 문화대혁명의 경험과 제2차 세계대전의 유럽 지성인들의 경험과도 유관하다. ③ 그리고 류샤오펑은 우리가 그리스도의 사건을 마주할 때 우리에게는 인격이 형성되어 독립적인 자아(개체성)가 형성된다고 한다. 여기서 묘하게 조자신 등의 인격구국의 논리와 만나게 된다. 물론 류샤오펑의 개체성의 강조는 조자신의 논리를 한발 더 나가게 한다.
류샤오펑은 중국교회와 신학은 현대성 문제에 대안이 될 수 없다고 한다. 중국 기독교의 토착화 신학의 방법으로는 현대성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토착화 신학의 방법은 중국의 전통 사상인 유가와 사회주의 제도와의 조화를 추구하면서, 기독교의 독특성인 그리스도의 사건을 부차적인 것으로 약화시켰다는 것이다. 류샤오펑은 토착화 신학의 내적 동력은 민족주의라고 보고, 민족주의는 중국의 현대성 문제(허무주의, 가치의 문제)를 제대로 볼 수 없기에 ‘잘못된 문제의식’이라고 한다. 오늘의 중국인들은 중국과 서양이라는 이분법이 아닌 인간이라는 공동의 문제인 삶의 의미의 문제에 직면해야 한다고 한다.
그는 더 나아가 중국 문화 전체가 중국 근대화 과정 중에 형성된 민족주의 문제의식에서 개체성의 현대성 문제의식에로 전환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기독교 신앙이 중국 문화에 없는 초월성과 개체성을 가져주며, 중국 타문화와는 상호 비판적 경쟁적 관계를 가져가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래야만 중국 문화가 새롭게 재생할 수 있다는 것이다. 사실 그는 중국 문명의 갱생과 새로운 부흥을 꿈꾸고 있는 것이다. 그는 개인의 자유가 보장되는 개체 중심의 사회를 만들되, 가치 추구를 잃어버린 다수주의는 반대한다. 그를 기독교의 핵심 진리는 신봉하나 교회나 종교활동에 참석하지 않기에 ‘문화 그리스도인(文化基督徒)’이라고 부른다. 그리고 그들의 사상을 한어신학(漢語神學)이라고 부른다.
오동일 | 장로회 신학대학교 교양학 교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