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3.4  통권 199호     필자 : 나은혜
[나은혜 선교문학]
하와이에서 온 여인


아침에 떡국을 끓였다. 우리 집에 손님으로 온 Y가 이틀간을 머물고 오늘 떠나기 때문이다. 여섯 끼를 밥을 함께 먹었지만 떡국을 한번 끓여 주고 싶었다. 설날이야 지났다지만 만두까지 넣어서 제대로 끓인 떡국을 잘 먹고 나서 커피를 마시면서 쉬고 있는데 Y가 말했다. “목사님 오늘 점심은 좋은 데 가서 제가 대접하고 싶어요.” 그러고 보니 오늘이 내 생일이었다. 2월 15일은 나의 법정 생일이다. 실제로 태어난 날은 아니지만 SNS 덕분에 수많은 사람들로부터 생일 축하를 받았다. 그런데 내 앞에 있는 하와이에서 온 여인 Y가 점심을 사 준다고 하니 생일 축하가 제대로 되어 가는 모양새다.

남편 K 선교사와 Y, 나 이렇게 세 사람은 함께 동네 식당으로 갔다. ‘소담촌’이라고 하는 샤브샤브 집으로 갔다. 언젠가 혼자서 밥 먹으러 왔더니 1인분은 팔 수 없다고 해서 아쉬움을 남기고 그냥 돌아섰던 집이다. 오늘은 세 사람이나 되니 당당하게 들어가서 월남쌈 버섯샤브샤브를 주문했다. 정말 푸짐한 식사를 했다. 야채며 버섯이며 얼마든지 리필이 가능한 집이라서 더 풍성하게 느껴졌다. 식사를 마친 뒤에 맞은편에 있는 한 대형마트의 식당가에서 커피를 마셨다. 그리고 카카오택시를 불러서 Y를 태워 보냈다. Y는 우리 집에서 비교적 가까운 곳에 혼자 살고 있는 친구가 있어서 그곳에서 머물고 있었다.

남편과 걸어서 집으로 돌아가면서 많은 대화를 나누었다. 남편이 먼저 입을 열었다. “참 감개가 무량하네, 중국에서 만났던 자매인데 이제 이곳에서 이렇게 다시 만나다니.” 남편은 또 이어서 “중국에서 우리 교회에 찾아와서 이틀간 재워주고 보낼 때 당신의 오리털 잠바를 입고 가던 자매의 뒷모습이 생각이나요. Y자매에게는 그 잠바가 무척 컸었는데.” 하고 말했다. 우리 부부의 기억 속에 남아 있는 Y자매의 마지막 모습은 똑같았다. 커다란 오리털 잠바를 입고 걸어가던 뒷모습을 우리는 짠한 마음으로 우리의 시야에서 그녀가 사라질 때까지 바라보았다.

Y는 탈북민이었다. 우리가 중국에서 한인 목회를 하고 있을 때 그녀는 우리 교회를 찾아왔다. 우리 교회 성도 중에 한 사람이 “목사님 조선족이라는 사람이 찾아왔어요.” 하기에 만나 보니 탈북민이었다. Y는 중국 동북쪽에서 우리가 살고 있던 중국의 남쪽인 광동성(廣東省)까지 온 것이다. 탈북의 꿈을 안고서 말이다. 그렇게 우리는 만났다. Y가 이틀 밤을 자고 떠난다고 했을 때 나는 아껴 두었던 오리털 점퍼를 꺼내서 입혀 보냈었다. 주로 기차로 이동하는 Y에게 밤의 추위를 막으려면 두툼한 점퍼가 필요할 것 같았다. Y는 그때 아주 얇은 옷을 입고 있었다. 국경도 넘어야 하고 험한 길을 가야 할 텐데.

추위를 막을 수 있는 옷은 꼭 필요할 것 같았다. 그래서 내가 입었던 꽃자주색 오리털 점퍼를 입혀 주었다. 그 옷을 입고  떠나가던 Y의 뒷모습이 우리 부부의 뇌리에 깊이 새겨져 있었던 모양이다. 다시는 만나지 못하겠지 하면서 Y를 떠나보냈는데, 그 후로부터 3년인가 지났을 때 나는 뜻밖에도 Y의 전화를 받았다. 그것도 Y가 미국에 정착해서 걸어 온 국제전화였다. Y가 드디어 탈북에 성공한 것이다. 중국 남단 국경지역에서 A국을 거쳐 B국을 통해서 미국으로 간 것이다. Y를 중국에서 만났을 때 나는 탈북을 하려면 한국으로 가지 말고 미국으로 가라고 일러 주었는데 Y는 정말 미국으로 간 것이었다. 그 후 나는 선교지에서 추방이 되어 한국으로 나오게 되었고, 미국 인디애나주에 있는 그레이스신학교에서 선교학 박사과정을 밟고 있었다. Y는 정착하여 살고 있던 필라델피아에서 내가 있는 인디애나까지 자동차를 타고 나를 만나러 왔다. 중국에서 헤어지고 다시는 못 만날 줄 알았던 Y를 미국에서 만나다니.

그러고 나서 그 후에 Y는 한국에도 한 번 와서 나를 만났다. 이번 한국 방문은 두 번째 방문이었다. 그리고 그동안 거처를 뉴욕에서 하와이로 옮겼다고 했다. 그래서 Y는 하와이 여인이 되어 있었다. Y가 우리 집에서 지내는 동안 내 외손녀 로아가 설 명절에 올라와서 자던 내 서재에서 Y는 이틀 밤을 잤다. 내 딸이 와서 입었던 팥죽색 면 잠옷을 입고 마치 내 딸처럼 내 옆에서 잤다. 자주 만난 것도 아니건만 조금도 어색함이 없이 우리 가족처럼 되어버린 Y. 이북에 두고 온 부모 형제를 그리워하는 Y. 그래서 그 향수 때문에 나와 남편을 더욱 애틋하게 따르는 Y. 하와이 여인이 되어 나타난 Y는 새로 인테리어를 꾸민 교회에 와서 카페에 앉아서 쉬면서 말했다. “목사님네 교회가 제가 하와이에서 나가고 있는 한인교회보다 훨씬 좋아요.”

교회 카페에서 마시라고 맛있는 하와이 내림커피와 초콜릿을 잔뜩 사가지고 온 Y. 우리 어머니께 애교를 부리며 짐짓 “엄마 나 막내딸이에요. 기억 안나요?” 하며 ‘호호호’ 웃는다. 치매가 있는 어머니가 긴가민가하고 Y를 쳐다보자 까르르 웃으며 어머니 품에 안겨보는 Y. 그녀가 하는 하나하나의 행동에는 고향에 대한 애수가 깃들어 있다. 탈북한 지 20여 년! 고향과 부모 형제에 대한 그리움은 더 깊어만 갔으리라. 삶이 안정될수록 Y가 살아온 40여 년 인생은 질곡의 세월이었다. 평탄하게 살아온 사람의 인생에 비해 Y는 훨씬 많은 어려움과 아픔을 겪으며 살아온 것이다.

Y가 미국에서 살면서 무엇보다도 변한 것이 있다면 얼굴화장이다. 중국에서 만났던 Y는 맨얼굴에 수수하기만 한 얼굴이었다. 그런데 탈북하여 미국에서 만난 그녀는 원래부터 미국에서 살았다고 여겨질 만큼 세련된 용모에 화장이며 옷차림을 예쁘게 하고 있었다. 이번에도 그랬다. Y의 예쁜 머리카락 색과 긴 머리 파마가 세련되어 보였다. “한국에 와서 17만 원에 염색도 하고 파마도 했어요.” 아침마다 정성들여 화장하는 Y를 보며 나는 또 한 번 마음이 짠해진다. 그리고 마음속으로만 Y에게 말을 건넨다. ‘그래 마음껏 예쁘게 해보렴. 그동안 북한에서 얼마나 멋도 부리고 예쁘게 하고 싶어도 하지 못했겠니? 이제 자유의 나라에 왔으니 마음껏 예쁘게 하고 다니려무나.”

벌써 그동안 내가 몇 번이나 “한국에 와서 살 마음이 없니? 우리를 부모처럼 의지하고 한국에 와서 살아도 좋을 텐데.”라고 물으면, Y는 멈칫대면서도 “저...는... 미국이 좋아요.” 한다. 나는 더는 할 말이 없었다. Y의 말을 반박할 이유를 찾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지금 이 나라는 탈북민들이 마음 편하게 살 수 있는 나라가 아니지 않은가. 많은 탈북민들이 다시 미국으로 유럽으로 이민을 간다는데, 나는 그냥 괜히 한마디한다. “중국에서 만나고 다시 못 만날 줄 알았는데 내가 추방되지 않았으면 지금도 중국에 살고 있었을 거야. 그러면 우리는 못 만났겠지.” 그러자 Y는 정색을 하고 곧바로 대답했다. “만약 목사님이 중국에 살고 계셨으면 전 중국으로 목사님을 만나기 위해서 찾아갔을 거예요.” 순간 나는 울컥했다. 친부모 친자녀도 아닌데 무엇이 우리를 이처럼 친밀하게 결속하고 있는 것일까? 그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그리스도의 사랑’이었다.

나는 Y를 처음 중국에서 만났을 때부터 떠나지 말고 나와 함께 살자고 했었다. 제대로 못 먹어 배곯으면서 자랐기에 체격이 왜소한 그녀가 왜 그리 불쌍하고 안쓰러웠는지 모른다. Y도 우리가 Y를 향해 갖고 있는 긍휼과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고 있었다. 그러기에 이제 아무 걱정 없이 미국에서 잘살고 있음에도 늘 우리 부부를 그리워하고 찾아오는 것이 아니겠는가. 이제 우리는 젊어서 사역하면서 뿌려 놓았던 사랑의 씨앗들을 거두면서 살아가고 있다. 인생의 가을에는 거둘 것이 있어야 풍성해진다. 찾아오는 사람이 있어야 외롭지 않다. Y는 아마 이후에도 계속 우리를 찾아올 것이다. 하와이 여인 Y가 한국을 방문해서 우리의 새 교회에 온 것이 무엇보다 나는 기쁘다. Y도 몹시 기뻐하였다. Y가 건강하게 행복하게 날마다 자유를 누리며 살아가는 것이 나는 참 좋다.

억압받고 빈곤하고 자유가 없는 것이 싫어서 탈북한 Y. 한 마리 작은 새처럼 그녀는 이제 창공을 자유롭게 훨훨 날아다니고 있다. 필라델피아에서 뉴욕으로, 뉴저지에서 하와이로. 한국으로 얼마든지 거주의 자유가 있는 사람이 되었다. 한 인간에게 있어서 ‘자유’가 얼마나 소중한 가치인지를 나는 Y를 보면서 더욱 실감한다. 사회의 통제가 심한 공산주의 사회에서 선교사로 살았던 나이기에 그렇기도 하지만 말이다. “나에게 자유가 아니면 죽음을 달라”라고 외쳤던 패트릭 헨리(Patrick Henry)는 그 자유의 소중한 가치를 잘 알고 있었던 사람이다. 그러나 오늘날 많은 자유를 누리며 사는 우리나라 사람들은 그 소중한 자유의 가치를 잘 모르는 것 같다. 하와이에서 온 작은 여인 Y를 보면 알 수 있지 않은가. 부모 형제를 떠나서라도 찾고 싶은 것이 자유라는 것을.. 지금 우리에게 흔한 것처럼 보이는, 그러나 실상은 너무나 소중한 자유를 잃어버리지 않게 우리는 더욱 자유를 지키려는 의지의 날을 곧게 세우고 정신을 차리고 깨어 있어야 한다. 
 

"억눌린 사람들을 위해 정의로 심판하시며 주린 자들에게 먹을 것을 주시는 이시로다 여호와께서는 갇힌 자들에게 자유를 주시는도다" (시 146:7)




 

 

사진 | 나은혜
나은혜 | 장로회신학대학교 선교문학 석사, 미국 그레이스신학교 선교학 박사, 지구촌 선교 문학 선교회 대표, 지구촌 은혜 나눔의 교회 담임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