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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아행로에서 중국 상천도 경유 1551년 11월 20일 사비에르는 일본에서의 선교 업무를 두 명의 동료 선교사에게 맡기고 일본을 떠나 인도 고아(Goa)로 복귀하는 길에 올랐다. 이때 사비에르는 내란으로 어수선한 일본에서 선교의 역량을 강화하기 위해 불교 승려들과 신학적 논쟁을 벌일 수 있는 훈련을 받은 선교 인력이 더 필요하다고 생각하고 있었고 이와 더불어 장차 중국선교를 시도하여 중국과 일본 양국의 교화를 꿈꾸고 있었다.
그의 이러한 포부는, 나는 1552년 중국에 가서 선교의 자유를 얻어 많은 사람들의 영혼을 구하려고 합니다. 중국이 그리스도의 복음을 받아들이면 이것은 대단히 유익한 일이 될 것입니다. 일본은 현재 그들이 신봉하는 종교를 버리고 가톨릭을 신봉하지 않으면 안 될 것입니다. (···) 일본은 중국이 천주교를 받아들인 것을 알면 현재 신봉하는 종교에 대하여 흥미를 잃고 일본 전국이 그리스도를 신봉하게 될 것입니다. 중국과 일본 양국은 말은 다르나 문자는 같아 일본인은 중국의 문자를 알고 있습니다. (···) 우리는 일본어로 천지창조와 그리스도의 강생 구속 사업에 대하여 저술했습니다. 우리는 이 책을 다시 중국어로 번역할 것입니다. 이 일은 제가 일단 중국에 도착한 후에 착수하게 될 것입니다.1) 라고 한 그의 서신에 잘 나타나 있다. 사비에르가 탄 배는 그해 12월 중국 광주(廣州) 앞바다의 상천도(上川島)2)를 지날 때 폭풍우를 만나 잠시 정박하던 중, 전부터 친분을 갖고 있었던 디에고 페레이라(Diego Pereira)3)를 만났다. 그는, “장차 중국에 가서 황제를 방문할 계획을 페레이라에게 얘기하면서 구체화할 방안을 의논했다. 중국은 공식 사절이 아닌 외국인의 입국을 일체 금지하고 있으므로, 그가 인도로 돌아가 고아 총독과 주교로 하여금 중국 조정으로 갈 사절단을 만들게 할 계획이었다. 그리고 그 사절단에 자신도 합류하여 중국에 들어가기만 하면 황제를 만나 중국인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만약 선교 허락이 얻으면 공개적으로 선교 활동을 전개하고 그렇지 않으면 비밀리에 할 각오를 하고 있다”4) 라고 밝혔다.
페레이라는 사비에르의 이러한 모험적인 계획에 지지를 표하면서 자기 선박과 재산을 기꺼이 사비에르가 사용하도록 제공했다. 그뿐만 아니라 페레이라는 사절단이 진공(進貢)할 예물을 가져가는 것이 중국 진입에 큰 도움이 될 것이라는 점과 최근 포르투갈인 3명이 광주성에 체포되어 있으므로 이 정보를 고아 당국에 알리면 이들을 구출하기 위해서라도 중국 파견 사절단 구성이 신속히 이루어 질 수 있을 것이라는 사실도 알려 주었다.
상천도에서 헤어질 때 페레이라는 사비에르에게 다량의 금화를 주어 사절단을 구성하는 비용으로 쓰게 하고, 사람 하나를 붙여 고아까지 수행하게 했으며, 두 사람은 얼마 뒤에 말라카에서 만나기로 약속했다. 인도로 돌아오는 선상에서 사비에르는 요지로 등의 도움을 받아 교리문답을 한자로 바꾸는 등 중국 진출을 위한 준비에 몰두했다. 고아에서 중국으로 1552년 2월 사비에르는 고아에 도착한 뒤 즉시 자신의 계획을 고아 주재 인도 총독과 주교에게 보고하여 곧 바로 허가를 얻었다. 단장에는 페레이라가 임명되었고 사비에르는 그 일원이 되어 서류와 예물도 준비했다. 사비에르가 잠시 동방선교회 회무를 정리하고 1552년 4월 14일 고아를 떠나서 페레이라가 중국행 준비를 하고 있던 말라카에 도착하였다. 
말라카를 지키고 있던 식민지 총독 알바레스 타이디오(Alvares Taidio)는 전부터 사비에르와 친분이 있었으나 사절단장을 상인 페레이라가 맡은 것에 불만을 갖고 산타 크루즈호의 중국행을 막무가내로 막았다. 교황청 대사이며 포르투갈 국왕의 대표로서의 임무(전체 동방에 복음을 전하는 사명)와 직권(선교활동을 방해하는 자에 대해 파문할 수 있는 권한) 그리고 위협적인 영향력을 행사하는 지위에 있었던 사비에르는 결국 타이디오를 파문하였다. 알바레스 타이디오는 고아 총독의 직권을 무시한 혐의로 체포되어 반역죄로 고아로 압송되었다가 그곳에서 다시 포르투갈 국왕 앞으로 보내져 처벌을 받게 되었다. 그는 재산 몰수형을 받고 군중들에게 모욕을 당했으며, 게다가 괴질에 걸려 천벌을 받은 것으로 간주되어 곧 죽게 되었다. 사비에르가 그의 중국행을 막고 있던 타이디오를 파문한 사례를 통해서도 사비에르가 중국 선교를 얼마나 열망하고 있었는지를 알 수 있다. 그러나 이 사건으로 인하여 사비에르의 중국행은 지체될 수밖에 없었다. 중국 상천도 도착 사비에르는 1552년 7월 17일이 되어서야 중국 통역 한 명과 또 다른 한 명과 함께 산타크루즈호를 타고 말라카를 출발할 수 있었고, 8월에야 상천도에 이르렀다. 당시 중국은 포르투갈과의 무역을 공인하고 있지 않아서 포르투갈 상인들은 이곳을 근거지로 삼아 중국과 밀무역을 하고 있었다. 상천도의 포르투갈인들에게 중국 당국의 건축 허가가 나지 않았기 때문에 사비에르는 산기슭에 조그마한 초막을 지어 거처로 삼아 매일 미사를 올리는 한편 중국으로 들어갈 방법을 모색하였다. 그는 외국인이 중국 땅으로 들어갈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중국 상인과 만나 그들과 함께 중국 내륙으로 들어갈 방도를 다각도로 찾았다. 1552년 10월 22일 사비에르가 상천도에서 보내 서신에는, 광동성 상인들이 나를 그곳으로 데려 갈 수 있는지 열심히 알아보았으나 모두 나의 요청을 거절했습니다. 그들 모두 이런 일은 그들의 생명과 재산에 너무 큰 모험이며, 만약 관청에서 그러한 사실을 알게 되면 틀림없이 엄벌을 받게 될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나의 주 하느님께서 도우사 광주에 거주하는 믿을만한 한 사람이 금화 200 크루자도스(克魯扎朵)를 대가로 나를 작은 배로 태워주겠다는 의사를 표하였는데, 그 배에는 그의 아들과 시종 이외에 그 선원들도 동행한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나를 그의 집에 3-4일 숨겨주고 날이 밝기 전 새벽에 서적과 기타 짐과 함께 나를 성문까지 데려다 주겠다고 했습니다. 그러면 나는 직접 포정사(布政使)의 관저로 들어가서 중국 황궁으로 가서 주교가 중국 황제에게 보내는 서신을 전달하고 교리를 전할 수 있을 것입니다. 5) 라고 했다.

서적을 갖고 중국으로 들어가서 포정사 등 고위 관료를 만나 그들을 도움을 받아 황제를 만나려고 한 점, 황제의 허락을 받아 중국선교를 합법적으로 시도하려고 한 점 등은 사비에르가 중국선교를 학술선교, 합법적 절차를 거친 선교, 위로부터의 선교를 지향하려고 했던 점을 잘 보여주고 있다.
미주 1) Epistolae S. Fracisci Xaverii, Monumenta Historica Societatis Jesu, Vol. 67, T.11, pp.291-292 (서양자, 《중국천주교회사》, p.109에서 재인용). 2) 광동 남부 연안 신녕현(新寧縣) 소속으로, 광주만으로 들어가는 입구인 마카오 서남방 100여 킬로미터 거리에 위치한 섬이다. 3) 페레이라는 그의 친구로서, 무역상이었고 항해 경험이 많았다. 4) 何高濟·王遵仲·李申 譯, 何兆武 校, 《利瑪竇中國札記》 上冊 (中外關係史名著譯叢, 北京: 中華書局, 1983. 3; 원전: Louis Joshph Gallagher tr., New York: Random House, 1953), p.128. 5) 裴化行 著, 蕭濬華 譯, 《天主敎十六世紀在華傳敎志》 (北京: 商務印書館, 1936), p.74; [法]安田朴, 〈禮儀之爭及其對中西文化交流的影嚮〉 (安田朴ㆍ謝和耐 等著, 炅異 譯, 《明淸間華耶穌會士和中西文化交流》, 成都: 巴蜀書社, 1993. 7), p.30.
김종건 | 대구한의대학교 기초교양대학 교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