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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학십도는 우주본체의 본질을 밝히는 데에서 시작하여 인간사회의 이상적 구조를 제시하고 다시 인간 마음의 본래적 특징을 이해하는 데로 나아갔다가, 마지막 개인의 공부론으로 종착하고 있다. 그러나 공부론으로의 종착은 사실 끝이 아니라 또 다른 시작이다. 성학은 현학적인 이론만으로 종결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실천으로 새롭게 열려야 그 의의를 얻을 수 있다. 실천으로 다시 열리지 않는 이론은 아무런 의미 없이 단지 수사에 불과하다는 것은 누구나 알고 있는 이야기일 것이다. 그래서 퇴계는 태극도로부터 펼쳐지는 방대한 성리학의 이론체계를 경의 실천을 통해 다시금 현실 속에 열어 보이고자 한다. 즉 숙흥야매잠도는 10개 이론을 종결하고, 다시 그것을 생활세계에서의 실천으로 구체화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숙흥야매잠도는 성학십도에서 제시된 성리학의 요체를 실천철학의 관문으로 들어가게 해 주는 열쇠 구실을 한다.” - 홍성민
왜 공부하는가? 성학십도는 성학, 즉 성인이 되기 위한 공부이다. 세상에는 수많은 공부가 있다. 출세와 처세를 위한 공부도 있고, 지식과 기술을 쌓기 위한 공부도 있다. 유학은 그중에서도 인간다움을 세우는 공부를 지향한다. 춘추시대로부터 인간사회의 불화를 바라보며 인간 내면의 선한 본성을 일깨우고 한마음으로 조화를 이루어 살아가려는 대동사회의 이상을 가지고 한 사람의 변화가 온 세상의 변화를 위한 단초가 됨을 강조해왔다. 성인은 특출난 철인이 아니라, 누구든지 인의예지의 본성을 품기만 하면 될 수 있음을 주장했다. 그러나 역사는 덕보다는 법이, 법보다는 힘이 이끌어 가는 것처럼 보일 때가 많다. 자신의 인격을 갈고 닦아 다른 사람을 살려주는 이가 대접받기보다는 오히려 다른 사람을 착취하여 자신의 이익을 높이는 사람이 추앙받는 시대가 많았다. 오늘날처럼 돈이 꿈이 되어버린 시대에도 눈에 보이지 않는 인간다움의 가치가 큰 무게감이 없다는 것이 안타깝다. 사람답기 위하여 공부한다는 것은 유학자들에게는 큰 울림이지만 자신의 입신양명을 위해 살아가는 평범한 사람들에게는 매력이 없어 보인다. 사랑이라든지 정의라든지 평화라든지 그러한 고매한 가치들이 얼마나 실질적인 문제의식으로 느껴지는가. 시대와 사회가, 그리고 일상의 문화들이 폭력적일수록 그러한 가치들은 의식되지 않고 우리의 공부 역시 폭력에 일조하는 도구에 불과하게 될 것이다. 인간다움이라는 목적은 다스림과 관련된다. 나를 다스리고 가정을 다스리고 국가와 사회를 다스리기 위함이다. 그러나 그것은 지배가 아니라 가꿈이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적재적소에 필요한 인재를 쓰고 사랑과 성실과 정직으로 일하며 공동체를 지탱해나가는 것이다. 치열하게 경쟁하고 동시에 소외되는 사회에서 우리는 늘 따뜻한 사람을 그리워하고 그러한 사람냄새가 절실하기 때문에 우리 안의 갈증을 느낄 수밖에 없다. 무엇을 공부하는가? 퇴계는 성학십도를 통해 성리학의 체계를 자세히 그렸다. 태극이라는 인간과 세상만물의 근원이 되는 형이상학적 개념에서 시작하여 숙흥야매라는 인간의 일상으로의 체계는 사람다움을 위한 공부가 형이상학적인 근거와 형이하학적인 실천을 잇는 작업임을 보여준다. 인간과 사회, 자연의 근원을 생각해보는 것으로 공부는 시작된다. 성리학은 만물의 거대한 한 뿌리, 즉 하나의 근원이 되는 지점을 논리적으로 상정한다. 만물은 저마다의 모습으로 살아가지만 하나로 연결되어 있고, 자연의 법칙은 그것을 지탱한다는 것이 리기론이다. 또한 천태만상으로 살아가는 인간의 역사를 보면서도 자연의 법칙에 근거한 인간의 순수하고 선한 본성을 읽어내려는 것이 심성론이다. 만물이 한 뿌리에 근거한다면 우리의 마음도 한마음으로 마주할 수 있을 것이다. 성리학은 리기론과 심성론을 연결하면서 ‘하늘’에 관한 개념을 공고히 했다. 곧 자연만물의 근원인 태극과 그것이 인간의 마음 속 본성으로 자리매김하는 천명을 이은 것이다. 하늘은 그렇게 자연 위에 있으면서 인간의 마음에 하늘마음으로 비춰진다. 하늘의 마음에 민감할 때 우리는 한마음을 가질 수 있다. 결국 하늘과 인간의 마음은 ‘하나’라는 울타리로 집중된다. 그러나 하나라는 것은 획일적인 하나가 아니다. 자연만물의 다양한 모습이 보여주듯 자기다움을 가진 상태에서의 ‘어울림’이다. 하늘을 님이라고 부르면서 하나의 해석을 강요하는 종교적 폭력과는 다르다. 사람다움의 공부는 하늘에 기대면서 하늘의 권위를 등에 업는 것이 아니라, 하늘처럼 겸손히 말없이 사랑하는 모습이다. 자기다움만큼 다른 이들을 그답게 세워내려고 한다. 어떻게 공부하는가? 성학, 곧 성인이라는 사람다움의 완숙한 경지를 추구하는 공부를 제시하면서 성학십도 곳곳에 이미 경에 대한 언급이 많이 있다. 그리고 퇴계는 그것이 공부의 핵심임을 계속해서 강조한다. 머리가 아니고 마음이고, 지식이 아니라 감동이다. 사랑의 큰 울림을 갖기 위하여 경거망동할 수 없는 것이 당연하다. 그래서 경은 무시간성을 갖는다. 어느 때에 특별히 할 것이 아니라, 일거수일투족을 무시로 조심스럽고 진지하게 살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 인격의 조급함과 천박함은 우리보다 연약한 것, 사소한 것을 볼 때 확연히 드러난다. 쉽게 경건으로 번역되는 경은 자연, 사람과 사회가 하늘이라는 거대한 하나의 뿌리 위에, 하늘의 마음 안에 있음을 상정할 때, 하늘을 보듯 모든 것을 보고 하늘을 대하듯 모든 것을 대하는 몸가짐과 마음가짐을 의미한다. 참으로 사랑하는 것이다. 우리 마음속에 무엇이 있는가를 반추해본다면 세상에 가볍게 널려있는 그런 사랑이 아니라,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러움이 없는 그런 무거운 사랑이 더욱 필요하다. 경을 두려움과 기쁨이라는 상충되는 감정의 연결로 읽어보기를 권한다. 우리 마음 안에 두려움과 기쁨이 있을 때 사랑은 풍부해진다. 두려움만 있고 기쁨이 없다면 자발적인 사랑이 아니다. 기쁨만 있고 두려움이 없다면 겸손한 사랑이 아니다. 조심스러울 때 진지해지고, 기뻐할 때 진실해진다. 하늘이 무엇일까. 우리 안에 질문이 많지만 그것은 결국 형이상학적인 논쟁거리에 지나지 않는다. 다시 우리 안에 우리가 만나야 할 일상의 관계 안에서 사랑이 무엇인가를 고민해본다면 경이 공부의 시종임을 자연스레 느끼게 될 것이다. 하루의 시간 동안 자신을 소중히 여겨본다면 그리고 자신만 소중한 것이 아니라, 이 세상의 모두가 소중함을 인정할 수 있다면 사랑은 그 마음속에 이미 들어있다.
김주한 | 길가에교회 전도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