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기독교회사내지1.jpg)
예수회의 동방선교 서유럽에서 르네상스, 종교개혁의 물결이 몰아치면서 지금까지 서유럽 세계에서 보편적 지배력을 유지해 오던 가톨릭교회 내에도 새로운 변화가 일어났다. 이른바 가톨릭 개혁운동이 전개되는 가운데 부각되는 수도회가 예수회(Jesuits, 耶蘇會)였다. 1534년 스페인 출신 이그나티우스 로욜라(Ignatius Loyola, 1491-1556)에 의해 개창된 예수회는 동방 항로 발견과 신대륙 개척으로 등장한 선교 미개척 지역으로 기독교회를 확장시키는 운동에 적극 참여하였다. 예수회는 충실한 학문적 수련과 엄격한 영성 훈련을 거쳐 선발된 정예요원을 인도의 고아(Goa)로 파송하였다. 예수회는 고아를 근거지로 하여 동남아시아와 동아시아로 선교의 무대를 확장해 나갔으며 마침내 중국선교의 문호도 열게 되었다.
예수회 선교사들의 중국선교는 적응주의 선교라는 특징을 보이고 있다. 적응주의 선교라 함은 전통에 대한 자부심이 강한 일본이나 중국에서의 선교를 위해서는 먼저 그 나라의 언어와 문자를 충분히 학습하여 그들의 사상과 문화를 구체적으로 익힌 다음 지배층이나 지식인들과의 학술적 교유를 통해 교리를 전파하는 전략을 말한다. 이는 당시 스페인과 프랑스 등이 신대륙에서 행하던 군사적 우위에 입각한 기독교 전파 전략1)과는 대비되는 것이다. 예수회 소속으로 중국에서 적응주의 선교활동을 전개한 대표 인물은 마테오 리치(Matteo Ricci, 利馬竇, 1552-1610)였다.
지금까지 명말(明末) 예수회 선교사들에 의한 중국에서의 적응주의 선교에 대한 연구는 마테오 리치의 업적에 한결같이 집중하였던 결과 그의 적응주의 선교전략이 확립되기까지의 과정에 대한 면밀한 접근은 이루어지지 못한 상태이다. 우리나라에서의 명말 기독교회사 연구도 마테오 리치의 선교활동이나 그에 의한 서양 문물 소개에 집중되어 있다.
마테오 리치에 이르러 확립된 적응주의 선교전략은 최초로 중국선교를 시도한 프란시스코 사비에르(Francisco Xavier, 沙勿略, 1506-1552)에게서 그 단서가 찾아진다. 이 전략은 이후 시찰원 발리냐노(Alessandro Valignano, 范禮安, 1539-1606)에 의해 보다 체계적으로 조직화가 되었고, 루지에리(Michele Ruggieri, 羅明堅, 1543-1607) 신부를 통한 중국 현지에서의 실천을 거쳐 완성되었다.
사비에르의 인도 파송 사비에르는 1506년 4월 7일 스페인 나바라(Navarre)에 있는 사비에르성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 후안 핫수(Juan de Jassu)는 왕궁 최고회의 의장 겸 재무장관이였고 어머니 마리아 역시 귀족 출신이었다. 그의 이름 ‘사비에르’는 ‘새 집(new house)’이라는 뜻인데 어머니 소유의 성(城)을 새로 건축하면서 얻은 이름이다.2)
사비에르는 9세 때 아버지가 죽고, 10세이던 1516년에는 정변으로 살고 있던 사비에르성이 함락되어 가족들이 흩어지는 아픔도 겪었다. 1525년(19세) 그는 프랑스 파리대학에서 철학과정을 시작하였고, 1529년(23세) 학사학위를 받았는데 그해 어머니의 죽음을 맞았다. 이듬해에 그는 철학석사 학위와 문학석사 학위를 받아 파리대학에서 철학 강좌를 맡게 되었다. 그의 어린 시절은 이와 같이 가정적으로나 사회적으로 유복한 환경과 혼돈한 현실이 교차하는 과정이었다. 이러한 성장 과정이 선교에의 헌신과 정치한 상황 인식을 가능케 하였다고 할 수 있다. 프란시스코 사비에르는 성 바르바대학의 기숙사에서 파브르와 같은 방에서 4년 동안을 함께 지내면서 학업에 임하였다. 그러다가 1529년 9월부터는 파리 성 바르바대학 철학과정을 밟으려고 사비에르의 숙소로 옮겨온 이그나티우스 로욜라와도 함께 지내게 되었다. 이 기간 동안 사비에르와 파브르는 로욜라로부터 신앙적으로 깊은 영향을 받게 되었다. 1534년 초 파브르는 ‘영성 훈련(神操)’ 과정을 시작하여 의사, 법률가, 대학교수가 되겠다던 세속적 꿈을 버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로서의 헌신을 결심하게 되었다. 사비에르는 파브르와 로욜라로부터 정신적 교화를 받았고, 1534년 8월 15일 이들 3명을 포함한 7명3)은 로욜라의 인도로 파리 교외 몽마르트라 불리는 교회당에서 그리스도를 섬기고 일생 동안 정결하고 청빈한 생활을 할 것을 선서했다. 사비에르로 하여금 세속적 꿈 대신 신앙적 헌신을 하게 한 데는 로욜라가 사비에르에게 거듭 들려준 “사람이 온 세상을 얻는다 해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마태복음 16:26)”라는 성경 구절로 말미암았다고 전한다.4) 이후 사비에르는 로욜라의 지도하에 영성 훈련을 받고 신학과정을 시작함과 동시에 가톨릭교회 개혁에 힘을 쏟았다. 또한 원래의 ‘청빈과 정결’ 선서 외에 ‘복종’ 조항을 추가하고 예수회 창립에도 동참하였다. 이들은 1939년 예수회 수도회를 결성하고 초대 총회장으로 로욜라를 선출했으며, 1939년 교황으로부터 구두 인가를 받았고, 1540년 9월 27일 교황 바오로 3세의 교서에 의해 공식 출범하였다. 예수회는 교육과 선교를 주요 사업을 삼았고 특히 해외선교를 중시하였다. 1540년 3월 교황 바오로 3세(1534-1549)에 의해 사비에르와 로드리게스의 인도 파견이 결정됨으로써 예수회 역사상 최초의 아시아선교사 파견이 이루어졌다. 이것은 포르투갈 국왕 후안 3세의 인도선교사 파견 건의에 따라 로욜라의 추천으로 이루어진 일이었다. 원래 로욜라는 로드리게스와 보바딜랴를 임명하였으나 보바딜랴가 병이 나서 사비에르가 대신 파견 대상이 되었다. 후안 3세는 파견이 결정된 사비에르 일행에게 현지 귀족 자제들의 개종을 위해 전력을 다하고, 이를 기반으로 대규모 개종을 실현하도록 권면하였다. 사비에르가 선교지로 나가게 된 것은 국왕의 지원과 로욜라의 추천, 그리고 교황의 추인에 의해 이루어졌다. 그러나 근본적으로는 사비에르가 파리에서 직면한 성직자의 부정에 관련된 충격적인 사건들, 교회 개혁운동의 확산, 콘스탄티노플이 이슬람 세력에게 압박을 받고 있다는 소식 등에 자극을 받았던 것으로 보인다. 사비에르의 인도 사역과 중국 1541년 4월 7일 바로 35번째 생일날, 사비에르는 신임 인도 총독과 고아수비대 파견병들과 함께 성 야고보(聖 雅各伯)호를 타고 출항하여 희망봉을 돌아가는 긴 여정 끝에 1542년 5월 6일 포르투갈의 인도 식민지 고아에 도착하였다. 이로써 ‘동방의 사도’라 불리는 한 선교사의 평범하지 않은 생애가 시작되었다. 1542년부터 1549년까지 사비에르는 인도 예수회 선교사 대표를 맡았고 후에는 초대 인도(고아)지역 회장이 되었다. 이 기간 동안 그가 방문하여 선교활동을 전개한 영역으로는 “인도, 실론, 말라카, 싱가포르, 몰루카(摩鹿加)군도 등지가 포함되었다.” 고아에 도착한 뒤 사비에르는 포르투갈 교민들의 신앙적 문란과 도덕적 타락을 직면하고 신앙 정화에 나섰다. 그는 매일 오전 병원과 감옥을 찾아 전도하고, 오후에는 사람들을 교회당으로 불러 모아 설교하였으며, 저녁에는 교우 가정을 심방하고 성례를 베풀어 많은 사람들을 교화시켰다. 그리고 고아신학교를 설립하여 원주민 사역자 양성 사업도 전개하였다. 사비에르는 인도선교 3년 후 또다시 먼 길을 나서 실론, 말라카, 몰루카 군도까지 이르러 유럽 교민을 교화시키는 사업을 벌이고 선교구 행정 기구를 조직했다. 인도에서 사비에르는 선교과정에서 언어장벽이 갖는 어려움을 줄이기 위해 적극 노력하였다. 사비에르는 신앙고백, 기도문, 설교문을 타미르어로 번역한 다음 로마자로 기록하여 이것을 읽으며 사람들에게 전하였다. 인도선교에서 현지어를 통한 선교가 중요하다는 사실을 그는 인도에 도착한 직후부터 깊이 인식하고 그에 상응하는 실천을 보였던 것이다. 사비에르를 비롯한 예수회 선교사들은 인도 현지에서 정통 가톨릭이 아닌 기독교 이단에 대해서는 강경한 대응을 하였다. 그 결과 인도에서 신앙활동을 하고 있던 경교도들은 포르투갈 선교사가 온 뒤 곧 재산 몰수나 감옥행 등의 조치를 당하여 강제로 로마 가톨릭으로 귀의해야 했다. “고국을 떠나 온 예수회 선교사가 인도 경교도의 성지를 빼앗는 싸움에서 그 투쟁의 잔인함은 이루 형언하기 어려웠다. 그리고 로마 교황에게 보고하기 시작해서 경교에 대해 강제 정책을 쓴 사람은 다름 아닌 ‘동방선교의 아버지’라는 칭호를 갖고 1542년 인도에 도착해서 1552년 중국 상천도(上川島)까지 이른 유명한 예수회 선교사 사비에르였다”5)라는 기록도 있다. 사비에르의 적극적인 선교활동의 결과 인도에서 교회의 성장이 두드러지게 되었다. 이와 관련된 보고가 유럽으로 전해지면서 그를 파송한 포르투갈 국왕 후안 3세는 크게 고무되었다. 이로써 본국의 예수회에 대한 지원이 늘어나고 더 많은 선교사들이 인도교구로 파견되었다. 요컨대 인도에서의 사비에르의 선교활동은 현지어를 중시하고 주민과의 직접 접촉을 중시하는 등 현지 상황을 중시하는 성향을 기본으로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교회의 외형적 확대와 현지 문화 배척을 지향하는 등 아직도 유럽의 전통적 선교정책의 틀에서 벗어나지 못한 측면도 함께 보이고 있었다. 사비에르는 말라카로 이동하여 선교활동을 전개하던 중 일본과 중국에 대한 정보를 접하게 되었다. 그는 일본을 드나드는 무역 상인들로부터 일본의 존재를 전해 들었고, “새로운 것을 배우는 데 열심인” 이 나라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이 인도나 동남아시아에서의 선교보다 효과적일 것이라는 조언도 들었다.6) 중국과 교역하는 상인들을 통해 중국에는 아직도 기독교도가 남아 있으며 신구약성경이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는 소문도 듣게 되었다. 1547년 1월 사비에르는 말라카와 몰루카군도를 오가며 선교하던 중 특별히 포르투갈 친구에게 부탁하여 중국 상황을 전달받았다. 1548년판 《중국보도(中國報導)》 필사본은 예수회의 선교 계획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 어떤 분야의 자료를 보여주고 있다. 중국의 교육제도, 한자, 인쇄술과 외국인의 생활상 등에 관한 것들이었다. 그 자료에는 “중국의 여러 도시에 학교가 있고 통치자들은 그곳에서 국가의 각종 법률을 학습하고 있으며, (···) 중국에는 학자가 아닌 귀족은 없으며 중국에서는 학식이 높을수록 황제에게 중용되므로 어른이건 아이건 간에 모든 방법을 동원하여 공부하려고 한다고 했다”7)라고 설명했다. 이러한 보고는 사비에르에게 깊은 인상을 주어 그가 이후 일본과 중국에서 ‘학술선교’ 주장을 제시하게 되는 주요 배경이 되었다.
미주 1) 이 전략은 백지방식(tabula rasa)이라고도 일컬어진다. 즉 선교 대상 지역의 문화를 기독교와 관련 없는 이교 문화로 단정한 바탕 위에서 그들이 계승해 내려오고 있는 문화와 관습을 깨끗이 지우고 기독교를 전파하려고 시도하는 방식이다. 2) 알베르 주 지음, 박금옥 옮김, 《성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서울: 성바오로, 1996. 11; 원전: Albert Jou S. J., The Saint on a Mission: The Story of Saint Francis Xavier, Anand, India: Gujarat Sahitya Prakash, 1985), p.11. 이하 사비에르의 일생에 대해서는 方豪, 《中國天主敎史人物傳》 (北京: 中華書局, 1988. 3) 上, pp.58-65; [法] 費賴之 著, 馮承鈞 譯, 《在華耶蘇會士列傳及書目》 (北京: 中華書局, 1995. 11; 원전: Le P. Louis Pfister, S. J., Notices Biographiques et Bibliographiques sur les Jésuites de L’ancienne Mission de Chine, 1552-1773, Chang-hai: Imprimerie de la Mission Catholique, 1932, 1934) 上, pp.1-10; 沈定平, 《明淸之際中西文化交流史》, pp.157-181(이경규 외 번역, 〈명청지제중서문화교류사〉 Ⅳ, 《釜山敎會史報》 61, 부산교회사연구소, 2009. 1, pp.80-99); 黃鴻釗, 〈耶穌會與沙勿略在遠東的傳教活動〉 (《澳門研究》 46, 2008. 6, pp.110-114; 앙드레 라비에 지음, 엘렌 르브랭ㆍ김지수 옮김, 《성 프란치스코 사베리오의 생애》 (서울: 가톨릭출판사, 1988. 4. 초판; 1994. 7. 개정 초판; 원전: André Ravier, S.J., Saint François-Xavier, Nouvelle Librairie de France); 김상근, 《프란시스코 하비에르》 (홍성사, 2010. 2); 알베르 주 지음, 박금옥 옮김, 《성 프란cl스코 하비에르》 등 참조. 3) 7명은 이들 3명 외에 스페인 출신 디에고 라이네스와 알폰소 살메론, 니콜라스 알폰서 보바딜랴, 포르투갈 출신 시몬 로드리게스가 포함된다(후안 카트레트 지음, 신원식 옮김, 《예수회 역사》, p.15).
4) 후안 카트레트 지음, 신원식 옮김, 주영락 감수, 《예수회 역사》, p.15. 5) 朱謙之, 《中國景敎》, p.57. 6) 김상근, 《프란시스코 하비에르》, p.170. 7) 《中國報導》 (《文化雜志》 31, 1997), pp.35-39 (沈定平, 《明淸之際中西文化交流史》, pp.163-164에서 재인용함. 여기에 담긴 자료들이 사비에르의 요청에 따라 수집되어 그에게 전달된 정보들일 개연성이 높다. * 사비에르의 이름 표기는 그의 출신지 바스크어로는 프란치스코 샤비에르(Frantzisko Xabier), 스페인어로는 프란치스코 하비에르(Francisco Xavier)이다. 라틴어 표기로는 프란치스코 사베리오, 영어로는 프란시스 자비에르로 할 수 있다. 본고에서는 네이버백과사전, 두산동아대백과사전에 근거하여 프란시스코 사비에르(Francisco Xavier)로 표기하였음을 밝혀둡니다.
김종건 | 대구한의대학교 기초교양대학 교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