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9.3  통권 193호     필자 : 김종건
[중국기독교회사]
중국기독교 암흑기

중국기독교회의 쇠퇴
몽골족이 주도한 원(元)왕조가 쇠하면서 중국기독교회는 급격히 쇠퇴하게 되었고, 1368년 명(明)왕조가 건국된 이후 중국기독교회의 모습을 찾아보기 어렵게 되었다. 이러한 양상은 16세기말 프란시스코 사비에르를 비롯한 예수회 선교사들이 동방선교를 위해 중국으로 도래하기까지 이어졌다. 이렇게 된 요인들은 다음과 같은 몇 가지 중국적 요인에서 비롯된 결과였다.

첫째, 원대 중국기독교회가 원 황실의 후원을 받은 것이 진입과 확산에 도움이 되었으나, 바로 원 황실 지배력의 퇴조와 더불어 쇠퇴로 이어지는 결과를 가져왔다. 원대 중국의 기독교회는 당(唐)대 경교(景敎)의 성행과 비슷한 모습으로, 특히 황실의 후원과 지배계층의 지원에 절대적으로 의지하였다. 당말 조정의 기독교 지원과 보호가 사라지면서 경교가 쇠퇴의 길을 걸었듯이, 원 조정이 약화되고 중국에서 떠나면서 곧 의지할 곳을 잃고 지원과 보호가 끊겨 빠르게 중국 내지에서 쇠퇴하게 되었다. 몽골 황실이 몽골고원으로 떠나가면서 궁궐 등은 모두 부서졌고, 황실의 보호 아래 있던 북경(北京)의 3개 교회당도 훼손되어 흔적이 남지 않게 되었으며, 교도들도 구심력을 잃어 흩어지고 말았다.

둘째, 원대 중국기독교회는 조정의 장려와 지원을 많이 받았지만 당시 중국 인구의 절대 다수를 차지하고 있던 한족 사회에서 기반을 깊이 확보하지 못하였다. 최고 지배층인 몽골인들 사이에서 부분적으로 유행하였고, 주로 중국 내지에 와 있던 페르시아인·시리아인·아르메니아인 등 이른바 색목인들이 주요 전도대상이었다. 한족들은 불교 등을 신봉하고 있어서 세례를 받는 자들이 다수 있었지만 그들 가운데서조차 마음 깊이 교리를 따르는 경우는 많지 않았다. 따라서 원대 기독교회의 영향력은 중국 사회 전체 차원에서는 상대적으로 제한적이었다. 이러한 기독교 신봉자 분포상의 한계, 이교적 색채를 농후하게 갖고 있었던 기독교 자체의 특징 등이 중국 사회에 쉽게 융화되지 못하였던 배경 요인이었다.
 
셋째, 원대 기독교는 중국 내지에서 유행했던 한 외래종교로서 통치자들의 우대와 관용을 받았지만 중국 전통 종교집단으로부터는 전반적으로 배척되었다. 도교와 불교 심지어 유교의 공격을 받았을 뿐 아니라 외래의 이슬람교에 의해서도 배척당하였다. 
 

중국 기존의 유·불·도교는 당말 송(宋)대 기독교 쇠퇴에도 주요 역할을 하였다. 당대에는 민간에서 불교가 확산되어 있었고, 지배층은 유교적 교양으로 무장하고 있어서 이들의 이교 배척 기조는 기독교회에 큰 압박이 되었는데 원명(元明) 교체 이후에도 같은 양상이 전개되었다. 특히 도교는 시조격인 노자(老子)가 황족과 같은 이(李)씨였다는 등 제반 배경에 힘입어 당대에 특별히 존중을 받았고, 무종 회창 5년(845년) 불교 금지를 주도하면서 경교와 조로아스터교에도 절대적인 타격을 입었고, 원명교체 이후 중국 민간에서도 유사한 상황이 전개되었다.
 

중국기독교회는 같은 외래종교였던 이슬람으로부터도 압박을 받았다. 원 헌종 몽케황제 때 유럽 프란체스코선교회 루부르크가 와서 포교활동을 전개할 때 이슬람의 방해를 받았다. “회교도인은 몽케 앞에서 두 명의 수도사가 황제를 모욕했다고 무고하면서 사악한 신을 경배하는 사람이라고 외쳤고,” 몽케는 즉시 “상제(上帝)가 성경을 하사하시고 너희들은 그것을 받들고 가르치는 사람인데, 너희들은 그것을 준행하지 않고 있다. 살아있는 부처와 유학자를 나에게 주셨고 나는 그것을 따르니 오랫동안 평화롭게 다스릴 수 있게 된 연고이다.”1)라고 하게 되었다. 이로써 루부르크의 몽골 군신들을 천주교로 귀의시키려는 계획은 완전히 무산되기도 하였다.
 

넷째, 기독교는 배타성이 강한 유일신 신앙이었기에 중국에 일반적이었던 범신론의 신앙으로서는 받아들이기 쉽지 않다는 기본적인 한계도 지적 가능하다. 그리고 전도 과정에서 고상하고 품격이 높다고 인정받지 못하였고, 중국 문화 차원의 식견과 교양이 갖추어지지 않아서 특히 사람들의 마음을 신복시키지 어려웠다.
 

원 몽케황제는 “상제가 사람에게 훈계하는 도리는 각기 다른데, 마치 사람의 열 손가락 역시 장단이 다른 것과 같다”라고 하면서 서로 수용하고 받아들이는 것이 유익하다고 했다. 길일이 되면 황제는 모든 사람에게 자신을 위해 기도해 달라고 했다.
 

“기독교 선교사들은 법의를 입고서 이날 먼저 와서 기도하고 복을 빌었다. 그들이 떠난 뒤 사라센사람(이슬람교)들이 와서 그를 위해서 기도드렸다. 그런 연후 우상숭배 하는 승려들도 똑같이 했다.”
 

이 같은 말은 모두가 범신론에서 나온 것이다. 따라서 기독교회 선교사들이 하나님의 유일함과 천지창조, 전지전능하심, 무소부재하심 등을 전할 때 쉽게 받아들일 수 없었을 뿐 아니라 도리어 조소와 반박을 받게 되었다. 루부르크가 몽골 바투 군영에서 세례를 받고 입교해야만 영혼이 구원받을 수 있다고 했을 때, 이후 몽골 궁전에서는 오로지 하나님 한 분만 계신다고 설교했을 때도 모두 관원들과 이교도들의 조소와 반발에 직면하였다.2)
 

다섯째, 현지인들의 현실적 차원의 마음을 얻는데 한계가 있었다. 처음 당대 경교도가 서쪽에서 동방으로 건너올 때, 상당한 문화적 소양을 갖추고 있었고 문화 지식을 이용해서 이방인들을 끌어들일 수 있었다. 경교도들은 페르시아와 아랍의 여러 도시에 경교학교를 설립하여 신학뿐만 아니라 의학․문학․법학을 가르쳤다. 경교도 가운데는 수공업 기술(목공․야금․직조)에 뛰어난 사람들도 적지 않았다. 이러한 문화적 우월성에 감복하여 경교에 귀의하는 사람이 결코 적지 않았다. 그리고 원대 천주교 선교사들도 라틴교의를 몽골어로 번역하는 노력을 전개한 바 있다. 그러나 그들은 외래 기독교가 중국 전통문화와 풍습에 적응하여 현실적인 도움을 주는 데는 근본적인 한계를 갖고 있었다.
 

유럽 사회의 혼란과 동방선교의 위축
원말 이후 명 중후기까지 중국에서 기독교가 쇠퇴하게 된 데는 유럽 사회의 정국 혼란이라는 측면도 영향을 미쳤다.
 

첫째, 교황권의 위축이 동방선교의 쇠퇴를 가져왔다. 1096년부터 1270년까지 전개된 십자군전쟁은 교황권과 세속 군주권의 결합을 바탕으로 기독교회의 위상 강화와 대외적 확장을 지향하였다. 그러나 십자군전쟁 중반 이후 이교도 토벌이라는 명분이 상실되어 갔고, 1270년 제8차 원정을 마지막으로 십자군전쟁이 종식되면서 이후 15세기 초까지 교황권의 심각한 실추 국면이 이어졌다.
 

교황 보니파키우스 8세(Bonifacius Ⅷ, 1294-1303 재위)는 과세권, 재판권을 둔 경쟁에서 프랑스 왕(필립 Ⅳ)에게 밀려 났고, 교황 클레멘트 5세(Clement Ⅴ) 때 교황청이 프랑스 경내 아비뇽(Avignon)으로 옮겨지는 소위 아비뇽유수(1309-1377)라는 굴욕적인 상황도 맞게 되었다. 1378년 로마에서도 교황에 즉위하면서 교황이 둘 재임하는 교회대분열(1378-1417) 상황도 이어지면서 교황권의 추락은 극에 달하게 되었다. 따라서 교황 차원의 지금까지와 같은 동방선교 지원이 불가능해진 것이 중국에서 기독교회 쇠퇴의 한 요인이었다.

둘째, 중앙집권적 국민국가의 형성과 경쟁 구도의 등장이 동방선교의 위축에 영향을 미쳤다. 영국은 노르만왕조가 종식되고 1154년 플란타지네트(Plantagenet)왕조가 성립되면서 대헌장(1215년)이 공포되고 모범의회(1295년)가 출범하는 등 중앙집권적 국민국가로의 지향이 구체화하였다. 프랑스는 987년 까페(Capet)왕조가 성립되어 사법제도와 신분제의회 삼부회를 갖추는 등 중앙집권적 국민국가로의 지향을 시작했다.
 

1328년 프랑스 카페왕조가 종식되고 발르와(Valois)왕조로 이행하는 과정에서 영국왕 에드워드 3세(1327-1377)가 프랑스 왕위계승권을 주장하면서 이른바 백년전쟁(1337-1453)이 일어났다. 당시 유럽 사회에서 강국으로 부상하게 된 양국 간의 백년을 넘기는 전쟁 국면은 15세기 중엽까지 유럽 사회 전체에 큰 혼란을 초래하였다. 따라서 이러한 전란의 국면이 그나마 중국에 와 있던 선교사들마저도 본국 귀환을 자극하였고, 중국선교 인력의 추가 파견을 어렵게 만든 또 하나의 주요 요인이었다.

이와 같이 중국에서 기독교회가 자취를 감추게 된 상황은 중국에서 명 왕조 건국 이후 명조의 보수주의적 기조와도 연계되어 지속되게 되었다. 명 태조 주원장(朱元璋)은 몽골풍 일소와 전통문화 회복을 대표 정책 기조로 내세우고 유학을 강조하였다. 이로 인해 외래종교인 기독교의 입지도 당연히 허용되기 어려워졌다. 이러한 상황은 16세기중엽까지 이어졌다.
 

16세기 후반, 명조에 양명학(陽明學)을 비롯한 새로운 사상적 경향이 형성되고, 기존의 성리학 중심 이념에 대한 반성이 나타났다. 또 유럽에서는 지리상의 발견과 대항해시대로의 진입에 따른 대외적 진출 동력의 강화와 종교개혁을 통해 개신교가 형성된 데에 위기의식을 느낀 로마 가톨릭은 로마 가톨릭 차원의 동방선교를 적극 지원하는 정책의 전환 등에 따라 중국기독교회의 새로운 역사로 진입하게 되었다.



미주         

1) 樊國梁, 《燕京開敎略》 (北京: 救世印堂, 1905), 上編, pp.49-51; 沈定正平 著, 《明淸之際中西文化交流史 -明代 : 調適與會通-》 (北京: 商務印書館, 2001) 제1장 제3절 참조.
2) 이상 위와 같음.






 

 

김종건 | 대구한의대학교 기초교양대학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