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심통성정도>는 성리학에서 파악하는 마음의 대략적인 틀을 보여 주고, 그러한 틀을 따라 본성이 감정으로 드러나는 과정을 설명하며, 수양을 통해서 본성을 어그러짐 없이 감정으로 드러내는 방법을 보여준다. <심통성정도>의 핵심이 되는 말은 ‘마음이 성과 정을 통섭한다’는 뜻의 심통성정(心統性情)인데, 본성이 감정으로 드러나게 될 때 마음은 어떤 역할을 하는가를 밝히는 성리학의 명제이다. 성이 인간의 마음속에 내재한 본래적인 경향과 그 원리라면, 정은 그것이 감정이나 정서로 드러난 결과인 것이다. 심통성정이란, 마음이 본성과 감정을 아우르고 있으면서 본성을 감정으로 드러내는 일을 주관한다는 뜻이다. 인간에게 있어 삶의 행위는 감정에 따라 이루어진다. 사람은 의식하든 의식하지 못하든 어떤 마음이나 생각, 느낌, 의지가 있어야 움직이게 되고, 행위란 그 마음을 몸이 실현하는 것이다. 이렇게 보면 마음의 결과로서의 감정이나 느낌은 행위를 아우른다고 할 수 있기에 사람의 행위의 문제는 곧 마음의 문제와 깊이 연관된다.” -남지만- 심통성정, 마음의 구조를 설명하다 심통성정도는 상도, 중도, 하도의 세 그림으로 구성되어 있다. 상도는 정복심이 주자의 심통성정을 정리하여 그린 것이고, 중도와 하도는 퇴계가 직접 그린 것이다. 중도와 하도는 퇴계가 고봉 기대승(1527-1572)과의 사단칠정논쟁을 통해 그의 성리설을 집약한 정수라고 불린다. 주자의 학문 여정에서 특히 심성론과 관련하여 중화구설에서 중화신설로의 발전이 중요하다. 중화구설은 성체심용(性體心用)으로, 본성이 본체가 되고 마음이 작용이 된다는 것인데, 곧 사람의 마음속에 있는 본성은 우리가 그것을 그 자체로 쉽게 인식하거나 만질 수 없고, 오직 마음이 드러난 감정의 상태를 미루어 본성의 이치를 깨달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본성과 마음이 체용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논리가 오히려 본성과 마음의 거리를 멀게 하는 약점을 지니게 되어 주자는 이 설을 수정하여 중화신설이라고 하였고, 이것이 곧 심통성정(心統性情)이다. 이를 통해 마음이 본성과 감정을 통섭하는 중심의 역할로 이해하게 되었다. 주자학에서 본성에 대한 이해는 매우 중요하다. 우리의 감정이 선한 본성의 이치에서 비롯된 것인지 사적인 욕구에서 나오는 것인지를 제대로 알아야 우리의 마음이 보다 선한 것을 선택할 수 있기 때문이다. 성즉리(性卽理)는 곧 성발위정(性發爲情)의 논리와 맞닿아 있는데, 본성이 선하다면 그 본성을 품은 우리의 감정도 선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감정이 늘 선한 것만은 아니라는 현실로 인해 주자는 심통성정을 통해 우리의 본성과 감정이 모두 마음의 주체적인 일임을 강조하고, 더 이상 마음이 작용하기 이전의 본성을 찾기 위한 종교적 깨달음의 경지를 추구하지 않고 마음을 움직이기 전의 고요한 중에도 함양하고 마음을 움직이는 적극적인 상황 중에도 성찰하는 마음공부를 수양의 핵심으로 자리매김하였다. 본성, 이상과 현실 사이에서 근원적인 선의 힘 심통성정도는 이러한 주자의 심통성정의 요지를 중도와 하도를 통해 보다 깊이 진작시켰다는데 의미가 있다. 퇴계는 중도를 통해 마음의 선한 본성과 본성이 그대로 표출되는 선한 감정을 정리했다. 우리 마음의 허령지각(虛靈知覺)한 특성 안에 인의예지(仁義禮智)의 본성이 있고, 이것이 마음을 통해 감정으로 드러난 것이 사단(四端), 곧 측은지심, 수오지심, 사양지심, 시비지심이다. 그러나 선한 본성이 있다는 것이 자동적으로 선한 사람을 만들어주지 않는다. 중도가 이상적인 본성과 감정의 선한 측면을 드러낸 것이라면, 하도는 현실적인 본성과 감정의 선할 수도 있고 불선할 수도 있는 차원을 설명했다. 자연의 이치는 하나이지만 만물의 특성에 따라 그 드러난 모습은 제각각이다. 이러한 리일분수(理一分殊)의 세계관 안에서 인간의 본성 또한 모든 인간이 공통으로 지닌 본연지성과 각 사람의 특성에 따라 현실적으로 주어진 기질지성으로 구분할 수 있다. 인간에게 두 가지 본성이 있는 것이 아니라 이상적인 측면과 현실적인 측면의 양상이다. 여기에 더해 감정 또한 본성이 온전히 발현되어 드러나는 사단의 감정과 감정이 앞서 본성을 억지로 끌고 가는 칠정(喜·怒·哀·樂·愛·惡·慾)의 감정으로 구분된다.
사단칠정논쟁에서 고봉은 기질지성 위에서 칠정의 감정 속에 사단이 포함되는 것으로 보았다. 곧 모든 선하고 불선한 감정에서 특히 선한 부분이 있음을 강조한 것이다. 그러나 퇴계는 이와 달리 본연지성 위에서 사단과 칠정이 구별되는 것임을 말했다. 칠정은 기질에서 비롯된 감정이고 사단은 본성에서 비롯된 마음이다. 고봉이 인간의 자연적 측면에서 본성과 감정이 불가분의 관계임을 말한 것이라면 퇴계는 인간의 도덕적 측면에서 본성의 선한 면과 감정의 불선한 면을 구분하였다. 퇴계는 본성의 절대선의 의미를 중시했고, 이와 관련하여 중도는 심통성정에서 선한 측면을, 하도는 선과 불선의 구분 자체를 부각시킨 것이다. 마음, 무엇을 따르고 선택할 것인가 자연과 사회의 통합을 꿈꾸는 성리학의 세계관에서 극명한 선과 악의 대립은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오히려 선과 불선을 말함으로 조화로운 우주와 자연의 이치 가운데 어그러진 인간사회가 선한 상태로 돌아가려는 의지가 더 강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실에서 여전히 불선이 있는 이유는 우리의 본성이나 그것을 파악할 수 있는 논리가 완전하지 못하기 때문이 아니라, 우리가 본성보다 기질의 사욕을 따르는 마음을 선택하기 때문이다. 악한 순간에도 선한 본성의 이치가 없는 것이 아니다. 만약 악인에게 선한 본성이 없다면 그는 더 이상 선한 사람이 될 가능성이 없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선한 본성에도 불선할 수 있는 기질이 여전히 있고, 불선할 수 있는 기질 속에서도 여전히 선한 본성이 있다. 심통성정은 사람의 마음이 일어나기 이전인 본성과 마음이 일어나는 감정의 사이에서 무엇을 선택할 것인지를 묻는 마음의 주체성에 관한 물음이다. 구체적으로는 우리가 현실을 살아가면서 내어놓는 수많은 감정들의 동기가 선한 것인지 불선한 것인지를 판단하고 선한 마음을 길러나가야 한다는 요청이다. 우리는 ‘나’만을 생각할 수도 있고 ‘우리’를 생각할 수도 있다. 우리 안에도 내가 있고 내가 모여 우리가 되는 것이기 때문에 우리 마음속에는 절대악이 자리할 수 없다. 마음이 무르 익어갈수록 나와 우리 사이에서 여전히 사람답게 다듬어져가고 있는 것이다. 모든 만물이 하늘 아래 있듯이, 사람의 마음속에는 모두 선한 본성이 있으므로 그것이 온전히 드러나지 않는 중에도 본성이 없는 것이 아니다. 결국 선은 이미 어디에나 있다. 마음 안의 선을 넘어 선 안의 마음을 그리는 것, 그것이 퇴계사상의 정수이다.
김주한 | 길가에교회 전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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