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7.4  통권 191호     필자 : 이성은
[선교현장 이야기]
변화하는 중국, 변함없는 은혜

지문등록을 하고 입국심사를 받다
중국이 하루가 다르게 변한다고 하지만 그래도 여전히 변하지 않는 것들이 있는 것 같다, 1년 만에 다시 방문하는 중국! 소소하게 들리는 중국에 관한 소식은 알다가도 모를 일이 참 많았다. 그러던 중에 지난 6월에 베이징(北京)을 잠시 다녀왔다. 비행기 안에서 베이징공항에 도착하면 외국인은 입국심사 전에 반드시 ‘지문등록’을 먼저 해야 한다는 기내방송을 들었다.

입국심사의 첫 과정이 열손가락 모두를 지문인식기에 등록해야 하는 것이었다. 먼저 왼손 엄지손가락만 빼고 네 개의 손가락을 지문인식기에 90초가랑 댄다. 그리고 다시 오른손 손가락 네 개를 90초가량 댄다. 그 다음은 엄지손가락 두 개를 다시 90초가량 지문인식기에 올려놓는다. 지문인식기에 등록하는 시간이 제법 걸리는 데도 긴 줄을 서서 기다리는 여행객들은 불편함을 호소할 곳이 없다. 로마에서는 로마의 법을 따라야 한다는 말이 있듯이 말이다. 이렇게 지문인식기 등록을 마치면 무사히 지문등록을 마쳤다는 종이증서가 나온다. 한 번 등록을 해놓으면 다음에는 하지 않아도 된다고 하니 참으로 다행이다.

 

갑자기, 이제는 중국에서 내 개인정보의 유출을 막기 위해 장갑이라도 끼고 다녀야 하나 하는 우스운 생각이 들었다. 지난 수십 년 동안 기독서적을 전달하는 일을 많이 했다. 그때마다 두려운 마음이 있었지만 늘 주님이 주시는 담대함으로 무사히 입국심사를 마치고는 했다. 이번에도 다량의 신학서적들을 전달해야 했는데 무사히 입국심사를 통과하고 마중 나오실 한 목사님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긴급 상황이 발생했다. 내 스마트폰의 와이파이(wi-fi)가 터지지 않는 것이다. 그냥 속수무책으로 기다려야만 했다.

약속시간이 지나도 마중 나오시기로 한 그 목사님은 나타나지 않았다. 안 되겠다 싶어서 옆에 있는 중국인 여성한테 도움을 청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나는 자초지종을 말한 뒤 혹시 전화 한 통화만 쓸 수 있겠냐고 했더니 이상한 눈초리로 쳐다보더니 전화번호를 달라고 했다. 그래서 고마운 마음으로 전화번호를 건네주니 선전(深圳) 것이냐고 물었다. 순간, 나는 아니라고 할까 하다가 맞는데 왜 그러냐고 되물었다. 그랬더니 그 중국인 여성은 전화번호가 선전으로 뜬다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아, 이 친구가 선전에서 살다가 최근에 베이징으로 이사를 왔다고 했다. 전화를 하면 그 지역명이 뜨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중국 과학기술의 발전이 참으로 놀라웠다. 그러나 끝내 전화가 연결되지 않았다. 어쩔 수 없이 무작정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결국 우리는 한 시간이 지나서야 만났다.

광장에서 찬양과 율동을 하며 자유롭게 전도하는 날이 오기를
나를 마중을 나온 그 목사님은 베이징에 온 지가 얼마 안 되어 지리도 잘 모르는데 사모님과 같이 병원심방을 다녀오느라 늦었다고 했다. 목사님은 연신 미안하다고 말씀하셨지만 나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감사한 마음이 들었다, 베이징 외곽으로 나가는 길은 교통체증이 극심했고, 날씨는 이미 완연한 여름이었다. 마치 선전에 와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착각이 들 정도였다. 그날 베이징의 기온이 중국 남방지역의 여름 기온인 37℃도였다고 한다. 그런데 이 더위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은 저녁노을이 붉게 물든 시간에 광장 한가운데 모여서 광장무(廣場舞)를 추고 있었다. 지금 내 눈 앞에서 펼쳐지는 너무 익숙한 중국인들의 광장무를 보니 반갑기까지 했다. 문득 저 광장에서 크리스천들도 찬양과 율동을 하며 자유롭게 전도할 수 있는 날이 온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이 떠오르며, 벌써부터 느껴지는 중국의 향수에 내 기분은 한껏 부풀어 올랐다.

중국요리는 사랑을 싣고 

이제부터는 음식으로 중국의 향수를 느껴야 할 시간이다. 마중 나온 목사님이 가장 먹고 싶은 음식이 무엇이냐고 물었다. 나는 동북요리 생각에 군침을 삼키고 있었다. 오랜만에 동북요리 식당에서 식사를 하는데 양이 너무 많아서 절반은 그대로 남기고 말았다. 이 정도의 요리라면 가격도 만만하지 않았을 텐데 아깝다는 생각이 맴돌았다. 한국 사람들이 중국식당의 회전식탁(转盘饭桌)에서 요리를 먹을 때는 적어도 일곱 명 이상은 함께 먹어야 음식을 남김없이 먹기에 적당할 것 같은 생각을 했다. 저녁식사를 마치고 상가 건물에 세 들어 있는 교회를 먼저 둘러보고 그 목사님의 사택에 가서 휴식을 취하기고 했다. 그 목사님의 사택은 33층짜리 아파트의 21층에 있었다. 짐을 내려놓고 잠시 21층 베란다에서 주변의 환경을 내려다보았더니 예전 그대로였다. 아파트 정문에 즐비하게 세워져 있는 자동차, 자전거, 삼륜차까지 정감이 철철 흘러 넘쳤다.
 

그렇게 오랜 시간이 지나도 변하지 않는 것은 역시 중국 사람들의 삶의 모습인 것 같다. 중국 정부가 4차 산업혁명의 역습을 가하며 빠른 변화를 주도하고 있지만 여기서 조금만 움직여도 예전의 중국을 볼 수 있었다. 차량은 예전이나 지금이나 여전히 많은 것 같았고, 전동자전거도 만만치 않게 많아졌고, 한국에서는 보기 쉽지 않은 수많은 오토바이와 그 외 개조된 차량들도 눈에 띄었고, 다양한 수입차들도 보였다.
 

거대한 빌딩숲을 이루고 있는 도심 주변에도 아직 개발되지 않은 채 여전한 옛 모습의 쓰허위안(四合院, 중국 화베이[華北]지방, 베이징의 전통 건축양식, ‘ㅁ’자 형태에 가운데에 마당을 두고 본채와 사랑채 등 4개 건물로 둘러싼 구조로 되어 있다. _출처: 네이버 두산백과)들이 좁게 늘어져 있었다. 그 속에서 웃옷을 입지 않은 채 서 있는 남자들의 흔한 풍경도 여전했다.
 

영화 《투게더 (和你在一起, Together, 2002)》에서처럼 우리의 눈에 보이는 화려함보다 눈에 보이지 않는 순박함이 마음을 편안하게 느긋하게 만들어주었다. 겉으로 보기에는 이렇게 평온한 중국인데, 최근 중국 정부의 신(新)종교사무조례의 시행으로 많은 중국선교사들이  비자발적 출국을 당하거나 압력이 고조되어 여기저기 옮겨 다니는 불안한 생활을 하고 있는 것이 또 한편의 현실이다. 이러한 상황이기에 선교사들의 비자발급, 모임장소, 거주지 등의 문제들은 지금 우리가 다함께 절실히 기도해야 할 기도의 제목이다.
 

이미 들어서 알고는 있었지만 예전과는 다르게 시내로 진입하려면 무조건 신분증 검사를 받아야 한다고 한다. 자가용도 예외는 아닌데 이날 우리는 신분증 검사를 받지 않아서 마음이 놓였다.
 

생각지도 못한 점심식사에 초대를 받았다. 베이징에 오면 꼭 먹어야 하는 ‘北京烤鸭(베이징, Peking duck)’! 예전에 먹었던 것과는 차원이 달랐다. 왜 이렇게 고소하고 맛있는 것일까? 새삼 그 맛에 감탄했다. 때마침 베이징에서 세계 차(茶) 박람회가 열리고 있어서 구경을 갔다. 게다가 VIP용 입장권을 선물로 받아서 중국 전통차에 대해 두루두루 한눈에 살펴보게 되었다, 중국 쿤밍(昆明)의 유명한 푸얼차(普洱茶)에서부터 우롱차(乌龙茶)까지 다채로운 차들이 진열되어 있는 부스를 방문했다. 시간이 넉넉하지 못해서 다 살펴볼 수는 없었지만 잠시라도 차 박람회를 관람하면서 전통문화 수호에 앞장서고 있는 중국이 새삼스러운 느낌이 들었다.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원래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잠깐의 짧은 휴식을 뒤로하고 외곽지역을 향해 약 두 시간가량을 자가용으로 달렸다, 도심의 빌딩숲을 벗어나서 고속도로를 달리니 내가 좋아하는 미루나무 가로수 길을 끝없이 달리고 달려서 드디어 흙먼지 풀풀 날리는 시골길로 들어섰다. 정확하게 어디로 가고 있는지 방향을 종잡을 수가 없었다. 넓고 넓은 허허벌판이 보이고 드디어 시골의 작은 마을 어느 집 앞에 도착했다. 그리고 짐 가방을 잘 챙겨서 집 안으로 들어갔다. 보고 싶은 얼굴들은 열심히 강의를 듣고 있었다.
 

나는 강의가 끝나기를 기다리면서 주방에서 식사를 준비하는 분들과 먼저 반갑게 인사를 나누고 이리저리 집안을 살펴보았다. 이 집은 독특한 구조로 되어 있었다. 밖에서 보면 진흙벽돌집이지만 안으로 들어오면 비닐하우스 같은 느낌이었다. 한 번 대문을 열고 들어가면 나가기가 수월하지 않는 공간구조로 되어 있었고, 하늘이 보이지 않는 마당 오른쪽에는 교실 겸 예배당이, 왼쪽에는 겉으로 보기에는 창고 같은 숙소가 있는데 여기에는 거실과 화장실, 주방, 안방과 큰방과 또 다른 방 하나가 있었다. 높은 지붕 옆으로는 열리지 않는 창문이 있었는데 빛이 들어오는 통로역할을 하고 있어서 아주 따뜻했다. 대체적으로 모든 것이 깔끔하게 정리가 잘 된 느낌을 주었다. 약 서른 명 정도가 공동체생활을 하는 데도 문제가 전혀 없어 보였다. 이들이 원래 거주하려고 했던 곳은 여기가 아니다. 이 은혜로운 집을 가정교회로 사용할 수 있게 허락하신 하나님의 놀라운 계획하심에 영광돌리며 감사할 뿐이다.
 

이들은 다시 본 훈련센터로 돌아가야 하지만 새로운 종교사무조례로 인해 지금은 돌아갈 수 없게 되었다. 그야말로 광야생활을 하고 있는 것이다. 중국에서 신앙생활을 한다는 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불기둥과 구름기둥 없이 살 수 없었던 것과 마찬가지이다. 하나님을 마음껏 찬양하며 신앙생활을 마음껏 하고 싶어도 하지 못하는 곳이다. 하지만 오히려 더 하나님을 갈망하고 하나님께 의지하는 간절한 믿음을 가진 이들을 보며 우리의 모습을 되돌아보았다.

우리는 신앙의 자유가 주어진 너무나 편하고 익숙한 신앙생활을 하면서 주님과 친밀하고 깊은 교제에 있어서 오히려 나약해진 느낌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는 현실인 것 같다. 살아있는 믿음의 감동이 있는 이 땅에 눈물의 씨앗이 뿌려지고 있기에 분명 이들을 통해서 선교하는 중국의 시대는 계속될 것이다. 노아의 때처럼 모든 것이 믿겨지지 않는 시대라고 하지만 그 속에 수많은 주님의 음성을 듣고 있는 믿음의 사람들이 있기에 어려워도 핍박이 있어도 하늘의 소망이 끝없이 이루어지리라 확신한다. 두 시간을 달려서 이렇게 사랑하는 동역자들을 만나니 그 두 시간조차도 부끄러움이 되면서 새로운 힘을 얻게 된다.
 

잠시 식탁교제의 시간을 갖고 다시 이동을 하였다. 다시 한 시간을 넘게 달려서 도착한 곳은 가정신학교였다. 하지만 신학교의 문은 굵은 쇠사슬로 굳게 닫혀 있었다. 한밤중이었지만 주변을 찬찬히 한 번 살펴보았다. 지금은 이렇게 굳게 닫혀 있지만 언제, 다시, 자유롭게 사용될 수 있을지는 아무도 모른다. 오직 주님만이 신학교의 안전을 지켜주시고 다시 길을 열어주실 것이라고 굳게 믿으며 기도한다. 주님이 원하시는 그때에는 어느 곳에 있든지 노래할 것이다. 새 노래로 주님을 찬양할 것이다. 이 땅의 젊은이들이 각 나라와 족속과 백성과 방언(계 7:9-12)을 향해 나아가는 그날에 함께 노래하는 꿈을 위해 기도할 것이다.
 

또 다시 두 시간을 달렸다. 그리고 다시 새로운 장소에 도착했다. 차가 너무 밀려서 약속시간보다 늦게 도착했지만 좋은 교제의 시간을 가졌다. 마침 이날은 6월 1일이었는데 중국에서는 어린이날로 보내는 날이기도 하다. 어느 나라이든지 어린이들은 축복의 통로이다. 하지만 요즘 신세대 부부들은 양육비의 어려움으로 아이 낳는 것을 꺼리는 것은 중국도 한국과 마찬가지인 것 같다. 그래도 오늘은 어린이날이라 그런지 어린이들의 발표를 보려고 부모들이 교회에 오는 것을 보니 참 행복했다. 요즘 새로운 종교사무조례로 어린이주일학교 예배를 드릴 수가 없다. 하지만 내가 참석한 교회에서는 어린이주일 예배를 드리고 있어서 참 감격스러웠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서 이렇게 예쁜 율동과 찬양을 하는 아이들의 하나하나의 움직임이 어찌 그리 사랑스럽고 귀여운지 모두가 함박웃음으로 화답하고 박수와 격려를 잊지 않았다.
 

중국은 우리와 가깝고도 친근감이 있는 나라이지만 우리와 문화의 차이는 크다. 그래서 이 차이를 극복하기보다는 다름을 인정하는 것이 필요하다. 장기거류가 결코 쉽지 않은 지금의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이 주시는 지혜로 모든 사역자들이 어려움을 잘 이겨내기를 기도한다.
 

이번의 짧은 여정을 통해 다시 한 번 축복의 땅에 머물고 있다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지 깨달았다. 앞으로 날마다 감사의 기도를 드려야겠다고 마음에 새겨본다.

 





이성은 | 중국어문선교회 총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