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7.3  통권 179호     필자 : 배다니엘
[고전을 통해 생각해보는 현대인의 삶]
“마음이 평온하면 초가집에 살아도 편안하다”

문득 익히 알고 있으면서도 잊고 살아가던 한 이야기가 생각난다. 어느 날 갑자기 궁궐로 들어오라는 왕의 부름을 받은 어떤 이가 두려운 마음에 친구들을 찾아가서 같이 가달라고 부탁했더니 첫 번째 친구는 무조건 거절했고, 두 번째 친구는 궁궐 문 앞까지만, 세 번째 친구는 친히 왕의 앞까지 같이 가주었다. 여기서 왕의 호출죽음, 첫 번째 친구는 ‘재산’, 궁궐 문(무덤)까지만 가주는 친구는 친지, 세 번째 친구는 선행을 각각 의미한다고 한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하게 생각되는 세 번째 친구 선행은 드러나지는 않았지만 나에게 끝까지 힘을 주는 존재인 나의 내면의 충만을 의미하기도 한다. 옛 선인들은 어떠한 모습으로 이 내면의 충만을 지니고 있었을까 궁금해진다.
 

당대(唐代) 유우석(刘禹锡)은 주도했던 개혁운동의 실패로 안휘성(安徽省) 작은 현의 통판(通判)으로 좌천당한 때가 있었다. 중앙에서 밀려나와 한직을 맡게 된 그에게 지방관은 갖은 구실로 거처를 계속 옮기도록 하여 결국 그에게는 침대와 책상과 의자 한 벌만 있는 하찮은 방이 주어진다. 그러나 유우석은 몸뚱이 하나만 간신히 들여놓을 ‘陋室’(누추한 방)에서도 굴하지 않고 누실명(陋室铭)을 통해 자신 내면의 기상을 펼쳐낸다.
 

산이 높지 않더라도 신선이 살면 유명한 산이고, 물이 깊지 않더라도 용이 살면 신령한 물이다. 이 집은 비록 누추하지만 오직 나의 덕으로 향기가 그윽하다. 이끼 낀 흔적은 계단을 오르며 푸르고, 풀빛은 창문의 발을 통해 더욱 파랗게 보인다. 담소하는 덕망이 높은 선비가 있을 뿐, 왕래하는 비속한 선비는 없다. (山下不在高, 有仙则名, 水不在深, 有龙则灵, 斯是陋室, 维吾德馨. 苔痕上阶绿, 草色入廉青. 谈笑有弘儒, 往来无白丁.)….
 

겉으로는 비루해 보여도 내가 있기에 이 집은 향기와 기개가 높은 집이 되고 있다는 호기에 찬 언급이다. 사람이 찾지 않아 이끼가 끼어있던 계단이나 창문에 어둡게 드리웠던 발도 나의 시선이 닿자 한층 푸르고 파란 생기를 발하는 존재로 인식된다. 그 사람이 있음으로 해서 비루한 환경이 더욱 빛이 나는 기적의 역사가 일어난다. 이러한 상황을 만들 수 있는 힘은 그 사람의 내면을 가득 채우고 있다가 흘러나오는 실력과 인품의 향기가 아닐까 싶다.
 

몽골족이 세운 원(元)에게 송(宋)이 망해갈 때 의병을 일으켜 대항하던 문천상(文天祥)이라는 선비가 있었다. 그가 포로가 되자 원나라 세조(世祖)는 그의 의기를 높이 사서 항복을 권했지만 그는 거절하고 두 해 동안 감옥에 있다가 사형을 당하였다. 그가 좁은 감옥에 있을 때 찜통 같은 더위, 비린내와 누린내 섞인 땀내, 똥오줌과 시체 썩는 냄새 등 온갖 더러운 상황에 고통 받으면서도 호연지기(浩然之氣)하나로 각종 악한 기운을 이겨내며 쓴 시가 정기가(正气歌)이다.
 

아아! 이 막히고 젖은 진탕 속이, 나에게는 즐거운 나라가 되었구나. 이 상황에 어찌 무슨 잔재주 있으리오, 음양의 이치를 도적질하지는 못하리라. 둘러봐도 있는 듯 없는 듯 깜빡이는 빛 하나요, 하늘을 봐도 그저 흰 구름뿐. 내 마음의 슬픔은 끝이 없으니, 푸른 하늘인들 다 할 수 있으랴. 어진 이들 가신 날은 이미 멀어도, 그들이 보인 모범은 어제 본 듯하구나. 바람 부는 처마에서 책을 읽으니, 그들의 옛 가르침이 내 얼굴에 비추어 오네. (嗟哉沮洳场,为我安乐国。岂有他缪巧,阴阳不能贼. 顾此耿耿在, 仰视浮云白. 悠悠我心悲, 苍天曷有极. 哲人日已远, 典刑在宿昔. 风檐展书读, 古道照颜色.)


문천상은 훈련받은 군인도 아니었고 힘이 센 장사도 아니었다. 그저 옛사람의 가르침을 사모하고 나라를 향한 충의를 마음속에 지녔던 일개 선비였을 뿐이다. 그런 그를 용감한 전사가 되게 하고 혹독한 고통을 당당히 제압해 나가도록 했던 놀라운 힘은 바로 그가 내면에 오롯이 품고 있었던 기개와 의지였다. 자신만의 당당한 신념이 있었기에 각종 환경에서 오는 두려움과 걱정을 넉넉히 극복해나갈 수 있었던 것이다.
 

중년 남녀를 대상으로 자신이 가진 가장 슬픈 감정이 무엇인가를 물으니 남성은 ‘소외감’, 여성은상실감이라고 답했다는 조사결과가 있다. 허덕이면서 열심히 살아왔건만 인생을 돌이켜보니 무언가 이루어 놓은 것도 없고, 내가 그토록 마음 쏟고 공을 들였던 자식은 서서히 남이 되어가고 있으며, 그 누구도 내 마음 알아주는 이 없다는 자괴감도 문득문득 피어오른다. 깊은 상실감에 아득해지기도 하고 마음 하나 허할 뿐인데 인생이 통째로 흔들리는 듯한 심각한 느낌을 받기도 한다.
 

그러나 생각해보면 우리는 결코 인생을 대충대충 살았거나 무의미하게 살아온 존재가 아니었다. 비록 실패하는 순간이 있었고 실수로 아파하는 순간도 있었지만 그 순간들 역시 가르침으로 역사하며 소중한 자양분이 되어왔다. 지금 보이지는 않지만 우리가 흘린 땀과 눈물 역시 귀한 수분이 되어 주변을 소리 없이 적시고 자라나게 하였음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어떠한 어려움이 순간 나를 흔들 수는 있지만 주님의 피값으로 다시 태어난 나는 분명 귀하고 가치 있는 존재임에 틀림없는 것이다. 그저 순간 나를 일렁이게 만드는 마음 하나 빼어내면 될 뿐이다. 명심보감(明心宝鉴)에 “마음이 평온하면 초가집에 살아도 편안하다(心安, 茅屋稳).라고 했다. 이 의미를 터득한다면 성격이든 신체의 결함이든 남에게 내보이기 어려운 초라한 누실(陋室) 같은 부끄러움에서도 자유로울 수 있다. 남을 이기는 이보다 자신을 이기는 이가 진정 강자이기 때문이다. 마음의 자유를 누리는 경지를 위해 겸허한 마음으로 기도하면서 진리의 말씀과 선현의 행적을 묵상해 본다. 앞서간 위대한 인물들이 그렇게 마음을 다스려 나갔던 것처럼!

 





배다니엘 | 남서울대 중국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