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7.3  통권 179호     필자 : 유관지
[발행인통신]
존 로스(罗约翰) 선교사

무서운 가뭄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가뭄은 농민들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을 힘들게 만듭니다. 중국은 어떤가 궁금했는데 지난 달 21부터 중국의 베이징을 비롯해서 13개 성(省)이 폭우 피해로 고통을 겪고 있다는 소식이 들어와 있습니다. 지난 달 23일에는 오전에만, 베이징 서우두(首都)공항의 항공편 175편의 운항이 취소되었다고 합니다. 비가 안 와서 겪는 가뭄도 무섭지만 영적인 가뭄은 우리를 더 답답하게 만듭니다. 선지자 아모스는 영적인 가뭄을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못한 기갈”(암 8:11)이라고 했습니다. 우리에게는 중국이라는 영적인 논과 밭에 물을 공급하는 하는 양수기(扬水机)의 역할을 해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그리고 이 《중국을주께로》는 양수기들에게 기름을 잘 공급해 주어야 하는 사명을 가지고 있습니다.
 

로스 선교사가 한국에 잘 알려진 이유들
오늘은 존 로스 선교사(1842. 8. 9.-1915. 8. 6.)의 이야기를 하려고 합니다. 로스 선교사는 중국에서 사역했던 많은 선교사들 가운데 한 분입니다. 로스 선교사는 중국선교사들 가운데 한국교인들에게 아주 잘 알려져 있는 몇 분의 선교사들 가운데 한 분입니다. 그 이유가 몇 가지 있습니다.
 

첫째, 그의 사역지가 한국과 가깝고, 한국과 관계가 깊은 중국 동북지역이었기 때문입니다. 로스 선교사는 여러 곳을 거쳐 1878년부터 선양(沈阳)을 중심으로 일했는데 그가 선양에 세운 동관교회는 그때나 지금이나 변함없이 중국 동북지역의 모교회로, 또 중심교회로 많은 일을 하고 있습니다. 동관교회는 1887년에 예배당을 건축하고 1889년에 낙성식을 했습니다. 그리고 1907년에는 서양식 청벽돌 예배당을 지었고, 1997년에 새 예배당을 지었습니다.
 

둘째, 이것이 제일 큰 이유라고 할 수 있겠는데, 한글성경을 번역하고, 출판하고, 보급하는 일을 하였기 때문입니다. 1887년에 출간된 <예수셩교젼서>을 보통 <로스역>이라고 부릅니다. <로스역>이 한국교회에 끼친 공은 의외로 큽니다.
 

셋째, 한국에 복음을 전하려고 애쓰고, 한국을 사랑하고, 한국을 알리기 위해 히멌기 때문입니다. 로스 선교사는 1874년 10월에 제1차 순회전도여행을 떠났습니다. 그가 먼저 찾은 곳은 압록강 상류에 있는 린장(临江)이었습니다. 린장은 압록강을 사이에 두고 북한의 중강군(中江郡)과 마주 보고 있는 곳입니다. 린장을 떠난 로스 선교사는 고구려의 두 번째 수도였던 지안(集安)을 방문했습니다. 지안은 북한의 만포시(满浦市)를 마주 보고 있는 곳입니다. 지안을 떠난 로스 선교사는 귀로에 고려문(高丽们)을 방문하였습니다. 고려문은 조선과 청의 출입 사무가 이뤄지던 국경마을이었는데 로스 선교사는 여기에서 만난 사람들한테 한문성경을 나눠주며 전도하였습니다. 그 가운데는 흰옷에 갓을 쓴 한국인도 있었습니다.
 

로스 선교사는 1876년 4월과 5월에 고려문을 두 번째로 방문하였습니다. 이번에는 한국 청년을 여러 명 만나 한문성경을 건네며 전도했는데 그 청년들은 별로 반응을 보이지 않았습니다. 로스 선교사는 이 일을 통해 한글성경의 필요성을 깊이 깨달았습니다. 고려문은 이렇게 한국교회와 기독교의 첫 접촉이 이뤄진 곳인데 지금은 그와 관련된 아무런 자취가 남아 있지 않는 것이 아쉽습니다. 로스 선교사가 전도여행을 할 때 그의 시선은 내내 조선에 고정되어 있었을 것이 분명합니다. 로스 선교사는 한국어를 배우는 일에 힘써 1877년에 한국어 교재 를 출간하였습니다. 로스 선교사는 안식년을 맞아 본국에 가 있을 때 쉬지 않고 서방세계에 조선을 소개하였습니다. 로스 선교사의 고향에는 그를 기념하는 작은 돌비가 하나 서 있는데 여기에는 ‘중국과 한국선교사’라고 새겨져 있다고 합니다. 그를 파송한 스코틀랜드장로교 연합선교회에서는 로스 선교사가 이렇게 조선선교에 힘쓰는 것을 못마땅하게 여겨 마찰도 있었다고 합니다.
 

선교지 도착 다음해에 부인을 잃다
로스 선교사는 1842년 8월 9일, 스코틀랜드 크로마티 하구의 한 어촌에서 8남매의 장남으로 출생했습니다. 스코틀랜드에 한국의 크리스천들이 로스의 생가로 알고 방문하는 집이 하나 있는데, 로스를 깊이 연구한 박형신 교수(남서울대)에 따르면 그 집이 생가는 아니라고 합니다. 그런데 그 집의 주인은 찾아오는 이들이 실망하지 않도록 로스에 대한 자료를 풍부하게 갖춰놓고 친절하게 안내하고 있다고 합니다. 로스는 글래스고대학과 에든버러신학교를 졸업한 뒤 전도사로 일하다가 1866년 해외선교회 총무 맥길 박사와 중국선교사 허드슨 테일러의 영향으로 중국선교사가 되기로 결심합니다. 로스는 필요한 절차를 밟아 1872년 3월 20일, 스코틀랜드장로교 연합선교회 소속 선교사로 임명을 받았습니다.
 

선교사로 임명을 받은 그 주간에 M. A. 스튜어트와 결혼하고 바로 중국을 향해 8월 23일, 중국성에 도착하였고, 이후 잉커우(营口)에 정착하였습니다. 잉커우는 보통 ‘중국 동북의 관문’이라고 불리는 항구도시입니다. 1858년에 톈진(天津) 조약이 체결되었을 때 뉴좡(牛庄)이 개방되었으나, 랴오허(辽河)에서 흘러내린 토사가 퇴적되어 뉴좡을 항구로 사용하는 것이 어려워지자 뉴좡을 대신해 1864년부터 잉커우가 하항(河港)으로 이용되었습니다. 서구인들은 이 새 항구를 본래 조약에 명기되어 있는 뉴좡으로 불러서 조금 혼선이 빚어지기도 했습니다.

로스 선교사는 잉커우에서 첫 아이 드루먼디를 얻었는데, 출산 후유증으로 중국에 도착한 다음 해인 1873년 3월 31일, 부인이 하늘나라로 가는 아픔을 겪었습니다. 로스 선교사는 혼자서 아이를 양육하며 계속해서 선교활동을 했습니다. 어려운 처지가 된 오빠를 돕기 위해 여동생 캐서린이 중국에 왔는데, 캐서린은 중국에 와있던 매킨타이어 선교사와 사랑에 빠졌고, 결국 로스와 매킨타이어는 처남 매부간이 되었습니다.
 

에피소드 하나
올해는 <로스역>발간 130년이 되는 해인데 <로스역>이 서울에서 발간되었다고 말하는 분을 만난 일이 있습니다. <로스역>의 안쪽 표지에 “예수강세일쳔팔백팔십칠년 예수셩교젼서 광셔 십삼년 경셩 문광셔원활판”이라고 인쇄되어 있는데, ‘경성’이 곧 일제 때 서울의 이름이 아니었느냐는 것입니다. ‘경성’은 ‘성경(盛京)’을 왼쪽부터 쓴 것으로 ‘성경’은 ‘선양’의 옛 이름들 가운데 하나입니다. 그리고 1887년은 일본에 강제합병이 되기 이전이었습니다. ‘광서(光绪)’는 청나라 광서제 때의 연호입니다. 1875년에서 1908년까지 이 연호를 사용하였으니 광서 13년은 바로 1887년이 됩니다.
 

이렇게 존 로스 선교사에 대해 생각하다보니 그에 대한 고마움이 새삼 마음에 가득 차오르는 것을 느낍니다. 대한성서공회는 1995년에 경기도 용인에 숙식을 하며 학술회의와 세미나를 할 수 있는 건물을 하나 지었는데 로스 선교사에 대한 고마움을 표하기 위해 이 건물의 이름을 ‘로스기념관’이라고 지었습니다. 그리고 동관교호의 벽돌 석 장을 가져다가 머릿돌 밑에 박아넣고 로스 선교사의 공적을 설명하는 글을 벽면에 부착했습니다. 선양의 동관교회에는 로스 선교사의 추모비가 있는데 그 초무비의 비문을 다음과 같습니다.
 

그 음성이나 모습이 여전히 계시는 듯해 경의를 표하노라. 하나님께 충성하고 성도들을 사랑하기를 38년간 사방에 교회의 붐을 일으킴 관동의 한 분이시여, 교회당을 신설하고 설교하시니 그 덕행이 받들림을 받도다.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며 만고에 보존하기 위해 돌에 비문을 새기니 길이 길이 남아 있으리라.
 

로스 선교사의 추모비문을 읽으면서, 중국을 위해 애쓰는 분들의 수고도 하늘나라에 길이 길이 기록되어 있으리라는 믿음을 새롭게 가져 봅니다.

 




사진 | 국민일보
유관지|중국어문선교회 고문, 본지 발행인, 성화감리교회(분당) 원로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