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삶사역2수정.JPG) 선교사의 사명 2000년 8월, ‘선교’의 ‘선’자도 잘 모르면서 23살 나이에 선교의 길에 들어섰습니다. 하룻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모른다는 말이 있듯이, 오직 주님을 향한 그 열심을 가지고 남편과 함께 결혼한 지 20일 만에 고향을 떠나 낯선 지역으로 갔습니다. 목숨이라도 내놓을 듯 하는 열심을 가지고 떠났습니다. 그곳은 바로 중국 남방에 있는 구이저우성(贵州省)이었습니다.
비록 한 중국 안에 있는 성(省)이지만 언어가 다르고, 민족이 다르고, 모든 것이 생소한 지역이었습니다. 그 성에는 이십여 소수민족이 살고 있었는데, 우리는 주로 먀오족(苗族)과 이족(彝族)이 살고 있는 마을로 가게 되었습니다. 하나의 민족 가운데도 여러 부류로 나뉘어져 있어서 언어가 약간씩 달랐습니다. 먀오족과 이족은 오래전부터 다른 민족한테 쫓겨서 주로 깊은 산속에 살고 있었고 한 가정의 일 년 수입이 너무나도 적었습니다. 다음해 여름이 오기 전에 식량이 떨어지기 시작해 생계를 겨우 겨우 유지하는 집이 참 많았습니다. 감자나 옥수수가 이들의 주식이고, 집에서 키운 닭이나 돼지, 그리고 계란을 팔아서 돈을 마련합니다.
농촌에서 더 편벽한 농촌으로 저도 농촌 출신이긴 했지만 남편과 같이 찾아온 사역지는 더 형편없는 농촌이었습니다. 차가 다니지도 않을 뿐 아니라 편지를 써서 소식을 전하려고 해도 몇 달이 걸릴지도 모르는, 전화 한 통 걸려고 해도 몇 시간을 걸어서 작고 작은 향(乡)에 와서야 겨우 통화할 수 있는 형편이었습니다. 하나의 문으로 들어오면 우리의 침실(침대 하나와 책상 하나)이 있었고 옆 칸에는 말, 돼지, 닭이 같이 살고 있었습니다. 널판자로 만든 문틈 사이로 고약한 냄새가 코를 찌르고, 여름에는 파리떼가 득실거렸습니다. 그러니 음식을 먹으려면 파리떼와 전쟁을 치러야 했습니다. 지금 다시 그런 환경으로 나를 인도하신다면, 내가 과연 견디어 낼 수 있을지? 오직 만군의 여호와의 열심이 이를 이루셨습니다.
현성(县城)에 거주지를 옮기다 농촌생활을 한 달 정도 한 뒤에 교통과 통신의 불편함 때문에 끝내는 그곳을 떠나야 했습니다. 현성에 와서 작은 집을 하나 구했습니다. 방세와 전기요금, 수도요금을 떼고 나면 얼마 남지 않는 생활비, 하지만 농촌의 여러 교회를 다니면서 말씀과 보내온 구제물자로 섬길 수 있어서 참 행복했던 시절이었습니다. 특히 오토바이에 신발과 옷, 인형 등을 싣고 농촌교회를 찾아다니면서 가져다줄 때, 기뻐서 어찌할 바를 모르는 그분들이 우리에게는 큰 위로와 힘이 되었습니다. 주로 먀오족과 이족들이 사는 마을을 다녔는데, 남편은 먀오족 가운데서도 소화묘족(小花苗族)에 대해 복음전파의 큰 부담과 관심을 가졌습니다. 현지 그리스도인들의 예배 현지의 그리스도인들은 백여 년 전부터 복음을 받아들였고 이들의 예배와 신앙방식이 정확하다고만 생각해 온 지라 저들과 다른 예배방식이나 새로 듣게 되는 주님의 말씀에 대해서는 약간의 거부 반응을 보였던 것입니다. 특히 농촌에서 드리는 예배는 보통 서너 시간 이었고, 찬양은 이들이 꿈에서 배운 노래나 현지 성도들이 만든 찬양이었는데, 이들은 이런 찬양을 영가(灵歌)라고 불렀습니다. 특히 문맹(文盲)인 분들이 많아서 찬양은 거의 다 외워서 불렀고 성경을 외우는 사람들도 적지 않았습니다. 헌금생활은 성탄절이나 성찬식 때만 하였고 장로나 전도사 직분을 가진 분들이 성찬식을 인도하거나 축도를 할 수 있었습니다. 목사의 직분을 가진 분들은 거의 없었습니다. 매번 예배를 드릴 때마다 네다섯 명의 설교자들이 말씀을 전했으며 설교 중에 감동을 받은 성도가 수시로 일어나서 영가를 부르면 설교자와 성도들도 함께 영가를 부릅니다. 한번 부르기 시작하면 한 곡에서 끝날 때도 있지만 여러 곡을 연이어 부를 때도 많습니다. 좀 더 ‘충만’(?)하면 다 같이 서서 뛰면서 춤을 추기도 합니다. 찬양이 끝나면 설교자가 계속하여 설교를 합니다. 설교자는 강단에서 설교하는 것이 아니라 남녀 성도가 양 옆으로 갈라 앉은 사이로 걸어 다니면서 강연하듯이 설교를 하였습니다. 더욱이 성경에 대한 지식이 없기 때문에 자기의 소견에 옳은 대로 말씀을 전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도시에 있는 큰 교회들은 이런 문제가 많지는 않았습니다. 처음에 우리는 이들의 이런 예배가 아주 어색했습니다. 제자 양육 남편은 현지 교회에 다니면서 중국어로 신학공부를 해야 할 필요를 느꼈기에 하얼빈(哈尔滨)신학교에서 2년 동안 공부를 하고 다시 사역지로 돌아왔습니다. 그리고 다른 교회의 요청으로 한 달에 한 번씩 설교를 하였으며, 3년 반 동안 매주 수요일마다 교회 일꾼들이 모이는 모임에서 성경공부를 가르쳤습니다. 하나님이 남편을 훈련하심과 동시에 그 교회의 일꾼들을 양육하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농촌으로 다니면서는 열정이 넘치는 사역자들을 만났지만 그들 대부분은 성경공부를 한 적이 없고 신학교를 졸업한 분들은 더욱 적었습니다. 이들은 주님의 말씀을 올바르게 배워야 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제자양육의 필요성을 느끼고 젊은 사람들을 데려다가 성경공부와 건반악기 반주법을 가르치기 시작하였지요. 그리고 목회자자녀들을 현성에 와서 공부할 수 있도록 집을 마련해 숙식을 제공했습니다. 저녁마다 한 시간씩 성경공부를 하는 학생들과 목회자자녀들이 모여서 찬양하고 기도하며 지냈습니다. 제자양육은 한 2년 정도 하다가 공안의 핍박으로 사역을 계속할 수 없게 되었고, 항상 공안의 ‘보호(감시)’를 받으면서 지내야만 했습니다. 그렇게 3년이라는 시간이 지났습니다. 주님의 때를 기다리다 사역자가 아무 일도 못하고 공안한테 꽁꽁 묶여서 다른 사역자들과 안전 문제 때문에 모든 연락을 끊을 수밖에 없는 것은 참으로 괴롭고 가슴 아픈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는 동안 작은 음식점을 꾸리기도 하고, 과일을 팔기도 하였습니다. 또한 농촌의 시장에서 옷을 팔기도 하고, 길거리에서 꼬치구이를 팔기도 하였고, 한 중학교 식당에서 학생들을 대상으로 음식을 만들어 팔기도 하였습니다. 이 외에도 헤아리기 어려울 만큼 많은 일을 하면서 주님의 때를 기다렸습니다
 교회를 개척하다 그러던 어느 날, 남편은 또 다른 교회의 요청으로 설교를 하게 되었고, 그 뒤에 주님은 남편을 통해 모범된 교회를 개척하도록 감동을 주셨습니다. 교회를 개척하고 나서 첫 주일예배에는 비록 다섯 명의 가족들만 모여서 예배를 드렸지만 두 번째 주일부터 주님이 사람들을 불러 주셨고 나중에는 삼사십 명의 그리스도인들이 모여서 함께 예배를 드렸습니다. 주님은 현지 사람들이 아니라 다른 성에 모여든 사람들을 우리 교회에 불러 주셨습니다. 처음에는 왜 이 지역의 사람들을 불러 주시지 않고 다른 성의 사람들을 보내 주시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목회를 하는 과정을 통해 이렇게 일하시는 하나님의 섭리를 조금씩 조금씩 알 수 있었습니다. 현지 사람들은 그들의 오래된 생각과 방법을 고집하며 바꾸는 것을 원하지 않았고 자신들이 드리는 예배와 신앙만이 정확한 것이라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그들은 주일 낮 예배시간마다 담임목사 한 분만이 설교하는 것, 주일헌금을 하고 나서 예배 후에 교회에서 식사하는 문제, 수요일 저녁과 금요일 저녁예배, 새벽기도가 그들한테는 아주 생소했기 때문에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았던 것입니다. 심지어 현지 그리스도인들은 십일조로 드리는 헌금이 구약에 있는 것이기 때문에 신약에서는 십일조를 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현지 사람들은 우리 교회에 나왔다가도 얼마 안돼 다른 교회로 옮기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다른 지역에서 우리 교회에 모여든 성도들은 대부분이 젊은 새신자이고 새로운 것들을 받아들이는 것에 대해 거리끼지 않았기에 목회자의 양육훈련에 잘 따라왔습니다. 성도들 대부분이 돈벌이를 위해 온 사람들이었고, 남편들은 주로 밖에서 일하고 아내들은 하루 종일 집에만 있었기 때문에 시간이 많은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리하여 제자양육도 쉽게 진행될 수 있었습니다. 물론 그 사이에 우리의 활동이 너무 자유로운 것만은 아니었어요. 핍박과 어려움도 많았지만 만군의 여호와의 열심이 항상 우리를 인도하시고 보호하시며 일을 이루어 가시고 계심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다음호에 계속됩니다.
노은혜 | 중국인사역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