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5.4  통권 177호     필자 : 현덕손
[기획]
5•4운동과 기독교: 그 100년을 바라보며

들어가며
올해로부터 2년 뒤인 2019년이 3•1운동 100주년이 되는 해이어서, 3•1운동의 의미를 되새기는 모임이 많이 열리고 있다. 기독교계에서도 이런 일이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다. 지난 2월 23일에는 ‘3•1만세운동과 종교계’를 주제로 한 ‘3•1운동 100주년 기념준비 학술심포지움’이, 3•1만세운동 당시 민족대표 33인이 모였던 태화관(지금 이름은 태화빌딩)에서 열렸다.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는 1년 2개월에 걸쳐 ‘3•1운동과 기독교’에 대해 인물•자료•문화유적 등을 전수(全数)조사하여 지난 4월 26일에 보고회를 가졌다. 이런 일은 앞으로 더 많아질 것이다. 기독교는 3•1만세운동의 ‘주역’이라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중국의 복음화에 관심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역시 2년 뒤면 100주년이 되는 5•4운동에 대해 관심을 가져야 한다. 5•4운동은 기독교에 많은 영향을 미쳤기 때문이다. 이 글이 그런 일의 단초(端初)가 되기를 바라며 컴퓨터 자판 앞에 앉는다.
 

5•4운동, 왜 일어났고, 어떻게 진행되었나
1919년 5월 4일, 톈안먼(天安門) 광장에는 젊은 학생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그들은 울분이 가득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오후가 되자 모인 숫자는 삼천 명을 넘어섰다. 이들은 베이징대학의 학생들로서, 파리평화회의의 결과에 항의하는 시위를 벌이기 위해 이렇게 모여든 것이었다. 파리평화회의는 제1차 세계대전의 종결을 위하여 승전국들이 파리에서 개최한 회의인데 1919년 1월 18일에 시작되어 1920년 1월 21일까지 1년 동안, 간격을 두고 계속되었다. 중국도 연합국의 일원으로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하였으므로 파리평화회의에 참가했다. 이 회의에서 중국이 강력하게 요구한 것은 일본이 차지하고 있는 산동(山东)지역 칭다오(青岛)를 돌려받는 것이었다. 산동반도 남쪽 해안에 있는 칭다오는 중국 북부의 뛰어난 자연항(自然港) 가운데 하나로, 무역과 군사의 중요한 기지였다. 그런데 1897년에 독일 정부가 자국 선교사 피살사건을 구실로 군대를 급파해 조차지(租借地)로 만들어 버렸다. 이후 칭다오는 유럽풍의 근대적 도시로 변모해 갔는데(그 모습은 지금도 일부 남아 있다) 1차대전이 일어나자 독일에 선전포고를 한 일본이 군사행동을 일으켜 이곳을 장악했다.
 

칭다오를 돌려받으려는 중국의 노력은 열매를 거두지 못했다. 1915년에 위안스카이(袁世凯)가, 독일의 권익을 계승하려는 일본의 압박을 이기지 못했고, 그를 이어 집권한 친일성향이 강한 돤치뤼(段祺瑞) 정권은 1918년, 일본에 유리한 내용이 담긴 문서를 일본과 교환했을 뿐만 아니라, 파리평화회의의 실세였던 영국과 프랑스가 일본의 편을 들었기 때문이었다. 1919년 4월 21일 회의에서 일본측의 주장이 통과되었다는 소식이 베이징에 알려지자 중국 국민들은 충격과 분노에 휩싸였다. 파리평화회의 조인을 거부하고, 친일매국노를 처벌해야 한다는 여론이 들끓는 가운데 5월 7일에 ‘국치(国耻)기념대회’를 열기로 결의되었는데 학생들이 먼저 들고 일어난 것이었다. 톈안먼 광장에 모인 학생시위대는 각국 외교사절들에게 청원서를 제출하기 위해 공사관 구역으로 몰려갔으나, 일요일이어서 뜻을 이루지 못했다. 학생들은 방향을 돌려 친일매국노의 집을 습격하여 그들을 구타하고 집에 불을 질렀다.
 

당황한 정부는 강경탄압에 나서 학생들을 마구 체포했다. 학생들은 체포된 동료들의 석방을 요구하며 수업거부에 들어갔다. 베이징대학 차이위안페이(蔡元培) 총장이 여론을 등에 업고 경찰과 협상에 나서서, 수업거부를 철회하고 7일의 국치기념대회에 참석하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학생들은 석방될 수 있었다. 그런데 7일이 지나자 정부는 차이위안페이 총장과 경찰책임자를 해임하려고 했고, 학생들의 지탄을 받은 친일관리 차오루린(曹汝霖)은 유임하려고 했다. 학생들은 다시 들고 일어나 반일과 애국을 외쳤고, 정부는 닥치는 대로 학생들을 체포했다. 이 운동은 전국의 각 도시로 확산되어 나갔는데, 특히 상하이(上海)에서는 학생들은 수업을 거부하고(罢课), 상인들은 철시(罢市)하고, 노동자들은 파업(罢工)을 하는 삼파투쟁(三罢斗争)이 큰 규모로 일어났다. 돤치뤼 정부는 이 거센 물결을 이기지 못하고 6월 10일에 친일파 관리 3명을 파면했다. 한편 파리의 중국대표단은 베르사유 강화조약의 조인을 거부했다. 5•4운동은 이런 과정을 거치면서 반제국주의 민족운동, 반봉건주의 운동으로 발전하였고, 중국현대사의 문을 열어 젖히는 사건이 되었다.
 

‘예수•불교•우상을 없애야 한다’
이 5•4운동은 돌발사건이 아니고 1915년에 시작된 신문화운동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1911년, 신해혁명(辛亥革命)이 일어나 청나라가 무너지고 중화민국이 세워졌다. 이를 통해 중국 역사에서 처음으로 공화정치가 행해졌기 때문에 신해혁명은 ‘공화혁명’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중화민국의 헌법은 제2장 제5조에서 “백성은 법률의 범위 내에서 신앙의 자유가 있다.”라고 명시하였고, 교인들은 “새 시대가 시작되었다!(新时代开始了!)”라고 외치며 기뻐하였다. 그러나 보수회귀세력도 만만치 않았다. 대표되는 것이 쑨원(孙文)한테 임시대총통직을 물려받은 위안스카이가 벌인 제제운동(帝制运动)으로써, 위안스카이는 황제제도를 부활하려고 했던 것이다. 공교국교화운동(孔教国教化运动)도 대표되는 보수운동으로 꼽힌다.
 

진보 지식인 천두슈(陈独秀)는 이런 일의 원인이 국민이 각성되지 않은데 있다고 보고, 1915년에 청년들의 각성을 목표로 〈청년잡지〉를 창간하였는데, 이것이 신문화운동의 시발점이 되었다. <청년잡지>는 이듬해에 <신청년>으로 이름을 바꿨는데, 이 잡지는 신문화운동의 핵심 존재가 되었다. 〈신청년〉은 1918년부터 구어체인 백화문(白话文)으로 발간되었다. 1917년에, 앞에서 이름이 나온 차이위안페이가 베이징대학 총장에 취임하여 일대 개혁을 단행하고, 천두슈•리다자오(李大钊) •후스(胡适) 등의 진보적인 학자들을 이 대학으로 초빙하면서 베이징대학은 신문화운동의 중심에 자리잡게 되었다. 5•4운동은 신문화운동의 분기점 역할을 하였다. 5•4운동 이전이 신문화운동의 발상기라면, 5•4운동 이후는 신문화운동의 확대기로 구분되기 때문이다. 신문화운동은 5•4운동이 일어날 수 있는 기반을 제공했다고 하면 5•4운동은 신문화운동이 강력한 모습으로 퍼져나가도록 하는 동력이 되었다. 두 운동은 새로운 중국을 건설하겠다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었지만 전자는 문화적 개혁, 후자는 정치적 운동, 노선은 이렇게 달랐다.
 

신문화운동 발상기에는 사상과 문학개조가 중요한 토론대상이었다. 신문화운동의 막을 올린 것도 후스의 <문학개량추의(文学改良刍议)>였다. 후스는 학생들에게 풍습•신앙•전통•가치체계•권위에 대해 모두 ‘왜?’라고 묻도록 지도하였다. 천두슈도 후스와 논조를 같이하였는데 그는 낡은 문화를 파괴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예수•불교•우상을 없애야 한다고 하였다. 비기운동(非基运动)의 효시(嚆矢)가 되는 발언이 터져 나온 것이었다. 앞에서 중화민국 성립 이후 기독교가 누린 호시절에 대해 언급했는데, 신문화운동으로 그 좋은 시절은 종언을 고하게 되었다.
 

‘새 중국은 종교가 필요한가’
신문화운동의 중요한 단체 가운데 하나인 소년중국학회(마오쩌동이 이 학회 출신이다)는 1920년부터 종교토론회를 연이어 개최하였다. 소년중국학회는 1920년 8월에 “종교 신앙이 있는 자의 입회를 거절한다”라는 조항을 통과시켰는데 여기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는 회원이 있어 토론회를 열게 된 것이다. 이 조항은 결국 “혹 어떠한 종교의 신도들일지라도 기도의 의식에 매이지 않고 나라의 역군이 되는 청년일 때는 신중한 방법으로 그들의 입회를 인정한다.”라는 것으로 완화되었다. 종교토론회에서는 ‘현대 세계에서 종교는 아직도 그 필요성을 가지고 있나?’ ‘새로운 중국은 종교가 필요한가?’이들 두 문제가 집중 토론되었다.
 

차이위안페이와 후스는 종교 무용론을 주장하였는데, 차이위안페이는 미적 교육으로 종교를 대신하자고 주장했기 때문에 이 주장은 ‘취대론(取代论)’이라는 이름을 갖게 되었다. 천두슈는 ‘선취론(先取论)’을 주장하였다. 예수의 희생적인 사랑은 받아들였으나 초자연적인 부분은 단호하게 거부한 것이다. 기독교 토착화(本色化)를 주장하는 이들은 이 주장을 교범으로 삼아 중국 문화 속에 기독교를 흡입하여 중국의 기독교를 완성하려고 하였다. 종교를 단호하게 반대하는 ‘반종교론’도 등장하였다. 혹자는 순수과학을 기준으로, 혹자는 현대사회는 종교가 필요 없는 비종교시대로 진화되었다고 주장하며, 혹자는 서방의 자유주의와 공리주의 이론을 가지고 종교를 배격하였다. 당시에 가장 많은 사람들이 이 주장에 동조하였다.
 

세계를 객관과 지식의 세계, 주관과 경험의 세계, 둘로 나누는 ‘이원론’도 있었다. 이 주장은 당시에는 영향력이 크지는 않았으나 뒷날 중국 종교정책의 기틀이 되었다. 중국은 ‘종교는 일부 백성들의 주관적 체험이므로 부정할 수 없고, 부정할 필요도 없다. 그러나 사회성과 객관성이 없으므로 전파해서는 안 된다.’라는 것을 기초이론으로 하고 있다. 신문화운동은 1920년대 초반에 무대 뒤로 사라졌다. 추진세력의 분열 때문이었다. 천두슈나•리다자오 같은 급진 지식인들은 정치•경제•사회의 변혁을 통해 중국의 문제가 총체적으로 해결될 수 있다고 생각하여 1921년 7월, 중국공산당을 창당했다. 이에 따라 〈신청년〉은 당 기관지가 되었다. 반면 후스를 중심으로 한 자유주의 지식인들은 교육을 통해 사회와·문화의 변혁을 추구하고, 나아가 정치개혁을 이룩한다며 직접하는 정치활동을 멀리하고 학문연구와 교육방면에 노력을 기울였던 것이다.
 

신문화운동은 종말을 고했지만 신문화운동이 기독교에 미친 비우호적인 영향은 오히려 증대되었다. 신문화운동에서 시작된 종교에 대한 비판적인 견해가 중국공산당 발기인들에게 그대로 이어지면서 비기운동의 뿌리가 되었던 것이었다. 1922년 4월 4일에 베이징의 칭화대학에서 열리는 세계기독교학생동맹회의에 반대하는 운동이 비기운동의 출발 나팔소리가 되었는데, 여기에 앞장선 차이위안페이나 리다자오 등은 신문화운동의 중심인물들이었다. 교회는 신문화운동의 기독교 배격에 대응하여 중화귀주운동(中华归主运动)을 벌리고 북경기독교증도단(北京基督教证道团)을 조직했으나 역부족이었다. 앞에서 5•4운동이 중국현대사의 문을 열어 젖히는 사건임을 말했는데 중국현대사는 이렇게 기독교에 대해 눈을 흘기면서 출발하게 되었다.
 

나가며
5•4운동 100년을 앞에 두고 우리는 5•4운동, 나가서는 신문화운동이 기독교에 미친 영향에 대해 폭넓은 심층 연구를 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현재 중국기독교의 모습과 신문화운동 당시 제기된 종교 문제의 연관성도 분석되어야 한다. 한국의 3•1만세운동은 5•4운동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서두에서 말한 ‘3•1운동 100주년 기념준비 학술심포지움’에서 기조강연을 맡은 이만열 전 국사편찬위원장은 3․1운동이 5•4운동에 미친 영향을 자세하게 소개하면서 신문화운동 지도자들이 3•1운동을 소개하는데 앞장섰음을 밝혔다. 이만열 전 위원장은 “당시 북경대학 교수로서 신문화운동의 지도자였던 「천두슈는 조선독립운동지감상」에서 3•1운동을 격찬하면서 중국민족의 궐기를 호소하였다.”라고 하였다. 3•1운동의 기독교적 요소가 5•4운동에 미친 영향은 없는지 찾아볼 필요도 있다. 3•1운동이 교회에 미친 영향과 5•4운동이 기독교에 준 영향을 비교해 보는 것도 요청된다. 시작 부분에서 이미 말했지만 부족한 이 글이 이와 같은 일들의 동기부여가 된다면 더 바랄 것이 없을 것이다.


〔이 글에서 신문화운동과 기독교에 대한 언급은, 필자가 1984년에 책임교열을 맡아 편역하여 출간한 《중공의 기독교정책》의 “3.오사신문화운동시기(1912-1922)”(33-43쪽)를 많이 참고했음을 밝혀둡니다. 그 글은 작고한 조나단 차오 박사의 중국교회연구중심에서 발행한 <중국과 교회> 1979년 3/4월호에 실려 있는 것을 번역한 것입니다.〕






 

현덕손|제주극동방송 초대본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