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한국 극장가를 휩쓸고 있는 영화가 있다. ‘분노의 질주: 더 익스트림(이하 분노의 질주)’과 ‘특별시민’.
‘분노의 질주’는 쿠바 하바나의 해변가를 시원하게 달리는 자동차의 모습으로 시작된다. 주인공 도미닉 토레토(빈 디젤 분)가 레이스 경기를 벌인다. 빚을 져서 자동차를 뺏길 위기에 빠진 사촌동생의 체면을 세워주기 위해 하바나에서 가장 빠르기로 소문난 차와 벌이는 레이스다. 개조한 도미닉의 자동차가 불길에 휩싸인다. 하지만 주인공은 회전한 자동차를 후진한 상태에서 그대로 질주한다. 영화 도입부의 아찔한 레이스는 관객들의 시선을 사로잡기에 충분하다. 전편 ‘분노의 질주: 더 세븐’에서 막강 악역으로 그려진 데카르 쇼(제이슨 스타뎀 분)의 교도소 탈출, 뉴욕 추격 신, 러시아 빙판 위 질주 등 관객들이 한시도 눈을 뗄 수 없는 전개가 급박하게 진행된다. 이 영화는 사상 최악의 테러에 가담하게 된 주인공과 그의 배신으로 팀 해체 위기에 놓인 멤버들의 피할 수 없는 대결을 그린 액션 블록버스터다. 지난 4월 12일 개봉한 이래 4월 29일 현재 누적관객 305만8087명. 이 기록은 시리즈 최고의 흥행작 ‘분노의 질주: 더 세븐’보다 4일 먼저 300만 관객을 돌파한 것. ‘특별시민’은 4월 26일 개봉한 이래 연속 박스오피스 1위를 기록하고 있다. 4월 29일 현재 누적관객 68만1154명. 이 영화는 차기 대권을 노리고 3선 서울시장에 도전하는 현 서울시장 변종구(최민식 분)의 선거전 이야기다. 변종구는 오직 서울만 사랑하는, 발로 뛰는 서울시장으로 보이지만 실제로는 어느 정치인보다 온갖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최고 권력을 지향하며 이미지 관리에 철저한 정치 9단이다. “사람들이 믿게 만드는 것, 그게 바로 선거야”라며 ‘허상 속 정치’가 무엇인지 항변한다. 하지만 그에게 위기가 닥친다. 차기 대권을 노리는 같은 당대표는 그를 견제하는 한편 ‘기호 2번’인 상대당 후보인 여성 정치인 양진주(라미란 분)는 무서운 속도로 그를 추격한다. 정치부 기자 정제이(문소리 분)는 변종구의 치부를 밝혀낼 기회를 호시탐탐 노린다. 그의 선거대책본부장인 심혁수(곽도원 분)는 복잡한 의중을 보일락 말락 한다. 일촉즉발의 상황에서 그의 캠프에 우연히 합류하게 된 홍보팀 ‘젊은 피’ 박경(심은경 분)은 뚜렷한 소신과 번뜩이는 감각으로 변종구의 마음을 얻는다. 시간이 흐를수록 “똥물에서 진주 꺼내는 게 선거”라는 심혁수의 말은 ‘특별시민’의 종말을 예고한다. 교통사고를 숨기기 위해 자신의 딸까지도 범죄자로 만들어가는 변종구에게서 관객들은 아픈 정치의 단면을 보게 된다. 후보의 가족사, 치명적인 약점을 덮기 위한 야합과 비정함, 정치인들의 이합집산과 눈치 전쟁, 권력형 부정부패 등 잿빛으로 변해버린 인물과 상황이 끝없이 그려진다. ‘분노의 질주’와 ‘특별시민’을 보고 있노라면 일견 고개를 끄덕일만한 장면들이 수없이 등장하지만 보고 난 뒤 남는 거라곤 허무 그 자체다. 전달력 높은 연기력에 생동감이 넘치는 이야기로 넘실거리지만 어둠이 느껴진다. 어느 순간 화가 치밀어 오르기까지 한다. 희망보다는 좌절이 곧 드러난다. 물론 부패한 변종구에게 ‘X파일(변종구의 교통사고 전후 내용 녹음파일)’을 들려주고 평범한 유권자로 돌아가는 박경의 모습에서 결국 유권자가 승리할 것이라는 열린 메시지를 감독이 그리려고 했겠지만 관객의 입장에서 통쾌함보다는 한없는 씁쓸함이 몰려온다. ‘분노의 질주’, ‘특별시민’이 인기몰이를 하는 4월 한국 극장가에서 청량제와 같은 영화가 있어 그나마 큰 위안이 된다. 4월 29일 현재 누적관객 3만2571명. 한국기독교 다큐영화 ‘서서평, 천천히 평온하게(이하 서서평)’가 그 주인공이다. 개봉한 지 4일 만에 3만 명을 돌파한 것은 한국기독교 다큐영화의 일대 사건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동안 기독교 다큐영화 중 최고 관객 수를 차지한 것은 2010년 1월 14일 개봉한 ‘회복’으로 15만5281명. 이는 역대 국내 다양성영화 33위 성적이다. 2009년 4월 2일 개봉한 ‘소명(아마존에서 사역 중인 강명관 선교사부부와 바나와 부족의 이야기)’의 최종 관객 9만7529명(국내 다양성영화 51위)을 넘어선 것. 회복은 200년 동안의 핍박과 고난, 분노와 갈등의 역사가 점철돼 있는 이스라엘 땅에서 예수님을 믿기 위해 대가를 치르고 있는 ‘메시아닉 쥬(Messianic Jews)’의 신앙과 눈물 어린 기도가 담겨 있는 다큐영화다. 이후 그 어떤 기독교 다큐영화도 10만 명이라는 벽을 넘어서지 못했다. 우간다 김은혜 선교사와 레바논 김영화 선교사의 이야기인 ‘순종(2016년 11월 17일 개봉, 국내 다양성영화 68위)’은 5만8634명. ‘제자 옥한흠(2014년 10월 30일 개봉, 국내 다양성영화 80위)’은 5만392명, 손양원 목사의 이야기를 그린 ‘그 사람 그 사랑 그 세상(2014년 11월 20일 개봉, 국내 다양성영화 91위)’은 4만2245명이 극장을 찾았다. 한편 최근에 10만 명에 가장 근접했던 주기철 목사를 그린 ‘일사각오(2016년 3월 17일 개봉)’는 최종 관객 9만4825명을 기록했지만 장르가 다큐영화가 아니라 드라마였다. 반면 가톨릭 다큐영화인 고(故) 이태석 신부의 이야기 ‘울지마, 톤즈(2010년 9월 9일 개봉)’는 최종 관객 44만4327명으로 국내 다양성영화 14위를 기록했다. 과연 ‘서서평’의 관객몰이가 어디까지 갈 것인지 벌써부터 궁금해진다. 왜냐하면 ‘서서평’을 본 관객들의 호평이 연일 이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서서평’은 독일인 출신 미국선교사인 엘리자베스 쉐핑(Elisabeth J Shepping, 한국명 서서평, 1880∼1934년) 선교사의 삶을 다룬 다큐영화다. 특히 눈길을 끄는 장면은 서서평 선교사가 머물던 방의 한 구석에 붙여있던 걸로 묘사해 놓은 그의 좌우명인 ‘성공이 아니라 섬김이다(Not Success But Service).’ 원래는 그녀의 유품을 정리하던 친구가 그녀의 노트에서 발견했던 것이다.
서서평 선교사는 1912년 미국 남장로교 파송 간호사로 조선에 왔다. 한국에 온 지 3년 만에 당시 가장 무서운 풍토병이었던 ‘수푸르’에 걸렸다. 병마와 싸우면서 그녀는 광주 제중원, 군산의 구암 예수병원, 서울 세브란스병원에서 간호부장으로 일했다. 간호사를 양성하는데 헌신하는 한편 조선 최초의 간호교과서를 썼다. ‘조선간호부회(대한간호협회 전신)’를 만들어 국제간호협의회(ICN: The International Council of Nurses)’에 가입하도록 애썼다. 일제강점기였기에 조선간호부회는 ICN에 독자적으로 가입할 수 없었다. 대한간호협회는 1949년 ICN 회원국으로 정식 가입했다. 대한간호협회는 ICN 총회를 서울에서 개최하기도 했다. 서서평 선교사는 전국 최초의 부인조력회(여전도회 전신)를 조직하고 여성 최초의 신학교인 이일학교(한일장신대 전신)을 건립하는 등 여성계몽과 교육사역에도 힘썼다. 무엇보다 서서평 선교사가 지금까지도 기억될 수 있는 것은 고아와 버려진 이들의 이웃이었다는 점이다. 가진 것을 가난한 이들에게 모두 내어주고 정작 자신은 영양실조로 삶을 마감했다. 그녀는 광주 양림천의 거지들을 데려다가 목욕을 시키고 먹여 주었다. 길에서 여자 한센병환자를 만나면 집으로 데려와 목욕을 시키고, 새 옷을 입히고, 먹을 것을 주었다. 한센병환자들의 자녀를 입양해 키우기도 했다. 13명의 고아를 입양했다. 당시 서양선교사들 중에는 식모와 유모를 고용하고 애완견 사육비까지 받아 사역하던 이들이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서서평 선교사는 ‘조선인처럼’이 아닌 ‘조선인으로만’ 살았다. 선교비를 받으면 절반은 교회에 헌금하고, 나머지는 과부 38명과 양자 14명의 생활비로 썼다. 자신의 생활을 위해선 다른 선교사의 30분의 1 정도만 할애했다. 죽는 날까지 자신 때문에 다른 사람에 대한 치료를 늦추면 안 된다고 의사선교사에게 신신당부를 할 정도로 자신보다는 남이 우선이었다. 그녀는 임종 때 찬송가를 들으며 입가의 미소를 머금고 이렇게 말했다. “나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먼저 가니 천국에서 만납시다. 내가 호흡을 거두자마자 내 시체를 해부해서 연구 자료로 삼으십시오.” 그녀의 장례식은 광주 최초의 사회장으로 치러졌다. 불교신자들은 물론 일본인 등도 장례식에 참석했다. 일제강점기였다는 것을 감안할 때 일제가 사회장으로 허락한 것은 엄청난 메시지를 준다. 장례식에서 양림천 거지들과 수많은 한센병환자들이 ‘어머니, 어머니’라고 부르짖으며 목 놓아 통곡했다고 한다. 1934년 6월 28일자 동아일보에 서서평 선교사에 대한 기사가 세 개 크게 실렸다. 그때 실린 기사 중 두 개를 소개한다. “‘조선교육사업에 일생 바친 빈민의 대모 서서평 양 장서’, ‘광주 양림동에 있는 이일학교의 설립자이며 교장인 서서평 양은 지금으로부터 25년 전에 조선에 들어온 이후 선교사업은 물론 많은 사람을 구제하는 사회사업과 교육사업에 노력해오던 중 1922년에 이일학교를 창립하여 오금 13년 동안에 성경과 36명 과학과 37명의 졸업생을 내었으며 방금 66명의 재학생이 있었다고 한다. 이 학교는 이혼당한 여자, 남편이 죽고 없는 여자 학령이 초과한 여자 등을 요양하고 있었는데 서서평 양은 학교 창설 이래 자기 생활비일체까지 학교유지비에 바쳤으므로 사생활은 극도로 곤란하였다 하며 무너진 주택을 수선할 여유조차 없었다고 한다. 그러던 중 지난 26일 오전 4시 이 세상을 떠났다는 바 그의 장인은 전 광주 기독교단체 연합장으로 성대히 거행하리라고 한다.’” “‘보리밥 된장국과 고무신 끌고 생활, 자기 몸과 재산을 돌보지 않고 전심력을 교육자선에’, ‘별항 보도한 바의 서서평양은 그가 31세 된 25년에 미국으로부터 조선에 건너오던 즉시 경성 세브란스 간호원장으로 시무하다가 기미운동에 관련했다는 까닭으로 경성에 있지 못하고 전남 광주로 내려왔다고 한다. 그런데 자신은 평생을 독신으로 살아오면서 불쌍한 조선인 고아는 자신의 눈에 뜨이는 대로 데려다가 양육하며 교육하며 출가시켜준 수가 수십 명이라고 한다. 1922년 이일학교를 설립하였으나 특별한 재원이 없었던 까닭으로 자신의 생활비로 전부를 충당하는 동시에 자기 자신은 조선 농촌여성과 같이 무명베의 옷을 입으며 고무신을 신었으며 보리밥에 된장을 먹고 살아나왔다는 바 앞으로는 이 이일학교의 존속여하가 의문이라고 한다.’” 동아일보에 같이 실린 다른 하나의 기사는 그녀가 하나님의 품에 안기기 며칠 전에 그녀의 양녀에게 털어놓은 이야기로 어머니로부터 세 번이나 버림을 받은 내용이었다. 약 20년 만에 안식년을 맞이해 미국에 있는 어머니를 찾아갔지만 서서평 선교사의 초라한 몰골을 본 어머니는 이웃 보기에 창피하다고 문전 박대를 했다는 것이다. “지금 조선에서는 기독교만이 유일한 희망으로 보인다.” 1884년에 내한한 미국인 의료선교사 호러스 N 알렌(1858∼1932년)이 1908년에 고백한 말이다. 내한 선교사들은 의료, 복지, 교육(일반학교, 성경학교), 성경번역, 연합사역 등을 통해 한반도 곳곳에 교회와 기독교기관들이 굳건히 설 수 있도록 디딤돌이 돼주었다. 특히 이들은 선교지 분할정책을 통해 선교의 효율성을 높이는데도 앞장섰다. 이 정책은 아펜젤러 선교사의 제안에 의해 1888년에 미국 북감리회와 미 북장로교 사이에서 거론되기 시작된 것. 이후 1892년 1월 미국 북장로교와 남장로교 사이에 선교지 분할 협정이 체결되고 그해 6월 장로교와 감리교 대표들 사이에서 선교지 분할협정 초안이 작성됐다. 최종 선교지 분할협정은 1909년 9월 장로교(미 북장로교, 남장로교, 호주장로교, 캐나다장로교)와 감리교(미 북감리회, 남감리회) 사이 조인식을 통해 인준됐다. 협정 초안은 다음과 같았다. “인구 5000명 이상 도시와 읍들은 공동으로 선교한다. 5000명 미만의 읍은 이미 선교를 시작한 선교회가 감당하고 공백 기간이 6개월 이상이면 타선교회가 대신할 수 있다. 선교가 시작되지 않은 지역을 우선 고려하도록 강력히 권고한다. 각 교회 교인들이 다른 교단으로 옮길 고유 권한을 인정하지만 교회 담당자(담임목사)의 이명서가 없이는 받아들이지 않는다. 여러 교회의 권징에 대해 상호 존중한다. 섬기고 있는 당사자의 이명서가 없을 경우 다른 선교회는 모든 사역분야의 조사, 학생, 교사, 조력자들을 영입해서는 안 된다. 일반 서적들은 무료로 주지 않고 팔아야 하며 가격이 균일해야 한다.” 이에 따라 미 북장로교는 평안남·북도와 경상북도, 황해도와 충청북도 일부, 미 남장로교는 전라남·북도, 충청남도 일부와 제주도, 호주장로교는 경상남도, 캐나다장로교는 함경남·북도, 미 북감리회는 충청남·북도, 평안도와 황해도, 경기도, 충북, 강원도 일부, 미 남감리회는 원산, 송도(개성), 춘천 등 함경남도, 경기도, 강원도 일부 등에서 활동하게 됐다. 서울, 평양, 원산만 2개 이상 선교회가 공동으로 담당했다. 침례교, 성결교, 구세군, 성공회 등은 이 협정에 참여하지 않았다. 지금 봐도 파격적인 선교협정이라 할 수 있다. 당시 선교사들이 불필요한 경쟁이나 중복투자를 배제하고 얼마나 영혼 구령에 집중하고 싶었는지를 잘 알 수 있다. 해방 뒤 교회분열의 원인이 됐다는 일부의 평가가 나오지만 당시엔 최적의 선교방식이었다. 한편 알렌, 호러스 G. 언더우드(1859∼1916년), 헨리 G. 아펜젤러(1858∼1902년) 선교사 이래 1984년까지 내한한 선교사는 2956명(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의 ‘내한 선교사 총람’ 자료). 그중 1945년 해방 이전까지 내한한 선교사 수는 1529명, 출신지는 미국(1059명, 69.3%), 영국(199명, 13.0%), 캐나다(98명, 6.4%), 호주(85명, 5.6%) 순이었다. 국적 불명인 선교사는 88명, 5.7%에 달했다. 더 놀라운 사실은 1529명 가운데 여성선교사는 1114명으로 72%를 넘는다는 것이다. 특히 조선시대에서는 유교의 영향으로 여성들의 지위가 낮았다. ‘남녀칠세부동석’이라는 사상으로 남녀가 함께 있는 것마저도 금하였다. 이러한 사회 상황에서 남성선교사들이 여성들을 전도하는 것이 매우 어려웠다. 조선의 여성들에게 복음을 전한 사람들은 다름 아닌 여성선교사들이었다. 여성선교사들은 복음을 전하는 것은 물론 계몽운동도 함께 펼쳤다. 조선에 수많은 여성선교사들이 올 수 있었던 이유는 어디에 있을까? 필자는 1865년 중국내지선교회(CIM: China Inland Mission)를 설립한 허드슨 테일러 선교사가 독신 여성들에게도 동등한 선교의 기회와 자격을 부여해야 한다면서 수많은 여성들을 중국선교사로 받아들였기 때문이라고 확신한다. 이로 인해 세계교회가 남성선교사들을 선호했음에도 불구하고 지역의 필요에 따라 여성선교사들을 파송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수 세기 동안 유럽과 미국의 수많은 젊은이들이 예수님의 심장을 품고 ‘사도행전적’ 개척자가 되기 위해 세계 곳곳으로 나갔다. 그중에는 호러스 언더우드 선교사처럼 선교지 사람들로부터 아직까지 추앙 받는 이들도 있다. 하지만 ‘백인들의 무덤’으로 불리는 아프리카에서 활동한 선교사들처럼 현재에는 흔적조차 찾아볼 수 없는 무명의 선교사들이 더 많다. 유명이든 무명이든 이들의 한결같은 고백은 “나의 열정은 한 가지니 오직 주님뿐”이라는 것이었다. ‘근대 선교의 아버지’로 불리는 윌리엄 케리는 1792년 31세의 나이에 미지의 땅 인도로 떠났다. 얼마나 주님과 세상 앞에 겸손했는지 그의 묘비에 새겨져 있는 문구가 잘 말해주고 있다. “가엾고 비천하고 벌레 같은 내가 주님의 친절한 팔에 안기다.” 영국 최우수 크리켓 선수로 명문가 자제인 C. T. 스터드는 약 10년 동안 중국에서 사역하고 1908년 ‘식인종은 선교사를 원한다’는 벽보를 보고 2년 뒤 홀연히 아프리카로 떠났다. ‘중국선교의 아버지’인 허드슨 테일러는 아무도 가려고 하지 않던 중국 내륙으로 들어갔다. “하나님께서 저를 어려움이 가장 많은 곳으로 보내주시고 가장 축복하기 어려운 사람들 사이에서 일하게 해주소서.” 1927년 한 해 동안 외국선교사의 50%가 중국을 떠난 뒤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 이 같은 위험 속에서 여성선교사들이 수없이 파송을 자원했다. 한국인선교사들은 어떤가? 위험을 감사로 받아들이고 있다. 예수님 때문에 생명보다 고난을 선택한다. 중국에 사스(SARS·중증급성호흡기증후군)가 창궐할 때도 대부분의 선교사는 선교지를 지켰다. 많은 선교사들이 안식년을 맞이하면 오히려 버거운 삶을 산다. 거주할 곳이 마땅치 않아 친척집을 오가는 ‘철새선교사 가족’도 많다. 하지만 그들은 절망하지 않고 또 다른 내일을 위해 새로운 동역자들을 찾아 나선다. 모든 것을 누릴 수 있지만 포기할 줄 아는 삶, 큰 자이지만 스스로 작은 자가 되는 용기, 예수님처럼 진정한 ‘종(머슴)’이 되는 헌신과 열정 등. 기독교는 역설의 종교다. 기독인은 불편함을 즐거워하는 사람이다. 무늬만 기독인인 가식에서 벗어나자. “우리의 삶을 취하시어 감춰진 당신(삼위일체 하나님)을 드러내게 하소서”라고 고백하자. 그럴 때 가시면류관을 쓰신 주님으로부터 “나는 너를 위해 모든 것을 다했건만 너는 나를 위해 무엇을 했느냐”하는 책망은 듣지 않을 수 있다. “작은 일은 작은 일입니다. 그러나 작은 일에 충성을 다하는 것은 위대한 일입니다(a little thing is a little thing. But faithfulness in a little thing is a great thing).” 허드슨 테일러 선교사의 말이다. 한 여인의 슬픔과 한 그리스도인의 뜨거움, 한 선교사의 치열함의 이야기로 가득한 다큐영화 ‘서서평’은 예수의 정신으로 가득 찬 작은 밀알이 얼마나 많은 영혼들을 치유할 수 있는지, 과거 역사 속으로 감추어졌던 게 오늘의 역사로 소환돼 밝히 드러난다는 것이 무엇인지, 종교개혁 500주년을 맞는 한국교회, 특히 목회자와 장로, 권사 등 교회 리더십이 어떤 것을 구현하는 데 집중해야 하는지를 잘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아버지가 누구인지 모른 채 할머니의 손에 키워져야 했고 천신만고 끝에 만난 어머니에게 가톨릭에서 개신교로 개종했다는 이유로 버림을 받아야 했던 서서평 선교사가 오히려 가족과 세상한테 버림받은 이들을 위해 자신의 건강을 해치면서까지 사랑으로 다가갈 수 있었던 이유는 어디에 있었을까. 그런 점에서 ‘서서평’은 오늘날 부와 높은 자리를 추구하는 세속화가 된 신앙 속에 있는 모든 교회와 교인들에게 큰 도전의 메시지를 던진다. 즉 분노의 질주 속에 있는 세상에서 하나님의 특별시민으로 살아가는 우리 그리스도인은 예수님의 뜻을 온몸과 마음으로 보여준 서서평의 정신을 구현하기 위해 날마다 깨어짐과 낮아짐의 삶을 살아가야 한다. 마지막으로 ‘서서평’을 본 뒤 남긴 관객들의 반응을 소개한다. “우리가 달려가고 있는 삶의 방향을 되돌아볼 수 있는 영화다”, “예수님의 삶을 직접 본 것 같은 감동이다”, “아무리 가져도 행복한 이가 적은 지금, 진정한 가치를 깨우는 영화다”, “나의 고통과 슬픔까지도 하나님이 사용하심을 알 수 있는 영화다”,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울림으로 심장이 뛴다”, “좋다고 평가하는 것도 부족함을 느낀다”, “방향을 잃은 이 시대에 경종을 울리는 영화다” ‘서서평’의 제작사인 CGNTV가 영어, 중국어, 일어, 독일어 등의 자막 내지 더빙으로 곧 전 세계교회와 나눈다고 하니 국적과 언어, 세대를 뛰어넘어 하나의 마음을 갖게 될 것 같다. “성공이 아니라 섬김이다. 우리는, 아니 나는 ‘행복한 종’으로 살고 싶다. 우리의 리더는 예수 그리스도로 충분하다. 나는 주님을 따르는 진정한 ‘팔로워’이기를 바란다. ‘리더십’이 아니라 ‘팔로우십’이다.”
왕빈 | 중국전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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