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3.2  통권 175호     필자 : 편집부
[기획]
중국선교와 선교중국(China Mission kai Mission China)

서론/ 함께 시작해 봅시다!
 

만약 우리가 교차로에서 ‘중국선교와 선교중국’이라는 표지판을 보고 있다면 어떻게 읽을까? 어느 방향으로 나아갈까? 다양한 포럼이나 선교대회에서 외치는 구호처럼 ‘중국선교에서 선교중국으로’ 가게 될까? 아니면 교차로에서 우왕좌왕하면서 뒤엉키어 정체된 상태로 있어야 할까? 표지판을 잘못 읽어 도착한 곳에서 허탈감에 빠지지 않을까 하는 우려도 있다. 게다가 이 문제를 단순한 선교전략으로 분류하여 사람들의 경험 안으로 끌고 들어와서는 그 안에서 길 찾기를 시도한다. 이 또한 길이 우리에게 있다는 착각에 빠져서 진짜 길을 잃을 수도 있기에 고민의 고민을 거듭하게 하게 된다.  
 

봄이 오는 계절을 수치로 예측하여 정해진 ‘春节-설날’이라는 축제기간이 있다. 하지만 그 정해진 기간, 설날에 봄의 기운을 전혀 느끼지 못할 때가 종종 있다. 이렇게 예측된 날인데도 그 느낌이 전혀 와 닿지 않을 때는 당황하기도 하지만 그 당황함을 일거에 해소해 주는 소식이 바로 우리나라에서는 ‘봄의 전령-개나리꽃’이다. 봄의 전령이 된 꽃을 보고도 아직 겨울의 체감온도를 느끼지만, 마음은 봄기운을 느끼며 이 계절이 가져오는 축복을 더욱 믿게 되고, 봄의 계절을 확증하며 미래를 파종하길 시작한다. 필자가 ‘중국선교와 선교중국’이란 주제를 다루고자 함에 있어서도 봄의 전령, 개나리처럼 주제를 확증하는데 도움이 되는 무엇이 없을까 고민하다가 사도행전 1:8의 접속사 ‘kai’, 중국어의 표기법 ‘、’을 떠올린 것이다. 이러한 방법의 시도가 다소 생소하다 할지라도 한두 사람이 자꾸 걷다보면 때로는 관점이 길이 되기도 하는 점에 착안한 것이다.
 

지금은 중국선교가 저물고, 선교중국 시대라고 외치는 소리를 듣기도 한다. ‘선교중국’ 구호가 태동하면서 ‘중국선교’ 구호는 마치 마지막 바퀴임을 알리는 종소리처럼 들리기도 한다. 필자의 바람은 중국교회가 그리스도의 몸으로 이 주제의 두 부분을 한 몸 안에서 유기적으로 융합시켜 지혜를 얻기를 원한다. 마치 십자가의 죽으심과 부활의 사건이 하나로 융합되어 증언의 큰 능력으로 나타난 것처럼, ‘중국선교, 선교중국’도 복음 안에서 융합되어 미래의 사역에 길잡이가 되었으면 좋겠다.
 

I. 왜 우리는 이 주제를 이렇게 다루어야하나

‘중국선교’가 무르익어 가면서 동시에 ‘선교중국’이 논쟁이 되면서 약간의 혼란이 생겼다. 이 둘의 전후 사이의 간격에 생략된/없어진 무엇이 있다는 데 웅성거림이 있었다. 없어진(missing) 부분을 찾아내어 그것이 미치는 부작용을 방지하고 선교중국의 안정된 진행을 위한 토론의 필요성이 있었다. 
 

중국선교는 많은 위기 속에서 전환점(转换点)을 통과하면서 궤적을 만들어 냈다. 선명한 궤적을 드러내며 변곡점(变曲点)과 같은 역할을 한 사건들이 있다. 국내외 선교전문가들의 다양한 분류와 해설이 있지만, 주제에 대한 문제제기와 그 근거의 뿌리를 찾기 위해 변곡점을 살펴본 뒤, 이에 대해 답하고자 한다. 사실, 중국교회는 앞으로 살펴볼 사건의 변곡점에 대한 트라우마가 있다. 사건의 시간차가 있지만 변곡점에서 얻은 내용의 의미들을 주제와 서로 충돌시켜, 반면교사가 될 수 있는 부분을 찾아내어 대안을 제시해보려는 것이 필자의 의도이다.
 

중국선교 선교중국: ‘위험과 기회’의 중간지대, ‘시력과 시각’의 중간지대


첫째, 왜 이러한 관점과 방법으로 문제 제기를 하나

오늘 중국선교가 처한 위험을 알고 동시에 기회를 바라볼 때, 분류된 사건이 선교의 ‘시력과 시각’을 동시에 확보할 수 있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이다. 위험과 기회, 그 경계의 중간지점에 서서 사건을 바라본다고 할 때 ‘중간지점’이란 것을 찾아내어 설명체계를 만들어 의미를 정의하고 확증하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주제의 변곡점에서 우리가 설정한 중간지대와 동시성에 맞추어 주제를 읽게 된다면 주제는 활력이 넘칠 것이다. 또한 중국교회가 안고 있는 고민을 동감할 좋은 기회가 되기 때문이다.
 

둘째, 왜 꼭 중간지대와 동시성을 고집하며 문제 제기를 해야 하나
‘십자가의 죽으심과 부활’의 경계에는 3일이라는 중간지대가 있다. 그 3일의 의미를 어떻게 설명하느냐에 따라서 부활의 의미도 달라진다. 제자들에게 십자가는 며칠 전의 과거였고, 부활은 오늘의 실제였다. 연동되어 일어난 부활은 제자들에게 혼란스러움을 안겨 주었지만, 새로운 도약의 발판이 되었다. 발생한 두 사건은 의미가 분리되어 있는 것 같았다. 하지만 3일이란 중간지대의 의미를 성경의 예언을 따라 성취된 사건이란 올바른 의미와 적용이 부여되면서 두 사건은 분리된 사건이 아니라 동시에 발생한 사건이 되었다. 바로 성령의 능력이다. 결과는 생명이었다. 생명이라면 중간지대가 없어야 하며, 한 몸이라면 기능이 동시적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II. 도대체 ‘중국선교: 선교중국’ 목표와 내용은 무엇인가

주제가 무엇이냐 하는 문제는 뿌리를 찾아가는 과정이다. 첫째, ‘중국선교’ 주제에서는 토착화-중국교회가 겪은 고난의 전환점에서 생성된 중국교회의 독특한 신앙심이 그 뿌리 역할을 할 것이다. 둘째, ‘선교중국’ 주제에서는 세계화-선교동원과 교육과 훈련, 그리고 파송과 관리 문제가 뿌리 역할을 할 것이다.
 

중국선교, 선교중국: 뿌리를 찾기 위한 과정 
 

첫째, 바닥을 쳐본 초토화 경험: 빈 수레일까
중국교회는 나름대로 누적되어 온 목회의 경험과 한계성에 부딪친 경험이 있다. 초기 선교사들한테서 공급받던 영적 자양분이 말라가면서 당면하는 목회의 문제를 쉽게 해결해 줄 새로운 공급원을 찾게 된 것이다. 지도자들은 한계를 뛰어넘어 보려고 골방을 찾지 않고, 부족한 것을 채우기 위해 기대를 잔뜩 안고 각종 세미나와 해외집회를 찾아 이리저리 학습순례의 길을 헤매고 있다. 자신의 한계와 목회환경의 한계, 그 중간지대에 여러 우여곡절이 존재한다.
 

둘째, 끝나지 않는 신학 갈등: 발목 잡힐까
오랫동안 잠재되었다가 격발된 신학논쟁들이 일치점을 찾지 못한 채 아직도 여진으로 남아 영향력을 미치고 있다. 신학논쟁의 화약고는 선교사들의 유입과 동시에 이미 예고된 것이었다. 열악한 환경 속에서 중국선교에 대한 열정을 품은 선교사 중심의 제자훈련, 교회개척, 신학교사역이 결실을 보면서 신학 갈등은 더욱 고조되었다. 목회자 안수와 교파 확장에 눈을 돌리면서 신학 속에서 격발이 가능한 부분이 부각되기 시작했다. 기다렸다는 듯이 그 기회를 틈타 새로운 조직을 꿈꾸던 교회들이 신학논쟁의 방아쇠를 당기기 시작했다. 당시에는 격렬했지만 지금은 그 총성이 멎었다. 하지만 아직도 현장에서는 간간히 들릴 때가 있다.
 

셋째, 애잔한 음성으로 분쟁 잠재운 BTJ: 메아리로만 남는가
가정교회 안에서 신학논쟁의 총성을 멎게 한 것은 바로 백투더예루살렘선교운동(이하, BTJ)이었다. 그때 아무도 논쟁을 잠재우지 못했다. 만약 그때 해외선교운동으로 물꼬를 트지 못했다면 중국교회는 큰 내상을 입었을 것이다. 교회의 분쟁으로 답보상태에 빠진 중국교회한테 사명을 각인시킨 것이 바로 BTJ운동이다. BTJ운동의 동기와 방법에 문제를 제기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이 운동은 휴화산이 아니라 아직도 활화산이다. 공산화가 되면서 비전이 오랜 기간 잠들어 있다가 오늘에 재생된 것, 오늘날에는 내부 갈등으로 정체하고 있다. 가냘픈 목소리로 애잔하게 들렸던 선교동원의 진한감동, 얼마 뒤에 군중들의 함성으로 변했던 선교운동이 지금은 들리지 않는다.


넷째, ‘선교중국’과 ‘2030 선교운동’: 벌써 끝이 보이는가

그 운동의 확산으로 선교사들에 의해 촉진되고 재점화가 된 ‘선교중국(Mission China)’운동이 있다. 또 중국 가정교회 현지 지도자 중심으로 일어난 자체 선교운동이 있다. 바로 선교중국 2030이다. 이 선교운동이 우리의 조명을 받는 것은 운동의 동기 때문이다. 이 운동은 BTJ와 달리 중국 가정교회의 선교 각성에서 시작되었다는 점이다. 중국교회가 내적/외적으로 부흥했지만 그 부흥이 의미하는 실제를 찾기 위해 깊이 고민하는 가운데 시작되었다. 경제 발전과 교회의 큰 부흥으로 세계 최대의 성도를 가진 국가가 되었지만, 진정 중국교회는 무엇을 가지고 있는지에 대한 질문이 있었다. 그 질문에 올바른 답이 무엇인가를 고민하게 된 것이다. 
 

과연 중국교회가 가지고 있는 것이 무엇일까? 부흥의 뒤안길에는 교회 분열이 가속화하고 있었다. 이때 새로운 각성이 일어나면서 교회와 연합을 도모하고 선교를 주도적으로 실행할 수 있는 중국교회가 될 수 있다는 용기가 생겼다. 열정의 중국도시교회 지도자들이 교회의 사명을 선교에서 찾았고, 가정교회가 선교하는 교회로 일깨우는 일련의 선교각성운동이 시작된 것이다. 아직 초기단계이지만 이미 해외교회와 가정교회 안에 영향력이 입증된 상태이다. 하지만 선교중국 2030은 아직 평가의 시험대에 올라 있다.
 

다섯째, 심각한 치명적 생략: 그냥 지나칠 것인가
여러 세대를 통해 일어났던 선교운동이 긍정의 영향을 미친 것도 사실이다. 반대로 스스로 정한 목표에 의해 재촉을 당하면서 지쳐서 무리한 전략을 구사하다가 초심을 잃어버리고 운동의 메아리만 남는 경우가 종종 있다. 뜨거워지는 ‘선교중국’ 구호 속에 ‘중국선교’가 약화되면서 나타나는 부작용도 있다. 화살 시위에 휘어지는 활근과 화살촉은 있으나 궁의 양쪽 끝을 묶어 탄력을 지탱시키는 실이 보이지 않는다. 지도자들이 현지교회의 토착화 과정을 건너뛰려는 선교의 ‘치명적 생략’에 노출되어 있다. 그 잃어버림이 무엇인지 찾지 못하면 중간지대는 그냥 변곡점의 표지로만 남게 된다. 동시성은 융합의 내용을 찾지 못하여 결국 주제의미의 탄력성을 잃게 된다.

중국선교 선교중국: 내용의 ‘중간지대와 동시성’을 위한 질문
 

첫째, 의화단과 문화대혁명 전후의 선교사 역할에 대한 질문
‘중국선교’ 애환을 거슬러 올라가 보면 교황과 중국황제가 맞닿아 있다. 마태오리치의 선교적 적응으로써 토착화가 강력하게 추진되었지만 제례/의례 해석과 적응에 대한 갈등으로 크게 부흥했던 선교지가 초토화가 된 경험이 있다. 그리고 이후 의화단사건은 불평등조약에 의해 항구가 개방되면서 전통 경제 산업구조가 무너지면서 혼란이 가중되었다. 그 혼란의 원인을 외세침략으로 규정하면서 선교사들은 그들의 첨병으로 활동한다는 오해가 분노의 불을 질렀다.
 

기독교 선교사들의 활동이 사회 전반에 혼란을 가중시키는 것으로 비춰졌기에 문제 해결을 위해서 외세를 제거하는 것으로 당시의 문제를 해결한 것이다. 반기독교운동과 삼자애국운동은 그 사건의 해결과정에 나타난 현상과 그 결과이다. 그 해결의 과정에서 수천 명의 성도가 순교했으며, 선교사들도 순교를 당하고 추방을 당했다. 이로 인하여 놀랍게도 중국교회가 성장했다고 평가하는 역사학자들도 많다.
 

많은 선교사들의 무덤이 중국에 있지만 아직도 “중국교회는 의화단과 문화대혁명으로 선교사들이 철수하기 전보다 철수한 뒤에 더 큰 부흥을 이루었다.”라는 평가가 회자되고 있다. 당신은 어떻게 평가하는가? 이 질문이 첫 변곡점의 가장 돌출된 부분이다. 이 부분은 서로 충돌할 가능성이 농후하다. 여기서 ‘중국선교와 선교중국’중 한 부분에만 논쟁을 가열시키면 전체주제는 추락할 위험에 처하게 된다.
 

둘째, 개혁개방 후 발전되어 온 종교법에 대한 선교 질문
개혁개방도 기존 전통의 사회를 지탱하던 공산 경제 구조에 큰 변형을 가져온 사건이었다. 불평등한 개방이 아니라 자발적 개방으로 혁명적 변혁이라기보다 ‘고도의 재개발’ 수순에 맞춰져 있었다. 개혁개방은 우리가 순진하게 생각했던 것처럼, 단순히 먹고살기 위한 것이 아니었다. 잠시 칼날의 빛을 칼집에 감추고 어둠 속에서 힘을 길러 빛을 빛이 되게 하기 위한 전략으로 도광양회(韬光养晦)를 말한 것이었다. 이 시기에 많은 선교사들이 유입되었다. 중국교회는 부흥과 아울러 많은 문제점들이 드러나면서 몸살을 앓기 시작했다. 얼었던 겨울이 해빙되면서 나타나는 현상쯤으로 생각했으나 그 결과에 대하여 각 나라 선교단체들은 아무런 반성 없이 계속 질주하고 있다. 반성의 피드백을 받기도 전에 중국은 G2로 급부상하면서 파송교회들도 중국선교에 대한 열정의 변곡점을 찍었다. 
 

중국의 개혁개방시기에 우리는 단순히 자유의 횃불이란 이름으로 중국을 섣불리 정의했다. 사회주의 철의 장막, 죽의 장막, 어두움의 장막 등으로 치부했다. 하지만 중국은 외부세계가 내리는 정의에 아랑곳하지 않고, 어둠을 이용하여 그 어둠 속에서 무엇인가를 꿈꾸고 있었다. 그것이 바로, 평등, 협동, 자유를 근간으로 하는 새로운 중국 특색의 사회주의로 재정비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전략 가운데 세계 무(无)종교지역, 즉 종교의 청정지역으로 만들려는 의지를 가지고 주동적으로 행하고 있다. 그 동안 어둠 속에서 부단히 실험과 적용으로 피드백을 하면서 여러 번 작업해서 드러낸 빛이 바로 ‘종교법’이다. 이제 시진핑의 ‘主动作为, 즉 목표를 향하여 해야 할 일을 주도적으로 행하기’ 위한 지침으로 새 종교법이 태동되었다고 본다.
 

셋째, 반복되는 ‘억압과 느슨한 자유’에 익숙해진 교회 비전에 대한 질문
세계 곳곳의 분쟁을 촉발시키는 원초적 부분이 바로 종교라는 것을 중국은 익히 알고 있다. 그리고 그 분쟁의 해결을 위해 쏟아 붓는 에너지와 비용이 엄청나다는 것도 알고 있다. 전 세계가 몸살을 알고 있는 핵심 바이러스인 종교를 이제 감기 정도로 취급하면서, 어느 정도 통제할 수 있다고 자신하는 것 같다. 자생 종교보다는 외부에서 유입된 종교에 대해 그들은 아직도 민감하게 반응한다.
 

이제 종교는 밀물과 썰물이 만나는 바다와 육지의 어느 지점에서 발생하는 일상 현상으로 생각하고, 큰 변화가 없기를 바란다. 그 물결이 큰 도시에 범람하기를 원하지 않는다. 교회의 ‘억압과 느슨한 자유’가 반복되면서 교회는 마치 이러한 환경이 밀물과 썰물처럼 조류간만 차이로 일어나는 자연 현상처럼 받아들이고 익숙해졌다. 문제는 이러한 상황에 적응하면서 토착적 적응력은 갖게 되었으나 미래에 도전하는 꿈을 갖지 못하게 되었다. 
 

목이 조여오는 숨 가쁜 환경에서 벗어날 수 있는 요소는 안정된 호흡이지 꿈이 아니다. 따라서 숨막히는 환경 속에서 ‘느슨한 자유’는 산소공급처럼 간절히 희망하는 것의 모든 것이 된다. 여기서 우리가 고민하는 것은 신앙이 이러한 환경에 길들여진다는 것이다. ‘밀물과 썰물’을 처음 보는 사람들은 신기하게 보여도, 반복되면 그 현상을 일상으로 여긴다. 마찬가지로 ‘억압과 느슨한 자유’가 반복되면 정책을 고민하는 것이 아니라 대책을 고민하는 것에 익숙해진다. 그곳에서 잃어버릴 수 있는 것은 자유가 아니라 꿈이다.
 

넷째, 도시교회 연합과 중국교회 주도의 세계선교운동에 대한 질문
도시화로 급변하는 과정에서 농촌중심의 가정교회도 도시중심으로 편승하여 재편되었다. 복음의 전초기지였던 농촌교회는 점점 공동화가 되어가면서 그 대안으로 도시중심의 교회가 나타났다. 문제는 도시중심교회 지도자들이 목회경험이 부족하여 초기에는 많은 혼란을 겪었다. 그사이에 선교사들이 도시에 집중되면서 도시교회는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였다. 도시목회에서 발생하는 서로의 문제를 해결하고자 연합을 시도했지만 선교사들의 영향을 받은 교회들은 이미 신학의 토대를 형성하고 있었기 때문에 진정한 연합이 어려웠다. 연합의 어려움이 가중되면서 도시교회뿐 아니라 농촌교회도 결국 거대한 신학논쟁에 휩싸였다. 이 과정에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미래의 돌출구로 드러난 부분이 바로 BTJ운동이었다. 놀랍게도 이 운동은 중국교회의 세계선교운동의 기폭제가 되었고, 중국교회를 서로 연합하게 하는 촉매 역할을 하는 동시에 많은 논란의 중간에 서기도 했다.
 

III. 그러면 이제 중국선교, 선교중국 어떻게 할 것인가
 

“세계가 다 내게 속하였나니”(출 19:5)
 

어떻게 할 것인가? 중국선교를 먼저 실현한 뒤 그 다음 순서로 선교중국을 진행해야 하는 것 아닌가. 이러한 주장은 선교사들과 중국교회 지도자들한테 자주 듣는 내용이다. 간간히 중국 선교포럼이나 회의에 참가하면서 느끼는 감정은 ‘선교중국’이 마치 대세론처럼 목소리가 커지면, ‘중국선교’는 주눅이 들어 꼬리를 내린 채 묵묵부답으로 반응하는 모습을 많이 본다. 이런 현상을 어떻게 읽어야 할까. 이런 흐름이 성령의 이끄심이라 믿고 적극 동참하는 것과, 분명한 선교/신학의 명분은 없지만 왠지 불편하기에 그냥 ‘중국선교’에 부르심에 충실하자고 마음을 돌려세우는 선교사들도 많다. 그 해답을 사도행전 1:8에서 찾아 설명하는 것이 빠를 듯하다. 예루살렘, 유다, 사마리아, 땅 끝으로 나아가라는 명령이 순차를 설명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물론 예루살렘에서 시작한 복음이 순차적으로 증거되어 땅 끝으로 나아가는 모습이 사도행전에 나타나고 있다. 주님은 그 땅 모든 것이 자신의 것이다. 따라서 순차적이 아니라 동시적 요구로 초대교회는 이해하였기에 열방으로 나아갈 수 있었다.
 

첫째, 순차적으로 할 것인가, 아니면 동시적으로 할 것인가
중국교회 형편에서는 동시적으로 진행하는데 대해 부담감을 갖는 사람들이 많다. 그 부담감의 언저리에는 현지교회의 토착화가 아직 견고하지 못하다는데 있다. 현지교회의 자립이 아직 요원한데 해외로 눈을 돌리는 것을 부담스러워한다. 그래서 조금 용기를 내어 중국 안에 있는 소수민족한테 눈을 돌리는 경우가 많다. 
 

반대로 동시적으로 진행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성경의 원리를 강조한다. 형편이야 늘 그래왔던 것이며, 아예 교회개척부터 교회정체성의 중요한 부분으로 토착화와 동시에 세계선교가 진행되도록 지도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즉 ‘선교적 교회’의 정체성을 처음부터 분명히 하도록 가르쳐야 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틀을 제대로 형성하지 못하면 미래의 중국교회는 세계교회와 연동하지 못하고 그들만의 교회로 전락할 수 있다는 우려를 나타낸다.
 

둘째, 선교운동과 동시에 선교훈련이 가능한가
이미 선교운동은 중국 내부에서 큰 쟁점으로 자리매김을 했다. 아무리 큰 열정을 가졌다고 할지라도 선교교육과 훈련되지 않으면 사역의 현장에서 그만큼 어려워진다. 문제는 선교가 단순히 어떤 이벤트나 운동에 함몰되어 성과에만 관심을 두다가 원래의 목적을 놓치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운동의 영향력이 클수록 실제의 선교교육과 훈련이 병행되어야 한다. 교육과 훈련의 백업이 없는 선교운동은 결국 하나의 운동으로, 이벤트의 기구와 기록만 남긴 채 운동의 향연으로만 끝날 수도 있기 때문에 더욱 심사숙고 해야 한다. 이 부분에 대하여 중국교회는 아직 초기단계에 있기 때문에 경험이 있는 화교권, 서구권 할 것 없이 많은 선교단체들이 적극 도와야 한다. 대내외적으로 퍼져 있는 한족과 화교권의 우수한 인력자원이 풍부하기에 선교운동이 지속해서 유지된다면 세계선교의 큰 영향력을 미칠 수 있을 것이다.
 

셋째, 패쇄된 목회환경에서 과연 동시적 선교적 교회로 탈바꿈이 가능한가
이 질문에 모든 것이 걸려있다. 마치 토착화 삼자정책의 ‘자전(Propagating)’처럼 실제문제를 해결하는 지점이 될 수 있다. 세계선교를 중국도시교회가 주축이 되어 이루어가는 것처럼 보여도, 실제로 토착 농촌교회의 헌신과 선교의 열정을 능가하지 못한다. 농촌과 소도시 중심의 교회가 투박해 보이지만 오랜 목회 역량은 문화혁명과 개혁개방을 거치면서 뿌리를 내려 살아남은 그루터기 교회들이다. 그 핍박에 억눌렸던 목회의 관습을 벗고 선교하는 교회로 급속하게 탈바꿈하기가 쉽지 않다. 

그러나 중국교회는 하나님의 뜻이라 확인되면 순종하는 놀라운 믿음을 가지고 있다. 선교하는 교회로 탈바꿈이 가능한 것이 바로 여기에 있다. 제자들은 어디로 갈지 몰랐지만 예수님이 “땅 끝까지 가서 내 증인이 되라”고 명하셨기에 그들은 선교명령을 따라갔다. 성령님이 역사하시고 인도하시면서 그 길이 선교의 역사가 되었다. 초기 중국교회는 핍박 가운데 선교사들은 순교당하며, 추방당했기에 그들은 선교사들한테 길을 물을 수 없었다. 중국교회는 길을 물을 사람이 나타나길 기다리지 않았고, 직접 하나님께 미래의 갈 길을 여쭈었다. 놀랍게도 성령님은 중국교회를 선교의 길로 인도하셨고, 그들은 지금 세계선교의 길을 걷고 있다.
 

넷째, 지금 중국교회가 가지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
(1) 중국교회는 성도들도 많지만 교육받은 인재들도 많다.
(2) 경제가 부유하다.
(3) 믿음의 열정이 넘친다.
 

이러한 요소들이 선교의 동기와 자원이 될 수 있을까. 단순히 무엇이 옛날보다 더 많아졌다는 것으로 동기를 삼으면, 그 많음이 부족으로 변할 때 동기를 잃게 된다. 제주도에는 여자들이 많다. 돌들도 많다. 그리고 바람이 많다. 이러한 요소가 ‘제주도 세계화’ 비전의 동기가 될 수 있을까. 우리가 중국교회의 미래를 진단할 때 간과해서는 안 될 부분이 있다. 바로 고난가운데 살아남기에만 급급했던 것이 아니라 그 가운데서도 선교를 사명으로 붙잡을 수 있는 믿음을 소유하고 있다는 것이다. 사실 그 믿음이 오늘의 주제를 만들어 냈다.
 

IV. 만약 ‘중국선교와 선교중국’의 꿈을 갖게 된다면
 

“내가 하고 싶어서 했던 일들에서 보다는, 내가 꼭 해야겠다고 했던 일들에서 휠씬 더 많은 것을 배운다.”는 격언이 있다. 우리가 중국을 꼭 사랑해야 하기 때문에 우리는 서로에게 배운다. 우리의 마음에 경계를 만들었던 사마리아가 있다면 그곳도 우리가 꼭 가보아야 할 곳이다. 거리가 멀어서 못 가는 것이 아니라, 마음이 없어서 안가는 것이다. ‘중국선교’만 주장하면서 ‘선교중국’을 강 건너 불 취급하고 있거나 혹은 ‘선교중국’만 주장하면서 ‘중국선교’을 터부시하고 있다면, 양쪽 모두가 우리에게 사마리아 땅이다. 우리가 진정한 선교의 꿈을 꾼다면 사마리아는 더 이상 장벽이 아니다. 유대인들은 마음에서 경계를 지어 사마리아를 아예 차단했지만 예수님의 마음은 그렇지 않았다.

“사마리아로 통행하여야 하겠는지라”(요 4:4) 
 

선교운동의 분위기가 아닌 정말 선교의 꿈을 가졌다면 사마리아는 중국교회가 반드시 통행할 것이다. 변방14개국과 전 세계 열방을 통행하며 복음으로 섬겨야 할 곳이다. 이 방향은 올바른 것이다.
 

중간지점, 동시성: 주제를 위한 올바른 질문, 충분한 대답

‘중국선교’가 선교사들의 질문이었다면, ‘선교중국’은 중국교회의 질문이 되어야 한다. 그리고 오늘의 주제인 ‘중국선교와 선교중국’은 세계교회와 우리 모두의 질문이 되어야 한다.
 

첫째 질문: 한국교회는 무엇을 가지고 있으며, 중국교회는 무엇을 가지고 있는가? 그 가진 것으로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중국선교 토착화의 뿌리는 얼마나 견고할까? 중국선교와 선교중국의 뿌리를 동시에 내릴 수 있는 좋은 생각이 없을까?
 

첫째 답변: 한국사역자들은 ‘빨리 빨리!’, ‘초전박살’, ‘선착순’ 등으로 역동적 선교를 하면서 사역의 많은 결과를 얻는다. 하지만 삶의 문화 속에서 변화하는 과정을 다루어주는 상황적 선교나 연합에는 약하다. 중국교회는 인력자원이 많다. 또한 그들의 본능은 ‘만만디!’이다. 문화를 개혁하려는 의지보다는 문화 속에 주저앉는 경향이 많다. 착근력보다는 순응력이 더 강하다. 가족중심의 연합에는 강하나 의를 기초로 하는 연합에는 약하다. 토착력과 문화적응력을 개발하여 승화시키면 선교비전을 성취하는데 큰 힘을 발휘할 수 있다고 본다.
 

둘째 질문: 중국교회가 주도하는 선교중국의 진정한 동기는 무엇일까? 그 선교운동의 주도권을 위해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할까? ‘중국선교와 선교중국’은 균형보다는 일체성을 이루는 작업이 필요한데 선교사들의 역할 전환이 어떻게 이루어지면 좋을까?
 

둘째 답변: 선교중국 동기를 의심할 필요가 없다. 성령의 인도하심이며, 이제는 중국교회의 사명이 되었다. 교육해서 그렇게 된 것이 아니라 성령의 강권하심이 만든 현상인 것이다. 중국교회가 우리를 원하지 않는 곳으로 데려다 놓아도 이제 함께 그 길을 가야 한다. 우리는 ‘중국선교와 선교중국’ 복합된 길을 왕래하면서 그들의 친구요 동역자로 섬기는 자로 곁에 있어야 한다. 이제 다시 오리 길이 아니라 10리를 동행해야 한다.
 

셋째 질문: 주제 논의를 위한 ‘동시성’은 올바른 설정일까? 미래 ‘중국선교와 선교중국’에서 주의해야 할 부분과, 집중 해야 할 부분은 무엇일까?
 

셋째 답변: 동시성은 중국교회의 현존하는 문제와 미래의 비전이 융합/통합하면서 얻어지는 새로운 시너지 효과를 얻기에 아주 중요하다. 두 주제가 아니라 한 문장으로 읽어야 한다. 중국선교는 선교운동과 함께 선교훈련과 교육이 시도되어야 한다. 그리고 비전과 열정을 갖고 일하도록 격려하며 세워야 한다.
 

위의 질문들은 우리가 결론을 내리기 전에 다시 한 번 주제의 핵심들을 종합하는 데 도움이 될 것 이다.
 

(1) 중국선교의 토착화 정도
(2) 선교중국의 운동의 동기와 주체
(3) 주제의 전제인 동시성의 실효성
(4) 궁극 목표인 세계교회와 연동된 동반자로 중국교회의 선교
 

결론/ 포기하지 마십시오!
 

“어디에 두었느냐 (…) 눈물을 흘리시더라 (…) 돌을 옮겨놓아라” (요 11:34-39)
 

‘중국선교와 선교중국’은 너무 크고 방대하며 그 과정에 엮인 내용이 결코 간단하지 않다. 따라서 우리의 결론을 무덤 입구를 막는 큰 돌로 사용할 필요는 없다. 차라리 돌을 굴려 이 주제를 주님 앞에 두는 자세가 필요하다.
 

핍박을 견디고 부흥을 이룬 중국교회는 옛 신앙의 관습에 머물지 말고, 세계교회와 함께 도전하면서 선교 반열에 서야 한다. 한국교회와 중국교회는 지금 자신들이 걷고 있는 세계선교의 길을 마치 자신들이 처음 개척하며 걷는 길이라고 착각하면 큰일 난다. 이미 오래 전 다른 나라 사역자들이 지나갔기에 길이 된 그 길을 걷는다고 생각 해야 한다. 이러한 마음을 가질 때 하나님은 세계교회 가운데 중국교회를 선교의 동역자로 삼아 열방을 크게 축복하실 것이다.
 

그 축복의 증거는 G2로 성장한 정치/경제 능력이 아니라 복음을 믿는 믿음의 능력인 것이다. 그 믿음으로 이 세대 선교의 큰 물결을 형성한다고 할지라도 결코 자랑할 것이 못 된다. 오로지 십자가의 은혜로 세상에서 부르시고, 세상을 향하여 다시 보내시는 예수님, 그리고 모든 세대에 선교의 길을 여시고 역사하시는 성령님이 중국선교와 선교중국을 이루심을 믿는다.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를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에 대하여 그러하니라” (갈 6:14)
 

오늘의 주제가 십자가의 복음으로 녹아들지 못하고, 정보의 한 분류로만 취급하게 되면, 우리는 채집망을 들고 바람을 잡으려고 이리저리 뛰어다니는 어린아이와 같게 된다. 선교의 어떤 선행 결과도 결코 우리의 자랑이 될 수 없다. ‘중국선교’가 우리의 자랑이 아닌 것처럼, ‘선교중국’도 결코 중국교회의 자랑이 될 수 없다. 십자가의 복음만이 중국교회의 힘이 되고 자랑이 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선교의 주체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정리 | 편집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