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11.30  통권 148호     필자 : 후오후오(霍或)
[기획]
교파와 가정교회의 신학, 목양 그리고 체제전환(建制转型)

수년 전 많은 가정교회 지도자들이 홍콩에 모여 하나님나라의 큰 계획에 대해 논의한 적이 있다. 그 기간 중 참석자들은 교파문제에 대해 열띤 논쟁을 벌였는데, 나는 몇몇 선후배 전도자들로부터 ‘교파쟁이’로 인식되고 있었다. 당시의 분위기상 이에 대해 심도 있게 논박하기는 어려웠기에 그냥 웃어넘기고 말았다. 몇 년이 지난 후, 생각지도 않게 잡지 《敎會》에서 “命题作文” 코너를 마련해주었다. 기도하는 중 이에 대해 부담이 컸었기에 나는 그 토론에 응하기로 결심하고 흔쾌히 펜을 들게 되었다. 교파에 반대하는 적지 않은 형제자매들이 스스로를 성경파(圣经派)라고 칭하면서 가정교회의 ‘무교파, 오직 예수, 오직 사랑’의 전통을 높이 평가한다. 나는 그들에게 배우기를 원한다. 형제자매들과 함께 성경과 하나님의 뜻으로 돌아가기 위해 성경 외에는 그 어떤 것도 필요치 않는 그들의 자세를 말이다. 하나님께서 일하시기를 원한다!


1. 성경 속에 과연 교파는 있는가?

구약에는 의심의 여지없이 열두지파가 나오고, 제사장과 백성들은 분명히 각자의 종족에 속해 있었다(민 1:2, 26:2). 지파와 족보가 없는 자들은 특히 그것이 제사장이라면, 불결한 것으로 간주되었다(민 2:2, 느 7:64-65). 그리고 선조들의 교훈을 따라 술을 마시지 않던 레갑 족속은 하나님의 칭찬과 축복을 받게 되었다(렘 35:1-19).

구약에 근거해 말할 때, 우리는 구약의 이스라엘과 신약의 교회 모두 하나님의 은혜에 속한 언약공동체임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하나님과 인간 간의 언약이라는 측면에서 볼 때, 언약의 대상이 비록 다르긴 해도 양자는 근본적으로 차이가 없다. 교파란 동일한 신앙 아래에 있는 서로 다른 언약공동체라고 할 수 있다. 이 공동체는 구약에서는 지파별로 구분되고, 신약에서는 종족과 지역에 따라 달라진다. 그러나 적지 않은 형제자매들은 구약의 이스라엘과 신약의 교회 간의 이 연속성을 인정하지 않는데, 이는 부지불식간에 시대론(时代论)의 영향을 받은 탓이다. 이들 형제자매들은 성경 전체의 3분의 2 이상을 차지하고 있는 구약과 오늘날의 교회 간의 관계를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라는 이 난제에 도전할 필요가 있다. 도덕적 권면의 기능 외에 구약과 신약은 영적 관련이 없는가? 동일한 하나님이 구약에서 신약에 이르는 동안 변하셨단 말인가? 사람이 구원을 얻는 방식이 달라졌는가? 구약의 사람들은 율법에 의해 구원받았고 신약의 사람들은 은혜에 의해 구원받는가? 당연히 아니다.

신약을 다시 한 번 살펴보자. 바울은 디모데에게 이렇게 말한다. “그러나 너는 배우고 확신한 일에 거하라. 너는 네가 누구에게서 배운 것을 알며”(딤후 3:14). 바울은 디모데가 그의 신앙이 ‘누구’에게서 배운 것인지 알기를 원했다. 이는 신앙전승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대목이다. 디모데에게 보내는 같은 편지에서 바울은 또한 이렇게 말한다. “내가 밤낮 간구하는 가운데 쉬지 않고 너를 생각하여 청결한 양심으로 조상 적부터 섬겨 오는 하나님께 감사하고, 네 눈물을 생각하여 너 보기를 원함은 내 기쁨이 가득하게 하려 함이니, 이는 네 속에 거짓이 없는 믿음이 있음을 생각함이라. 이 믿음은 먼저 네 외조모 로이스와 네 어머니 유니게 속에 있더니 네 속에도 있는 줄을 확신하노라”(딤후 1:3-5). 한 번 보라. 바울은 자신과 디모데의 신앙전승에 대해 자세히 언급하며 이것을 잊지 말라고 당부한다. 심지어 디모데의 신앙의 연원을 일깨우기 위해 바울은 특별히 디모데에게 할례를 베풀었다(행 16:3). 이처럼 바울은 복음전도에 도움만 된다면 유대인에게는 유대인의 모습이 되었다.

한걸음 더 나아가, 사도행전에서 빌립이 사마리아에서 복음을 전할 때에 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믿었다. “예루살렘에 있는 사도들이 사마리아도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다 함을 듣고 베드로와 요한을 보내매, 그들이 내려가서 그들을 위하여 성령 받기를 기도하니 이는 아직 한 사람에게도 성령 내리신 일이 없고 오직 주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만 받을 뿐이더라. 이에 두 사도가 그들에게 안수하매 성령을 받은지라”(행 8:14-17). 여기에 성경해석의 난제가 하나 있다. 성령은 왜 잠시 동안 그들 위에 임하지 않으셨는가? 이것의 이유는 다음과 같다. 직분으로 볼 때 빌립은 단지 복음전도자였을 뿐 사도가 아니었다. 따라서 그는 교회를 세울 수 없었다. 교회는 반드시 사도와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워져야 했다(엡 2:20). 그러므로 베드로나 요한은 사도의 신분으로 그곳에 가서 사마리아 교회를 세우고 정식으로 이를 선포했던 것이다. 그리고 성령께서 적절한 시기에 임하심으로 이 사건에 대한 신성한 증거가 되어주셨다.
에베소서 2장 20절에서 ‘선지’는 구약을 대표하고, ‘사도’는 신약을 대표한다. 교회는 필히 성경을 근거로 세워져야 하는데 이 기록이 바로 이를 증명해준다. 그때는 신약성경이 없던 때이기에 사도는 그 현장에서 매우 중요했다. 어떤 이는 오늘날 우리는 신구약성경 전체를 가지고 있으므로 성경의 교훈을 지키고 충심으로 하나님의 도를 전파하기만 하면 교회의 성립을 선언할 수 있다고 말한다. 사도라는 직분은 일시적인 것이었고 이후에는 사라지게 되었다고 말한다. 이런 주장은 일리가 있지만 몇몇 문제점을 가지고 있다. 이에 대해서는 후반부에서 다시 이야기하도록 하겠다. 어쨌든 결론적으로 구약이든 신약이든 모두 신앙전승과 신앙소속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형제들아 너희는 각각 부르심을 받은 그대로 하나님께 함께 거하라”(고전 7:24).


2. 고린도전서 1장에서 바울은 교파에 반대한 것이었을까?

바울은 고린도전서 1장 10-13절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형제들아 내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모두가 같은 말을 하고 너희 가운데 분쟁이 없이 같은 마음과 같은 뜻으로 온전히 합하라. 내 형제들아 글로에의 집편으로 너희에 대한 말이 내게 들리니 곧 너희 가운데 분쟁이 있다는 것이라. 내가 이것을 말하거니와 너희가 각각 이르되 나는 바울에게, 나는 아볼로에게, 나는 게바에게, 나는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한다는 것이니 그리스도께서 어찌 나뉘셨느냐 바울이 너희를 위하여 십자가에 못 박혔으며 바울의 이름으로 너희가 세례를 받았느냐” 어떤 이들은 이것에 근거하여 바울과 성경은 교파에 반대한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이들은 바울이 “나는 그리스도에게 속해 있다”고 말하는 자들에게도 비판을 하고 있음을 잊고 있다. 그들은 자신의 소속과 분파를 높이는 것을 통하여 스스로를 높이면서 타인을 공격하는 등 사실은 교파주의의 해독에 해당하는 자들이다. 있는 그대로 말하자면, 그들은 ‘교파’를 그리스도보다 더욱 중시하는 자들이다. 그리고 자신의 소속과 분파를 절대화하고 그리스도를 상대화하는 자들이다. 따라서 바울은 그들을 비판하며 “그리스도가 나뉘었느냐?”고 외쳤던 것이다. 이에 근거해볼 때 우리는 교파(宗派)와 교파주의(宗派主义)를 구분할 필요가 있다.


동일한 신앙, 서로 다른 공동체인 교파

교파주의는 자신의 교파의 이익과 자신의 이익을 출발점으로 삼는 사상과 행위를 가리킨다. 우리가 교파를 언급할 때 당연히 그리스도, 신앙, 진리는 모두 절대적이고 그에 비해 교파는 상대적인 것임을 강조한다. 또한 우리는 ‘오직 성경’을 절대적으로 인정한다. 그러나 교파주의는 이와 달리 ‘성경+교파’를 치켜세우는데 최종적으로는 ‘오직 교파’로 변질된다. 바울은 이러한 교파주의에 반대한 것이지, 신앙의 소속과 전승에 대해 반대한 것이 아니었다. 이는 마치 성경이 율법주의에 반대하고 율법에는 반대하지 않았던 것과 같다. 하나님의 율법은 선한 것이지만 율법에 의지하여 구원을 얻고 거룩하게 된다는 율법주의는 틀린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를 특정한 신앙공동체 가운데 두신다. 그리고 이러한 가시적인(혹은 유형의) 공동체 안에서 우리가 가르침을 받고 성장하도록 하신다. 교파는 바로 이런 가시적 공동체의 형식 가운데 하나인 것이다. 교파는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받는 통로가 된다. 하나님은 가정, 사회 그리고 교회를 통해 우리에게 은혜를 주시고 부단히 가르침과 지도를 받게 하신다. 하나님은 또한 소그룹, 공동체, 교파 등을 통해 우리를 성장시키신다. 이렇게 서로 다른 여러 형식들을 통해 우리는 겸손히 가르침을 받고 성장하게 된다. 그리고 우리는 눈에 보이는 유형의 교파에 자신을 맡기고 의탁함으로써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께 의지하게 되고, 결국 보다 많이 그리고 보다 깊이 그리스도와 진리를 알게 된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너희 마음에 계시게 하시옵고 너희가 사랑 가운데서 뿌리가 박히고 터가 굳어져서 능히 모든 성도와 함께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고”(엡 3:17-18).

영원토록 실수가 없으신 하나님에 비한다면, 교파는 사실 별 대단한 것이 못된다. 따라서 일단 교파에 문제가 있을 경우, 우리는 용감히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야지 인간을 따르면 안 된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교파의 가르침을 받아들일 뿐이다. 그러함에도 보다 쉽게 실수하고 죄를 범하는 개개인에 비한다면 교파는 매우 중요한 것이다. 교파는 우리에게 하나의 기본적 규범이 되고 겸손히 가르침을 받도록 해준다. 그러므로 관건은 해당 교파가 하나님께 속해 있느냐, 아니냐 하는 것이다. 말년의 요한은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하나님께 속하였으니 하나님을 아는 자는 우리의 말을 듣고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한 자는 우리의 말을 듣지 아니하나니 진리의 영과 미혹의 영을 이로써 아느니라”(요일 4:6).

신앙은 누가 누구를 대신하여 믿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모두 개별적, 단독적으로 은혜를 입는다. 그러나 성경은 우리에게 개개인마다 독립적인 신앙개체가 되라고 말한 적이 단 한 번도 없다. 도리어 성경은 우리에게 “이와 같이 우리 많은 사람이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이 되어 서로 지체가 되었느니라.”고 말하고 있다(롬 12:5). 게다가, 믿음이라고 하는 그 자체부터가 공동체적 성격의 사건이라고 성경은 말하고 있다. “그런즉 그들이 믿지 아니하는 이를 어찌 부르리요 듣지도 못한 자를 어찌 믿으리요 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찌 들으리요”(롬 10:14-15).

결론적으로, 하나님은 각양각색의 은혜의 통로를 통해 우리에게 은혜를 주심으로써 우리가 절대 진리를 알도록 하신다. 어떠한 교파이든지 은혜의 통로에 불과한 그 교파 자체를 절대시한다면 그것은 교파주의가 된다. 교파주의자는 무한하신 하나님이 유한한 교파를 통해 우리에게 은혜를 주신다는 사실을 믿지 않는다. 그리고 그저 맹목적으로 오로지 개인의 감각만을 신뢰하면서 결국에는 폐쇄주의(关门主义)와 감각지상주의(感觉至上)에 빠지게 된다.


3. 가정교회 신학 건립에 있어서 교파의 기능과 역할

어떤 이들은 가정교회의 신학을 업신여길 뿐만 아니라 가정교회는 신학이 없다고 한다. 어떤 이들은 가정교회의 신학을 지나치게 과대평가하면서 대공(大公)교회의 영적 전통과 스스로 거리를 둔다. 이러한 두 가지 태도는 모두 잘못된 것이다. 가정교회는 자신만의 신학을 가지고 있다. 나는 그것을 ‘경건한 생명(敬虔的生命)’ 전통이라고 부르는데 믿음의 선배들이 겪은 수많은 고난, 이를 통한 경건의 연습과 훈련 등은 헛된 것이 아니다. 내가 개인적으로 핍박을 경험하며 영적으로 곤고하던 시절에 시편 66:12을 읽어보았다. “사람들이 우리 머리를 타고 가게 하셨나이다 우리가 불과 물을 통과하였더니 주께서 우리를 끌어 내사 풍부한 곳에 들이셨나이다.” 흐르는 눈물을 주체하지 못하면서 나는 이것을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응답과 위로라고 생각했다. 또한 이것이 가정교회의 생명에 대한 사실적 묘사라고 여겼다. 그러나 우리는, 고난의 경험을 신성시하며 그 안에 갇혀버리는 우를 범해서는 안 될 것이다. 그리고 가정교회의 전통 외에 우리에게는 종교개혁의 전통, 공교회 전통, 초대교회의 전통과 더 나아가 성경의 전통도 있다는 것을 잊으면 안 된다. 그리스도는 나뉠 수 없다.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만 전 세계의 형제자매들과 이전의 성도들은 비로소 서로 연결되어 하나가된다(시 22:3 ).

성경적으로 볼 때, 인간은 그리스도에 속해 있든지, 아담에게 속해 있든지 중 하나이다.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대표자 되시든지, 아담이 우리의 대표자가 되든지 둘 중 하나이다(롬 5:12-21). 그리스도를 믿는 것은 아담을 머리로 하는 진영에서 벗어나,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는 새로운 진영으로 들어오게 됨을 의미한다. 이것이 바로 진정한 ‘개종(改宗)’이다. 이러한 점에서 본다면, 성경이 견지하는 바는 개혁주의 신앙이다. 아담의 대표성으로 인해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 전해진 원죄를 인정하지 않고 사람들이 자기 스스로 지은 죄를 이야기한다면 이것은 성경 전체의 가르침에 위배되는 것으로, 성경은 “내가 죄악 중에서 출생하였음이여 어머니가 죄 중에서 나를 잉태하였나이다”(시 51:5) 라고 말하기 때문이다.

인간의 전적타락(부패)은 복음과 성경의 논리적 출발점이다. “기록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롬 3:10). 죄는 필연적으로 인간의 이성, 감성, 의지 전체를 오염시켰다.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롬 3:11). 그렇기에 하나님의 무조건적 선택이 있어야 한다. 그리고 우리는 오직 하나님께만 모든 영광을 돌릴 수 있다. 죄로 인해 지옥과 사망 가운데 있는 우리를 하나님께서 무조건적으로 선택하셔서 구원하여 주셨다(엡 1:4). 그런데 성결하시고 공의로우신 하나님이 죄를 범한 인간을 어떻게 그냥 용서하실 수 있을까?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정하신 구원을 믿게 될 것이다(히 2:17, 7:25). 하나님은 무질서하게 죄인을 용서하시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대신하여 흘린 피로 속죄를 이룬 것이다. 그리스도는 개개인을 대신하여 피 흘리시고 희생하실 수 없다. 만약 그렇다면 지옥에 있는 자들은 무엇인가? 예수의 보혈이 그들에게 효력이 없다고 말해야 하는가? 주님의 대속의 능력이 설마 불신의 죄를 범한 자들을 깨끗하게 하지 못하겠는가? 그러므로 성령 안에서의 부르심은 인간에 대한 부르심이고 우리 인간은 이를 거절할 수 없다. 마른 뼈를 살아나게 하시고, 나사로를 무덤에서 부활하게 하신 하나님, 그분의 부르심은 결코 헛된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을 끝까지 지키실 것이다. 주 예수께서는 “아버지께서 내게 주시는 자는 다 내게로 올 것이요 내게 오는 자는 내가 결코 내쫓지 아니하리라"(요 6:37)고 말씀하셨다. 바로 이것이 개혁주의 신앙의 정수이다. 이 귀한 신앙전통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하나님의 완전한 주권과 영광을 보게 되었다. 진정한 복음과 진정한 신학 안에서 교파는 가정교회의 신학 건립에 도움을 줄 수 있다. 적지 않은 사람들은 이렇게 말할 것이다. “하나님은 진리를 하나의 교파에만 주시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주권의 진리에 관한 부분은 개혁주의 교파에게 주셨고, 인간의 책임에 관한 진리는 아르미니우스(阿米念派)에게 주셨다고 볼 수 있다.” 이렇게 말하는 사람들은 무엇이 하나님의 주권이고 무엇이 인간의 책임인지에 대해 그리고 양자 간의 유기적 관계에 대해 잘 모르고 있는 것이다. 진정으로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는 사람만이 비로소 진정으로 자신의 책임을 다 할 수 있게 된다. 하나님은 바울에게 고린도에 하나님의 백성이 많음을 알려주셨고, 이에 바울은 비로소 ”두려워 않고, 침묵하지 않고 말할 수“ 있었다(행 18:9). 하나님의 예정과 주권을 인정하지 않는 사람이 어떻게 바울과 같은 믿음을 가지고 나가서 필사적으로 전력투구할 수 있겠는가? 하나님의 정하심이 있기 때문에 우리의 전력투구는 비로소 의미를 지니게 된다. 하나님은 단지 목적만 정하신 것이 아니라 나를 사용하셔서 당신의 목적을 이루는 이러한 방식까지도 정하셨다. 하나님께서 바울에게 배 위의 그 누구도 죽지 않을 것이라고 말씀하셨고, 이에 바울이 비로소 밤낮 파수를 보며 모든 이들에게 배 위에서 기다리라고 확언하는 장면을 보라(행 27:31). 자신의 대장의 전략과 방책을 신뢰하고 백전백승할 것을 믿어 의심치 않는 병사가 비로소, 용감하게 그리고 책임을 다해 싸울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나는 가정교회 신학의 건립에 있어 교파의 기능과 역할에 대해 두루뭉술하게 이야기하지 않겠다. 나는 가정교회에 진정한 도움을 줄 수 있는 것은 개혁주의 신앙임을 분명히 그리고 구체적으로 말하고자 한다. 우리는 물론 경건한 생명의 전통을 가지고 있지만 ”온전한 교의(纯正的教义)‘ 전통은 결여되어 있다. 그런데 순전한 교의는 하나님께서 개혁주의 신학이란 그릇에 담아 우리에게 주신 것이다. 우리는 이 개혁주의 신학이란 그릇을 통해 그 속의 신령하고 살아있는 생수를 맛볼 수 있다. 이를 일단 마시게 되면 인간에게 영광을 돌리지 않고 하나님께 돌리게 된다. 이 교파에 속한 모든 사람은 하나님의 일을 감당한 이후에 ”이와 같이 너희도 명령받은 것을 다 행한 후에 이르기를 우리는 무익한 종이라 우리가 하여야 할 일을 한 것뿐이라 할지니라“고 말한다(눅 17:10).

오늘날 적지 않은 개혁주의 학습자들이 개혁주의를 성경보다 높인다. 이들은 개혁주의 정신의 요체가 바로 하나님을 근본으로 하여 끊임없이 자신을 개혁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모르고 있다. 개혁주의는 영원히 하나님의 영광만을 드높이지 교파를 높이지 않는다. 그리고 그들 “후교파(后宗派)”를 외치면서 교파간의 조화를 이끌어 내려는 사람들은 더더욱 간과하는 기본적 사실이 있다. 교파초월도 일종의 교파에 해당한다는 것과 그들은 자기를 중심으로 하는 더 강한 교파주의자라는 사실이다.


4. 가정교회 목양에 있어 교파의 기능과 역할

가정교회 목자 한 분과 가정교회의 현황과 필요에 대해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현재 중국의 최대 필요는 복음이기에 가정교회의 최고 책임은 복음전도입니다. 이것은 기독교인들의 삶의 근본목적이기도 합니다. 요즘 시대에 목양에 대해 말한다면 사실 금상첨화일 것입니다. 그리고 가정교회가 해야 할 것은 어려울 때 도움을 주는 것입니다. 어떤 지체가 주님을 믿게 된다면 그 믿음이 올바르든 올바르지 않던, 교회에 나가던 나가지 않던 그게 뭐 그리 중요하겠습니까. 천국에만 들어갈 수 있다면 그걸로 충분한 것 아닌가요? 왜 그렇게 많은 신학을 꼭 알아야 하는 것이지요?” 그의 말에는 일리가 있다. 현재 적지 않은 교회들이 해외교회의 목양방식을 그대로 모방, 답습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기 때문이다. 지금 우리는 확실히 복음전도 사역을 중요시해야 한다. 가정교회의 신학의 성숙과 목양의 성숙은 아마도 여러 세대에 걸친 노력이 필요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의 말은 여러 문제점을 가지고 있다. 첫째, 사람이 살아가는 가장 큰 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영원히 그분을 즐거워하는 것이지 복음전하는 것이 아니다. 복음전도는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여러 방식 가운데 하나일 뿐이기에 그것을 최고의 자리에 놓으면 안 된다. 둘째, 주 예수께서 부여하신 대사명의 임무는 사실 복음전도 뿐 아니라 목양과 가르침을 모두 포함하는 것이다(마 28:18-20). 우리는 자녀를 낳기만 한다고 다 되는 것이 아니라 그 자녀를 양육하고 가르쳐야 한다. 자녀를 낳기만 하고 양육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책임을 다하지 않는 것이다. 셋째, 기독교인이 교회를 떠나 살아갈 수 있는가? 올바르지 않은 신앙은 마지막에 가서는 가짜 믿음인 것으로 판별되는 경우가 대다수이다. 단지 구원 얻는 신앙에 그친다면 그것은 값싼 은혜를 전파하는 것에 불과하다. 기독교인이라면 구원 얻음에서 더 나아가 성화에 이르러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자 되심과 예수 그리스도의 주님 되심은 분리될 수 없다. 가정교회의 목양에 있어 개혁주의 신앙은 어떤 역할을 감당할 수 있는가?

첫째, 개혁주의 신앙은 완비된 복음을 전하고 가르치게끔 우리를 일깨워준다. “이는 내가 꺼리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다 여러분에게 전하였음이라”(행 20:27). 우리가 인간의 전적타락/전적부패를 명료하게 이야기해야만 ‘오직 은혜’와 ‘오직 믿음’을 확실히 말할 수 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인간의 전적타락을 명료하게 이야기할 수 있을까? 하나님의 율법과 아담의 언약에 대해 반드시 이야기해야 하고 또 하나님의 사랑만 강조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성결과 공의를 언급해야 한다.

둘째, 개혁주의 신앙의 신조와 요리문답은 우리의 믿음을 심화시키고 신앙을 가르치고 인도하는 데 도움이 된다. 신학과 삶은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어떤 신학을 가지고 있느냐에 따라 그 신앙이 결정된다. 신학이란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를 가르치고 지도해주는 것이다. 성경의 내용은 넓고도 깊다. 어떻게 전하고 어떻게 가르칠 것인가? 성경에 뿌리를 두고 있는 개혁주의 신조와 문답은 이것에 있어 매우 좋은 도구가 된다. 개혁주의 신학은 우리를 구속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성경의 진리 가운데로 이끌어 참 자유와 참 기쁨을 얻게 해준다.

셋째, 개혁주의 신앙은 지금까지 ‘말씀선포’, ‘성례집행’, ‘기율의 집행’을 교회의 3대 표시로 삼아 왔다. 개혁주의 신앙은 완비되고 온전한 복음을 전파하고 또한 성경에 부합하는 성례를 실시한다. 천주교의 성찬관인 ‘화체론(化质论)’은 성찬예식을 우상숭배로 만들어 버린다. 그리고 루터교단의 ‘공재론(同质论)’은 그리스도의 인성을 오해하여 그리스도의 인성이 일종의 신비한 방식을 통해 성찬과 실제로 함께 한다고 주장한다. 그들은 예수께서 몸을 가지고 승천하셨고 현재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심을 망각하고 있다. 가정교회의 적지 않은 이들이 츠빙글리의 성찬관인 ‘기념론(记念说)’을 받아들이면서 그리스도께서 믿음 가운데 우리와 함께 계시고 신비 가운데 우리에게 당신의 생명을 맛보게 하심을 간과한다. 오직 개혁주의 신학의 성례관 만이, 성례는 표지이자 기호이면서(미신화로부터의 탈피) 또한 동시에 증거이자 인증(이성화로부터의 탈피)이라는 주장을 견지한다. 세례는 성령께서 우리의 죄를 씻으셨음을 상징하고, 성찬은 성도와 그리스도가 연합하여 하나님께서 부어 주시는 은혜에 동참함을 상징한다. 이와 동시에 세례는 복음의 응답과 은혜의 언약에 대한 진실한 증거가 되고, 성찬 역시 신약의 백성과 주님이 연합하여 영적으로 그리스도의 생명을 맛보는 것에 대한 증거가 된다. 성례의 뒤에는 ‘성약(圣约)’신학이 있는 것이다.

성약신학은 구약과 신약을 연결하여 하나로 만들어준다. 그리고 구약과 신약에 나타나 있는 은혜의 언약을 관통한다. 아브라함부터 그리스도까지 은혜는 실질적으로 전혀 변하지 않았다. 그 표시만 할례에서 세례로 바뀌었을 뿐이다(골 2:11-12). 아브라함의 언약은 성약가정의 자녀들까지 포함하는 것이었기에 신약에서도 당연히 자녀들이 포함된다. 따라서 유아세례는 성약가정의 자녀들을 목양하는 중요한 방식 중 하나가 된다.

영유아세례는 신약의 사도들로부터 어거스틴을 거쳐 루터와 칼뱅에 이르기까지 모두 시행한 것이었다. 그들이 설마 틀렸겠는가? 그들이 틀렸고 설마 재세례파의 영향으로 우리 가정교회가 받아들이고 있는 이 조그만 전통이 옳은 것이겠는가? 나는 일찍이 어느 사역자에게 물은 적이 있다. “당신은 아이들에게 세례를 행하지 않는데 그렇다면 당신은 기독교 가정에서 태어난 아이와 불신자 가정에서 태어난 아이 간에 차이와 구별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나요, 인정하지 않나요?” 그는 “물론 인정하지요. 그래서 우리 교회는 봉헌례(奉献礼)를 하고 있습니다.”고 대답했다. 나는 아연실색하며 “형제여, 아름답고 좋은 전통은 취하지 않으면서 봉헌례를 한다니요. 이것이 사람의 유전을 가지고 하나님의 말씀을 폐하는 것이 아닌가요?” 결국 개혁주의 신앙은 가정교회가 하나님의 백성들과 자녀들을 보다 잘 목양하는 데에 도움을 주고 그들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도록”(엡 4:13) 해준다. 또한 “우리가 이제부터 어린아이가 되지 아니하여 사람의 속임수와 간사한 유혹에 빠져 온갖 교훈의 풍조에 밀려 요동하지 않도록”(엡 4:14) 해준다.

5. 가정교회 체제전환 중 교파의 기능과 역할
당신이 ‘종교학개론’을 강의한다면 당신은 수업 중 기독교는 단지 종교들 중 하나일 뿐이라고 가르치겠는가?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당신은 종교에 대해 어떻게 정의를 내리겠는가? 내가 교파의 역할에 대해 두루뭉술하게 넘어갈 수 없는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교회는 하나님의 집이다. 가정교회 가운데 진정으로 작용하는 것은 성령께서 사용하시는 거룩한 말씀 즉 진리이다. 그리고 교파는 우리에게 성경해석에 관한 일종의 규범을 제시해주고, 우리가 이전 세대들의 성경이해에 기초하여 성령께서 주시는 올바른 뜻에 따라 심혈을 기울여 성경을 해석할 수 있도록 해준다. 우리는 앞에서 초대교회를 세움에 있어 사도들이 담당했던 중요한 역할에 대해 이야기했다. 현 시대에 사도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데 교회는 어떻게 세워지고 확립될 수 있는 것인가? 먼저, 교회는 반드시 성경의 토대 위에 그리스도 예수를 머릿돌로 하여 세워져야 한다(엡 2:20). 이것만으로 충분한가? 천주교는 ‘사도권 계승使徒统绪)’ 문제를 이야기한다. 우리는 이에 대해 코웃음 치며 비웃지 말아야 한다. 많은 사람들이 개신교 안에 ‘교황’이 존재하고 있음과 교회 내부에 혼란이 있음을 목도하고는 천주교로 개종하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우리는 사도권 계승에 대한 천주교의 해석이 완전히 틀렸다는 것을 인정한다. 예수님은 천국의 열쇠를 베드로에게 주시면서 “이 반석 위에” 교회를 세우실 것이라고 말씀하셨다(마 16:18). 이때의 ‘반석’은 베드로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베드로의 믿음의 고백을 가리키는 것이다. 우리는 베드로가 확실히 대표성이 있다는 점도 보게 된다. 그 당시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은 교회를 대표하였다. ‘베드로는 무슨 신분으로 교회를 대표하였는가?’ 의 문제일 것이다. 이 문제에서 성경해석의 단서는 주 예수님이 처음 언급하셨고 또 신약성경 전체에서 맨 먼저 등장하는 ‘교회’라는 이 단어에 있다(마 16:18). 예수님께서 교회라는 이 단어를 사용하셨을 때, 제자들은 왜 그것이 무슨 의미인지 질문하지 않았을까? 감히 물어볼 수 없어서가 아니라 모두들 잘 알고 있는 것이기에 물어볼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이어서 마태복음 18장 17절에 이르게 되면, 예수님은 “만일 그들의 말도 듣지 않거든 교회에 말하고 교회의 말도 듣지 않거든 이방인과 세리와 같이 여기라”고 말씀하신다. 예수님은 마태복음 16장의 ‘매임과 풀림’의 교훈을 반복하시면서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마 18:20) 고 말씀하신다.

예수님과 제자들은 교회를 어떻게 이해했을까? 제도의 측면에서 볼 때, 예수님과 제자들의 교회 이해의 출발점은 일반적으로 유대회당일 것이다. 이 회당을 관리하는 자들은 장로들이었다. 예수님과 제자들은 회당의 관리 제도를 부정하신 적이 결코 없는데 이러한 제도는 가장 위로는 모세 시대로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출 18장). 열 개의 유대인 가정이 하나의 회당을 조직할 수 있었고 선출된 장로들이 회당을 관리하였다. 한 지역 내의 몇 개의 회당들은 유대인들의 최고 공회에 참가하는 대표를 선출할 수 있었다. 그러므로 여기에서 말하는 ‘두세 사람’은 본문의 앞뒤 맥락을 볼 때 우선, 교회를 대표하는 장로를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된다. 그리고 베드로는 사도의 신분이나 혹은 주교의 신분이 아닌 장로의 신분으로 예수님께로부터 권한을 부여 받았다. 교회는 성경의 기초 위에 세워지는 것일 뿐 아니라 교회를 대표하는 -적어도- 두세 명의 장로가 있어야 비로소 온전히 성립될 수 있는 것이다. 베드로 역시 자신이 장로의 신분임을 강조하였다. “너희 중 장로들에게 권하노니 나는 함께 장로 된 자요 그리스도의 고난의 증인이요 나타날 영광에 참여할 자니라”(벧전 5:1).

신약성경에서 강력한 증거를 발견할 수 있는데 사도행전 14장 23절은 이렇게 말하고 있다. “각 교회에서 장로들을 택하여 금식기도하며 그들이 믿는 주께 그들을 위탁하고” 원문의 ‘택함’은 희랍어로 ‘손을 들어 투표하는 것’을 의미한다. 디모데전서 4장 14절은 “네 속에 있는 은사 곧 장로들의 회에서 안수 받을 때에 예언을 통하여 받을 것을 가볍게 여기지 말며”라고 말하는데, 여기에서의 ‘장로들’은 희랍어 원문에서는 단수로 표현되어 있는데, 안수 후 세움 받은 ‘장로단’을 뜻하는 말이고, 바울은 개인적 신분과 자격으로 장로단을 세운 것이 아니다. 보다 더욱 중요한 증거는 사도행전 15장에서 찾아볼 수 있다. 교회에 어려운 문제가 생기자 대표들을 뽑아 장로단 총회를 개최하고 할례를 주장하는 이들을 이단으로 규정하였다. 사도들을 장로의 신분으로 총회를 소집하였는데 야고보가 제1차 총회의 의장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예루살렘교회, 고린도교회, 에베소교회 이런 말들을 보라. 그런 대도시에는 수많은 회당들이 있었을 텐데, 예루살렘교회, 고린도교회 등처럼 하나의 교회로 표현된다. ‘교회’, 이 용어 역시 단수인데 이는 그 회당들의 대표인 장로단이 하나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들 장로들이 한 자리에 모여 총회를 개최하므로 하나의 기독교, 하나의 교회가 되고 교회는 한 목소리를 내는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의 우리는 이렇게는 할 수 없다.

누가 기독교를 대표할 수 있단 말인가?
어떤 이들은 교회체제를 제멋대로 생각하는데, 모세가 차용했던 방식은 당시 문화의 영향을 받은 것이라는 주장까지 한다. 이는 당연히 틀린 것이다. 모세는 물론 장인 이드로의 말에 따랐지만 그들 두 사람은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란 걸 알고 있었다. “네가 만일 이 일을 하고 하나님께서도 네게 허락하시면 네가 이 일을 감당하고 이 모든 백성도 자기 곳으로 평안히 가리라”(출 18:23). 이러한 장로제 모델은 후에 다윗과 여호사밧시대에 이르러 더욱 확대 및 보편화된다(시 122:4-5, 대하 19:8-11 등).

모세가 세운 모델은 가장제에 보다 더 가깝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것은 가장제가 아니었다. 왜냐하면 모세는 예수님의 예표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모세를 교황과 같은 식으로 이해할 수는 없다. “또한 모세는 장래에 말할 것을 증언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온 집에서 종으로서 신실하였고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집을 맡은 아들로서 그와 같이 하셨으니 우리가 소망의 확신과 자랑을 끝까지 굳게 잡고 있으면 우리는 그의 집이라”(히 3:5-6).

장로제 외에, 나는 성경이 지시하는 다른 교회체제 모델을 본 적이 없다. 그리고 나는 이렇게도 중요한 하나님 가정의 치리제도를 채택함에 있어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들에게 죄로 얼룩진 인간의 문화이념을 받아들여 마음껏 자유롭게 채택하라고 허락하셨을 리 없다고 확신한다. 동시에 우리는 천주교에 대하여 장로제야말로 진정한 사도권 계승(장로계승)이라고 대답해줄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장로제 교회는 진리의 기초를 확보할 수 있을 뿐 아니라 장로정신을 계승할 수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을진대, 가정교회의 전형과 체제에 있어 시급히 필요한 것이 장로제도라고 말하지 않을 수 있을까?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너희는 길에 서서 보며 옛적 길 곧 선한 길이 어디인지 알아보고 그리로 가라 너희 심령이 평강을 얻으리라 하나 그들의 대답이 우리는 그리로 가지 않겠노라 하였으며"(렘 6:16).

하나님의 뜻에 부합한 제도가 세워진 이후에야 장로들은 교회를 대표하여 교회의 기율과 징계를 집행할 수 있었다. 기쁨으로 하나님의 양들을 돌볼 수 있었다. 목사는 장로당회가 소집될 때 장로의 일원으로서 회의에 참여하게 된다. 이렇듯 하나님의 집에서는 모든 것을 질서에 따라 품격 있게 행해야한다(고전 14:40). 그리고 구약에서부터 신약에 이르기까지 우리는 자매들이 장로를 맡는 것을 본 적이 없다(딤전 2:12-13).

가정교회가 전형과 체제를 세우려면 우선 “너로 하여금 하나님의 집에서 어떻게 행하여야 할지를 알게 하려 함이니 이 집은 살아 계신 하나님의 교회요 진리의 기둥과 터라”(딤전 3:15)는 말씀을 알아야한다. 그리고 개혁주의 신학과 장로제도는 우리가 성경과 하나님의 뜻으로 돌아가는데 큰 도움이 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기본으로 돌아가지 않는다면 부흥도 없다. 하나님의 뜻에 부합하지 않는다면 사역도 더 이상의 의미가 없다.


6. 가정교회의 현황과 필요

현재 가정교회의 상황과 필요에 대해 말할 때 사람들의 비판은 두렵지 않다. 나는 지금 시대가 사사시대와 흡사하다고 느낀다. “그 때에 이스라엘 왕이 없으므로 사람이 각기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삿 21:25). 우리도 시대적 풍조의 영향을 받았는지 ‘돌다리도 두드리며 건넌다고 하면서 할 수 없는 것은 염려하지 않으며 미처 생각해내지 못한 것을 염려하므로 가장 혼란스런 상황은 발생하지 않지만 보다 더 혼란스런 상황이 있게 되었다. 몇 년 전, 모두들 벌떼처럼 재난 지역으로 몰려가 많은 재물을 헌납하였음에도 기독교에 대한 인상은 더욱 나빠졌다. 기독교 내부의 혼란과 다툼 그리고 갈등 때문이다. 재난 지역에서 2년 간 사역한 한 형제가 내게 이런 이야기를 해주었다. “비기독교인들도 협력과 단결을 알고 있는데 우리들은 난장판에 흩어진 오합지졸 같네요.” 추태를 보이며 웃음거리가 되었던 우한(武汉)에서 발생한 세기적 결혼식 사건을 보자. 우한의 어느 가정교회의 36쌍의 남녀커플이 서로 얼굴도 모르는 상태에서 체육관에서 집단 결혼식을 올려서 큰 소동을 빚은 적이 있다. 이 사태로 가정교회의 이미지가 미신의 단계로 퇴보하게 되었다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 다음으로는 로잔대회 사건이 있다. 모두들 맹목적 열정에 휩싸였는지 로잔운동의 두 명의 발기인들인 빌리 그래함과 존 스토트의 심각한 신앙적 오류에도 불구하고 그 누구도 이를 문제 삼지 않았다. 빌리 그래함은 보편구원론을 주장했고 존 스토트는 영원한 지옥의 실재를 부인하였다. 문제가 많은 로잔언약을 교회들 간의 연합의 기초로 삼으려고 하였다. 후일 그들 모두가 출국을 저지당했음에도 대다수가 반성하지 않았고 그것을 두고 주를 위해 받는 고난이라고 말하였다. 많은 사람들이 선교와 ‘백투예루살렘’운동 등을 추진하는 데 정신이 없다. 견실한 교회의 기초가 없다면 선교사역이 말처럼 쉽게 되겠는가?

그 다음으로 산 위의 동네(山上之城) 건설, 십자가 있는 변혁, 기독교헌정운동 등을 말할 수 있겠다. 가정교회는 세상의 중심, 공공의 장, 주류문화로 가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인다. 그 위세가 대단하다. 나는 이들이 가정교회를 이용하려는 자들인지 가정교회를 진정으로 사랑하는 자들인지 정말 모르겠다. 제자들은 예수님을 따라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서 세속의 이스라엘 왕국을 재건함으로써 영적 깃발이란 간판을 내걸고 자신들의 야망을 이루려고 하였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그들과 달리 고난의 길, 십자가의 길, 죽음의 길로 향해 가셨다. 그리고 부활의 길로 가셨다. 이것이 바로 진정한 길이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요 12:24). 어느 노 사역자가 내게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요즘 젊은 가정교회 지도자들의 가장 큰 문제는 바로 야망입니다. 물론 그들은 자신의 야망을 웅장한 비전이라고 말하지요. 그것을 주님을 위해 열심을 내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현재 많은 이들이 家庭教会身份焦虑, 크리스천 지식인(基督徒公知:) , 도시 예배당 건립, 교회학교 설립, 신유은사, 복음다이어트(福音减肥) 등에 대해 토론하느라 정신이 없다. 그러면서 가장 기본이 되는 신학구축, 교회목양, 체제전환 등에는 별 관심이 없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신분에 대해서는 개의치 않아도 된다. 그리고 가정교회의 지위에 대해서도 마음 쓸 필요가 없다. 우리가 마음을 다해 전념해야 할 것은 그리스도를 왕 되시게 하는 일이다.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 하니라”(요 3:30). 개혁주의와 장로제도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귀중한 선물이다. 누군가 자신을 드려 헌신하고자 하여 주의 진리와 성령에 의해 불이 붙고 새롭게 된다면 갱신과 부흥은 머지않아 이루어질 것이다. 그러면 부흥의 전제는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뜻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그리스도를 왕 되게 하는 것! 내가 보기에 개혁주의 신학이든 장로제도든 그 초심은 바로 하나님을 온전히 영화롭게 하고 그리스도를 왕 되게 하는 것이다. 그리스도는 본래 왕이시지만 우리의 생명과 봉사를 통해 당신의 왕 되심이 드러나길 원하신다. 그분은 우리를 사용하시기를 기뻐하신다.

‘포스트 기독교‘(后基督教)’ 시대에 진리와 도를 말하면 사람들에게 비웃음을 사기 십상이다. 하지만 진리에 의해 새롭게 되어 생명의 길을 걸어가는 사람을 그 누구도 감히 우습게보지는 못할 것이다. 그들의 생명이 어찌나 활기차고 풍성한지. 보라, 그들이 함께 있어 서로 사랑하면 모든 사람이 그들이 그리스도의 제자인줄 알게 될 것이다(요 13:34-35). 신분은 쟁취하는 게 아니라, 드러나는 것이다.


7. 하나님께서 여신 문은 닫을 자가 아무도 없다

13년 전의 9월 1일, 뉴욕의 한 목사가 어느 청년의 전화를 받게 되었다. 그 청년은 일찍이 셀 수 없이 많은 돈과 미녀를 가져 보았지만 당시에는 병상에서 죽음을 기다리고 있었고 그 목사를 매우 만나고 싶어 하였다. 목사는 서둘러 집을 나섰다. 거리로 나서자 검은 연기 사이로 보이는 두 개의 고층빌딩, 시끄러이 떠들어대는 곳곳의 군중들, 복잡한 차량들과 크게 울리는 경적소리들이 갑자기 그의 눈에 들어왔다. 그는 눈을 돌려 급히 병원으로 향했다. 병원은 수많은 환자와 부상자들로 북적거렸다. 두려움과 불안, 그리고 절망과 분노의 기운으로 가득 차 있었다. 젊은이의 병상 곁에서 그 목사는 혼신의 힘을 다해 복음을 전하였다. 그가 깨달은 것은 이 젊은이만 복음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자신 역시 매순간 복음이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죽음을 눈앞에 둔 젊은이는 눈물을 흘리며 회개하고 주님을 영접하였다. 그는 2001년 9월 11일에 세상을 떠났다. ‘9.11’ 테러의 그날, 하나님의 역사는 어디에 있었던가? 당신이 역사를 살펴본다면 그 젊은이의 일은 결코 눈에 들어오지 않을 것이다. 역사의 거대한 흐름 속에서 그 작은 인물의 보잘 것 없는 죽음은 별로 대단한 것이 아니다. 그런데 그 목사가 젊은이의 얼굴에서 눈을 옮겨 창밖의 어지러운 군중들과 무너진 세계무역센터를 보자 실로 위대한 하나님의 위대한 역사를 깨닫게 되었다. 하나님은 “맹인이 보며 못 걷는 사람이 걸으며 나병환자가 깨끗함을 받으며 못 듣는 자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마 11:5)고 말씀하셨다. 하나님은 마른 뼈를 살아나게 하셨고(겔 37:10), 나사로에게 명하여 무덤에서 나오게 하셨다(요 11:43). 이 역사들이 작은 것인가? 하나님은 인간의 방식이 아닌 하나님 자신의 방식으로 역사하셨다. 또한 하나님은 우리가 생각하는 그런 방식으로 일하지 않으신다. 한 번은 내륙의 어느 도시의 가정교회에서 설교초청을 받은 적이 있다. 거실에서 설교를 하게 되었다. 시간이 되자 어느 형제가 나를 데리고 안으로 들어갔다. 문 밖에서는 어떤 소리도 들을 수 없었는데 안으로 들어가니 집에 사람들로 가득 차 있는 걸 보게 되었다. 모두들 아주 낮은 목소리로 노래하고 기도하고 있었다. 나중에 도착한 사람들 역시 조용히 걸어 들어왔다. 마이크와 음향시설도, 설교탁자도 없었다. 오직 주의 말씀과 반짝반짝 빛나는 눈만 있을 뿐이었다.

그리고 또 한 번은 주님을 섬기는 어느 서점에서 강의를 한 적이 있다. 스무 명 정도만 겨우 앉을 수 있는 협소한 곳이었는데 갑자기 삼사십 명의 사람들이 몰려들어왔다. 나중에 온 사람은 의자조차 구할 수 없었다. 나는 공공장소에서 복음과 관계된 내용을 강의하게 되면 서점 측에 부담과 어려움을 주게 되지 않을까 걱정이 되어 오늘 시간에는 독서에 대해서만 이야기하겠다고 밝혔다. 그리고 종교적인 내용은 언급하지 않았다. 강의가 끝난 후, 두 시간여 질문하고 대답하며 서로 교제하였다. 그런데 어느 누구도 독서에 대해 이야기하는 사람이 없었다. 내게 던진 질문들은 모두 종교에 관한 것이었다. 모든 시간이 끝나고도 몇몇의 젊은이들은 여전히 남아서 나와 이야기를 나누었다. 어떤 젊은이는 내가 가는 곳마다 따라다녔는데 밤을 새서 나와 대화할 작정인 듯 했다. 대화할 마땅한 곳이 없어 찬바람이 부는 길거리에서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마음만은 뜨거웠다.

미국에서는 매년 8천 종의 기독교 서적이 출판된다고 한다. 그에 반해 중국에서 매년 출판되는 기독교 서적은 불과 1백 30 종에 불과하다. 이렇게 비교해볼 때 중국의 가정교회에게는 사실 별다른 자원이 없다. 하지만 가정교회에서 당신은 하나님께서 열어 놓으신, 아무도 능히 닫을 수 없는 문을 보게 된다(계 3:7). 주를 믿는 사람들의 수가 늘어나는 것 뿐 아니라, 보다 중요한 것은 사람의 마음에 대한 복음의 흡인력과 생명에 대한 전환이다. 그렇다, 우리에게는 아무 것도 없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길과 진리와 생명이 있는데 무엇이 더 부족하단 말인가? “무명한 자 같으나 유명한 자요 죽은 자 같으나 보라 우리가 살아 있고 징계를 받은 자 같으나 죽임을 당하지 아니하고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고후 6:9-10). 어떻게 이러할 수 있을까? 그것은 주님께서 우리 가정교회를 당신의 신부로 여겨주시기 때문이다. “딸이여 듣고 보고 귀를 기울일 지어다 네 백성과 네 아버지의 집을 잊어버릴 지어다 그리하면 왕이 네 아름다움을 사모하실 지라 그는 네 주인이시니 너는 그를 경배할 지어다”(시 45:10-11). 모두 주님께 경배할 지어다. 이 ‘딸’은 그 마음이 온전히 자신의 ‘
왕‘에게로 향해 있어서 심지어 자기 자신도 잊어버린다. “주의 권능의 날에 주의 백성이 거룩한 옷을 입고 즐거이 헌신하니 새벽이슬 같은 주의 청년들이 주께 나오는 도다”(시 110:3). 이처럼, 그리스도에서 출발하고, 그리스도에 기초하고, 그리스도께 돌아가고, 아무 것도 돌아보지 않고 그리스도를 살아내는 것이다. 그것을 위해 변하지 않으나 변하고, 그것을 위해 살지만 죽고, 그것을 위해 영광 그리스도께서 모든 것 위에 머리가 되시도록 하는 것이다. 그 분은 왕이시기에 예전에도 왕이셨고 지금도 왕이시고 영원토록 왕이시다. 가정교회는 오직 주님을 위해 정결히 단장하길 원한다. 이 고난의 땅 위에서 하늘에 속한 아름다움을 드러내라!




 

출처 | 《敎會》2014년 5월 3호(통권 47호)
번역 | 김성민 . 본지 집필위원, 한국외대 동북아 연계전공 외래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