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안 발생 원인과 특징 19세기 후반 중국에서 가톨릭교회와 개신교회의 선교 활동이 왕성해지면서 중국 전통 사회와 교회 공동체 간에 충돌이 일어나 크고 작은 사건들이 급증하게 되는데 이를 당시 중국 당국에서는 교안(敎案)이라 하였다. 교안의 발생 원인은 다음 몇 가지로 정리할 수 있다.
첫째, 중국에 새롭게 다가선 신·구 기독교회가 조상 제사 등 중국 전통문화를 우상 숭배라고 규정하여 반대하였는데, 이러한 교리가 기층 중국 지식인들에게 전통 윤리를 위협하는 것이라 인식되어 교회의 확산에 반대하게 되었다.
둘째, 1·2차 아편전쟁 이후 중국에서 서구 문화가 개방되는 과정에서 확인된 서구 열강의 군사적 우위는 서구식 근대화의 필요성을 인식하게 한 측면도 있지만, 중국 사회를 위협 압박하는 존재로 두려움을 주기도 하였고, 이는 서양과 관련된 모든 것에 거부, 반감, 공격으로 이어질 수 있었다.
셋째, 1960년 베이징 조약의 체결 이후 기독교회의 중국선교가 합법화하면서 선교의 활력은 급속이 높아졌지만, 그것이 열강의 역량을 등에 업고 중국 전통 사회를 위협하는 전위 부대로 인식하게 되면서 서양 교회에 대한 공격이 급증하게 되었다.
교안의 전개 과정에서 다음 몇 가지 특징이 부각한다.
첫째, 서양 세력의 위력 여부와 관계없이 서양 세력에 대한 배척과 공격이 중국 지키는 애국주의 운동인 것으로 인식하게 되었다.
둘째, 서양의 군사력과 정치적 위압뿐만 아니라 서양인, 서양 교회, 서양 물산까지도 반대하는 극단적인 반외세 운동으로 확산하였다.
셋째, 서양적 요소의 효용성을 무시하고, 서양과 연계를 가지는 중국인까지도 배척과 공격의 대상으로 인식하는 맹목적 배외(排外)주의로 확산하였다.
넷째, 서양 세력의 진출 교두보였던 개항장이 교안 발생의 출발점이 되기보다는 상대적으로 내륙 지역에서의 교안 발생이 더 큰 규모로 빈발하였다.
다섯째, 반외세운동의 확산이 가장 내륙 깊이 진출해 있었던 기독교회 공동체에 대한 공격으로 이어졌다.
19세기 후반 전개된 교안들 대부분은 특히 가톨릭교회의 구 재산을 둘러싼 분쟁, 각급 선교회의 적극적인 전도 활동이 전개되는 가운데서 불거진 교인과 비교인 간의 불화와 분쟁, 향촌 기층 불화 요소를 이루는 사람들의 교회와 선교사를 등에 업은 국면 전화의 시도, 선교사들의 입교민에 대한 비호, 조약에 근거하여 인정된 서양 선교사들에 대한 고관 대우에 대한 신사층들의 반감 등이 촉발 요소가 되었다.
이미 1856년에 광서성 서림현에서 프랑스 선교사 샵들렌느(Auguste Chapdelaine, 馬賴 1814〜1856)가 피살된 것이 19세기 중국 교안의 대표적 서막이라 할 수 있는데, 이후 대표적 교안 사례들을 살펴보면 아래와 같다.
귀주 교안 파리외방선교회 포리(Louis-Simon Faurie, M. E. P., 胡縛理, 1853〜1871) 신부는 귀주 대목주교(代牧主敎)로서 1861년 프랑스 공사가 발급한 선교 허가증을 취득한 뒤, 귀주성 각지에서 적극적인 선교 활동을 전개하였다. 청암(靑岩)현에서 토지를 매입하여 수도원과 인쇄소로 운영하면서 주민들의 반발을 샀다.
1861년 단오절에 현 내 군중들이 청암현 조가관(晁家關) 수도원을 불 지르고 단무(團務) 조외삼(趙畏三)이 천주교민 여러 명을 붙잡아 올렸는데, 귀주 제독 전흥서(田興恕)가 지시하여 이들 중 4명이 처형되었다. 대목주교 포리는 프랑스 공사관에 사태를 보고하였고, 프랑스 공사의 항의를 받은 청 왕조가 수습을 위한 관원을 귀주로 파견하였으나, 귀주 신임 순무 한초(韓超)는 교회 공격자에 대한 처벌과 교회에 대한 배상을 진행하지 않고 미루었다.
그러다가 이듬해 1862년 음력 정월 보름에 개주(開州) 협사(夾沙) 마을에서 용신제(龍神祭)를 올릴 때, 프랑스 선교사 네엘(S. Jean-Pierre Néel, 文乃耳, 1832∼1862)이 중국인 교민들에게 이 제사를 위한 모금에 참여하지 말게 하여 주민들과의 충돌이 일어났다. 개주지부 대록지(戴鹿芝)는 상황을 보고받은 후 명을 내려 네엘 신부와 수하의 오정상(吳貞湘) 등 4명의 중국인 교도를 체포하여 능지처사하였다.
이 두 지역에서의 큰 사건이 있고 난 이후 귀주 지역 내 흥의(興義), 보안(普安), 영녕(永寧) 등지에서도 주민과 교민 간 충돌이 발생하였다. 잇따른 사건들에 대해 대목주교 포리 신부가 프랑스 공사관에 보고하였고, 조약에 따른 선교사 보호가 지켜지지 않았다는 프랑스의 항의에 따라 청 왕조는 양광 총독 등을 귀주로 파견하여 교안 처리에 나섰다. 1863년 귀주 순무 한초는 파직 소환하고, 제독 전흥서 등은 신강으로 귀양보내는 등 책임자들을 처벌하고, 백은 1만 2천 량을 배상하였다.
이 사건은 1860년 베이징 조약으로 중국에서의 기독교 선교가 공인된 이후 발생한 선구적 교안이었다. 이후 각지에서 교회 공격 사건이 잇달아 발생하게 되는데, 1862년 호남성 장사(長沙) 교안, 1865년 프랑스 선교사 마빌로(François Mabileau, 瑪弼樂, 1829〜1865)가 피살되는 등 교회가 공격받은 데 이어, 1869년 프랑스 선교사 리고(Jean François Rigaud, 李國安, 1834〜1869)를 피살되고 교민 20명과 주민 29명이 사망한 대규모 사천성 유양(酉陽) 교안으로 이어졌다.
이후 교회를 공격하는 게첩(揭帖)이 널리 뿌려지면서 교안은 1869년 호남성 안경(安慶) 교안, 강소성 양주(揚州) 교안 등 장강 유역 각 지역으로 확산하였다. ▦
▦ 김종건 | 대구한의대학교 기초교양대학 교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