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1. 20세기 복음주의의 시효 만료 2. 새로운 신앙전통의 모색 _과거와의 연속인가 불연속인가? 3. 신학적 인식론과 세계관의 확장 1) 교의적 전환을 가능케 할 인식론의 변화 2) 세계관과 제자도의 확장 4. 21세기 복음주의를 위한 착안점 1) 개인주의 비판 2) 공동선의 세계관 3) 선택적 성경읽기를 넘어서 4) 개종주의의 극복 5) 온정주의를 넘어서(upstream) 6) 반지성주의에서 지성적 경건으로 7) 자본주의의 동일시를 거부하는 변혁적 제자도(INFEMIT) 5. 맺는말
지난 호에서 2024년의 제4차 로잔대회는 이미 시효가 다된 20세기형 복음주의를 넘어서 새로운 버전(Version)의 복음주의를 구성해야 했으나 그 과업을 수행하지 못했다는 평가를 한 바 있다. 이번 호에서는 향후 21세기의 복음주의는 어떤 것이어야 하는가를 논의해 보도록 한다. 1. 20세기 복음주의의 시효 만료 20세기의 세계 복음주의운동은 미국과 한국이 주도하는 것이었음이 분명하다. 2024년 현재 세계의 선교사 파송 숫자에서 두 나라는 각각 1, 2위의 자리를 차지한다. 로잔운동은 지난 반세기 동안 에큐메니칼 진영을 제외한 세계 기독교의 다수를 포괄하고 있는데, 여기서 빌리 그래함 개인의 영향력과 그의 전도협회가 담당한 조직과 재정의 역할은 굳이 재론할 필요가 없다. 미국에서는 복음주의자가 어떤 특성의 그리스도인인가라는 물음에 대하여 ‘빌리 그래함을 좋아하는 기독교인’이라고 답하는 시기가 있었다. 주로 대중 집회를 통해 수행된 그의 전도사역의 영향력은 전 미국을 휩쓸었다. 1972년에는 한국에서 빌리 그래함을 강사로 세운 민족복음화대회가 개최된 바 있다. 이것을 계기로 한국교회는 전 세계를 놀라게 한 급속한 교회 성장을 이루어 나갔고 다소 수그러지던 미국에서의 복음주의운동도 이에 힘을 얻었다.

한국과 미국에서 복음주의 기독교의 한계를 드러낸 현상은 다음과 같다. 한국교회는 1995년까지 폭발적인 성장을 나타내었으나 그 이후 동력을 잃기 시작했고 2005년 전후하여 교인 수의 감소가 시작된다. 국내적으로 한국의 개신교는 도덕적 실추로 인하여 ‘개독교’, 그리고 지성적 능력이 없음을 풍자하는 ‘노답’이라는 비하하는 말을 들으며 시민사회의 존중을 잃게 된다. 한국교회의 성장이 종료되고 영적 활력이 감소하면서 이단이 득세하는 상황을 겪게 된다. 2020년대 이후에는 각별히 신천지 집단이 현저히 증가하고 있다. 해외 선교지에서는 자발적 지원과 파송에 따른 중복 배치, 현지의 필요보다 선교사들의 희망에 따른 사역의 추진으로 인하여 부조화를 일으키는 예가 나타났다. 일부 동남아 국가에서 과거 1970년대에 서구 선교사들을 향하여 제기되었던 선교사 모라토리엄이 거론된 사실도 보고된다. 한동안 현지 목회자들에게 한국교회의 성장 프로그램으로서 인기를 끌었던 ‘두 날개 성장 세미나’, ‘순복음교회 투어’ 등과 중상류층 중심의 대형교회 성장모델, 선교단체를 배제한 대형교회의 캠퍼스 확장 사역 등은 더 이상 매력을 주지 못하고 있다. 오히려 현지교회 지도자들은 한국에 왜 이단이 번성하며 선교지까지 진출하는지 의문과 우려를 던지고 있다. 한편, 미국에서는 대략 2016년을 전후하여 복음주의가 과거에 근본주의를 대신하는 참신한 신앙전통으로서의 이미지를 상실한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팀 켈러(Timothy J. Keller)는 백인 복음주의자들이 더 이상 신앙적 도덕적 가치보다 정치적 입장을 따라 흘러가는 경향을 지적한다. 미국의 시사 주간지 ‘더뉴요커(The Newyorker)’ 기고문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다양한 분노가 나타나고 있다. 한때 스스로 “도덕적 다수(Moral Majority)”라고 불렀던 사람들은 이제는 아무리 부도덕하더라도 자신의 정치적 입장을 지지하는 누구에게나 기꺼이 투표하려 한다. 혐오감에는 같은 진영 안에 있는 사람들에게서도 나타난다. 이번 달 초, 과거 세 차례나 공화당 행정부에서 일했던 타임지 사설 기고가 피터 웨너(Peter Wehner)는 “왜 나는 더 이상 나 자신을 복음주의 공화당원이라고 부를 수 없는가”라는 제목의 글을 기고했다. 이전에 복음주의에 자신을 동일시했던 많은 젊은 신자들과 유색인종 기독교인들도 이 꼬리표를 버리겠다고 선언했다. (…) “복음주의자”는 높은 도덕적 기준을 주장하는 사람들을 가리키는 데 사용되었지만, 이제 대중적으로 사용되는 이 단어는 “위선자”와 거의 동의어가 되었다. 내가 1970년대에 나 자신을 설명하기 위해 이 단어를 사용한 것은 내가 근본주의자가 아니라는 것(was not)을 의미했다. 그러나 내가 오늘 나를 이렇게 부른다면, 나는 근본주의자라는(am) 뜻이 된다.1) 2. 새로운 신앙전통의 모색 _과거와의 연속인가 불연속인가? 이미 2000년대 초부터 2020년대까지 Post Evangelical, Next Evangelicalism, After Evangelicalism 등 복음주의에 포스트, 넥스트, 애프터 등의 접두사가 붙은 용어가 출현하였다. 어떤 이들은 복음주의라는 용어 자체를 포기 내지 거부하는 태도를 보이는 한편, 어떤 이들은 복음주의 전통 자체를 폐기한다는 것이 아니라 근본 기조를 유지하되 변화된 세계에 적응하는 신앙 패턴을 형성하고자 한다. 알기 쉬운 예를 든다면, 미국의 기독교 사회운동가 짐 월리스가 자신을 ‘20세기에 태어난 19세기 복음주의자’라고 표현한 내용이다. 짐 월리스는 한국에서도 IVP의 모던 클래식으로 유명한 《회심》의 저자이다.

그는 복음주의권의 사회적 참여 사역의 로날드 사이더와 함께 대표적인 지도자였는데, 그가 전통적 복음주의의 신조(십자가의 속죄 구원, 성경의 권위, 회심의 중요성, 전도의 사명)를 믿는 형제단교회(Brethren church) 출신임에도 사회적 책임 사역을 강조하니까 구령 전도에만 집중하기를 원하는 백인 중산층 교회 사람들이 ‘당신은 복음주의에서 이탈했다’라고 비난할 때 그는 “내가 당신들과 다르다고 해서 복음주의자가 아닌 것이 아니고 현재 20세기 복음주의보다 원조인 19세기형 복음주의자”라고 한 것이다. 19세기 복음주의는 웨슬리 윌버포스 등 전통적 구령 중심의 복음과 산업혁명 이후 발생한 극심한 빈곤과 사회악과 노예해방을 해소하기 위해 헌신했던 복음적 신앙을 가진 그리스도인들을 가리키는 것이다. 실제로 웨슬리는, 오늘도 전도와 교회 성장론자들이 모델로 언급한다. 전도, 설교와 함께 광범위한 기독교 사회운동(빈민 복지와 비혁명적 노동조합 운동)을 통해 영국 산업혁명 시대 영국 사회가 극심한 계급 갈등에 처했을 때, 프랑스혁명(1789)의 방식이 아니라 평화적인 의회정치로 해결해 나간 것으로 역사가들은 평가한다. 여기서 한 가지 더 제시할 역사적 연구는 Great Reversal(대역전)이라는 주제이다. 사회학자 데이비드 모버그(David Moberg)는 미국에서 19세기 복음주의의 총체성을 버리고 전도 우선 영혼구원 지상주의로 교회의 신학과 정책이 바뀐 현상을 분석한다. 이처럼 십자가의 속죄구원과 회심, 성서의 권위, 전도의 중요성이라는 역사적 기독교의 근원적 신앙고백을 견지하면서 20세기 복음주의의 퇴행적 요소를 털어내고 21세기에 기독교 진리의 증거에 호소력을 발휘할 수 있는 신앙전통은 어떤 형태와 속성을 확보하여야 하는가? 3. 신학적 인식론과 세계관의 확장 1) 교의적 전환을 가능케 할 인식론의 변화 문명 전환기마다 시효가 만료된 과거의 규범(norm)에 대한 비판이 필요하지만, 보수적 교회일수록 신앙전통의 형성 과정에 대한 무지로 인하여 신학적 비판은 곧 신조의 거부로 인식됐다. 역사 속에 실재하는 신앙전통은 신조만으로 구성되지 않는다. 신조와 함께 인간과 세계에 대한 올바른 앎(지식)을 확보하는 성숙한 인식론이 장착되어야 시대마다 신앙공동체를 이끌고 나갈 적실한 신앙의 규범을 구성할 수 있다. 중세 스콜라 신학에서 종교개혁 신학으로의 이행은 혁명적인 패러다임 변화(shift)였다. 이는 교의적으로 공로(merit) 신학에서 은총의 신학으로의 전환이었다. 우리는 이신칭의로 상징되는 개신교 신학의 탁월함을 예찬할 때는 많으나 무엇이 그것을 가능케 했는가를 깊이 다루지 않는다. 교리는 신앙의 규범인데 제도화한 교회의 공적 기준이 바뀌는 것은 기술의 변화처럼 단순히 좀 더 세련되고 정교한 이론이 나왔다고 되는 것은 아니다. 기존의 교의가 시대의 영적 필요와 도전에 더 이상 답하지 못하는 상황, 즉 이 신학으로는 노답이라는 현실을 민감하게 느끼는 사람들의 의문과 고뇌의 성찰로부터 쉽지 않은 전환의 과정이 시작되는 것이다. 16세기 종교개혁의 신학은 14, 15세기의 기독교 인문주의자들이라 불린 시인과 철학자, 예술가들이 신앙과 삶에 관한 지식을 더 이상 부패한 제도교회의 권위적 결정 아닌 다른 원천에서 찾으려는 지적 운동을 기반으로 형성된다. 중요한 것은 결론적 교의의 대안 앎(지식, 인식)을 얻는 방법의 변화에서 시작된 것이다. 그래서 칼뱅의 《기독교 강요》는 사도행전의 순서를 따라 교의적 진술을 전개함에 앞서 1.1.1.에서 이중 신지식론을 제시한다.
개신교에서 가장 주요한 신앙전통인 칼뱅주의 개혁파의 신학적 전범으로 인정되는 《기독교 강요》를 보자. 이 책의 전체 구성은 사도신경의 구조를 따라 교의적 내용이 서술되지만 제1권 제1장 제1항은 특정 교의가 아니라 칼뱅의 신학 전체를 관통하는 신학적 인식론을 선포하고 있다. 통칭 이중 신지식론(Twofold knowledge of God, Duplex Cognitio Dei) 이라고 불리는 조항으로서 다음과 같다. 거룩한 지혜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knowledge of God)과 인간 자신(knowledge of Self)을 아는 지식이라는 두 개의 지식으로 구성된다. 그리고 이 두 지식은 서로 뗄 수 없이 여러 겹으로 결합하여 있다. 여기서 두 지식(in search of ‘God and Self’)은 특별은총과 일반은총 또는 신조와 세계관으로 이해될 수 있다. 이 두 가지는 서로 용질과 용매(지적, 문화적)의 관계로 결합하여 작용한다.
21세기 복음주의의 새로운 버전은 십자가의 신학을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20세기 복음주의자들이 배제했던 일반은총의 영역을 신학의 주 과제로 받아들여야 한다. 이는 과거의 개혁자들이 인문학의 개방적으로 받아들인 것처럼 사회과학과 자연과학에 대한 이해를 수용해야 한다. 이미 복음주의권 외의 학문적 신학에서는 상식화한 얘기라고 코웃음을 칠 수도 있지만, 중요한 것은 교회의 현실에서 우리가 주목할 점은 학자와 전문가들의 신학이 얼마나 회중과 현장 사역자들에게 전달되어 통용되고 있는가이다. 세계 기독교의 중심이 서구에서 비서구(global south)로 이동하면서 교회의 신학적 함량은 전보다 더 취약해질 수도 있다는 우려가 있다.
2) 세계관과 제자도의 확장 하나의 신앙전통이란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개인과 신앙공동체의 신앙고백이 자기 시대의 문화와 상호작용을 하며 역동적인 결합을 이룬 소산이다. 여기서 중요한 구성요소는 교의적 신조와 인간과 세계를 해석하는 세계관이다. 성서 속에는 여러 가지 교의적 개념들이 담겨 있다. 창조와 구원, 하나님 나라(통치)와 이신칭의, 특별은총과 일반은총, 하나님의 주권과 인간의 책임, 초월과 (역사) 내재, 개인과 공동체, 구원과 영광, 미래와 현재 등이다. 이러한 이항구조 중 무엇을 중심 개념으로 삼는가에 따라, 그리고 인간과 세계를 이해하는 다양한 방식 중 어떤 견해를 채택하는가에 따라 신앙관의 특질이 형성된다. 여기에는 그리스도인 개인이나 집단의 기질적 속성(ethos)과 시대의 영적 필요, 도전과 질문이 중요한 역할을 한다. 20세기의 미국식 복음주의는 창조보다 구원론에, 역사보다는 초월, 공동체보다는 개인에 더 비중을 두어왔다. 이러한 경향성은 단순히 명료한 구원 메시지를 제시하는 강점은 있으나 이는 선교 초기 대중 전도에서는 효과를 발휘했으나 인간과 세계에 대한 기독교적 이해에서는 매우 빈곤해지는 결과를 가져왔다. 그 결과 복음주의 교회에는 부지불식간에 세속의 문화 이념과 정신적 기류가 쉽게 들어올 수 있는 공백이 생기게 되었다. 성경적 표현으로 말한다면 집을 깨끗이 청소하고 비워놓으면 악한 귀신이 자기 친구들까지 데리고 와서 일곱 귀신이 점령하게 된다. 더 심각한 문제는 복음주의의 세계관적 공백 속으로 들어온 비성경적 문화와 사상들이 복음주의자들의 메시지와 행동에 녹아 들음으로써 마치 그것이 기독교 복음의 내용인 것처럼 여겨지고 재생산된다는 것이다. 복음주의는 시간상으로 18세기의 조나단 에드워드, 웨슬리, 휘트필드 등으로 거슬러 올라가며 지리적으로는 대서양 양안의 영국과 북미대륙을 오가며 형성되고 오래된 광범위한 신앙전통이다. 그렇기에 과거에도 시대와 국가에 따라 특질의 차이가 있었고 앞으로도 그러한 발전 양상을 띠게 되는 것이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렇다면 21세기 복음주의의 내용은 무엇이 되어야 할지 기존 전통에 대한 체계적이고 비판적인 성찰을 근거로 하여 적실한 대안적 전통을 형성해야 할 것이다. 변하지 않는 기조는 무엇이고, 새롭게 장착해야 할 구성요소는 무엇인가? 4. 21세기 복음주의를 위한 착안점 라승찬(Ra Seung Chan)의 《넥스트 복음주의(Next Evangelicalism)》 (2009), 데이비드 거쉬(David P. Gushee)의 《애프터 복음주의(After Evangelicalism》 (2020), 마크 놀, 배빙튼, 말스덴 공편, 《Evangelicals: Who They Have Been, Are Now, and Could Be》 (2019) 등을 참조하면 20세기 미국을 중심으로 발달한 복음주의는 다음과 같이 설명할 수 있다. 첫째, 구원론에서나 세계관에서 철저히 개인주의에 함몰되어 있으며, 둘째 20세기의 자본주의 확장 시대에 형성된 복음주의는 기독교와 자본주의를 전적으로 동일시하는 신념과 성향을 보이게 되었고 소비주의 문화에 탐닉하였다. 셋째로 교회 성장주의와 맞물려 사회적 강자와의 유대를 추구하는데 이는 미국에서는 인종주의와 연계된다.2) 1) 개인주의 비판 21세기 복음주의는 기존의 복음주의가 전도와 회심에 과도히 몰입함으로써 잃어버린 ‘대립의 복합’이라는 성서의 인식론을 회복하고 개인주의와 공동선의 사상을 통전하여야 한다. 먼저 개인주의에 대한 성숙한 이해가 필요하다. a. 개인주의의 정의와 속성 개인주의는 개인의 자유와 독자성, 자기 책임성에 근거한 자율성을 핵심 가치로 삼는다. 개인을 목적 자체로 보고 각 사람이 자신의 견해로써 자기의 행동을 지배해야 한다는 믿음이다. 개인주의의 대비 개념은 집단주의(collectivism) 또는 공동체주의(communitarianism)이다. 극단의 반대편에 전체주의(totalitarianism)가 있다. 개인의 존엄성을 추구하되 개인으로서의 각성은 인간성의 성숙에 필수적인 요소이다. b. 개인주의의 종류 먼저 신앙의 자유, 양심의 자유, 신념의 자유를 추구하는 것이 17세기 청교도들에 의해 성립된 근대 개인주의의 출발이다. 그러나 경제적 권리에 중심을 두는 소유적 개인주의(possessive individualism)가 개인주의의 주된 면모가 된다. 단편적인 예시이지만 인생관과 역사 인식에서의 개인주의로서 윤치호를 들 수 있다. 그는 한 말의 뛰어난 계몽 지식인이었으나 ‘나라가 망하더라도 개인주의자로서 역사 현실에 초연하리라’ 하는 견해를 밝혔고 후에 친일 인사가 된다. 소설가 김훈은 '어떤 깃발 아래로도 들어오지 않으며, 무엇에도 길들여지지 않는 사내'로 묘사되듯이 어떠한 정파적 소속도 거부하는 개인주의자이지만 연속되는 산업재해의 참사 사태를 직면해서는 ‘개체 인간으로서의 생명 가치에 대해서는 차마 침묵할 수 없다’라고 발언하며 시민단체의 공동대표를 맡아서 화제가 된 바 있다. c. 개인주의와 다른 사회사상의 상관성 경제적 자유방임주의 전통의 극대화라고 할 수 있는 20세기 후반의 신자유주의는 자본주의의 종교화라고 평가한다. 한편 사회주의 사상 속에서도 개인주의적 가치를 추구하는 예가 있다. 오스카 와일드는 ‘사회주의 아래서 인간의 영혼’에서 “사유재산을 폐지함으로써 우린 진정하고 아름다우며 건강한 개인주의를 향유하게 될 것이다. 누구도 상징적인 것들을 축적하기 위해 인생을 허비하지 않게 될 것이다’라고 주장한 바 있다. 그는 자유지상주의적 사회주의를, 개인주의를 보장하는 방법으로서 옹호했다. 실존주의 철학자 키에르케고어는 문화 기독교를 배격하며 신 앞의 단독자로서의 개인적 신앙의 진정성을 주창했다.

2) 공동선의 세계관 세상을 큰 바다라고 할 때 그 바다를 건너는 방법은 각 개인이 조그만 배를 타고 가는 것이 아니라 공동의 노력으로써 바다를 항해할 만한 규모의 배를 만들어 함께 타고 가는 것이다. 그때 이 배는 공동체 모두에게 선한 것이다. 만일 항해 시 풍랑을 만나 짐을 버려야 할 때 자신을 포함한 공동체 구성원의 생명을 위하여 자신의 화물(사익)을 버리는 선택을 할 수 있어야 공동선은 유지된다. a. 기독교 신앙은 개인주의와 공동체주의 어느 편에 친화적인가? 태생적으로 프로테스탄트 개신교는 가톨릭 체제의 모순을 극복하기 위하여 종교 제도에의 소속이나 중보자의 공덕과 무관한 개인의 신앙고백이 신앙의 진정성을 결정함을 주장함으로써 출범한 신앙전통이다. 그러나 그것은 중세 말의 모순된 상황에서의 해법이었을 뿐 모든 시대, 모든 조건에서의 도식적 규범은 아니다. 복음 진리의 이해를 위해서 앞서 말한 ‘대립의 복합(complexio oppositorum)’ 또는 화쟁(和諍)과 회통(會通)의 인식론이 요구된다. 모든 사상과 정책에는 순기능과 역기능이 있고 과유불급이 있다. 기독교 신앙은 수많은 대립 요소의 복합(complex of the opposites)이다. 영과 육, 개인과 사회, 존재와 행위, 신성과 인성, 초월과 (역사) 내재 등이다. 무엇보다 하나님의 주권과 인간의 책임이라는 대립의 복합을 현저히 예시하는 구속사의 사건은 창45장 요셉과 형들의 대화이다. “나를 이리로 보낸 이는 형님들이 아니라 하나님이십니다”(45:8).
 또한 복음은 피조계의 모든 것에 대하여 비판적이다. 어떠한 것도 신성시되거나 절대화하는 것을 거부한다. 사유재산을 옹호하지만, 신앙의 차원에서 사유재산은 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것이라는 위임개념 아래 있다. 리더십의 중요성을 강조하지만 권력자가 자신의 법과 언약의 한계를 넘어서는 권력의 절대화를 추구하면 폭군으로 규정한다. 민주주의가 기독교의 정치적 이상이 될 수 있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기독교 신앙은 개인주의 일변도의 역기능과 폐단을 비판하지만 반대로 집단에 의해 개인의 양심과 인권의 존엄이 억압받을 때는 개인주의의 필수 불가결인 가치를 주창한다.
b. 양극화 세계가 요구되는 공동선의 가치 개인주의 과잉은 사회나 국가의 공동체성을 파괴한다. 개인과 개별집단의 사익이 구성원들이 함께 누려야 할 행복과 가치, 즉 공동선(common good)을 압도하기 때문이다. 공동체성이란 구성원들이 '함께 자유함'으로 평등한 관계를 형성하는 사회이다. 성경적 표현은 몸의 사상(고전 12:12)이다. 현재 개교회주의 현실에서 교회의 공동체성에 대한 이해의 피상성은 복음주의가 세속적 개인주의에 포획되어 있음을 말해 준다. 탈가치, 탈윤리적 신앙의 공동체 담론의 맹점은 구체적으로 공동선을 이루는 방책의 추구가 없다는 것이다. 한국에서 교회가 세상의 강자 편에 서는 집단이 된 비극적 사례는 세월호, 이태원 재난의 희생자 가족들이 교회에서 불온한 사람으로 취급받는 상황이다. 3) 선택적 성경 읽기를 넘어서 복음주의는 은총 교리를 강조하고 구원과 회심을 중시하며 그와 함께 성경의 권위를 지극히 높여왔다. 그러나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빠진 큰 함정은 성경의 특정 본문들에 몰입하면서 간과하는 본문이 매우 많아졌다는 사실이다. 간략히 예를 들면, 로마서에서 1:17은 칭의교리의 근거성구로서 애호되지만 롬8:22 피조물의 신음에 대한 성령의 탄식이나, 그리스도께서 소자와 자신을 동일시한 마25의 최후심판 비유는 별로 설교되지 않는다.3) 진정으로 종교개혁의 ‘모든 성경(totum Scriptura)’에 충실히 하려고 한다면 우리가 성경을 얼마나 선택적으로 읽고 있는가를 돌아보아야 한다. 4) 개종주의(Proselytism)의 극복 선교의 개념을 타종교에서 기독교로의 개종과 교회 등록 차원에 한정함으로써 '하나님 나라와 세상의 맞닥뜨림(Encounter with the World)'이라는 포괄적이고 역동적인 개념으로 나아가지 못한다. 선교나 목회를 하나님의 통치를 구현하는 사역이라기보다는 교회 확장으로 인식하는 교회 성장주의 선교관이 이와 부합하는 것이다. 이것의 유래는 서구 선교가 식민지 확장과 함께 진행되던 19세기 제국주의 선교에 있다. 식민지 백성들에게 기독교로의 개종과 교회 등록 외에 삶의 모든 영역에서의 제자도나 윤리적 회심, 사회의 구조적 불의에 대한 인식을 고취하지 않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 결과 오늘날까지 선교지에서 현장에서 교회개척, 전도와 수세자의 수적 성과 외의 것을 목적하기 어렵게 한다. 현실적으로 개종주의 선교관의 문제점은 아이러니하게도 개종을 얻어내는 전도사역에서 창의적 개발의 노력을 요구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5) 온정주의를 넘어서(upstream) 온정주의 비판은 간혹 오해되듯이 긍휼(mercy) 사역의 가치를 깎아내리는 것이 아니라 인간과 세계의 곤경에 대해 피상적인 인식과 임시방편의 시혜로 국한하는 것을 지적하는 것이다. 삶의 곤경을 야기하는 구조적 과정에 대한 통찰이 부재함으로 전도 대상자들과 공감대를 얻지 못하고 있으며, 그것의 원인인 불의한 구조에 대한 몰이해로 인하여 기독교 신앙의 정의와 긍휼 차원에 대한 인식도 선포도 이루어지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예를 들면, 최근의 한국 저출산 문제에 대하여 교계를 대표하는 위치에 선 인사들이 생육과 번성이라는 창세기의 말씀을 따라 혼인의 당위성을 강조하고, 출산 장려금 지급을 해법으로 제시한 적이 있었다. 소수의 상류층 외에 청년층의 대다수가 고용과 주거, 사교육의 심각한 부담에 결혼과 출산을 피하는 현실에 대해 공감도 사회과학적 인식도 부재한 모습을 보임으로써 교회는 반지성적이고 기득권의 이데올로기에 갇힌 집단으로 간주되기도 하였다. 6) 반지성주의에서 지성적 경건으로 복음주의는 신앙과 인격의 다양하고 복합적인 속성을 이해하는 것보다는 구원을 위하여 가장 필요한 것 한 가지(unum necessarium)만을 취하고 그것을 파수하는 입장을 선호해 왔다. 신학에서도 중세 카톨릭이나 개신교 정통주의의 사변신학을 거부하며 성찰적 사유보다는 초자연적 감성을 중시하였고 거기에 대중성이 결합하면서 복음주의는 반지성주의라는 정신적 경향성을 내장하게 되었다. 이것은 신학을 관념의 유희와 소모적인 논쟁 담론에서부터 벗어나게 하는 유익이 있었으나 치명적인 역기능을 낳았다. 기독교 신앙의 체계적 이해를 불가능하게 한 것이다. 복음은 본질적으로 대립의 복합(complexio oppositorum)으로 이루어져 있다. 사랑과 심판, 믿음과 행위, 하나님의 주권과 인간의 책임, 교회의 구심성과 원심성(모이는 교회와 흩어지는 교회) 등이다. 이 역설과 긴장 속에서 이루어지는 섭리를 시의성 있게 분별하지 못할 때 항상 성령의 인도에서 이탈하는 종교적 독단과 오류가 발생하였다. 반지성주의의 가장 심각한 역기능은 복음주의를 시대 상황의 인식능력이 결여된 탈역사의 신앙, 윤리-문화적 가치에 관하여 무관심이나 독단에 빠지는 탈윤리의 신앙이 되게 한 것이다. 최근 화제가 된 노벨상 수상 작가 한강을 깎아내리는 어느 목사의 주장과 그에 대한 열렬한 호응은 이러한 성향을 공공연히 드러낸 사건이었다. 문학의 기능과 효용에 대한 그의 부정적 견해는 문학의 구원과 신앙의 구원 사이의 범주 차이는 물론 기독교 문학 자체에 대한 무지에서 말미암은 것이었다. 종교가 박해받고 있던 구소련에서 톨스토이와 도스토옙스키의 작품은 설교와 예전이 부재한 상황에서도 러시아의 민족 문학의 지위를 인정받으며 지식인 사회에서 신앙부흥을 일으킨 바 있다. 그 외에도 단테의 《신곡》이나 존 밀턴의 《실낙원》은 물론 셰익스피어, 빅토르 위고, C. S. 루이스 등의 문학작품이 복음의 증거와 기독교 사상의 심화를 위한 방편으로써 작용한 예는 이루 다 열거할 수 없다. 중세의 스콜라 신학에서 종교개혁 신학으로의 급격한 전환은 어느 날 갑자기 학문적 신학 집단 토론의 결과로 일어난 것이 아니다. 종교개혁 전 단계인 르네상스의 기독교 인문주의 운동으로 시대의 지성 구조와 정신적 성향이 변화되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그것이 새로운 경건(devotio moderna)운동이 지향한 지성적 경건(learned piety)이었다.
7) 자본주의와의 동일시를 거부하는 변혁적 제자도(INFEMIT) 《넥스트 복음주의》의 저자 라승찬은 소비주의와 맘몬주의를 20세기 복음주의와 결합한 지배적 문화 이데올로기로 지적한다. 이것을 재진술한다면 복음주의는 기독교 신앙을 자본주의와 동일시했다는 점이다. 20세기 후반 이후 세계 자본주의는 사회적 합리성을 잃게 된다. 풍요 속의 빈곤, 고용 없는 성장, 부의 세습, 생태적 지속 불가능성, 사회적 유동성의 감소가 어느 시대보다 높아지며 전 지구적인 사회경제적 양극화를 낳고 종교화 즉 물신숭배로 치달아가게 된다. 기독교는 16세기 이래로 자본주의 형성 과정에서 도덕적 기반과 문명의 이상을 제시하는 역할을 했다. 과거에는 기독교가 자본주의와 동질성, 친화성을 인정받을 만한 이유가 있었으나 그 이유가 사라지게 된 것이다. 소비주의는 자본주의의 문화적 양식이며 소프트웨어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이 저항할 수 없는 지배적 세력이 되었다면 물신숭배, 즉 종교화한 것이다. 이러한 현상을 최근에 아감벤 등의 철학자들이 지적하고 있는데 흥미 있는 것은 이미 1920년대에 저명한 발터 벤야민(Walter Benjamin)의 저서다. 발터 벤야민은 《종교로서의 자본주의(Capitalism as Religion)》(1921)에서 자본주의라는 이념과 체제가 종교화되었을 때 기독교를 능가하는 힘을 발휘함을 지적한다. 1차 대전(1914〜1918) 당시 유명한 에피소드였던 ‘크리스마스의 기적’은 자본주의적 제국주의의 식민지 경쟁과 전쟁 속에서 기독교 신앙이 사탄의 체제 아래에서 하찮은 에피소드 수준의 효과밖에는 힘을 내지 못하고 있는 현실을 역설적으로 말해 준다. 벤야민은 이 저서에서 자본주의가 막스 베버가 지적한 것처럼 특정한 종교에 의해 형성된 이념을 넘어서 ‘본질적으로 종교적 현상’이라고 주장한다. 여기서 더 중요한 것은 종교개혁이 자본주의의 발생을 지원한 것을 넘어서 이후의 과정에서는 종교 자체가 자본주의화 되었다고 분석한다. 
이러한 문명 전환의 위기 속에서 21세기 version의 복음주의는
20세기 방식의 개종주의와 외형적 교회 성장을 대체할 새로운 목표를 설정하고 그것을 성취할 수 있는 실효성 있는 신학 콘텐츠를 생산할 수 있어야 한다. 이것을 위해 로잔운동의 흐름 속에 있었지만 일찍이 1980년대에 미국식 복음주의와 다른 길을 모색한 INFEMIT(Interantional Fellowship for Mission as Tranformation) 운동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INFEMIT는 변혁적 선교를 지향하는 선교운동가들의 국제적 협의체이다. 주로 중남미와 인도를 비롯한 비서구권 선교운동가들이 존 스토트의 후원 아래 결성되었다. 21세기 선교의 컨텍스트(context)를 지구적 양극화와 포스트모더니즘으로 인식하며 제자도 없는 선교에 대한 반성과 예수 따름의 급진적 제자도 전통을 되살리려는 지향을 갖는다. 변혁적 선교의 주요 개념은 화해와 총체성, 양극화 세계 속의 경제적 제자도 등이다.4) 5. 맺는말 1974년 로잔운동이 시작될 때에도 서구 중심 선교에 대한 모라토리움이 거론될 만큼 기독교 신앙은 위기를 겪고 있었다. 당시 로잔 언약은 복음의 총체성 개념으로써 이미 새로운 버전의 복음주의를 제시하였다. 그 이후로 만 50년 희년의 반세기가 지난 시점에서 우리는 교회와 선교의 난관 속에서 복음주의 신앙체계의 새로운 버전을 필요로 하는 상황을 맞고 있다. 이 글을 통해 나누려고 한 것은 첫째, 복음주의자들이 세상을 향해서 영적, 도덕적 영향력을 상실하고 정치적 힘을 발휘하려는 유혹에 빠져 있다는 사실이다. 둘째는 그 이유로서 복음주의자들이 자신이 가진 것이 무엇이고 갖지 못한 것이 무엇인가를 이해하자는 것이다. 즉 그리스도의 속죄 신앙을 중심으로 근원적 진리를 보유하고 있음을 자부하지만 복음주의는 세계관과 윤리적 가치, 문화 이념에서 성경의 권위를 추상 포괄적으로 내세울 뿐 실제 콘텐츠에서는 타종교에 비해 오히려 매우 '없어 보이는' 종교가 되었다. 그렇기에 세상의 가치와 이념에 쉽게 점령당하며, 특히 종교적 성향을 보이는 사람들을 이단들에 내어주고 있다는 점이다. 복음은 시대마다 어떤 지성 구조와 세계관을 장착하는가에 따라 세상을 향한 선교는 물론 자신의 신앙공동체를 형성하는 힘이 달라진다. 이 일을 위하여 시대의 영적 필요를 함께 발견하고 성찰하는 작업이 이루어지기 소망한다. ▨ 미주 1) Evangelicals: Who They Have Been, Are Now, and Could Be, by Mark A. Noll (Author), David W. Bebbington, G. Marsden (Eerdman,2019). 재인용. 2) 라승찬의 Next Evangelicalism은 총 3부로 구성되어 있다. 저자는 한국인 2세로서, 한국에서 태어나 어린 나이에 미국으로 이주하였으며, Golden-Conwell에서 목회학 석사를 Drew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교회 개척의 경험과 교회 사역을 경험한 후에 학교에서 가르치기 시작하였으며, 따라서 그의 책은 사변적이지 않고, 실제적이고 목회적이다. 현재는 Fuller Theological Seminary로 자리를 옮겨 전도 및 선교학 교수로 재직 중이다. 1. 서구 백인 문화에 포로된 교회(The Western, White Cultural Captivity of the Church) 2. 서구 백인 문화에 포로된 교회의 만연함 (The Pervasiveness of the Western, White Captivity of the Church) 3. 서구 백인 문화에 포로된 교회의 자유함(Freedom from the Western, White. Captivity of the Church) 라승찬은 실제적인 예와 더불어서 복음주의라고 불리는 교회들 안에 묻어 있는, 복음 이외의 것들, 특별히 서구, 백인, 남성, 중산층(Western, White, Male, Mid-class) 중심의 문화를 지적한다. 3) 구조적 불의에 희생되고 있는 약자를 주목하는 해방신학자들이 이 본문을 복음서의 최중요 성구로 지목한 것도 참조할 만하다. 4) 필리핀계 미국인 선교활동가 알 티존(Al Tizon)의 두 책을 소개한다. 《Whole and Reconciled》(2018, 총체성과 화해)와 《Christ among the Classes》(2023, 계급사회 속의 그리스도).
▨ 오형국 목사 | 청년신학아카데미 공동대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