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3.3  통권 259호     필자 : 강성열
[생태선교_함께 생명을 향하여]
생태환경과 구약성경

구약성경은 인간에 관한 이야기, 보다 구체적으로는 이스라엘 역사에 관한 이야기를 기록하기에 앞서 하나님께서 만드신 창조 세계에 관하여 이야기한다. 창세기 1장에서 하나님은 인간을 제외한 다른 모든 피조물을 말씀으로 창조하신다. 하나님의 창조는 엿새 동안 질서정연하게 이루어지고 있는데, 그 순서를 주의 깊게 들여다보면 첫째 날에서 셋째 날까지와 넷째 날에서 여섯째 날까지가 대칭 관계에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렇게 해서 만들어진 모든 피조물은 하나님이 보시기에 대단히 좋은 것들이었다. 창세기 1장은 하나님이 이처럼 아름답고 조화로운 세계를 인간에게 선물로 주셨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이 목적은 인간 창조에 대한 설명과 깊은 관계가 있다. 

창세기 1:26-28에서 하나님은 인간을 자기 형상을 따라 창조하시고 아울러 다른 피조물을 잘 관리하고 다스리게 하는 사명을 주신다. 이 본문은 인간이 다른 피조물들과는 비교될 수 없을 만큼 큰 복을 받았다는 점을 강조함으로써 인간이 하나님의 창조 사역의 클라이맥스에 해당하는 존재임을 밝힌다. 이러한 사실은 인간이 하나님이 심혈을 기울여 직접 만드신 피조물이라는 말씀(창 2:7, 22)에서도 잘 드러난다. 그러나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은 인간이 다른 모든 피조물의 왕으로 창조되었다는 사실이다. 인간이 앞서 만들어진 다른 피조물들을 다스리고 지배할 권한을 부여받았다는 것이 이 본문의 핵심적인 의미이다(참조. 시 8:4-8). 

그렇다고 해서 인간이 하나님의 창조 세계에 대해서 무제한의 지배권을 가지고 있는 것은 결코 아니다. 하나님이 인간에게 주신 왕권은 파괴와 수탈을 정당화하여 주는 통치가 아니라는 얘기다. 만일 그렇다면 그것은 자기가 만든 피조물들을 보기에 ‘좋은(히브리어로는 ‘토브’)’ 것으로 여기시던 하나님의 평가를 완전히 뒤집어엎는 것이 될 뿐만 아니라, 자연을 정복하고 다스리라는 명령이 복(福)의 형태로 주어지고 있음을 정면에서 부정하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창조 세계의 보기 좋음과 하나님의 복은 당연히 자연의 파괴와 착취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과 자연의 평화로운 공존을 뜻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최초의 인간 아담과 하와가 에덴동산에 있으면서 자연과 조화로운 삶을 산 것이 이를 잘 보여준다. 에덴에서의 삶은 누가 보아도 착취와 수탈 내지는 대결의 삶이 아니라 상호 공존과 의존의 삶이었다. 하나님이 에덴을 만드신 후 아담을 거기에 두고 그곳을 경작하며 지키게 하셨다는 사실(창 2:15)이 이를 입증한다.

이로부터 우리는 다음과 같은 두 가지 결론에 도달할 수 있다. 그 첫 번째는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자연을 다스리고 지배하라고 하신 것은, 한편으로 생각하면 은혜요 복이지만 다른 한편으로 생각하면 책임과 의무이기도 하다는 점이다. 하나님은 창조 세계의 관리와 보존을 인간에게 위임하셨다. 따라서 인간은 하나님의 대리인으로서 다른 피조물을 다스리되 위임자이신 하나님의 선한 뜻을 따라 자연 질서를 유지하고 보존해야 한다. 두 번째로 인간이 하나님의 아름다운 창조 세계를 잘 관리해야 한다는 것은, 인간이 자연에 대하여 청지기의 직분을 가지고 있음을 암시한다. 이것은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이 결코 인간의 것일 수가 없다는 것을 뜻한다. 왜냐하면 우주 만물은 하나님의 창조 주권에서 생겨난 것이요, 그러기에 그것들은 필연적으로 하나님의 것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처럼 하나님의 창조 세계는 인간의 관리를 받는 것으로 만들어졌다는 점에서 인간에게 의존하는 것이지만 그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즉 인간이 자연에 의존하기도 한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창조 세계를 만드실 때부터 자연이 인간의 생존 환경으로 인간에게 주어졌음이 이를 증명한다. 참으로 창조 세계를 떠난 인간의 삶을 우리는 상상할 수 없다. 창조 세계는 궁극적으로는 하나님께 의존하는 까닭에 인간이 없어도 존재할 수 있겠지만 인간은 창조 세계가 없이는 존재할 수 없는 것이다.

구약성경은 이처럼 하나님의 창조 세계인 자연과 인간이 서로에게 의존하는 운명 공동체임을 여러 군데에서 보여주고 있다. 이를테면 선악과를 따먹음으로써 하나님의 명령을 위반한 아담과 하와가 받는 저주는 인간의 운명이 자연에 깊은 영향을 주고 있음을 잘 보여준다(창 3:17-18). 노아 시대 사람들의 범죄 행태와 홍수 심판의 이유 역시 인간과 자연의 공동 운명을 강조한다. 인간의 범죄는 자연에 이르기까지 그 영향을 미치며 이에 상응하는 하나님의 심판도 범죄한 인간에게만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인간과 공동 운명을 가지고 있는 자연에 이르기까지 미치는 것이다(창 6:7, 11-12). 상황이 이러하기에 홍수 이후에 하나님이 노아와 맺은 언약은 당연히 하나님의 선한 창조 세계를 포함할 수밖에 없다(창 9:9-10). 

인간과 자연이 공동 운명에 속해 있다는 생각은 제도적이고 법적인 차원으로 확대된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토지(땅)를 묵히는 것에 관한 규정이다. 이러한 것에는 안식년과 희년의 두 가지가 있다. 안식년은 본래 모든 땅이 하나님의 것이라는 기본 전제에서 출발한 것으로서 땅을 묵히고(출 23:10), 채무를 면제하며(신 15:1-3), 종들을 해방(출 21:2-6)시키는 7년 주기의 국가적인 축제이다. 여기서 땅을 묵힌다는 것은 인간의 무절제한 욕망을 억제하는 한편 땅의 생산력을 회복시킴으로써, 인간의 더욱 나은 생존을 보장하려는 의도를 포함하고 있다. 그리고 묵혀둔 땅에서 자연적으로 생겨나는 수확물은 가난한 사람들과 짐승들을 위해 내버려 두어야 한다(출 23:10-11; 레 25:2-7).



50년 주기의 희년 제도 역시 땅의 휴식에 대해서 규정하고 있는 바(레 25:11-12, 18-22) 이 규정의 일차적인 의미는 가난한 자들을 구제하기 위한 것이지만, 토질을 보전하고 지력(地力)을 향상시킴으로써 인간과 자연이 똑같이 생존할 수 있는 길을 찾고자 하는 이차적인 목적도 가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는 결국 인간의 과도한 수확 욕구에 지친 땅을 쉬게 함으로써, 그 땅에 새로운 힘을 주고자 하는 의도에 다름 아니다. 그렇게 하지 않을 경우 지력의 감소는 결국 수확의 감소를 가져올 것이고, 수확의 감소는 마침내 인간의 삶을 빈곤하게 만들 것이기 때문이다.

1주일 간격으로 인간의 노동을 중단시킴과 아울러 자연의 일부인 짐승을 휴식하게 하는 안식일 계명도 마찬가지이다. 고대 사회에서 인간의 노동은 자연에 대한 직접적인 가공을 뜻했는데, 이러한 노동을 금하게 한 것은 결국 노동에 지친 인간을 회복시키는 치료의 의미를 가질 뿐만 아니라, 인간에 의하여 가공된 자연을 회복시키는 생태학적 의미를 가지는 까닭이다. 이로써 인간과 인간, 인간과 자연 사이의 창조적인 사귐이 회복되는 바 안식일 계명은 창조 세계에 감추어진 이 중요한 의미를 사람들에게 정기적으로 상기시켜 주는 셈이다(출 20:8-11; 23:12; 신 5:14). 추수할 때 곡식을 떠는 짐승의 입에 재갈을 물려서는 안 된다는 규정도 같은 맥락에 속한다(신 25:4). 곡식을 떠는 짐승의 입에 물려 있는 재갈
을 풀어주어야만 그 짐승이 땅에 떨어진 곡식을 배불리 먹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렇듯이 하나님의 창조 세계 안에서 인간과 자연은 상호 의존 관계 속에서 더불어 살도록 만들어졌다. 그러나 인간과 자연 사이의 이상적인 관계는 창조 직후부터 깨뜨려진다. 인간의 잘못된 행동과 죄악으로 인하여 자연은 본연의 아름다움을 상실한 채로 오염되고 부패한 모습을 보이며, 인간의 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으로 인하여 인간과 똑같이 저주와 파멸의 고통을 겪는다. 하나님을 향한 인간의 범죄 행위는 계속해서 자연계의 조화와 질서를 위협하다가, 마침내는 인간과 자연을 포함한 모든 현재적인 질서를 무너뜨리는 대파국을 맞게 된다. 

그러나 하나님은 자신의 아름다운 창조 세계가 인간의 죄와 그에 대한 심판으로 인하여 허망하게 무너지게 하지는 않으신다. 심판과 파멸로 모든 것이 끝장나는 것은 아니라는 얘기다. 이러한 사실은 파멸 이후의 새로운 창조 세계에 대해서 말하는 예언자들의 종말론적인 메시지에서 확인된다. 예언자들이 하나님의 심판이 끝난 후에 새로운 창조 세계가 전개될 것임을 선포하는 바의 변화된 그 세계는 철저하게 하나님의 구원 은총에 기인한 것이다. 사실 하나님이 인간과 자연의 왜곡된 관계를 그냥 두지 않고 심판을 통해서 그 둘 모두를 벌하시는 것은, 인간과 자연 모두를 죄의 권세 아래에서 해방시킴으로써 새로운 창조 세계를 건설하기 위해서이다. 그 까닭에 예언자들은 인간의 파멸과 창조 세계의 붕괴가 미래의 새로운 질서를 창조하기 위한 하나님의 분명한 목적과 계획 속에서 이루어짐을 강조한다. 

그 가장 대표적인 예를 우리는 호세아에게서 찾아볼 수 있다. 북왕국 예언자인 호세아는 심판 후에 있을 하나님의 구원 은총을 언급하면서 하나님이 이스라엘과의 관계를 회복하실 때, 홍수 후에 노아와 그의 가족을 포함한 모든 피조물과 우주적인 계약을 맺은 것처럼 이스라엘을 위하여 모든 피조물-더 정확하게는 들짐승과 공중의 새와 땅의 곤충-과 더불어 우주적인 계약을 맺으실 것이라고 말한다(호 2:18). 아울러 호세아는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자녀 출산과 인구 증가(호 1:10-2:1) 및 민족 갱신(3:5) 등의 복을 넘어서서 자연 질서의 회복과 풍요로운 농산물 수확으로 귀결되는 새로운 창조의 복을 주실 것임을 강조한다(2:21-22). 

생태학적인 의미를 갖는 호세아의 이러한 구원 메시지는 이사야에게서도 똑같이 발견된다. 마지막 날에 있을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이사야의 묘사(사 11:1-9)는 하나님의 새 창조가 어떠한 모습을 가지고서 나타날 것인가에 대하여 상세하게 언급한다. 이 본문에서 이사야는 종말에 있을 하나님 나라를 하나님의 공의와 자비와 평화가 넘치는 나라(11:1-5)로, 그리고 인간과 자연이 한 몸을 이룬 가운데서 기쁨과 즐거움을 함께 나누는 세계(11:6-9)로 묘사한다. 요컨대 하나님이 회복하실 새로운 창조의 세계는 인간과 자연이 서로를 인정하고 존중하는 조화로운 상호 공존의 세계, 모든 피조물 사이에 사랑의 사귐과 나눔이 있는 평화의 세계, 눈물과 고통과 죽음이 없는 생명의 세계 그리고 하나님의 구원이 인간과 자연 모두에게 골고루 임하는 세계가 될 것이라는 말이다. 



{생태적 삶을 위한 기도}
   _김준표 | 기독교환경운동연대 집행위원장, 손잡는교회 목사


주님, 이미 많은 것을 가졌는데도
소유 욕망을 멈추지 못하는 저희를 용서하소서.

내 손에 쥔 것을 소중히 품고 나누기보다,
곁눈질로 타인과 비교하며 불만 가득한 삶을 살고 있습니다.

기후위기와 코로나 팬데믹이 자연에 대한 인간의 남용과
지나친 욕심에서 왔음을 여전히 깨닫지 못하고 있습니다.

더 많이 소유하고, 부러움 없이 소비하고,
과감하게 버리는 것이 행복하고 축복된 삶이라 착각하고 있습니다.

주님, 회개합니다. 이제는 우리의 죄악에서 돌아서게 하소서.

무한경쟁에서 패배자로 낙인찍혀 고통 받는 이웃들과 생태계 파괴로 신음하는
피조세계를 향해 손 내미는 저희가 되기 원합니다.

이제는 모든 거짓된 욕망을 버리고,
배설물만 가득 남기는 소비사회 환상에서 깨어나게 하소서.
순환하며 정화되는 자연의 이치가 진리임을 깨닫게 하소서.

이웃, 자연과 더불어 공생하는 삶이
주님이 우리를 빛으로 이끄는 지속가능한 삶임을 알게 하소서.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가 공동체의 삶을 깊이 고민하고,
자연과 이웃의 고통에 함께하는 사랑의 길에 앞장서게 하소서.

기후재난으로 삶의 자리에서 쫓겨나고 쓰러지는
이 땅의 약자들을 기억하고 보호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사진 출처 | 픽사베이
♠강성열 | 호남신학대학교 구약학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