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콩의 신인 여성 감독 쩡셴닝(曾宪宁)의 첫 장편 영화이다. 대만 출신 배우 장아이자(张艾嘉)는 이 영화로 2022년 제59회 대만영화제 진마장(金馬獎)에서 36년 만에 세 번째 여우주연상을 수상하였다. 장아이자는 양찬뱌오(杨灿镳)의 역을 맡은 런다화(任达华)와 부부로 나오는데, 두 사람은 1982년 영화 《야경혼(夜驚魂)》 이후 40년 만에 호흡을 맞춰 주목받았다. 홍콩연출예술대학(香港演藝學院)을 졸업하고 양찬뱌오의 도제(徒弟) 역할을 한 저우한닝(周汉宁)은 지난해 제41회 홍콩영화제 진샹장(金像獎)에서 신인연기상 후보에 올랐다. 배우들의 명연기 또한 빛을 발해 관객들에게 울림을 던졌다.
홍콩 하면 쇼핑천국, 야경, 딤섬 등을 떠올리게 마련인데 특히 네온사인으로 화려하게 수 놓인 홍콩의 밤은 세계적으로 유명하다. 영화는 홍콩의 네온사인 간판에 얽힌 아름다운 추억과 그리움을 이야기한다. 네온사인 간판 제작을 평생의 업으로 삼았던 양찬뱌오가 죽자, 아내 장메이샹(江美香, 张艾嘉 분)은 잠을 이루지 못한다. 어느 날 우연히 세탁을 하다가 남편의 바지 주머니에서 열쇠를 발견하고는 공장에 갔다가 남편의 제자 리아오(利奧, 周汉宁 분)가 자살 시도하려는 것을 막는다. 장메이샹은 리아오에게 남편이 생전에 작업을 끝내지 못한 네온사인 간판이 있었다는 말을 듣고 간판을 주문한 사람들을 만나게 된다.
양찬뱌오와 장메이샹은 네온사인 인테리어 디자인이 있는 클럽에서 데이트를 하고, 양찬뱌오는 장메이샹의 생일날 네온사인 간판 앞에서 청혼을 하며 네온사인 간판이 깜빡이면 소원이 이뤄진다는 농담도 하였다. 두 사람의 만남에서 사별까지 온통 네온사인에 관한 이야기들로 가득하다.
남편은 바쁠 때면 매일 열 몇 시간씩 꼬박 6개월을 매달려 네온사인 간판을 완성하였다. 네온사인 간판업이 사양길로 접어들면서 장메이샹은 남편 양찬뱌오에게 LED 간판으로 제작하지 않는다고 잔소리도 하였고, 심지어 택시 기사로 전업할 것을 권했다. 양찬뱌오는 딸 차이홍(彩虹, 蔡思韵 분)이 대학에 합격하자 정부 지급 학자금 대출을 알아보라고 한다. 그러나 아내는 딸이 대학에 합격했는데 돈을 빌려서 다녀야겠냐고 핀잔을 주었다. 또 남편은 간판을 납품하고서도 주문자에게 대금 결제를 독촉하지 못하고, 오히려 경기가 좋지 않아서 그렇다며 아내에게 핑계를 댔다. 결국 남편은 많은 빚을 남겼다.
어두우면 잠을 이루지 못하는 아내 장메이샹이 침대 위에 네온등을 켜 놓고 잠들면 남편 양찬뱌오가 등을 끄고 잠자리에 들곤 했다. 나중에 양찬뱌오가 죽고 나서 네온등이 망가지자 리아오가 고쳐 주었다.
부모를 일찍 여의고 외할머니와 산 리아오는 가정이나 학교에서 발붙일 곳이 없었다. 그런 리아오에게 스승 양찬뱌오는 네온사인을 만드는 데 재주가 있다며 학교도 제대로 다니지 못한 그에게 네온사인 장인(匠人) 졸업장을 주겠다고 약속했다.
리아오는 외할머니의 기일에 바닷가에 가서 지전(紙錢: 돌아가신 분에게 드리는 종이돈)을 뿌렸는데, 함께 온 장메이샹은 리아오에게 앞으로 외할머니를 보러 올 때 자신과 남편도 함께 보러 올 수 있겠냐고 물었다. 장메이샹의 이 말에는 남편을 잃은 아내의 상실감과 더불어 누군가 그들을 기억해 주길 바라는 소망이 담겼다.
생각해 보면 남편은 “간판이 있어야 장사가 잘된다”고 했다. 이는 ‘불빛이 있는 곳에 사람이 있다’는 것이다. 상점 주인이나 네온사인 제작자는 가게 밖에 걸린 간판이 오색영롱한 빛을 발할 때 도시의 손님들이 모여들어 가게 장사도 잘된다고 믿었다.
장메이샹은 남편이 철거된 네온사인 간판을 다시 만들고 싶어 했다는 말을 듣고, 생전 남편의 소원을 이루어 주기 위해 리아오에게 네온사인 간판 제작을 배우기 시작한다. 장메이샹은 유리관에 불을 붙이다가 손에 화상을 입기도 하고, 유리관에 손을 베이기도 했다.
남편은 생전에 철거반 사람들에게 네온사인 간판을 떼려면 자신을 먼저 제거하라고 소리 질렀다. 장메이샹은 리아오와 함께 남편 양찬뱌오가 제작한 가게의 간판을 수리하러 갔는데, 철거반이 가게의 네온사인 간판을 철거하려고 하자 옥상에서 강력하게 저항했다. 예전에 부부가 네온사인 간판이 철거되는 것을 차마 지켜보지 못하고 죽기를 각오하고 지키려고 했던 기억이 났다.
장메이샹은 외동딸 차이홍이 회사의 동료 건축가인 남자친구 로이(Roy, 麦秋成 분)와 3년이나 교제하고도 남편이 죽은 뒤에나 집에 데려온 것이 내내 섭섭했다. 딸이 남자친구와 결혼한 후 함께 호주로 이민 가서 창작생활을 맘껏 하고 싶다고 하자, 장메이샹은 머리가 어지럽다고 자리를 피한다. 딸은 엄마는 자신이 대학 시절 교환학생으로 선발되었을 때도, 방학에 알바를 한다고 했을 때도 머리가 어지럽다고 했다며 짜증을 냈다. 아빠 양찬뱌오도 생전에 사람들에게 딸을 시집보내는 것은 못내 아쉬울 것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리아오는 철거된 간판을 다시 제작해서 스승 양찬뱌오 생전의 소원을 들어주려고 SNS에 모금운동을 시작했다. 작업실 임대료와 제작 비용 등을 마련하기 위해 리아오는 장메이샹과 함께 후원을 호소하는 동영상을 찍어 올렸다.
딸 차이홍은 엄마 장메이샹과 아버지의 제자 리아오가 네온사인 간판을 제작하는 것에 대해 리아오에게 불만을 토로했다. “간판을 만들면 어디에 설치할 거야? 건물주의 동의를 받았어? 건축물 조례는 어떻고? 소규모 공사 인허가는 알기나 해?” 아버지가 일하던 과거와는 다른 작업 환경의 변화에 대해 지적했다. 하지만 딸은 “아빠는 간판을 지켰으니 너는 집을 지켜야 해”라는 돌아가신 아버지의 목소리가 어디선가 환청처럼 들리면서 울먹였다.
딸의 남자친구가 양찬뱌오 생전에 전당포에 저당 잡혔던 나무상자를 장메이샹에게 건넸다. 상자에는 류먀오리(刘妙丽) 여사에게 보내는 편지가 들어 있었다. 장메이샹은 중년의 여성 류먀오리를 만난다. 류먀오리는 기억력을 잃어가는 남편에게 과거의 기억을 되살리고자 먀오리라는 이름을 넣은 네온사인 간판을 만들어 달라고 부탁한다. 크기가 크고 문양이 복잡해서 양찬뱌오의 동료 제작자의 도움을 받아 제작한다.
건축가인 차이홍과 그녀의 남자친구 로이는 제작하려는 네온사인의 간판이 법규에 벗어나 옥외에 설치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고도 함께 제작에 참여한다. 장메이샹은 리아오에게 양찬뱌오가 주겠다던 졸업장을 건네준다. 류먀오리는 남편에게 먀오리 네온사인 간판을 보여주면서 감격에 젖는다. 하루밖에 볼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도 네온사인 간판을 제작해서 옥상 한 켠에 세우고 단체 사진을 찍으며 모두가 행복한 미소를 짓는다.
슬픔에 빠진 장메이샹에게 ‘단원인장구(但愿人长久)’라는 죽은 양찬뱌오의 환청이 들렸다. 이는 북송 시대 소동파의 사(詞) 〈수조가두(水調歌頭)〉 구절에서 유래한 것이다. “다만 건강하게 오래 살기를 바란다”는 기원을 담은 내용이다. 차이홍은 ‘백년해로(白頭偕老)’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는 오래된 빗으로 어머니 장메이샹의 머리를 빗겨 주었다. 이 장면은 남편이 생전에 아내의 머리를 염색해 주던 모습과 교차한다. 여성 감독은 홀로 남은 장메이샹의 비애를 고전 시가와 성어를 인용해서 섬세하고 함축적으로 표현했다. 두 부부 중 한 사람은 남편을 여의고, 한 사람은 남편이 기억 상실증에 걸렸다. 장메이샹과 류먀오리 두 여성은 치료와 회복, 재건에 애쓰는 홍콩 어머니들의 모습처럼 보인다. 이 여성영화는 홍콩 여성의 노력과 의지를 부각했다.
영화는 ‘만가등화(万家灯火)’라는 글씨가 쓰인 네온사인이 등장한다. 수많은 집의 등불이란 뜻으로 불야성인 홍콩의 야경을 함축하고 있다. 네온사인은 홍콩의 화려한 과거의 영광과 번화한 도시의 상징이다.
이 영화는 양찬뱌오의 역을 맡은 런다화가 출연했던 홍콩영화 《세월신투(岁月神偷, Echoes Of The Rainbow, 2009)》를 떠오르게 한다. 1960년대 중국 본토에서 홍콩으로 이주해 온 가족의 삶의 분투를 그렸다. 《세월신투》가 복고와 회상에 초점을 맞췄다면 이 영화는 상실과 회복, 재건에 관한 이야기로 풀어나갔다.
영화의 중국어 제목은 남송 시대 대표 사인(詞人) 신기질(辛棄疾)의 〈청옥안(青玉案)·원소절(元夕)〉에서 유래하였다. 중국의 대표 포털사이트 바이두(百度)의 명칭 또한 여기에서 기원한다. 신기질의 〈청옥안〉 하편(下片)의 세 번째 구절을 보면 다음과 같다. “인파 속에 임을 천백번 찾아 헤맨다. 홀연 돌아보니, 그분이 계시네, 등불 희미한 곳에(眾裡尋他千百度. 驀然回首, 那人卻在, 燈火闌珊處).”
영화의 중국어 제목은 스러지는 불빛에 대한 아쉬움을 말한다면, 영화의 영어 제목은 홍콩의 네온사인은 사람들의 마음속에서 영원히 꺼지지 않는 불빛으로 기억될 것이라고 말한다. 홍콩 사람들의 집체(集體)기억은 역사처럼 불멸할 것이라고 믿고 있다. 쩡셴닝 감독은 “영화는 서로 다른 차원의 상실을 표현했으며, 과거 네온사인이 찬란하고 번화했던 홍콩을 대형 스크린에 재현하고 싶었다. 사물들이 어쩔 수 없이 사라지지만 영상은 영원히 남길 수 있다고 생각했고, 영상으로 홍콩의 색다른 역사를 쓰고 싶었다”고 토로했다.
영화의 끝부분에는 네온사인 제작자와 그들이 제작한 간판들을 열거하는 데 심혈을 기울였다. 이 영화는 홍콩의 찬란한 등불에 일생을 헌신한 네온사인 장인들에게 바친다는 자막을 띄웠다. 네온사인 제작자를 ‘장인’이라 부르며 예술가로 인식하였다. 인빙광(尹炳光), 류인(刘稳), 황젠화(黄健华), 탕궈샹(唐国祥), 산성밍(单圣明), 화거(华戈),후즈카이(胡智楷) 등의 장인을 소개하였다. 기네스북에 등재되었던 세계 최대 규모의 네온사인 간판, 서양에서 수입된 제작 도구와 개량의 노력, 홍콩 네온사인의 외국으로 기술 전파, 철거 시기 등도 설명하였다. 1980-90년대에 홍콩에는 100여 명의 네온사인 제작자와 300여 곳의 제작소가 있었는데 LED의 보급으로 홍콩 네온사인 간판의 90%가량이 철거되었다고 한다. 건물의 안전을 이유로 2014년부터 홍콩특별행정구의 옥루서(屋宇署: 건축물 관리기관)는 《건축물조례(建筑物条例)》에 따라 안전이 우려되고 규정에 어긋난 네온사인 간판을 대규모 철거를 단행했다.
홍콩의 네온사인 제작자는 예술가와 협업하면서 네온사인은 예술품으로 변모하고, 미술관에 전시되고, 3D 조소(彫塑)기술 등 독창적인 창작 방식을 선보이고 있는데 이들은 후진 양성이 활성화하기를 기대하였다.
네온사인 간판은 LED로 교체되고, 신설된 법규와 더불어 상점은 간판보다 인터넷 댓글에 더 신경을 쓰게 되는 시대의 흐름과 도전과 마주하였다. 네온사인이 휘황찬란했던 과거의 영광과 번화함은 새로운 변화에 직면하게 되었다. 영화에는 홍콩인들의 자부심과 긍지가 농후하다. 이러한 기억을 후대에 전해주고자 하는 역사적 사명감이 비장해 보인다.
♣김영철 | 한양대학교 중국학과 교육전담교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