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7.3  통권 239호     필자 : 김종건
[중국기독교회사]
중국 의례논쟁 (2)

매그로의 금령과 논쟁의 확산 

1684년 프랑수아 팔루(陸方濟, François Pallu, 1626-1684)를 수행하여 중국에 온 파리외방전교회(巴黎外邦傳敎會)의 샤를 매그로(颜珰, Charles Maigrot, 1652-1730)는 1687년에 복건(福建) 종좌대목(宗座代牧)으로 임명되었다. 그는 1693년 3월 26일자 목회 서신을 통해 자신이 관할하는 교구는 7개 조의 금령을 준수할 것을 명했다. 즉, 하나님에 대한 칭호를 오직 ‘천주(天主)’만을 사용할 것, 교당 안의 ‘경천(敬天)’ 편액은 2개월 안에 떼어 낼 것, 교황 알렉산더 7세 때 마르티니가 요청한 의례안을 따르지 말 것, 공자와 조상에 대한 제례 금지, 죽은 자를 위해 세운 위패를 제거하거나 위패 위의 ‘신(神)’이나 ‘영(靈)’이라는 글자만이라도 제거할 것, 중국 철학과 천주교의 가르침은 다르지 않다거나 중국 성현을 신성시하거나 경전을 윤리 강령이라고 보는 등의 표현은 신중히 다룰 것, 무신론이나 이단 사설이 들어 있는 서적을 통해 천주교의 가르침에 저촉하지 말 것 등이다.


이 지시를 예수회 선교사들은 따르지 않았고, 매그로는 이를 무시한 예수회 신도 두 명을 제명하였고, 많은 신도들이 매그로를 지지하는 선교사들과 논쟁을 벌였다. 예수회 선교사들은 이런 논쟁을 계속하면 선교에 지장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예수회 선교사 콩트(李明, Louis le comte, 1655-1728)를 로마로 보내어 중국 선교정책을 설명하게 했다. 콩트는 1696년 《중국현황록(Nouveau mémoire sur l'état présent de la Chine)》을 출판하여 중국인은 도덕적이고 순수한 반면 유럽인은 부패하고 타락했다고 지적했다. 그러나 이 책이 출판된 뒤 네덜란드의 얀센파(Jansenism) 등 유럽 각 수도회와 학술계는 예수회를 상대로 반박 논쟁이 격화되었다. 오히려 개신교 신학자 라이프니츠(Leibniz)가 중국의 공자 숭배는 종교적 숭배가 아니라며 예수회 선교사를 변호했다. 1700년 파리대학의 신학자들이 30여 회 토론을 거친 뒤 마침내 10월에 매그로를 지지하며 중국 의례를 반대하는 선언을 채택했다. 


중국의 예수회 선교사들은 사람을 로마에 파견하여 변증하게 하는 동시에 의례논쟁을 직접 강희제 앞에서 제기하기로 하였다. 1700년 11월 19일 그리말디(閔明我, Philippus Maria Grimaldi, 1639-1712, 이탈리아), 토마스(安多, Antoine Thomas, 1644-1709, 벨기에), 페레이라(徐日升, Thoma Pereira, 1645-1708, 포르투갈), 제르비용(張誠, Jean-François Gerbillon, 1654-1707, 프랑스) 등이 강희제에게 만주문자로 공자에 대한 제사는 스승에 대한 예이고, 조상에 대한 제사와 위패도 효를 다하는 자세이며, 교사(郊社)의 전례도 하늘을 섬기는 것일 뿐이라 생각하고 있음에 대한 가르침을 구하는 청원서를 보냈다. 강희제는 청원서에 쓴 내용이 심히 좋고 큰 도(道)와 일치하며, 경천(敬天), 사군친(事君親), 경사장(敬師長) 등은 천하의 보편적인 도리로서 바꿀 것이 없다고 답했다. 


1704년 11월 13일 교황청 성직부의 회의가 열렸고, 11월 20일 다시 최종 회의가 개최되었다. 교황 클레망(Clemens) 11세는 중국의 의례를 행할 수 없다는 성직부의 결론을 비준했다. 1715년 3월 19일 클레망 11세는 이전 조칙 내용을 거듭 확인했다. 요지는 대략 다음과 같다. 천지 만물의 주를 천이나 상제가 아닌 천주라고만 칭하고 경천 편액은 걸지 말 것, 공자와 조상에 대한 연례적인 제사, 1일과 15일의 공묘 의례, 사당의 모든 의례 등은 우상숭배이므로 용인하거나 참여하지 말 것, 위패를 금하지만 세우고 싶으면 이름만을 쓰고 천주교의 가르침을 위패 옆에 새겨 둘 것 등이다.


투르논의 ‘남경명령’과 혼란 

교황 클레망 11세는 중국의 의례를 금지하는 금령을 발표한 뒤 투르논(多羅, Msgr. Charles Thomas Mailard de Tournon, 1667-1710) 추기경을 대표로 하는 사절단을 중국으로 파견하였고, 그들은 1705년 4월 3일 광주에 도착했다. 북경 주교 프란시스코 선교사 델라 키에사(伊大仁, Bernardino della Chiesa, 1644-1721, 세례명 Antonio, 이탈리아)는 즉시 투르논에게 편지를 써서 중국 황제는 선교사 가운데 예수회 선교사 페레이라를 신임하고 있다고 전해 주었다. 투르논은 북경의 예수회 선교사에게 대신 황제에게 상주(上奏)하여 알현을 요청해 달라고 부탁했다. 


강희제는 7월 20일에 투르논이 북경에서 황제를 알현하는 것을 비준하고, 12월 31일(강희 44년 11월 16일) 제1차 투르논 일행을 접견했다. 투르논은 강희제를 만났을 때 갈등을 피하기 위해서 금령에 관한 일은 입에 담지 않고, 다만 교황을 대표하여 강희제에게 선교사들을 예우하며 보살펴 준 은혜에 감사의 뜻을 보이기 위해 중국에 왔다고 말했다. 그리고 그는 중국에 총주교(總主敎) 한 사람을 임명하고 싶다는 의견을 제시했고, 강희제는 오랫동안 중국에 거주하며 조정 사무를 잘 알고 있는 인물이어야 감당할 수 있을 것이라고 답했다. 


강희제는 1706년 6월 29일 두 번째로 투르논을 접견할 때, 서양 선교사들은 중국에 온 뒤 황제의 보호를 받으며 공적인 일에 성실하고, 법령을 충실히 지키며, 중국의 의례를 존중해 왔음을 강조하면서 공자와 조상 제사를 반대하는 서양 선교사는 중국에 거주할 것을 바라지 말라고 명시했다. 강희제는 12월 31일 중국에서 선교활동을 하는 선교사들은 반드시 내무부(內務府)의 ‘인표(印票)’를 받게 하였다. 강희제 앞에서 한 번도 교황 교지의 핵심 내용을 꺼내지 않은 투르논은 남경에 도착한 뒤 강희제가 선교사에게 인표 수령을 요구한 사실을 전해 듣고 나서 1707년 1월 25일 중국교회에 목회 서신을 보냈다. ‘남경명령’이라고 불리는 이 서신은 공자와 조상에 대한 중국의 의례를 금지한 교황청의 칙서 내용을 선포하는 것으로 2월 25일 정식으로 공포되었다. 이를 지키지 않는 자는 교직을 박탈할 것을 명시하면서 파란을 예고했다.


중국의 예수회는 즉시 로마 교황청에 투르논의 명령 철회를 요청하는 청원서를 22명의 선교사가 연명으로 작성하여 보냈다. 강희제는 자신과 맞선 투르논을 마카오의 포르투갈 예수회 선교사에게 보내 연금(軟禁)하였다. 마카오 주교는 고아 총주교의 묵인 아래 목회 서신을 발표하고 투르논의 특사로서 권한을 인정하지 않았다. 이에 대응하여 투르논은 교황 특사의 신분으로 마카오 주교의 성직을 박탈하였고, 로마 교황은 투르논의 입지를 강화하기 위해 그에게 추기경이 쓰는 붉은색 모자를 보냈지만, 투르논은 중병에 걸려 반년 후 마카오에서 죽음을 맞았다. 


투르논의 남경명령과 예수회의 반대 청원서가 모두 로마 교황청으로 보내졌으나, 교황 클레망 11세는 1715년 3월 15일 유명한 칙서 ‘이 날로부터(Ex illa die)’를 발표하여 투르논의 목회 서신에 대해 지지를 표시하였다. 그러나 동시에 중국에 파견된 모든 선교사와 교직자들은 민간이나 정치적 성격의 순수한 의례 그리고 미신의 혐의가 없는 의례는 용인할 수 있고, 의심스러운 것은 순시원, 종좌대목 혹은 주교가 결단하도록 한다는 내용도 추가하였다. 그러나 이 칙서가 중국에 도착하면서 중국교회에 대혼란을 야기한다. 







사진설명 | 매그로(颜珰)가 반포(颁布)한 금령

사진출처 | 바이두

김종건 | 대구한의대학교 기초교양대학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