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6.3  통권 226호     필자 : 김수민
[나는 MK입니다]
하나님은 비극 작가가 아니십니다, “수민아, 기죽지 마!”

중국 학교에서 겪은 이야기
김포공항에 한 아이의 울음소리가 울려 퍼진다. 3살짜리 아이가 친구와 헤어지기 싫다고 생떼를 부리고 있다. 내가 기억하는 첫 번째 헤어짐의 아픔이다. 1996년 내 나이 3살, 부모님을 따라 중국으로 가게 되었다. 그래서 나는 한국어와 중국어를 자연스레 함께 사용하며 자랐다. 

유치원 시절 나는 부모님과 헤어지는 게 싫어서 항상 울고불고했던 것 같다. 어린 나이에 처음으로 시작하는 사회생활인데 그마저도 중국 유치원에서 하게 되었으니, 마음이 늘 몹시 불안했다. 선생님이 말씀을 하실 때도 잘 알아듣지 못해서 이리저리 슬슬 눈치를 보며 다른 아이들이 하는 대로 그저 따라했다. 그중에서도 낮잠 자는 시간이 제일 고통스러웠다. 잠이 오지 않아 눈을 뜨고 있으면 선생님께 한소리를 듣는다. 그리고 그때 주변 친구들이 모두 곤히 잠이 들면 나는 한없는 불안과 외로움을 느꼈었다. 이것이 나의 유치원 시절의 기억이다. 

좀 더 자란 초등학교 시절은 유치원 시절의 기억보다 더 선명하다. 그 학교에서 나는 유일한 한국인이었다. 담임선생님은 이러한 나의 국적에 대한 관심은 있었지만 배려는 해주지 않았다. 중국어 수업 진도를 따라가는 데에 힘겨워하는 나에게 돌아온 것은 야단과 체벌이었다. 제한된 시간 안에 수학 문제를 풀어야 했다. 그런데 나는 선생님을 만족시켜 드리지 못했고 선생님은 반 아이들 앞에서 보란듯이 내 공책을 찢고 뺨을 때렸다. 

그 순간 나는 그저 죄송한 마음뿐이었다. 모든 것이 다 내 잘못으로 여겨져서 더 잘 해야겠다고 다짐했다. 선생님이 가끔가다가 나를 칭찬할 때가 있었다. 나처럼 공부 못하는 친구들에게 면박을 줄 때 말이다. 선생님은 항상 공부 못하는 친구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저기 저 한국 애도 이 정도는 하는데 너는 중국 애가 더 못하는 게 창피하지도 않니?”라는 말을 들었을 때 칭찬받는 기분이 들어 기분이 좋기도 했다. 

그 날도 선생님께 야단을 맞았다. 무엇 때문인지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선생님은 학교에 부모님을 모시고 오라고 하셨다. 담임선생님은 부모님과 나를 데리고 교장실로 들어갔다. 그리고 교장선생님 앞에서 우리 부모님께 나를 학교에 그만 다니게 하라고 강력하게 말했다. 아무래도 유일한 한국인인 내가 선생님에게 골칫덩어리였나 보다. 그날 집으로 돌아오면서 나는 아무렇지도 않은 척했다. 

엄마는 거듭거듭 말씀하셨다. “수민아, 기죽지 마!” 그 당시에 나는 정말 아무렇지도 않다고 생각했다. 엄마가 왜 나에게 이런 말씀을 하는지 이해가 잘 안 됐었다. 그런 일을 당하는 게 나에게는 별로 대수롭지 않은 일반적인 일이었으며, 다른 게 있다면 교실이 아닌 교장실에서 부모님과 함께 그런 이야기를 들었다는 것이다. 나는 정말 아무렇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까지도 내 마음속에는 “수민아, 기죽지 마” 하고 말씀하셨던 어머니의 어조와 표정이 생생하게 기억난다. 그냥 그때 아무렇지도 않은 척하지 않고 엄마한테 안겨 실컷 울었으면 어땠을까.

어린 시절 나는 자존감이 낮고 열등감에 시달렸다. 자신감이 없는 아이였다. 사람들은 이런 나를 보고 참 착하다고 했다. 나는 내가 정말 착한 줄 알았다. 내가 다녔던 초등학교는 규율이 굉장히 엄격했다. 수업 시간에는 항상 정자세를 해야 하고, 발표를 하기 위해 손을 들 때는 책상에 팔을 붙이고 들어야 했다. 체육 시간에는 주로 운동장을 돌면서 제식훈련을 했다. 그때 참 많은 구호를 외쳤던 기억이 새록새록 새롭다. 

그리고 복도를 걸어 다닐 때에는 벽에 바싹 붙어서 일렬로 걸어 다녀야 했다. 어느 날 쉬는 시간에 친구와 함께 일렬로 복도를 걷다가 서로 장난을 치게 되었고, 그 순간 우리는 규율을 어기고 두 줄로 걷게 되었다. 그때 고학년 선도부에게 걸리게 되었고, 그 형은 이름을 적기 위해 우리를 불러서 옆으로 튀어나온 사람이 누구냐고 물었다. 나는 내가 하지 않았지만 내가 장난을 쳤고, 옆으로 튀어나온 사람이 나라고 친구를 위해 희생하려고 했다. 그리고 선도부 형은 나를 남기고 그 친구는 보내주었다. 친구는 웃으면서 가버렸다. 내가 기대했던 것은 친구도 함께 장난치다가 그런 것이라며 자기 잘못이라고 하며 서로 희생하려고 하는 모습에 선도부 형이 한 번 봐주며 보내주기를 기대했다. 그러나 내 예상은 빗나갔고, 순간의 분한 감정과 억울함이 밀려와 그 자리에서 눈물을 흘렸던 기억이 있다.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그 당시는 스스로를 억압하고 있었던 것 같다. 모든 일들이 다 내가 잘못해서 생긴 것만 같았다. 나를 억압하는 주변 환경에 익숙해져서 내가 스스로를 억압하고 있었나 보다. 그리고 그때 순간적으로 느낀 깊은 분노와 참을 수 없는 억울함 그리고 수치를 느끼고는 그렇게 울었나 보다.

부모와 친구 관계에서 일어난 이야기 

중국 사람들은 아빠의 직업에 대해 항상 나에게 물어 왔다. 그때 무어라고 대답을 해야 할지 참 곤란했다. 왜냐면 부모님은 나에게 절대로 그 누구에게도 심지어 친한 친구에게도 부모님이 ‘선교사’라는 말을 해서는 안 된다는 교육을 하셨기 때문이다. 그래서 누군가 아빠의 직업에 대해서 물으면 나는 그때그때마다 말을 지어냈다. 누군가에게는 한국어 선생이라 하고, 누군가에게는 회사원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어느 날, 어떤 중국 아주머니 두 분이 우리 아빠의 직업을 가지고 논쟁하는 것을 보았다. 둘 다 우리 아빠의 직업에 대해 듣기는 들었는데 내가 다 다르게 말했기 때문이었다. (다음 호에 계속)
 

* 이 글은 <나는 선교사입니다>(고신총회세계선교회)에 실린 내용을 저자의 허락을 받아 수정, 보완하여 게재하였습니다.








사진 | 픽사베이, 바이두(위에서부터)
김수민 | 중국선교사 MK, 열린교회 전도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