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12.3  통권 220호     필자 : 려용덕
[경교비 해설]
경교비문 역해(2)
이번 호에는 지난 10월호 경교비 역해(1)에 이어 원문(경교비 원문은 11월호에서 소개하였습니다.)의 “太宗文皇帝,光華啟運,明聖臨人,大秦國有上徳曰阿羅本,占青雲而載真經,望風律以馳艱險。貞觀九祀,至扵長安。帝使宰臣房公玄齡,惣仗西郊,賔迎入內”부터 끝까지의 역해를 싣고 연재를 마치려고 합니다.


태종황제(太宗皇帝)께서 광화(光華)하신 통치력으로 국정을 계발운행(啓發運行)하실 때 명성(明聖)이 임하니 이는 대진국(大秦國, 로마)의 아라본(阿羅本, Alopen 혹은 Abraham)이란 덕(德)을 갖춘 고명한 인물이 좋은 날(靑雲)을 택(占)하여 진리의 경전을 싣고 하나님의 말씀이 천하를 바르게 될 것을 바라는 마음으로(載眞經望風律) 험악한 길을 마다않고 정관 (貞觀) 9년에 장안(長安)에 도착하니, 황제께서는 재상 방원령(房元齡)을 시켜 서교(西郊)에 나아가 국빈으로 영접하고 궁궐로 인도하였다. 

경전(經典)을 연구할 서전(書殿)을 세워 대궐 중문에서는 문답함을 금하였고 바른 진리임을 조심스럽게 깊이 살핀 후 특령으로 전수하게 하기 위하여 정관 10년, 아라본이 도착한 지 2년 가을 7월에 조서를 명하니, 도(道)에는 적당한 이름을 칭할 수 없으며, 성인(聖人, 그리스도)의 가르침은 당대에 끝남이 아닌 영원한 것이기에 전국에 가르칠 곳을 설치하여 전 국민을 구원(濟世)토록 하라 하였다.

대진국 큰 스승 아라본이 원방에서 경전과 성상(聖像)을 가지고 상경에 내헌(來獻)하였으므로 그 교지(敎旨)를 상고한 바, 현모하고 근본 교지는 태어나고 자람의 번성과 완성을 확립하였고, 경전의 가르침의 번성함에 대한 것은 반박할 것이 없고, 그 원리에 깊이 해득하면 세상의 근심을 잊을 만하니, 인간을 제도하고 사물에 도이(道利)하므로 천하에 실행케 함이 가한즉 일꾼들은 장안 의령방(義寧坊)에 대진사(大秦寺, 로마 네스토리우스교회)를 세우고 승려(오늘의 목사, 신부, 사제 같은 그리스도교의 지도자를 승려라고 불렀음) 21인을 상주하게 하고, 일찍 종가(宗家)이었던 주조(周朝)의 도덕이 상퇴(喪退)하였고, 노자(老子)는 청우(靑牛)를 타고 서천(西天)으로 갔으니 대당(大唐)의 권위가 찬란하게 빛나는 때에 경교의 풍조가 동방을 향하여 왔다.

이와 같은 예는 도인들 간에도 일찍이 없었으나 우리는 지금 백의경교회(白衣景敎會)에서 보게 되었다. 경교유행비문을 현대어로 이해하도록 하기 위하여 이것저것 번역된 문헌과 원문을 대조하여 계속 번역하니, 역인(役人)에게 명하여 태종황제의 초상을 그려 대진사의 벽에 걸어두니 거룩한 천자(天姿)는 채폭(彩幅)에 떠오르고 영명한 광채는 이 종파에 조요(照曜)하여 성스러운 광채가 어리는 성왕(聖王)의 초상은 영원히 종교계의 자랑거리가 되었다.

서역도기(西域圖記)와 한위(漢魏)의 모든 역사를 고안(考按)해 본즉 대진국은 남으로 산호해(珊瑚海)를 경계로 하고 북으로는 상보(象寶)의 산까지 뻗었고, 서는 선경화림(仙境花林)을 바라보고, 동으로는 장풍약수(長風弱水)에 맞닿고 있는데, 이 지방에서는 화환포(Asbstos)와 반혼향(返魂香)과 명월주(明月珠; 珍珠)와 야광벽(夜光璧; 金剛石)이 출토되고 있었다. 경교가 아니면 행해지지 않으며 군주는 유덕의 인물이 아니면 높여 세우지를 아니 하는데 토지는 넓고 문물은 밝게 창성하였더라.

고종황제(高宗皇帝)도 종조(宗祖)의 황통(皇統)을 잘 계승하시어 전정한 종교인 경교를 더욱 빛나게 하셨으니 제주(諸州)에 각각 경교교회당(景敎寺)을 건립하시고 이에 아라본을 높여서 진국대법주(鎭國大法主)를 삼으시니 교회는 십도에 퍼지고(法流十道), 국가는 부유하며 백성들은 선미해졌으며 교회당은 각 성읍에 충만하고 가가호호에 경복(景福)이 은성(殷盛)하더라.

성력년간(聖曆年間: 698년)에는 불교도가 세력을 몰아 동주(東周)에서 경교 공격의 소리를 높였으니 선황제(先皇帝) 말년에 서민들이 크게 경교를 조소하였고, 서호(西鎬)에 모여 참방함이 있었다.

그러나 승수(僧首) 라함(羅含, Lohan, Abraham), 대덕급열(大德及烈, Chiliehl Cyiacus) 및 금방(金方; 西國)의 귀족 등 뛰어난 고승(高僧)이 있어 한 가지로 오묘한 강령은 진흥시키고 함께 끊어진 유대를 결속하기에 힘썼다.

신임이 두터운 현종(玄宗)황제께서 영국(寧國) 등 오왕에게 명하여 행복의 사(寺)에 친히 나셔서 제단(祭壇)을 건립하게 하시니 잠시 무너졌던 종교의 동(棟)이 다시 높아졌고, 잠시 기울어졌던 도(道)의 초석(礎石)도 다시 바로 놓였다.

천보(天寶) 첫해에 대장군 고력사(高力士)에게 명하여 오성(五聖)황제의 초상을 보내 사내(寺內)에 안치하게 하고 련(絹) 백필을 하사하니 성제(聖帝)의 도상(圖像)과 함께 손을 모으고 감사하였다.

용수염(龍髥)은 멀다하여도 활과 검(弓劍)이 손에 닿을 듯하며 일각 천안(天顔)은 빛을 쏘나 그를 지척에 배(拜)하는 것 같다.

천보 3년에 대진국에 승 길화(佶和, George)가 있으니 멀리 계신 별을 바라봄으로(膽星向化) 새롭게 되기를 기도하더니 성존(聖尊)에 귀의하더라.

승 라함(羅含), 보론(普論; Paul) 등 17인에게 조서를 내려 대덕(大德) 길화와 함께 흥경궁(興慶宮)에서 공덕을 갖추게 하였고, 황제께서는 사원(寺院)의 간판을 쓰시니(於是天題寺額載龍書), 보배로운 장식은 청옥이 빛나고 단하(丹霞)가 반짝이며, 거룩한 명찰이 공중에 높이 달려 일륜(日輪)을 무시하는 것 같도다.

황제의 성덕은 남산보다 높고, 넘쳐흘러 은덕은 동해와 같구나. 도(道)는 만능이어서 이루지 못할 것이 없고, 그 능한 바의 이름을 붙일 것이요, 성왕은 못할 일이 없으니 저의 족적을 가히 기록할 것이다.

문학에 깊은 경지에 달통한 숙종(肅宗)황제는 영무(靈武) 등 오군(五郡)에 경교 사원을 건립하였다. 하늘에서 내려온 선한 도를 받아 바탕으로 삼아서 복조(福祚)가 열리니, 국가의 대경이 상림하여 황업(皇業)이 쉽게 풀렸다.

문무를 겸한 대종(代宗)황제는 성운(聖運)이 널리 퍼지니 크게 노력함도 없이 만사형통하였다. 만수절(萬壽節)에는 향품을 하사하여 성공을 축하하였으며, 황제께서 음식을 내려 경교도들을 환대하였다.

천도(天道)는 선미하고 통리(通利)하므로 백성들이 창성하게 되고, 성왕(聖王)은 천도를 체승 하므로 백성이 화육(化育)하시었다. 건중(建中) 시대에 문무를 겸비한 성천자(聖天子) 덕종(德宗)황제는 팔조(八條)의 선정을 베풀어 유명간(幽明間)의 모든 사건을 처리하고, 구개조(九個條)의 법령을 경교의 사명을 유신선포(維新景命) 하였다.

황제께서는 경교의 신묘한 진리에 감화 통달하여 비행의 수치가 없었다. 그의 마음은 위대하여 겸허하고 순박, 고요하고, 관용하여 넓은 자애로서 불행한 민중을 구제하는 인선(仁善)한 시여(施輿)를 백성에게 입게 함은 우리들의 수행(修行)의 대 목표이며, 중인(衆人)을 인도하는 계단이 되었다.

황제가 정치를 잘하였고, 하늘은 때를 따라 비를 내렸고, 적당한 때에 바람이 불어 농사가 잘되어 백성들은 안정하게 되었다. 따라서 생존자는 창성하고 사자(死者)는 극락환생하고 언론은 생래(生來)의 의사를 그대로 반영하고, 안목은 생래의 감정을 성실하게 표현하였으니, 이것은 우리 경교의 도(道)의 강력한 작용 효과인 것이라 확신한다.

대시주금자선록대부 동방삭절도부사(大施主金紫先祿大夫 東方朔節都副使)이며, 시전중감(試殿中監)으로 자색가사(紫色袈裟)의 착용을 윤허 받은 승 이사(伊斯)는 천성이 화평하고 인혜를 즐기어 도를 들으면 곧 실천에 옮기는 이였다. 그는 멀리 왕사(王舍)의 성읍으로부터 중화(中華)에 왔으며, 학술은 삼세자(三世朝野)에 높이 들이었고, 예능은 십분 완전하여 세상에 널리 알려졌다. 그는 처음부터 단도(丹塗)의 궁전에서 충절을 나타내어 그의 이름은 왕의 유악에 수록되었다. 중서령 분양군왕 곽자의 공(中書令汾陽郡王郭子儀公)이 처음 삭방(朔方)에서 군대의 지휘관으로 임명되자 숙종황제께서 이사로 하여금 곽자의에게 호종(扈宗)케 하시었다.

그는 공(公)으로 침소에 출입할 정도로 친한 대우를 받았으나 군중(軍中)에 있어 스스로 잘난 체 아니하였고, 공의 치하가 되고 군대의 안목이 되었으며, 녹과 하사품을 헤쳐 가재를 축적하지 않았으며, 은사(恩賜)의 칠보유리를 예물로 헌상(獻上)하였고, 황제가 베푼 휴가(賜暇) 때 내사(內賜)받은 금의(金衣)는 타인에게 깨끗한 마음으로 가난한 사람에게 음식과 의복을 베풀었다(布施; 普施). 혹, 낡은 사원을 수리하여 회당을 넓게 증축하매 우람하게 장식된 회랑(回廊)과 단청(丹靑)의 채색은 아름답다.

이사는 다시 경교의 문호를 크게 확장하여 인자함으로 은혜를 베풀고, 매년 사린(四隣)의 사원의 승을 모아 경건한 마음으로 작사(作事)하여 신(神)께 몸 바쳐 헌신하고, 50일간 제품을 준비하여 주린 자에게 먹이고, 추위에 떠는 자에게 옷을 입히고, 환자를 돌보고, 죽은 자를 위하여 장례를 치러 주었다. 그러므로 청절을 숭상하는 도인들 사이에도 이미 이와 같은 미덕이 없었으나 지금 그 사람을 다름 아닌 백의경교회 안에서 만날 수가 있었다. 

그러므로 우리는 큰 비석을 세워서 경교의 미덕과 교회의 이바지한 아름다움을 선양한다. 아름다움을 노래하는 이들은 진리의 주는 시초 기원이 없으시며, 깊고도 고요하시며, 영원불변하신 분이시로다.

세상이 시작됨에서 거룩하신 솜씨는 우주 삼라만상을 창조, 화육(化育; Incarnation) 하심이여, 땅을 편만케 하심과 하늘을 만드심이여, 자신이 도성인신(道成人身) 하시고, 이 땅에 오심이여, 죄인을 구원하심이 광대무변(廣大無邊) 하시도다. 의(義)의 태양이 떠오르므로 흑암의 권세가 사라진다. 이것은 현묘하신 진리를 나타내심이로다.

권세와 문덕이 높으신 태종(太宗)황제께서 이 진리에 있어서 전 황제보다 탁월하시므로 때를 따라 전란을 평정하였고, 하늘(天)을 확대하며, 땅(地)을 확장하시었으니, 광명한 경교가 우리 당(唐) 나라에 들어왔도다.

성경(聖經)을 번역하고 교회당을 건립하심이여, 산 자와 죽은 자를 위한 구원의 방주시로다. 만 가지의 복이 함께 이르매 만국이 평강하도다.

고종(高宗; 649년)황제도 선왕의 대업을 이어서 정미한 옥우(屋宇)를 건축하니 화평한 궁기(宮氣)는 넓고 명랑하게 중국 전역에 편만하게 되었다. 진리가 밝게 퍼지니 황제께서는 의식을 갖추고 영적 교주(靈的敎主)를 임명하므로 백성에게는 안락과 평강이 있으며, 물산은 재앙과 고난이 없이 되었다. 

현종(玄宗; 712년)은 성지로서 계발되어서, 진리의 정도를 잘 수행하였다. 황제께서 친히 써준 제액(題額)은 광채가 찬란하고 황제의 친필은 보물처럼(寶樹) 아름답도다. 모든 황제의 초상은 관옥(冠玉)처럼 빛이 나고 전 국민은 한결같이 높이고 공경함이 있더라. 모든 황제가 베푸는 선은 모두가 빛을 발하였으며, 백성은 모두 그의 경복에 힘을 입었다. 

숙종(肅宗; 756년)이 다시 제위(帝位)에 오르매 그 권위는 황제가 탄 수레가 찬란하게 비췸이 하늘의 태양처럼 빛을 더하는구나. 상서(祥瑞)의 풍화(風化)는 어둠의 죄악을 없이하고 만복이 황실에 다시 임하니 악기(惡氣)는 사라졌구나. 티끌같이 일어난 모든 것을 그치게 하니 중화(中華)를 재건하였다.

대종(代宗; 762년)황제가 보위에 오르매, 윤리 도덕적 바탕에서 정치를 전개하여 공의(公義)의 치국을 하니 성덕(聖德)과 합하였다. 풍부하게 물자를 백성에게 베푸니 사람의 삶을 풍족하게 하여, 제세(濟世)하였다. 향불의 제전(祭典)으로 공적을 수(酬)하고 인(仁)을 가져 시제(施濟)하였으니, 태양이 솟아오르는 계곡이 극동(極東)으로부터 위덕(威德)에 이르고, 달그림자는 극서(極西)로부터 인화(仁化)에 이르는도다.

덕종(德宗; 779년)황제가 보위에 오르매, 명덕(明德)을 닦으니, 무위(武威)로서 서해를 완전하게 다스리고, 문덕(文德)으로 만방을 치국하였다. 백성들의 깊이 숨긴 죄악까지라도 밝히니 거울을 보듯 사물의 시비를 가리니 천하가 광명하게 되살아났으므로 변방(邊方)이 황제를 모범으로 하였다.

도(道)는 광대무변한(廣大無邊限) 함이여 그 감화는 보편적이었으므로, 우리가 이름을 붙이어 삼위일체(三位一體)의 구원의 진리를 만방에 전파하였다. 주(主; Lord)께서 도를 경륜할 권능을 소유하였으며, 신복(臣僕)은 이 도를 증거할 사명이 있다. 이에 큰 비를 세움으로서 도를 송출하노라. 

대당(大唐) 건중(建中; 辛酉; 781년) 2년 1월(太簇) 7일 일요일(大耀森文日)에 건립하였다. 그때의 법주(法主)는 승 영서(寧恕)이니 동방의 경교도(景敎徒)였고, 종육품(從六品) 조의랑(朝議郞) 전행(前行) 태주사사참군(台州司士參軍) 려수암(呂秀巖)이 글을 썼다.


경교비 해설을 마치며
경교비의 글씨체는 정확하고 깔끔한 해서(楷書)로써, 얼마나 날카로운지 섬뜩함을 느끼게 합니다. 비문을 쓴 려수암(呂秀巖)의 서기(瑞氣) 서린 서체(書體)는 읽고 감상에 앞서 옷깃을 여미게 합니다. 

려수암은 강태공망 려상(姜太公望 呂尙)의 후손 려덕공(呂德公)의 아들로 태어나서 경교도(景敎徒)가 되어 당시 경교(景敎) 최고 지도자의 반열에 올랐습니다. 이후 희종(僖宗)황제 시절에 황소(黃巢)가 반란을 일으키자(875-884년) 려수암의 후손으로 한림학사였던 려어매(呂禦梅)가 난을 피하여 신라 헌강왕(憲康王) 3년(중화 3년; 883년)에 신라에 귀화(歸化)하여 전서(典書)가 되었습니다. 

려수암의 후손인 필자가 1천2백여 년이 지난 오늘, 경교비를 소개하면서 많은 감회에 젖었습니다. 무엇보다도 짧은 지식으로 여러 가지를 설명하고, 난해하기로 유명한 비문을 현대어로 번역하면서 두려움을 느끼기도 했습니다. 

연재를 마치면서 경교비 해설을 연재해주신 웹진<중국을주께로>에 감사를 드립니다. 또 문장을 다듬어주신 실무진께 고마움을 전합니다. 무엇보다도 부족한 글을 잘 읽어주신 독자 여러분께 사의를 표하면서 모두에게 복이 넘치기를 기원합니다.






사진설명  2012년 5월 21일, 사단법인 한국경교역사연구소 주최로 한소망장로교회(경기도 광명시)에서 열린 제3회 국제경교연구 한국학술대회에서 경교비문을 쓴 려수암에 대해 발표하고 있는 필자
려용덕 목사 I 도봉중앙장로교회 담임목사, <한국교회신문> 발행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