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akaoTalk_20201204_181655980.jpg) 선교 의지의 위축 북경 진입 이후 역동적으로 선교 활동을 전개하였던 마테오 리치였지만, 중국선교에 대한 미래가 불투명함으로 인하여 만년에는 낙심과 고뇌가 넘쳐나게 되었다. 그렇게 된 요인은 다음과 같은 몇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첫째, 그는 황제의 재가를 받아 중국에서 기독교 선교를 효과적으로 전개할 수 있을 것이라는 당초의 기대와 달리 그 성취가 쉽지 않음을 체감하게 되었다. 황제는 황궁에서 거의 나오지 않아서 자신이 황제를 대면할 기회가 없었을 뿐만 아니라, 황족들과 선교 활동에 대한 인가를 교섭하는 것도 진척을 보지 못했다. 그는 북경으로 진입하기만 하면 황제나 황족과의 교섭을 통해 기독교 선교에 대한 공인을 얻어 중국에서의 선교를 보다 더 효과적으로 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현실과의 격차에 스스로 큰 좌절감을 느끼게 되었다.
둘째, 그는 자신이 야심차게 집필하여 보급한 자료들 가운데 오히려 중국선교를 가로막는 장애가 되는 상황에도 직면하였다. 특히 만력 32년(1604년) 정식 출판되었던 《천주실의(天主實義)》가 조정과 지방에서 적지 않은 문인들로부터 큰 반발이 야기된 것은 그에게 큰 충격이었다. 이 책을 근거로 하여 중국 사회에서 불교가 우상을 숭배하고 있다는 비판이 일어났으며, 선교사들이 중국 치안을 위협하는 존재라는 오해와 혐오도 늘어나게 되었다. 이교도를 배척해야만 하는 신앙인으로서의 마테오 리치는 지극히 난감한 국면에 처하게 되었다고 할 수 있다.
셋째, 그가 북경에 들어오기 전에 개척하였던 소주(韶州), 남창, 및 남경 선교구에서도 후임 선교사들이 선교를 진행하기에 어려운 상황들을 만나고 있었다. 소주에서는 선교사들이 마카오를 기반으로 중국 공격을 준비하고 있다는 소문이 일게 되었고, 남경에서도 선교사들이 반역 집단과 연계되어 있다는 유언비어가 확산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부 선교사들이 전통적 선교 방식을 고수하면서 공개 전도와 불상 파괴 등 중국 현실을 고려하지 않는 선교 방식을 일방적으로 취하였고, 이를 통해 일시적인 교세의 확장은 가져왔지만 한편으로는 거센 반발을 야기하기도 하였다. 중국 문화를 존중하는 바탕 위에서의 선교전략에서 이탈하는 선교사들의 모습에서 마테오 리치는 우선 깊은 자괴감을 느끼게 되었고, 나아가 장차 있게 될 시련을 예상하면서 괴로움이 더해 갔다.
넷째, 마테오 리치가 지향했던 중국 문화에 대한 적응 기반 위에서의 선교를 진행한다는 전략 자체가 중국의 현실에 무지한 교계 지도자들로부터 외면받고 심지어 공개 비판의 대상이 되는 상황에까지 이르렀다. 마테오 리치의 선교 방법론이 다른 지역에서의 물리적 압력을 동원한 선교에 비하여 외형적 성과가 현저히 미미했으므로, 마테오 리치의 선교전략에 대한 비난이 선교단 안팎에서 일기 시작하였고, 갈수록 그 강도가 높아져 갔다. 그동안 그의 전략을 엄호해 주었던 시찰원 발리냐노가 1606년 1월 세상을 떠나면서 그 정도는 더 심화되었고, 부성회장 파시오나 동료 디에고 판토하 등도 전략에 대한 동의를 거두었으므로, 그의 전략에 대한 비판의 정도를 가늠해 볼 수 있다. 이러한 내우외환 속에서 마테오 리치의 선교 말년은 스스로에게는 최대 곤경이었으며, 그로 인해 선교 의지가 크게 위축될 수 있는 상황에 처하였다고 할 수 있다.
선교전략의 조정 마테오 리치는 여러 어려운 정황에 처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 확인하며 적극 대응하는 면모도 보였다.
우선, 가급적 빨리 황실에 접근하여 황제의 환심을 사서 선교 자유를 허가받겠다는 기왕의 다분히 요행지향적인 방식은 유보하고 점진적 학술선교 및 유가사상과 문화 전통에 적응하는 선교로 바꾸었다. 대규모로 중국 사람들을 귀화시키려는 생각을 버리고 우선 중국 내에서 기독교를 수용하는 소규모 집단이라도 형성할 수 있는 가능성을 모색하는 쪽으로 전환하였다.
다음, 마테오 리치는 북경에서 확보한 폭넓은 중국 사대부들과의 교분을 바탕으로 각 지방에서 일고 있는 선교에 대한 저항과 반발을 줄여 보기 위하여 애썼다. 그는 북경에서 관료 사회와 교제하는 일에 더욱 힘을 기울였고, 그들이 지방으로 부임하게 되는 관료나 교회가 핍박받고 있는 지방관들과 교분이 있는 관료들을 통해 각 지방교회와 선교사들의 선교 활동을 보호해 줄 것을 부탁하는 일에 게을리하지 않았다. 북경에서 광동으로 복귀하는 광동(廣東) 안찰부사(按察副使) 장덕명(張德明)에게 부탁하여 현지선교사들의 누명을 벗게 하고 투옥된 교인들이 풀려나게 한 것은 그 대표적 실적이다.
또한, 마테오 리치는 만년에 20여 년 동안 중국선교 경험을 정리하여 《천주교전입중국사(天主敎傳入中國史)》를 편찬하였다. 중국선교의 산 증인이기도 했던 그는 이 책에서 기독교(천주교)가 어떻게 중국 역사 속으로 들어가게 되었는지의 전체 과정을 회고하고 총결산하였다.
《천주교전입중국사》의 의의 마테오 리치의 만년 회고록인 《천주교전입중국사》의 원고는 그가 만력 38년(1610년) 사망한 뒤, 그의 유품에서 발견되었다. 후에 《마테오 리치 중국찰기(利瑪竇中國札記, De Christiana expeditione apud Sinas)》로도 간행된 이 회고록은 1614년 동료선교사 니콜라스 트리고가 로마로 복귀할 때 라틴어로 번역되었다. 여기에 마테오 리치와 관련된 부록 자료를 첨부하여 1615년 아우구스부르그에서 《기독교원정중국사》란 이름으로 간행되었다. 이후 이 책은 라틴어판 4종과 프랑스어판 3종 그리고 독일어판, 스페인어판, 이탈리아어판이 각각 추가 간행되었다. 1625년에는 《푸르차스 성자 총서(Purchas His Pilgrims)》에 영문 요약판이 수록되었고, 20세기 들어 일련의 그의 저작 전집 간행 시에 주석과 색인 추가되어 수록되었다. 마테오 리치가 원래 기록한 이탈리아어 수고(手稿)는 로마 예수회 선교회 문서보관소에 보관되어 있다.
마테오 리치의 《천주교전입중국사》의 내용은 모두 5권으로 구성되어 있다. 제1권은 서론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는 데 중국의 위치, 영역, 정치 구조, 물산, 공예, 과학, 풍속 습관, 예절 및 각종 종교 현황 등을 약술하였다. 제2권부터 제5권까지는 중국선교단의 발전 과정을 정리하였다. 1552년 상천도(上川島)에서 병사(病死)한 사비에르 신부 이야기로부터 시작하여 마테오 리치가 주도하여 전개된 조경, 소주, 남창, 남경, 북경 선교단의 설립, 만력 38년(1610년) 마테오 리치의 사망 및 이후 만력 황제의 묘지 하사에 이르기까지, 선교의 전 과정을 기록되어 있다.
그의 중국선교 전체 과정을 체계적으로 총괄한 이 책은 중문이 아닌 이탈리아어로 쓰여진 만큼 중국선교의 실상을 유럽에 전달하려는 그의 의지가 돋보이는 자료이다. 선교 회고록인만큼 그의 선교 열정이 강하게 담겨 있을 것이라는 기대를 하고 읽는 사람들에게는 신앙과 선교 열정이 강하게 피력되어 있지 않은 점에 대한 아쉬움을 갖게 한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자료를 근거로 하여 사실을 정리하려는 목적이 강한 저술인 만큼 정확성과 신뢰성이 높은 기록물로 평가되고 있다.
사진설명 | 라틴어판 《마테오 리치 중국찰기(De Christiana expeditione apud Sinas)》 김종건 | 대구한의대학교 기초교양대학 교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