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데사최종.JPG) 에데사, 어떤 곳인가? 지금까지 여섯 회에 걸쳐서 경교에 대한 대략적 개요를 살펴보았다. 이제 대진경교유행중국비의 비문 해설에 들어갈 차례인데, 그에 앞서서 에데사신학교에 대해서 알아둘 필요가 있어서 이번 호에는 그 이야기를 먼저 하려고 한다.
에데사는 서남아시아 메소포타미아의 고대 도시로서 유프라테스강의 지류를 끼고 있으며 위도는 북위 37도로 우리나라와 비슷하다. 에데사는 서방 기독교의 중심인 안디옥에서 동쪽으로 100km 정도 떨어진 곳에 있다. 전승에 따르면 사도 도마에 의해 파송된 70인 중 한 사람인 다대오가 이곳에 제일 먼저 복음을 전했다고 한다.
에데사는 오스로에네(Osroene) 왕국의 수도였는데 오스로에네왕이 기독교를 믿음으로써 이 왕국은 동방에서 유일한 기독교 국가가 되었고 초기 동방 기독교의 첫 보금자리가 되었다. 에데사에는 수도원도 많이 있었다.
창세기 10장에는 용감한 사냥꾼이며 세상에 첫 용사로 알려진 니므롯의 이야기가 나오는데 10절에 “그의 나라는 시날 땅의 바벨과 에렉과 악갓과 갈레에서 시작되었으며”라고 기록되어 있다. 초대 교부들 가운데는 여기 나오는 에렉이 바로 에데사라고 말하는 분들이 있으며 이곳이 아브라함과 관계가 있다고도 말한다.
에데사의 역사에는 굴곡이 많았다. 독립왕국, 로마제국의 속국, 독립국, 식민지, 로마와 페르시아 간의 전쟁터, 페르시아의 지배, 회교도의 지배, 십자군의 탈환, 다시 회교도의 지배, 비잔틴에 속했다가 티무르인들의 지배를 받았고 1637년에 터키령이 되었다. 지금의 이름은 우르하이(Urhai)이다. 에데사에는 신학교가 세워져서 많은 인재를 길러냈다. 에데사신학교는 로마 영내에 있었지만 많은 페르시아(현재의 이란)인들이 거기서 신학공부를 하였다. 그 결과 시리아어를 사용하는 동방의 교회와 그리스어를 사용하는 서방의 교회가 서로 연관을 맺게 되었다. 에데사신학교를 졸업한 페르시아인들이 조국으로 돌아가서 영향력 있는 교회의 감독으로 일했는데 그들은 자연스럽게 에데사의 학문을 가르치게 되었다.
에데사신학교의 교리 중에는 그리스도의 인성(人性)과 신성(神性) 문제에서 그리스도의 인성을 지나치게 강조한 면이 있었다. 다른 말로 말하면 하나님의 말씀이 예수라는 이름의 사람에게 연합했다고 가르쳤는데 콘스탄틴의 네스토리우스가 특히 그러하였다. 이 교리를 따르는 교회를 네스토리우스교(Nestorianism)라고 부르게 되었다.
451년 에베소공의회는 네스토리우스를 정죄했는데 그는 굽히지 않고 자기가 주장하는 교리를 계속 가르쳤다. 마찰은 점점 커졌고 결국 네스토리우스주의 신봉자들은 대부분 페르시아로 망명하였다. 이때에 나시빈(Nasibin)의 감독은 바르 소마(Bar Sawma)였는데 그는 재능은 많지만 경건성이 빈약하다는 말을 듣는 사람이었다. 그의 역할로 페르시아의 그리스도교는 네스토리우스주의화하여 네스토리우스교는 공식적인 교회가 되었다.
동방교회와 서방교회의 분리가 결별의 소용돌이에 휩쓸릴 때 에데사신학교는 동방교회와 서방교회를 연결하는 중요한 역할을 했는데, 네스토리우스주의를 가르친다는 이유로 489년에 로마 황제의 칙령으로 폐쇄되고 말았다. 신학생들은 니시빈으로 가게 되었고, 니시비스(Nisibis)에 새로운 신학교를 설립되어 니시비스신학교가 에데사신학교보다 더 유명하게 되었다. 니시비스는 터키의 남동부에 있으며 현재의 이름은 누사이빈(Nusaybin)이다.
<에데사와 주변의 지도, 지중해 동북쪽에 에데사라는 지명이 보인다.>
교황청과 화해하다 페르시아교회가 424년에 다른 지역의 그리스도교회로부터 완전한 독립을 선언하여 외국과 연결되어 있다는 의혹에서 벗어날 때까지 페르시아의 그리스도인들은 심한 박해를 받았다. 페르시아교회는 니시비스의 수도 대주교 바르수마스(Barsumas)의 영향을 받아, 486년 2월 네스토리우스파 신학의 권위자인 몹수에스티아(Mopsuestia)의 테오도루스를 올바른 신앙의 수호자로 인정하게 된다. 바바이 총대주교(Babai, 497-502)는 이것을 재확인했고 사실상 이때부터 페르시아교회는 네스토리우스 교파가 되었다.
5세기 말에 이르러 페르시아에는 7개의 대주교 관구(管區)가 생겼고, 아라비아와 인도에도 여러 개의 주교 관구가 설치되었다. 페르시아교회는 분열(521년경-537/ 539년경)과 박해(540-545년)의 시기를 조로아스터교에서 개종한 마르 아바 1세 총대주교(540-552년 재임)의 지도와 니시비스 근처 이잘라산에 수도원을 세운 카슈카르의 아브라함(501-586년)이 일으킨 수도원 부흥을 통하여 잘 견뎌냈다.
오늘의 동방교회 또는 페르시아교회가 대표적인 네스토리우스 교파이며, 서양에서는 이들을 말하여 흔히 아시리아 교도, 또는 네스토리우스 교도라고 부르고 있다. 영국의 브리태니커 백과사전은 오늘날 약 17만에 이르는 네스토리우스 교도들의 대부분이 이라크, 시리아, 이란에 살고 있다고 말하고 있다.
네스토리우스교는 431년 에베소공의회에서 이단으로 정죄되어 파문을 당했다. 그런데 지난 1994년 로마 교황청에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와 아시리아교회 총대주교 마르 딘카 4세가 공동기독론선언문(Common Christological Declaration)을 통하여 화해의 서명을 함으로써 네스토리우스교는 이단에서 벗어났다. 이에 대해서는 박영규(朴永圭) 박사(서울대 종교학과 출신)의 정밀한 연구가 있다. 그러나 네스토리우스교와 콥트교회와는 아직 미해결 상태이다.
페르시아에 정착한 네스토리우스교는 자기들이 주장하는 교리를 마음 놓고 가르칠 수 있는 영토를 확보해야 할 필요를 갖게 되었다. 그들은 대륙으로 눈을 돌리게 되었고 결국 중국 당나라에 진출하게 되었다. 다음 호에서는 여기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려용덕 | 도봉중앙장로교회 담임목사, <한국교회신문> 발행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