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1세기를 시작하는 1월, 한동대학교 차이나 필드 리서치팀은 비행기에 몸을 싣고, 약 2시간이 지나 새롭게 단장한 베이징(北京) 공항에 도착하였다. 지난 해 여름에는 한국의 버스터미널 수준에 불과했던 곳이 이제는 최첨단의 공항으로 변모한 것을 바라보면서, 다시 한번 중국의 경제발전 속도를 실감할 수 있었다. 머지않아 중국이 세계의 패권을 쥐게 될 것이라는 말이 어느 정도 수긍이 갔다.
이튿날 우리 팀은 바로 닝샤후이족자치구(寧夏回族自治區), 윈난(云南)성, 칭하이(靑海)성으로 나뉘어 출발하였다. 필자가 속한 팀은 베이징에서 약 38시간 정도 기차를 타고 칭하이성의 성도(省都)인 시닝(西寧)으로 향했다. 도착해서 숙소를 정하고 본격적으로 리서치를 시작하는데, 영하 20℃라는 말에 매우 긴장했던 우리들에게 시닝의 날씨는 그다지 기세를 부리지는 않았다. 시닝을 베이스 캠프로 하여 대학과 시내를 리서치하고, 칭하이성에서 가장 큰 호수인 칭하이호를 중심으로 동서남북으로 흩어져 리서치하였다. 우리의 목표는 칭하이성의 짱족(藏族-티벳족) 중에서도 암도(安多) 짱족이라고 불리는 민족을 조사하는 것이었기에, 짱족의 주요 분포지인 깡차(剛叉), 티엔쥔(天俊), 통런(同仁), 따우(大武)로 나뉘어 향했다.
라마불교와 이슬람의 본거지 칭하이
칭하이성은 라마불교의 본산지라고 할 수 있는 시짱(西藏)자치구와 가장 근접한 성이기에, 이곳에서도 라마사원과 라마승들의 모습을 쉽게 볼 수 있다. 그 중에서도 라마의 종파 중 하나인 거루파(格魯派)의 창시자인 쫑카바(宗喀巴)가 창시한 황중(湟中)이라는 곳에 갔다. 이곳에 있는 사원의 이름은 타얼쓰(塔爾寺)인데, 쫑카바가 태어난 곳과 그의 어머니가 기도하던 곳 등에 수많은 절이 세워져 있고, 달라이라마가 오면 묵는다는 숙소도 있었다. 그만큼 타얼쓰는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사원임을 알 수 있었다. 마침 우리가 방문한 날, 다른 지역에서 단체로 차를 대절해서 찾아온 많은 라마교도들이 있었다. 라마를 숭배하기 위해 어린아이부터 노인까지 좁은 차에 몸을 싣고 수십 시간 아랑곳하지 않고 온 그들의 열정이 대단해 보이기도 했지만, 헛된 것을 위해 자신들의 시간을 낭비하는 것이 너무도 안타까웠다. 차 위에는 그들이 가져온 헌물들과 먹을 식량이 가득 있었고, 그 주위에는 짱족 특유의 냄새가 진동했다. 미리 적응해야 할 냄새이기에 약간은 지독했지만 감사함으로 일부러 맡기도 했다.
라마사원이 시닝의 외곽에 자리잡고 있다면, 도심지에는 이슬람사원이 있었다. 우리가 방문했을 때는, 마침 금식기간인 라마단이 끝나면서 시작되는 축제인 얼더제 기간이었다. 3일 동안 진행되는 얼더제에는 하루에 다섯 번씩 예배를 드린다고 한다. 예배당에 들어가지 못한 사람들이 밖에서 양탄자를 깔고 예배를 드리는 모습을 보면서, 그들이 바라보고 있는 것이 헛된 우상이라는 사실을 전하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또한 몇몇 모슬렘들과 이슬람 예배의 집례자인 아홍을 만나 이슬람교에 대해 인터뷰를 했는데, 외국인인 우리를 대하는 그들의 태도는 호기심에 차 있으면서도 아주 우호적이었다. 하지만 우리가 기독교인이라는 사실을 말했을 때 그들의 태도는 그다지 좋지만은 않았다.
칭하이성의 청년들
우리는 칭하이성의 미래를 들여다보기 위해 민족학원을 찾았다. 이 학교에는 많은 소수민족 학생들이 다니고 있었는데, 그 중에서도 짱족 학생의 비율이 꽤나 높았다. 바깥에서 보았을 때 학교 건물은 그다지 수준이 떨어져 보이지는 않았지만, 한 친구의 기숙사를 방문했을 때학생들의 후생복지는 아직까지 미흡하다는 것이 절실히 느껴졌다. 8명의 학생이 함께 생활하는 기숙사 방에서, 여러 학생들 특별히 우리의 관심 대상인 짱족 학생들과 이야기를 나누면서 그들의 생각을 조금이나마 엿볼 수 있었다. 그 중 지방에서 올라온 대다수의 학생들은 학업을 마친 후 고향으로 돌아가 낙후된 교육환경을 개선하고 싶다는 꿈을 갖고 있었다. 그들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무조건 서울로만 모이려는 우리 나라 학생들과는 다른 그들의 속깊음에 고개가 숙여졌다.
고산지대 따우
도시에서의 리서치를 마치고 팀은 4개의 현으로 나뉘어졌다. 우리 팀이 따우(大武)현을 향해 열차를 타고 가는 16시간 동안, 해발 4,000m(백두산 높이는 2,744m) 넘는 산을 2번 정도 지났다. 주위에는 광대한 자연이 펼쳐지는데 여름보다는 덜하지만 그래도 푸른빛이 도는 초원이 있고, 또 한참 가다 보면 모래로 뒤덮인 산(사막화가 진행되는 과정을 그대로 묘사하고 있음)도 있다. 짱족 전통복장을 입은 목동들이 양떼들을 모는 모습도 보였다.
해발 3,800m의 고산지역인 따우현에 도착 후, 라자(拉加)향(鄕: 현 아래의 행정단위)에 먼저 들렀다. 라자향은 마을 전체가 라마사원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마을 중심에는 라마불교사원인 라자쓰(拉加寺)가 자리잡고 있고, 도로변으로 마을 외부 전체를 경전통(經典桶: 라마경전이 쓰여 있는 통)이 감싸고 있다. 라마교도들은 경전통을 돌리면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믿기 때문에, 마을 사람들은 경전통을 지나칠 때마다 꼭 한 번씩 돌리고 간다. 라자쓰에는 경을 읽는 아이들이 많이 있었는데, 읽고 있는 내용이 무엇이냐고 물어보니 모른다고 했다. 경을 읽는 만큼 사원에서 돈을 주기 때문에 읽는 것이었다. 물론 라마승이 되기 위해서 읽어야 함은 당연지사이다.
라자쓰에서 약 10분 정도 떨어진 곳에 일본인이 세운 길미견찬이라는 학교가 있었다. 이 학교는 매우 현대식의 교육을 하고 있었는데, 교장이 베이징과 칭하이성에서 교육을 받았고, 이 학교에서 자신의 현대식 교육이념을 실천하고 있다고 한다. 부유한 사람보다는, 교육의 기회를 갖기 어려운 가난한 학생을 위주로 가르친다는 말에 학교의 이미지가 좋게 느껴졌다. 컴퓨터 등 여러 가지 현대식 과목을 가르치는 이 학교에서 5년 과정을 수료하면 대학교에 진학할 수준까지 된다고 한다.
그 후 둥칭꺼우(東傾溝)향이라는 곳에 들렸는데, 목축지대인 이곳은 다른 가축보다 양을 집중적으로 키우고 있었다. 향장(鄕長)이 특별히 연구하여 우수한 양의 품종을 개발했기 때문이다. 그 지역의 행정단위는 2개의 목위회와 8개의 합작사로 나뉘는데, 양의 품종 향상을 위해 각 마을 대표들이 모여서 한 달에 몇 번씩 회의를 한다고 한다. 마침 우리가 도착한 다음날이 회의가 있는 날이라고 해서, 회의 진행과정을 관찰하고 목축지대에 사는 짱족도 조사할 겸 그들을 따라가기로 했다.
30분 동안 거친 시골길을 달려 목적지에 도착했을 때, 한 짱족 가정이 우리를 맞이해 주었다. 3대에 걸쳐 9명의 식구가 함께 살고 있는 이들 중에는 우리와 나이가 비슷한 소녀도 있었다. 헝클어진 머리를 길게 늘어뜨리고 키는 초등학생만 했으며, 얼굴은 거의 안 씻었는지 검은 줄이 군데군데 나있고 거칠었다. 악수도 하고 이야기도 나누면서 -이들은 짱족어만 구사하기 때문에 한어로도 의사소통은 거의 힘들어 눈빛과 몸짓으로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쉽게 친해질 수 있었다.
많은 사람들이 여러 곳에서 모여 약 3시간 동안 회의를 하고 담소를 나누는 가운데, 말로만 들었던 짱족들의 술 의식을 볼 수 있었다. 술잔, 기타와 유사한 짱족의 전통 악기, 그리고 목에 두르는 비단천, 이 세 가지가 그들의 술 의식의 준비물이다. 한 명은 술잔을, 한 명은 기타를 연주하면서 동시에 짱족 전통 노래를 부르며 먼저 향장에게로 술이 전달되었다. 술잔을 받은 향장은 술잔의 술을 세 방울 하늘을 향해 튀기고 나서 약간 마신 후 다른 사람에게 술잔을 넘긴다. 단, 술잔을 넘길 때는 반드시 노래를 불러야 한다. 그들의 술은 60도가 넘는 독한 술이기 때문에 옆에서 냄새만 맡아도 취할 지경이었다. 이렇게 해서 그곳에 모인 모든 사람에게-우리 팀도 예외는 아님- 한 번씩 술잔이 다 돌아가고, 결국에는 다시 향장에게 돌아와서 술 의식은 끝났다.
우리는 목축지대 짱족들의 삶을 더 조사하기 위해, 멀리 떨어져있는 다른 마을에 들어가기로 결정했다. 한 명의 짱족이라도 더 만나보아야 한다는 열정에 사로잡힌 우리는 추위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산과 얼음을 타고 짱족 마을로 향했다. 가까이 있는 것 같았지만 장장 1시간이 걸려서야 겨우 도착하였다. 물론 이 마을에서도 한어가 통하지 않기 때문에, 손짓 발짓으로 의사소통을 하려고 노력하였다. 준비한 선물을 주면서 그들의 마음을 열어보려 했지만, 처음 찾아간 집에서는 문전박대를 당했다. 그러나 포기하지 않고 다시 들어간 집에서 겨우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마침 그 집의 가장이 약간의 한어를 할 줄 아는 사람이었기에 어느 정도 의사소통이 가능했다. 그들이 유목인의 전형적인 음식인 쑤여우차와 기름에 튀긴 밀가루를 내주어서 우리는 허기진 배를 달랠 수 있었다. 그 집에는 다른 집에서는 볼 수 없었던 재봉틀이 있었고, 집주인인 남자도 옷을 꿰매고 있었다. 그들의 삶을 자세히 보기 원했지만, 시간적으로 여유가 없어서 많은 것을 보지는 못했다. 그리고 언어의 한계로 인해 제대로 대화를 못하여 그들의 생각을 알 수 없었던 것이 큰 아쉬움으로 남았다. 그러나 지금도 그 땅에서 한 명의 영혼이라도 더 품기 원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느낄 수 있었다.
자신의 아들이 죽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을 찬양한다!
한동대학교 차이나 필드 리서치(China Field Research)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