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계는 배우는 자들이 공부하는 도중에 길을 잃고 헤매거나 목표를 잃고 방황하지 않도록 하나의 나침반을 제시하고 있다. <대학도>가 바로 소학에서 익힌 소양들을 바탕으로 하여 성인이 되는 궁극적인 길로 안내하는 퇴계의 나침반이다. 이 나침반은 17세의 나이로 왕위에 오른 선조가 성군이 되어 백성을 교화로 다스릴 것을 기대하는 마음과, 조선을 이끄는 선비들이 스스로를 수양하여 백성들의 모범이 되기를 고대하는 마음이 함께 배어 있다. 평천하가 이루어진 유가의 이상사회는 성군의 교화로만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닐 것이다. 퇴계가 계속해서 제수되는 벼슬을 마다하고 낙향하여 도산에서 제자들을 키우는 데 전념한 것이 우연한 일이었을까? 한 명의 성군에 의해서가 아니라 백성들의 사표가 될 만한 많은 인재들에 의해서 이상사회가 가능하다는 판단에서 퇴계는 인재들을 키우며 자신이 꿈꾼 이상사회를 준비했던 것은 아닐까?” -김근호- 성리학에서 《대학》의 위치 남송의 주자는 《사서집주》(대학, 논어, 맹자, 중용)를 중심으로 성리학의 체계를 완성하였다. 《대학》은 성리학이 지향하는 공부의 목적과 방법이 무엇인가를 제시하기 때문에 성리학의 출발이 되는 기본서이다. 《대학》은 《소학》과 짝을 이루어 어린 학생들이 몸가짐과 마음가짐을 훈련하는 공부에 뒤이어 자기수양과 사회적 실천인 수기치인을 구체적으로 어떻게 시작할 수 있는지를 제시하고 있다. 《대학》은 이미 성리학의 초석이었던 당 중기 한유 때부터 새롭게 조명되어 출세간을 지향하는 불교와 도교의 사상에 맞서 유교가 지향하는 대동사회의 정치·사회적 이상실현에 목적을 두고 있다.
《대학》은 그 내용의 순서가 《예기》 안에 포함된 원본인 《고본대학》과는 달리 주자가 말년까지 수정하고 보완한 《대학장구》의 순서로 재배치되어 있다. 즉 원래 있던 경전을 그대로 쓴 것이 아니라 주자가 제시하는 수기치인의 구도에 따라 삼강령, 팔조목의 체계로 구성되어 있다. 후대에 주자가 제시하는 대학의 구성에 대한 비판이 끊임없이 있어왔지만 주자가 제시하는 대학의 구성과 《사서집주》의 체계는 성리학의 정수를 이해하는 가장 중요한 내용이다. 퇴계는 조선초기 유학자인 권근의 <대학도>를 수정하여 《성학십도》의 소학도 다음인 제4도에 위치시킴으로 <태극도>와 <서명도>」의 성리학적 세계관에 근거하여 소학과 대학의 공부체계를 정리하였다. 퇴계의 <대학도>는 앎과 행함을 확실히 구분함과 동시에 그것이 반드시 이어지는 하나의 공부임을 분명히 하였다. 유학이 추구하는 이상은 앎으로서만 되는 것이 아니며, 또한 유학적 가치의 앎이 빠진 명분 없는 실천만으로도 안 되는 것으로, 오직 앎과 행함이 하나가 될 때에만 자기수양과 사회적 실현을 이루는 수기치인의 이상이 될 수 있음을 강조한 것이다. 《대학》의 삼강령(三綱領)과 팔조목(八條目) 대학은 고대의 고등교육기관인 태학(太學)에서 인재들을 가르친 내용이다. 주자는 대학의 구성을 수정하면서 삼강령과 팔조목으로 유학교육의 목표와 방법을 설정하였다. 먼저 교육목표가 되는 삼강령은 밝은 덕을 밝히는 것(明明德), 백성을 새롭게 하는 것(新民), 지극한 선에 머무르는 것(止於至善)이고 교육방법이 되는 팔조목은 격물(格物), 치지(致知), 성의(誠意), 정심(正心), 수신(修身), 제가(齊家), 치국(治國), 평천하(平天下)이다. 팔조목은 삼강령과 짝을 이루는데 수기에 해당하는 명명덕은 팔조목의 격물에서 수신까지 연결되어 있고, 치인에 해당하는 신민은 팔조목의 제가에서 평천하까지 연결되어 있다. 명명덕의 수기와 신민의 치인의 궁극적인 완성이 지어지선이 된다. 유학자에게 있어 공부란 언제나 내 마음의 본성인 하늘의 마음을 아는 것에서 시작하여 다른 사람들을 정치·사회적으로 교화하여 한마음을 이루는 것에서 완성된다. 한마음을 이룰 수 있다는 궁극의 믿음에서 출발하여 실제로 그것을 실천하는 단계까지 나아갈 때 비로소 유학의 학문은 완성된다. 이것이 유학 이외의 입신양명을 위한 공부나 사회적인 처세와 다른 점은 철저히 하늘로부터 주어진 자기 본성의 선함인 명덕(性)에서 시작하기 때문에 유학자들의 정치적 실천 또한 높은 자리를 차지하거나 군림하는 것이 아닌 자기 본성을 통한 교화(敎化)라는 점에서 수양과 실천의 원리가 같다. 지와 행의 관계에서 행해지지 않은 것은 진실로 아는 것이 아니라는 평가에서부터 유학에서 앎의 문제는 늘 실천의 문제를 동반하는 수양의 공부이다. 곧 몸가짐과 마음가짐으로부터 출발하여 본성을 오롯이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면 아무리 똑똑하고 실력이 있더라도 덕망이 있는 유학자로 인정받을 수 없고 아무리 좋은 사회적 이익을 얻더라도 그 과정이 의리에 맞는지 틀린지를 역사적으로 비판받게 된다. 《대학》과 경(敬) 대학이 제시하는 공부가 단계적이고 지와 행이 끊어질 수 없는 수양의 공부라면 우리는 어느 단계쯤에 와있고 어느 때에나 그것을 이룰 수 있을 것이라 기대할 수 있을까. 아마 자기의 수양이 완성단계에 이르렀다고 자부하는 사람이 있다면 다른 이들은 그를 칭송하기보다 교만하다며 비난할 것이다. 주자는 대학의 내용의 의문들을 정리한 <대학혹문>에서 배우는 이들마다 공부의 단계와 수양의 수준이 다른 것을 어찌해야 하느냐는 물음에 대하여, 소학과 대학의 공부가 얼마나 되어 있느냐보다 중요한 것은 성학(聖學)의 시종인 경(敬)에 힘써야 함을 강조하였다.
유학의 공부가 지식을 쌓는 학습이 아닌 자기를 수양하고 사회를 변화시키는 실천의 공부라면 유학을 공부하는 사람들에게 공부가 얼마나 되었는가라는 의문은 결코 암기나 시험으로 다 판단할 수 없을 것이다. 주자는 공부가 얼마나 되었는가를 어떻게 알 수 있느냐는 질문에 그의 평소 몸가짐과 마음가짐이 조심스럽고 집중되어 있는가를 보면 그의 위치를 충분히 알 수 있을 것이라 하였다. 학문은 곧 그 사람이다. 공부의 완성에 도달하는 길은 퇴계 또한 강조한 대로 ‘경으로 말미암아 격물치지하여 사물의 이치를 다 궁구하고, 경으로 말미암아 뜻을 성실하게 하고 마음을 바르게 하여 그 몸을 닦으며, 경으로 말미암아 집안을 가지런히 하고 나라를 다스려서 천하에까지 미친다.’는 것이다. 우리의 공부를 돌아볼 때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러움이 없는’ 마음인지 반성해보게 된다.
김주한 | 길가에교회 전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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