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포스터.JPG) 2015년 7월 30일 중국에서 상영된 이 영화는 스칭(十庆)이 총감독을 맡고, 톈좡좡(田壮壮), 장이머우(张艺谋) 감독이 함께 제작에 참여하였다. 과거에 양귀비를 소재로 한 초기작품 《양귀비(杨贵妃, The Empress Yang Kwei Fei)》는 1955년에 일본감독 미조구치 겐지가 홍콩과 합작한 것으로 일본어로 제작되었고, 역사에 충실한 명작이다.
1955년부터 2015년까지 양귀비를 소재로 한 영화나 드라마가 꾸준히 제작되었고 시가, 소설, 희곡, 무용극, 영화, 드라마, 게임 등 다양한 형식으로 재창작되었다. 중국의 전통문화콘텐츠 중에서 삼국지는 독보적이지만 유비, 관우, 장비, 제갈량, 조조, 주유 같은 영웅들이 매력을 발산하는 것과 달리 전통의 속박을 받았던 한 여성이 이렇게 오랜 세월 주목을 받은 것은 비교적 드물다.
당시(唐诗)에 형상화한 양귀비 술과 달을 좋아했던 이백(李白)은 시의 신선으로 불리는데 <촉도난(蜀道难)>이라는 시에서 당 현종(唐玄宗)이 촉으로 피신을 떠나는 험난한 여정을 읊어 그에 대한 동정과 연민을 표현하였다. 사람들이 현종이 촉으로 가는 길에 내리는 빗줄기에 들리는 방울소리를 듣고 양귀비를 떠올려 눈물짓는 애달픈 모습을 상상하여 우림령(雨霖铃)이라는 사패가 지어졌다. 시의 성인으로 추앙받는 두보(杜甫)는 <애강두(哀江头)>라는 시에서 “맑은 눈망울 하얀 치아의 미인은 지금은 어디에 있는가? 피 얼룩 묻히고 떠도는 영혼은 돌아갈 수 없네”라고 읊어 마외역에서 죽은 양귀비의 외로운 영혼을 애도하였다. 백거이(白居易)는 <장한가(长恨歌)>에서 “하늘에서는 비익조(比翼鸟)가 되고, 땅에서는 연리지(连理枝)가 되기를 원합니다.”라는 명구를 지어 당 현종과 양귀비의 사랑에 대한 맹세를 날개가 붙어 늘 함께 날아다니는 새와 가지가 엉겨 붙어 하나의 몸이 된 나뭇가지에 비유하였다. 백거이의 친구인 진홍(陈鸿)은 소설 <장한가전(长恨歌传)>을 통해 양귀비의 사적을 문학으로 남겨 후대 사람들에게 많은 영감을 주었다. 고대 문인은 양귀비의 사랑과 그녀의 서글픈 말로에 초점을 맞추고 동정 어린 눈길로 바라보았다.
불안한 궁녀 양귀비의 이름은 양옥환(杨玉环, 719-756)이고 호는 태진(太真)이다. 양옥환(杨玉环, 范冰冰분)은 광장에서 전쟁에서 목숨을 잃은 당나라 군사의 영혼을 달래주는 위령제에서 빼어난 춤 솜씨로 모든 사람들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당 나라 황제 현종 이융기(李隆基, 黎明 분)는 넋을 잃고 그녀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하였다. 옆에 있던 무혜비(武惠妃, 陈冲 분)가 현종의 마음을 알아차려 양옥환이 그녀의 아들 수왕(寿王) 이모(李瑁, 吴尊 분)를 위해 간택된 왕비라고 거짓으로 고했다.
어느 날 태자와 두 명의 왕자는 황제의 명을 받아 황궁에 침입했다가 역모죄를 뒤집어 씌고 산채로 석고상이 되는 극형에 처해졌다. 태감 고력사(高力士, 吴刚 분)는 이 사건이 무혜비가 꾸민 계략임을 간파하고 황제에게 사실을 고했다. 현종은 그녀의 행위에 치를 떨며 혐오하게 되고 무혜비는 현종 앞에서 장검으로 자결을 선택하였다. 처첩들이 즐비하고 수많은 왕자들 사이에서 무혜비는 자신의 아들이 왕위를 계승하길 바라다가 목숨마저 위태로울 수 있다는 불안에 사로잡혀 씻을 수 없는 과오를 저지르게 된 것이다.
무혜비(武惠妃, 699-737)는 정실은 아니었지만 현종의 총애를 받았고 그녀가 죽은 후 황후로 봉하였다. 후궁들은 왕의 총애를 차지하려고 끊임없이 계략을 꾸몄다. 조선시대 장록수, 김개시, 장희빈 등이 대표 인물이다. 호사가는 후궁을 악의 상징처럼 인식하여 그녀들이 미모로 재물과 권력을 탐내고, 태자를 폐위시키고자 계략을 꾸미며, 황후자리를 탐내어 참소하고 분란을 일으키고, 황제의 총애를 믿고 멋대로 행동한다는 편견에 사로잡혀 있었다. 후궁들은 자신이 처한 시대 환경에서 생존을 위해 치열한 삶을 살았다. 양옥환은 왕의 총애를 입어 귀비(贵妃)가 되었다. 무혜비나 양귀비 모두 왕의 첩실로 후궁이었다. 영화에서 후궁 사이의 갈등은 거의 증폭되지 않고, 무혜비는 현종이 다른 여자를 탐닉하고 자신의 아들을 홀대하는 것에 대해 아쉬움을 토로하였다.
궁녀의 자식 수왕 이모는 현종의 18번째 아들이다. 황후가 폐위가 되고 그의 어머니가 황후 노릇을 하지만 여전히 불안해 하였다. 어머니 무혜비가 양옥환을 견제하여 수왕은 양옥환과 결혼을 하였다. 수왕이 결혼하는 날 양옥환을 자신의 몸처럼 사랑하겠다고 맹세하였지만,수왕은 아버지 이융기의 양옥환에 대한 마음을 알아차린 후 겁을 먹고 임신한 양옥환에게 약을 먹여 낙태 시켰다. 양옥환은 아기를 지키려고 노력했지만 수왕의 무정함으로 자식을 잃게 되었다. 양옥환은 아내를 지키기보다는 태자의 자리를 선택하겠다는 수왕의 말에 절망하고 궁을 나와 사원으로 출가하였다. 사랑과 출세에서 방황하는 수왕을 통해 자식의 성공을 위해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는 무혜비의 그림자를 볼 수 있다.
수왕의 나약함과 집착은 오히려 아버지 현종에게 미움만 샀다. 안사의 난이 일어나자 수왕은 아버지에게 신임을 되찾을 기회라고 여기고 전세가 불리한 상황에서 참전했지만 전군이 패배하고 목숨마저 잃게 된다. 왕조시대의 차기 왕위 계승권자인 태자는 왕위 계승을 둘러싼 정국의 혼란을 막기 위해 태자를 미리 결정해둔다. 그러나 왕위 계승을 둘러 싼 음모와 참담한 일은 여전히 그치지 않았다. 수왕은 자신의 어머니를 잃고 아버지와 아내의 사랑마저 상실한 후 자신의 생명도 지키지 못했다.
궁녀의 남편 당나라 현종 이융기(李隆基, 685—762)는 44년 동안 재위하여 당나라 왕 중에서 가장 오랫동안 집권하였다. 당 왕조(618-907)는 현종 재위 기간 (712-756) 때 국력이 신장되었고 문화도 다양하게 발전하였다. 영화 속에서 당나라 국세의 강성함을 과시하여 황금빛을 두른 궁궐의 스케일이 크고 장엄하며 궁중 화원, 화청지(华清池) 등이 스크린을 화려하게 수놓았다. 태평 성대한 모습을 보여주려고 춤과 음악 등의 향연도 곁들였다.
영화에서 로마가 주교를 파견하여 로마와 중국이 협력해서 아랍을 정복하자는 제안을 설정하였다. 당나라는 문호가 개방되어 궁중의 신하들도 각국에서 온 외국인으로 구성되었다. 현종은 대외적인 외교와 국방에는 자신에 차있었지만 가족과 사랑에서는 순탄하지 못했다. 양옥환은 수왕이 태자 자리를 탐해 자신을 버린 것에 실망하여 도교사원에 들어가서 세상과 인연을 끊으려고 하였다. 현종이 그녀를 찾아와 환속을 간곡히 부탁했지만 거절당하자 분노하여 강제로 그녀와 혼인을 성사시켰다. 현종은 친히 타악기를 연주하며 양옥환과 협주를 즐기고, 그녀의 춤에 반해 <예상우의곡(霓裳羽衣曲)>이란 곡도 지었다. 현종은 물고기가 물을 만난 것처럼 양옥환을 대했고, 그녀는 현종의 진심을 받아들였다.
현종은 양귀비의 반대를 무릅쓰고 양귀비의 일족인 친척 오빠 양국충(杨国忠)을 재상으로 임명하였다. 양국충은 전횡을 일삼고 40여개의 직위를 겸하면서 안녹산과 갈등을 빚었다. 이 일로 인해 동북의 국경 수비를 맡아 대군을 장악한 번장(蕃将)인 안녹산이 반란을 일으켰다. 현종은 장안을 떠나 피난길에 오르고, 성난 병사들은 양귀비에게 안사의 난이 일어난 책임을 물어 그녀의 목숨을 요구하자 무기력한 현종은 양귀비를 지켜주지 못했다. 당 현종은 외교와 국력은 신장시켰지만 내부의 혼란을 바로 보지 못해 사랑하는 여인조차 잃는 아픔을 겪었다.
버림받은 궁녀 양귀비는 중국의 사대미녀 중의 하나이고 역대 왕비 중에서 가장 예술 재능이 뛰어났는데 특히 음악과 무용 등에 조예가 깊었다. 게다가 그녀는 자유분방한 성격으로 왕에게 직언도 서슴지 않았고, 말을 즐겨 타서 중국식 폴로 경기인 기마 격국(击鞠)을 즐겼다. 하지만 그녀가 사랑했던 수왕과 당 현종이 그녀를 지켜주지 못해 비운의 신데렐라가 되었다.
어느 날 현종이 토번(吐蕃)의 사신과 바둑을 두며 골머리를 앓자 양귀비는 왕을 도우려고 일부러 강아지를 바둑판 위에 떨어뜨렸다. 그러자 태감이 양귀비에게 바둑에도 외교정치의 전략이 있음을 귀띔해주었다. 훗날 안사의 난으로 장안을 떠나 피난 가던 도중에 양귀비는 성난 병사들에게 자신은 정치에는 문외한이라 관여하지 않았다고 변명하였다. 그녀는 음악과 춤, 사랑에만 몰두하였고 자신의 결백을 외쳤지만, 현종을 위해 자결을 선택하여 당나라 문인들은 그녀를 동정하는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하지만 또 다른 이들은 그녀의 오빠이자 재상이었던 양국충의 무능과 탐욕을 양귀비와 결부시켰다.
한국사에서도 왕을 위해 희생당한 후궁의 이야기는 흔히 볼 수 있다. 고려시대 시중인 이제현의 딸 이씨 혜비는 왕의 후사를 위해 궁에 들어갔지만 공민왕이 시해되고 나라는 망해 절에 들어가 여승이 되었다. 혜비는 아버지가 고관대작이고 전권을 장악한 왕의 아내였지만 자신에게 닥친 불행을 막지는 못했다.
정도전은 한양에 도읍을 정하고 《주례고공기(周礼考工记)》의 기록에 따라 조선의 궁궐을 신축하였다. 《고공기(考工记)》는 춘추시대 말기에서 전국시대 후기까지 도성 건설에 관한 내용을 수록하였다. 《고공기》는 원래 《주례(周礼)》의 일부분으로 《주례》의 원명은 《주관(周官)》이고 궁궐은 유교의 이념으로 건축되었다. 궁궐은 임금과 그의 가족과 그들의 생활을 돌보는 사람들이 생활하는 곳이다.
봉건전제 국가의 최고 통수권자인 왕이 생활하는 궁궐은 절대권력을 수호하고 엄격한 규범아래 세워진 화려하고 세련된 최상급 건축물이었다. 아래를 굽어보는 높은 망루와 울타리로 사방을 둘러막고, 겹겹인 문은 왕 이외의 사람 신하나 일반 백성과 구분을 짓고 왕의 권력은 절대적인 것으로 의례와 생활은 왕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왕과 혈연관계인 왕자들을 비롯하여 궁녀도 왕의 전유물로서 궁궐의 화려한 장식과도 같은 궁녀는 왕의 조연에 불과하다. 하지만 양귀비는 당당히 역사의 주인공이 되었다.
영화의 중국어 제목은 양귀비에게 왕조의 여인이라 칭해 양귀비의 정체성을 궁녀로 인식하였다. 그녀의 스토리는 궁녀로서 시작되고 종결된다. 이 영화는 ‘엉성한 졸작’, ‘흥행에 실패한 대형 영화’라는 혹평을 받았지만 앞으로 양귀비의 삶에 대한 이야기는 여전히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릴 것이다. 그것은 희극과 비극, 찬사와 연민, 혹은 단순한 포폄(褒贬)에 그치지 않고 시대마다 필요에 따라 다시 가공되어 새로운 문화콘텐츠로 탄생할 것이다.
김영철 | 한양대학교 ERICA캠퍼스 중국학과 교육전담교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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