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9.1  통권 169호     필자 : 유관지
[발행인통신]
김성하(金成河) 목사님

1990년대 초반까지, 중국 동북지역에는 동포 목사님이 단 두 분 계셨습니다. 한 분은 심양(沈阳) 서탑교회의 오애은(吴爱恩) 목사님이고, 또 한 분은 연길교회의 김성하 목사님 입니다. 오애은 목사님은 지난 2월 24일에 향년 91세로 하늘나라로 가셨습니다. 저는 《중국을주께로》 3월호(통권 163호)의 “발행인 통신”을 오 목사님을 추모하는 내용으로 작성하여 독자 여러분께 보내드렸습니다. 이 달 29일(목)은 김성하 목사님의 24주기가 되는 날입니다. 김 목사님은 1992년 9월 29일 새벽 3시에, 77세를 일기로 자택에서 눈을 감으셨습니다. 그래서 이번호 “발행인 통신”은 김 목사님을 추모하는 내용으로 엮으려고 합니다.


그의 역정(历程) - 정주, 집안, 평양, 도쿄…

김성하 목사님은 1915년 4월 24일, 평안북도 정주(郑州)에서 5남 1녀의 다섯째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그의 집은 농사를 지었는데 3대를 이어 예수를 믿는 뿌리 깊은 신앙의 집안이었습니다. 1919년 3•1 만세운동 때 김 목사님의 아버지는 시위에 참가했다가 구속되어 심한 고초를 겪고 석방되었습니다. 일경은 그 뒤에도 김 목사님의 집안을 들볶았고, 김 목사님의 집안은 하는 수 없이 압록강을 건너 길림성 집안현(辑安县)으로 이주하였습니다. 소년 김성하는 이곳에서 교회가 세운 배영학교에 다녔는데, 당시 재학생이 200명 내외였던 이 학교는 매일 예배를 드리고 수업을 시작하였고, 성경을 정규과목의 하나로 정해 가르쳤습니다.  


그가 배영학교에 다닐 때 미 북장로회의 캠벨(A. Campbell, 甘富悦) 선교사가 집안에 와서 사경회를 인도한 일이 있었습니다. 캠벨 선교사는 1916년에 한국에 와서 강계선교부에서 일하고 있었습니다. 캠벨 선교사는 김성하 소년이 성경과 일반학문에 뛰어난 것을 보고 그를 평양에 있는 숭실중학에 추천하였습니다. 이렇게 해서 김성하는 1933년부터 숭실중학에 다니게 되었는데, 학교에서 가난한 학생들을 위해 세운 목공장에서 일하면서 공부했습니다. 그러면서 평양서문밖교회에 열심히 출석하였습니다. 당시 서문밖교회는 잘 알려진 부흥사인 임종순(林锺纯) 목사님이 담임자였고, 수천 명의 교인이 출석하고 있었습니다. 


김성하는 1938년에 숭실중학을 졸업하고 고향으로 돌아와 이현숙(李贤淑)과 결혼하였고, 그 다음해에 일본유학 길에 올랐습니다. 그는 신문배달을 하며 연수(硏修)학원에서 영어를 전공하고 동경신학원에 입학하였습니다. 김성하는 일본에서는 하시모도 목사가 담임하고 있는 도쿄 본향구 삼정목(三丁目)교회당에 출석했는데,이 교회에는 300여 명이 출석하고 있었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막바지에 이르자 일본은 학생들을 대상으로 강제징병을 실시했습니다. 여기에는 일본신학원도 예외가 아니어서 학생들은 징병에 응하느냐, 아니면 자퇴하느냐, 둘 가운데 하나를 택해야만 했습니다. 김성하는 후자를 택해 3년만에 중퇴하고 중국으로 돌아왔습니다.


목사, 농사, 약제사, 의사, 다시 목사

중국으로 돌아온 김성하는 심양(당시 이름 봉천)에 있는 만주신학원에서 계속 공부해서 1944년에 졸업했습니다. 그는 남만노회에 소속되어 1945년 2월에 서풍(西丰)교회를 담임하였는데 이 교회의 교인은 10명 정도였습니다. 노회에서 주는 생활비로는 생활하기가 어려워 부인은 남의 집 빨래를 하고 밭일을 하였습니다. 8•15 해방 뒤에 그는 개원(开原)으로 임지를 옮겼고 1947년에 남만노회에서 목사안수를 받았습니다. 목사안수식은 서탑교회에서 있었는데, 장이규(张利奎) 등 여섯 분이 함께 목사안수를 받았습니다. 김성하 목사님은 동경신학원을 졸업하지는 못했지만 당시 엘리트 교역자들이 걷는 과정 가운데 하나인 숭실과 일본유학의 길을 밟아 목사가 된 것입니다. 그 뒤에 계속해서 개원교회를 담임했는데, 이때 생활비로 현금 20원, 입쌀 40근, 좁쌀 40근을 받았다는 기록이 남아 있습니다. 


중국공산당이 교회의 문을 닫자 김 목사님은 개원농업국에서 운영하는 의화둔(义和屯) 집단농장에 배치되어 농사를 지었습니다. 그러다가 1950년에 통화(通化)로 옮겨 처음에는 약제사로 일했고, 독습과 숭덕의료위생학교의 단기학습과정을 거쳐 국가 의사고시에 합격한 뒤, 1953년부터는 의사로 일했습니다. “의료기구 가방에 빨간 십자가가 그려져 있었는데 그것을 교회의 십자가로 생각하고 최선을 다했어요. 구사부상(救死扶傷)을 사명으로 삼고 열심히 일했지요.” 이것은 필자가 김 목사님으로부터 직접 들은 말입니다. 그는 해마다 모범일꾼(현급 선진공작자)으로 선정되었고, 표창을 여러 번 받았습니다.  


김 목사님은 통화현에서 33년 동안 의사로 일했는데 1980년초부터 교회에 대한 정책이 조금 부드러워지자 때때로 예배를 인도하다가 1984년 1월, 연길교회의 담임목사로 부임했습니다. 당시 중국의 교회들은 살 얼음을 밟는 것 같이 모든 것을 조심해야 했던 형편이었습니다. 이때 김 목사님은 퇴직금을 받으며 편안한 삶을 누릴 수 있는 처지였는데 그 길을 버리고 험난한 길을 택한 것입니다. 김 목사님은 부임 직후에 “광복이 되어 교역자들을 죽이고 붙잡고 가둘 때, 대부분의 목사들은 모두 한국으로, 해외로 달아났는데, 찌꺼기 같은 저를 이때에 쓰시려고 남겨둔 것을 생각하니 할렐루야, 주께 감사할 뿐입니다.”라고 설교한 일이 있는데, 이것은 꾸밈없는 그의 신앙고백이었습니다.
 

 


 

수십 개의 교회당, 처소는 백여 개, 목사는 하나!
당시 연변에는 수십 개의 교회당과 백이 넘는 처소가 있었는데 목사는 한 분뿐이었습니다. 김 목사님이 얼마나 바쁜 생활을 하셨는지는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을 것입니다. 김 목사님은 교회지도자를 양성하기 위해 도문(图们)에 길림성 조선족 성경학습반을 열었는데, 1991년 8월 19일에는 성경학습반을 인도하고 저녁에 연길로 돌아오다가 어두운 길에서 하수도에 빠져 갈비뼈 두 대가 부러지고 온몸에 상처를 입은 일도 있었습니다. 성경학습반을 지도할 때, 새벽기도회를 마치면 두만강변에 나가 북한을 바라보며 기도하곤 하였고, 졸업식 설교를 할 때 “우리, 이 복음이 두만강을 건너 북조선에도 전해지게 합시다!”하고 외쳐 사람들을 놀라게 하였습니다. 


김 목사님의 공식 사망원인은 뇌출혈이었지만 과로가 큰 원인이었음을 알만한 사람들은 다 알고 있습니다. 김 목사님은 하늘나라로 가시기 얼마 전에도 수백 명에게 세례를 베푸셨는데, “세례수(洗礼水) 그릇을 드는 장로님은 교대하실 수 있었지만 목사는 저 하나이어서…”하셨다는 이야기를 전해 들은 일이 있습니다. 저는 1989년 겨울에 연길교회 구내에 있는 사택을 방문하여 김 목사님을 뵌 적이 있는데 사택이 매우 좁고 초라했던 것이 지금도 생각납니다. 김 목사님은 한국에 두 번인가 오신 일이 있습니다. 한번은 마포의, 지금은 없어진 서교호텔에, 한 번은 한국기독교100주년 기념관에 투숙하셨던 것으로 기억됩니다. 1992년 <김성하 목사 설교집>이 출간되었습니다. 길림성 연변조선족자치주 기독교협회가 발행한 것으로 되어 있는 이 설교집에는 그의 설교 28편이 실려 있는데, “발행인 통신”을 쓰기 위해 다시 읽어보니 나지막하면서도 힘이 넘치는 그의 음성이 다시 들리는 것 같았습니다. 김 목사님은 이 설교집이 나오기 직전에 하늘나라로 가셨습니다. 이 설교집은 1992년 7월 25일에 인쇄했으나 여러 가지 사정이 있어서 실제 배포는 조금 지연되고 있었었는데 그 사이에 김 목사님은 하늘나라로 가셨습니다. 사모님께서 출판을 위해 수고한 분들에게 감사의 인사를 하면서 그 일을 안타까워 하시던 모습이 눈에 선합니다.  


 

 


 

몹시도 더웠던 여름이 가고, 서늘한 바람 부는 9월이 되었습니다. 이 가을에 《중주》 가족들에게 좋은 일이 많기를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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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관지|중국어문선교회 고문, 본지 발행인,성화감리교회(분당) 원로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