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3.1  통권 163호     필자 : 최성진
[변화하는 중국]
중국의 핵무기 개발 역사

  

 중국 핵 개발의 아버지로 추앙 받는 첸쉐썬


지난 번 상하이(上海) 출장에서 인상 깊었던 곳은 상하이교통대학에 위치한 거대한 규모의 첸쉐썬(钱学森)기념박물관이었다. 컴퓨터 워드프로세서가 없던 시절, 원고지에 자필로 쓴 논문과 공식, 그리고 각종 도표가 우람한 미사일 모형 등과 함께 전시되어 있었다. 그 빛바랜 자료들을 보면서 낯설지만 진중한 학자의 무게감이 느껴졌다. 중국의 천재 과학자인 그는 중국 핵미사일 발사체 개발을 진두지휘하였다.

그는 1911년 항저우(杭州)에서 출생하여 학생시절부터 천재 소년이라고 불릴 정도로 공부에 두각을 나타냈다. 그는 장학재단의 도움으로 MIT와 칼텍(Caltech, 캘리포니아 공과대학)에서 수학과 항공공학을 전공하였다. 박사 학위를 받은 후에 미국의 정부 연구소에서 근무하면서 2차 세계대전에서 사용된 각종 군사 무기를 개발하는 프로젝트에 참여하였다. 종전 후에는 칼텍의 교수로 임명되어 많은 논문을 발표하였다. 하지만 중국의 공산화와 6.25전쟁에 개입으로 미국과 중국이 적대관계가 됨에 따라 미국에서의 그의 신분도 크게 불안해졌다. 미국 당국은 그의 일거수 일투족을 감시하였고 심지어 가택연금을 하기도 하였다. 여기에 불만을 품은 그는 미국을 떠날 것을 결심하였다. 그리고 중국이 6.25전쟁에서 사로잡은 미군포로들과 맞교환하는 정책에 따라 고국에 돌아올 수 있었다.

중국에 돌아온 그는 마오쩌동의 전폭적인 지원으로 대륙간탄도미사일, 대함미사일, 인공위성, 핵탄두 등의 중요 전략 무기를 개발하는데 헌신하게 된다. 하지만 그는 순진한 과학자만은 아니었다. 중국 역사의 고비마다 지나치게 어용적인 처세를 보이면서 양지만을 걸어왔다. 대약진운동 기간에는 전공분야도 아닌 농업증산정책에 개입하여 큰 실패를 초래했다. 또 마오의 4인방에 줄을 대기도 하였으며 덩샤오핑의 천안문사태 진압을 적극 지지하였다. 그의 이러한 정치 처세술 덕분에 2009년 그가 사망할 때까지 별다른 격변에 시달리지 않고 극진한 대우를 받을 수 있었다. 그 때문에 그에 대한 평가는 극과 극을 달린다. 소련과 미국의 핵 개발 레이스에서 뒤늦게 출발한 중국 입장에서는 첸쉐썬의 헌신은 중국을 군사 강대국으로 발돋움시킬 수 있었던 중요한 시금석이었다.

하지만 과학자답지 못한 그의 행보와 정치 발언은 많은 사람들을 실망시켰던 것도 사실이다. 어찌 보면 그의 일생은 현대 중국을 상징하는 축소판 일지도 모른다. 13억 인구를 기아에서 탈피하게 하고 공업 강대국으로 변모시킨 중국의 공과 공산 독재의 질곡에서 정치의 후퇴를 거듭한 과의 모든 면이 동시에 현대 중국에 투영되어 있기 때문이다. 역사의 발전을 흑백논리로 평가할 수 없듯 그의 공과에 대한 후세의 평가도 한 두 줄의 논평으로 끝내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혼란했던 시기에 중국은 이렇게 다층의 측면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



♣ 최성진 | 한양대학교 경영대학 조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