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유가 이해한 ‘도(道)’는 단순히 정신적 가치만은 아니고, 하나의 완전한 원칙을 포함하는 것이다. 도(道)는 인의(仁义)로 대표되는 도덕 원칙, <시(诗)>, <서(书)>, <역(易)>, <춘추(春秋)>로 대표되는 경전 체계, 예(礼), 악(乐), 형정(刑政)으로 대표되는 정치제도, 그리고 유가가 확정한 분업구조(士农工商), 윤리질서(君臣, 父子, 夫妇), 사회풍속(의, 식, 주)과 종교적 예의(제사) 등을 모두 포괄한다. 실제로 도는 한유가 이해한 유가의 문화이자 사회질서로서, 불교와 구분하면서 동시에 불교도에게 압력을 행사하기 위해서 사용되었다.” -천라이(陈来)1) 정치와 종교의 폐단으로서의 시대적 종말 법가사상을 통해 부국강병을 이룩한 통일왕조인 진나라가 멸망하고 두 번째로 대륙을 통일한 한나라는 유가사상으로 정치체계를 꾸려나갔습니다. 그러나 유학이 관학과 국시가 되면서 현실정치를 비판하는 역할보다 권력에 대한 옹호와 경전의 문자적 해석인 훈고학에만 몰두하게 되면서 후한 이후 당나라 시기까지 유가의 사상이 발전하지 못하고 도가와 불가의 이론이 사회적으로 크게 성행하게 되었습니다. 위진남북조 시대에 이르러 유교와 도교가 혼합된 현학이 융성하였고, 도교를 통해 불교를 해석하는 격의불교가 도입되었습니다. 이후 천태종, 화엄종 등의 불교교파가 발전하였고 당나라에 와서는 더욱 중국화된 불교인 선종(祥宗)과 민중화된 불교인 정토교淨土敎 등이 두루 유행하였습니다. 당나라의 통치자들은 불교가 더욱 자비와 공덕을 강조하며 대륙의 문화를 이롭게 할 것이라 기대했지만 당시의 불교가 정치적으로 더 큰 비호를 받을수록 민간사회에 도덕적인 실천이나 종교적인 위로를 주기보다 정치 위에 올라 치외법권과 같은 호사를 누리기에 급급했습니다. 이로 인해 당시 정치계의 지식층이었던 선비계층은 불교를 비판하지 않을 수 없었고 한유는 불교의 문화적 이질성과 경제적 폐단을 지적하며 불교의 승려들을 몰아내고 경전을 불태우고, 사원을 몰수해야 한다고 주장하였습니다. 종교적 순수성이 사라지고 정치적인 탐욕성만 남았던 당나라의 불교는 그렇게 쇠락의 길을 걸으며 비판 받았고 이것이 곧 유학이 다시 한 번 재도약하는 정치적 계기가 되었던 것입니다. 신유학의 서막, 사상의 본의로 새롭게 돌아가려는 도통론(道通论) 새로운 신유학의 바람은 불교를 비판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하였지만 그 이론적 체계는 불교의 개념과 형식에 많은 영향을 받았습니다. 불교, 특히 선불교에서 가르침을 전수받는 도통의 형식을 그대로 차용하여 한유는 ‘유학 도통론’을 주장하였습니다. 특히 한유는 당시까지만 해도 제자백가 사상 중의 하나에 불과했던 맹자를 존숭하여 공자의 전승자로 추앙하였고, 끊어졌던 공맹의 도를 강조하며 불교와 도교의 폐단을 지적하였습니다. 또한 단순히 불교와 도교를 이단시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본래 <예기>의 한 편에 불과했던 <대학>의 내용을 들어 유학의 정치와 윤리의 체계를 새롭게 설명하여 학자들과 정치인들의 관심 밖에 있었던 유학을 불교와 도교를 넘어서는 새로운 사상적 대안으로 제시하였습니다. 한유의 문제의식은 언제나 종교적이거나 형이상학적인 내용이 아닌 사회구조적인 정치현실에 있었기 때문에 신유학을 물고를 튼 그의 업적은 불교나 도교와의 이단논쟁을 통한 이론적 정밀함보다는 유학을 현실정치에 새롭게 도입한 공로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한유는 이렇게 유학의 정치적 현실성이 곧 당나라 시대의 종교적 정치적 폐단에 대한 해답의 실마리가 된다고 주장함을 통해 새로운 시대와 사상의 선구가 되었습니다. 실천, 투철한 역사의식과 전통 가치의 재발견 한나라 때 유학이 국교화되어 유교가 되었던 이유는 법가사상의 폐단이 극에 달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유교의 폐단이 극에 달했을 때 또한 도교와 불교가 새롭게 부상하였습니다. 사상은 종교의 범주 안에 있든 정치의 범주 안에 있든 어쨌든 사람과 세상에 대한 논의, 곧 인문학으로써 기능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것이 더 이상 사람을 사람답게 세워주지 못하고 세상을 조화롭게 하는데 이바지하지 못한다면 그 가치는 퇴색되고 쓸모 없는 이념과 선동의 도구로 전락할 수밖에 없습니다. 바로 이러한 사조의 흥망성쇠를 보며 우리는 다시 한 번 종교의 순수성과 정치의 현실성에 대한 고민을 갖게 됩니다. 한유 역시 새로운 시대에 대한 열망과 새로운 사상에 대한 고민으로 기존의 유학사상을 새롭게 재해석할 수 있었습니다. 그는 단순히 당대의 종교와 정치의 폐단을 지적하는 것에 머무르거나 옛 전통으로서의 유학을 답습하기만 한 것이 아니라, 경제적 정치적 사회적 문제를 살피면서 어떻게 하면 그러한 문제를 실질적으로 풀어갈 수 있을까 하는 현실적 대안을 논의하고자 하였습니다. 정치적 종교적 폐단을 목도하면서도 그것을 비판하거나 대안을 찾는 노력을 기울이기보다 시류에 편승하고 그 안락함만을 누리려고 할 때 시대는 불의에 빠지고 아픔을 겪게 됩니다. 그와 반대로 한유가 가졌던 역사의식은 분명하게 이러한 상태로는 안된다는 비판의식이었고 이제 새로워져야 한다는 대안의식이었습니다. 그것은 개인의 안위를 넘어 역사적 책임을 다하려는 의식으로 사람을 살리고 현실사회를 이롭게 하는 것이 곧 역사적 사명임을 자각하는 것입니다. 한유가 단순히 비판에만 머물렀다면 개혁가가 아닌 한 명의 반대파 정치인으로만 이름을 남겼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가 기존의 사상에 안주하지 않고 공자가 말한 온고지신(温故知新)의 자세로 유학사상을 재해석하여 활용하였다는 것은 큰 의미가 있습니다. 새로운 대안을 생각할 때 옛 것을 등한시하는 경우가 많이 있지만 역사는 반복되고 사람은 변하는 시대 속에서도 한결 같은 인간적인 문제들을 안고 살아갑니다. 한유는 사람과 사회와 세상에 대한 옛 고민과 해답들을 버릴 것으로 치부하지 않고 더욱 절실히 귀를 기울여 그 안에서 현실적 대안들의 단초를 발견하였습니다. 특히 그가 유학의 도통으로 새롭게 강조한 <맹자>와 <대학>은 이후 주자학의 경전체계인 사서(논어, 맹자, 대학, 중용)를 구성하는데 결정적인 기여를 하게 됩니다. 진래는 ‘한유가 두루 사랑하는 것(博爱)으로 인(仁)의 의미를 규정한 것은 유가의 인학(仁学)을 이해하는 대표적인 견해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라고 평가합니다. 두루 사랑한다는 것은 곧 내면적 정신을 통한 사랑이해가 아닌 외면적 관계를 통한 사랑의 이해입니다. 사랑을 하나의 실천이라고 할 때 시대와 역사를 떠난 사랑이 있을까요? 한유를 통해 역사의식이 사상의 재해석을 만날 때 비로소 새로운 시대를 맞이하게 되는 것을 봅니다. 사회적 실천을 중시했던 한유와 같이 우리도 세상을 바르게 선도하고 사람을 살리는 울림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필자주) 1) 천라이 교수(陈来, 1952 ~ 현재)
약력 2009년-현재, 중국 칭화(清华)대학 철학 교수, 국학연구원(国学研究院) 원장 2008-2009년, 대만 중양(中央)대학 객좌교수 2003년, 홍콩 청스(城市)대학 객좌교수 2002년, 홍콩 커지(科技)대학 객좌교수(인문학부) 1999-2000년, 홍콩 중원(中文)대학 객좌교수(철학) 1998년, 중국 교육부에서 “세기를 뛰어넘는 인재(跨世纪人才)”로 선정 1997년, 미국 하버드대학 객좌교수(동아시아학) 1990-2009년, 중국 베이징대학 철학 교수 1986-1990년, 중국 베이징대학 철학 부교수 1985년, 중국 베이징대학 박사(철학) 주요 저서 『孔夫子与现代世界』, 2011 『传统与现代:人文主义的视界』, 2006 『诠释与重建--王船山的哲学精神』, 2004 『中国近世思想史研究』, 2003 『古代思想文化的世界 (중국고대사상문화의 세계)』, 2002 (한국어판 2008) 『现代中国哲学的追寻—新理学与新心学』, 2001 『朱子哲学研究』, 2000 『中国宋元明哲学史』, 1999 『古代宗教与伦理--儒家思想的根源』, 1996 『哲学与传统:现代儒家哲学与现代中国文化』, 1994 『宋明理学 (송명 성리학)』, 1992 (한국어판 1997) 『有无之境--王阳明哲学的精神 (양명철학)』, 1991 (한국어판 2003) 『朱子书信编年考证』, 1989 『朱熹哲学研究 (주희의 철학)』, 1987 (한국어판 2002)
김주한 | 길가에교회 전도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