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1.1  통권 161호     필자 : 김영철
[중국 영화]
허우샤오셴(侯孝贤) 감독의 《자객 섭은낭(刺客聂隐娘 The Assassin, 2015)》
-사람 살리는 세상을 꿈꾸는 협객

 

 
타이완 영화계를 이끄는 거장 허우샤오셴(侯孝贤)은 《비정성시(非情城市)》, 《밀레니엄 맘보》, 《쓰리 타임즈》로 국내에 잘 알려져 있다. 그런 그가 2015년 8월에 타이완과 중국 대륙에서 《자객 섭은낭》을 선보였다. 허우샤오셴 감독은 1989년 제46회 베니스국제영화제에서 《비정성시》로 황금사자상을, 1993年 제46회 칸국제영화제에서 《희몽인생(戏梦人生)》으로 심사위원대상을, 2007년 제60회 로카르노(Locarno)국제영화제에서 종신영화인상을 받음으로 아시아뿐만 아니라 세계 영화계의 거장으로 우뚝 섰다. 
 

《자객 섭은낭》은 허우샤오셴 감독이 8년 만에 내놓은 신작인 동시에 처음 연출한 무협영화로서 지난해 5월에 열린 제68회 칸국제영화제에서 감독상을 받은 수작이다. 또한 같은 해 10월에 거행된 제20회 부산국제영화제(BIFF)에 갈라프레젠테이션 초청작으로 선정됐고, 11월 21일 제52회 타이완영화제 진마장(金马奖, Taiwan Golden Horse Film)에서 최고 감독상, 최고 극영화상, 최고 촬영상, 최고 음향효과상, 최고 조형디자인상, 그해 타이완 최고 영화인상 등 6개의 대상을 한꺼번에 거머쥐었다. 《자객 섭은낭》은 후진취안(胡金铨) 감독의 《협녀(1971)》를 계승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협녀》는 1972년 제10회 타이완영화제 진마장과 1975년 제6회 칸국제영화제, 1975년 제1회 캐나다 몬트리올영화제 등에서 수상하여 중국 무협영화가 국제무대에서 주목받는 계기가 됐다.
 

허우샤오셴은 대학 때 당(唐)나라 배형(裵鉶)의 문언단편소설집 《전기(传奇)》 속의 《섭은낭》을 처음 접하고 난 뒤, 7년 동안 영화제작을 준비했다. 주인공 섭은낭(舒淇 분)은 어려서 여자 수도승한테 납치돼 무예가 출중한 여자 자객으로 변신하여 귀향한다. 허우샤오셴 감독은 그동안 고수해왔던 타이완 본토의식에서 벗어나 《자객 섭은낭》에서는 객관적으로 현실을 관찰하고 타이완과 대륙 양안에 대한 정치 은유를 담고 있다는 평론가들의 평론을 반박했다.


여성 자객의 프롤로그

8세기 중엽 안사(安史)의 난을 겪은 당 조정의 정치력은 급격하게 쇠퇴했다. 변방 장군들이 병권을 쥐고 정국을 흔들어 번진(藩镇) 문제가 수면 위로 떠오르기 시작했다. 원래 변방 서부 흉노족을 대항하기 위해 설치된 번진이었지만, 안사의 난 이후에 군사력을 증강한 번진의 할거는 더욱 심각해졌다. 허베이성에 위치한 범양(范阳), 성덕(成德), 위박(魏博) 이들 3개의 번진 가운데 허베이성 남부와 산동성 북부에 이르는 위박이 제일 강성했다. 황하 하류의 위박은 안사의 난 이후에 생겨난 번진으로 중앙 정부의 통제를 받지 않는 세력이었다. 위박의 첫 번째 세력가는 전승사(田承嗣)였는데 안록산에게 부림을 받다가 당에 투항해서 절도사 지위를 얻어 대대로 세습했다. 가성공주(嘉诚公主, 许芳宜 분)는 수도 장안(長安)에서 위박의 세 번째 주인 전서(田绪, 戴立忍 분)에게 시집와서 위박의 군사력을 안정시키고 반란을 저지하는 화친을 꾀했다.
 

가성공주는 전서의 아들 전계안(田季安, 张震 분)이 15세에 결혼할 때 옥결(옥으로 된 장식)을 주고 다른 한 개는 섭봉(聂锋, 倪大红 분)의 딸 섭은낭에게 나눠주었다. 하지만 낙주 자사(洛州刺史) 원의(元谊, 高捷 분)는 만여 명을 이끌고 귀순하여 서출 전계안(田季安)을 원의 딸 전원씨(田元氏, 周韵 분)와 혼인하게 하고 양가는 화목하게 지냈다. 이에 전에 가성공주의 쌍둥이 자매인 가신공주(嘉信公主, 许芳宜 분)였던 도사 비구니는 10살밖에 안된 섭은낭을 납치하여 산으로 데려갔다. 섭은낭은 산중에서 13년 동안 무술을 연마한 후 한 명의 폭군을 죽이면 수많은 생명을 살릴 수 있다는 사부의 명을 받들어 어려서 혼인을 서약한 소꿉친구 위박의 네 번째 주인 전계안을 제거하기 위해 돌아온다.


악인을 척살하는 자객

영화 도입부에서 매서운 눈썹을 기른 고위관리가 아들에게 손등의 나비를 보여주자 아이는 손을 대려고 한다. 그러자 아버지는 조심조심 다루라고 일러줬다. 이윽고 부자는 함께 천장으로 날아가는 나비를 쳐다보다가 아이는 어머니와 공을 가지고 놀기 시작했다. 한참 아이와 놀며 씨름한 부부는 지쳐서 방바닥에서 눈을 붙이고 아이도 아버지의 품에서 잠들었다.
 

검은 옷의 자객 섭은낭이 어둠 속에서 지켜보다가 다가가서 바라보자 아버지는 놀라서 잠에서 깼다. 섭은낭이 등을 돌리고 나갈 때 아버지는 칼을 뽑아 그 여자의 등을 향해 던지는데 그 여자는 칼을 막아내고 사라졌다.
 

사부가 왜 이리 늦었는지 꾸짖으며 물었고 섭은낭은 어린 아들이 너무 사랑스러워서 차마 손을 대지 못했다고 말했다. 그러자 사부는 엄하게 질책하며 앞으로는 죽일 대상인 사랑하는 사람을 먼저 처결하라고 다그쳤다.
 

이 장면을 보는 두 시선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첫째, 섭은낭은 수년 동안 살인의 도구로 살았지만 마음속에는 여전히 선한 본능을 간직하여 어린 아들을 안고 있는 탐관오리를 처단할 수 없어 주저했다. 이는 맹자가 중시했던 측은지심의 발로인 것으로 어른이 우물에 빠진 어린 아이를 보고 구해주는 심정과 같은 것이다. 아버지는 폭압 정치를 하는 관리였지만 자신의 아들에게는 나비를 살살 다루라고 당부하고 아이와 함께 놀아주고, 자는 아이를 품어주는 따뜻한 심성을 지닌 자상한 아버지였다. 어느 누구도 한 가정의 화목을 깰 권리가 없다.
 

둘째, 정치 역학관계에 희생된 여성의 반란이다. 섭은낭의 사부는 원래 가신공주였는데 쌍둥이 자매인 가성공주가 정략결혼의 희생물이 된 것에 반감을 품어왔다. 가성공주는 수도 장안을 떠나 멀리 번진으로 시집을 와서 조정과 번진의 평화를 가져올 것이라 생각했지만 그 여자의 삶은 평생 고독과 불행으로 점철됐다. 사부는 이를 목격하고 난폭한 지방세력 번진의 절도사를 제거해야만 진정한 평화가 온다고 굳게 믿었다. 그래서 섭은낭으로 하여금 부패관리를 처단하는 살인 도구로 만들었고 섭은낭의 이전 약혼남인 전계안을 제거하는 것은 한 명의 악인을 제거해서 세상의 평화와 안녕을 도모하는 것이기에 세상의 모순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유혈도 감행하는 무력이 필요하다고 여겼다.
 

이러한 사부의 이미지는 스승이나 부모의 원수를 갚기 위해 칼을 든 협객을 다룬 기존 무협영화에서 볼 수 있다. 허우샤오셴 감독은 혼란한 정국 속에서 여성은 정략결혼의 희생이 되거나 세상의 악을 처단하는 살인 도구로 변모하여 복수와 불행의 악순환의 고리를 벗어나기 어렵다고 보았다.


사람 살리는 자객이 동경하는 이상향

섭은낭의 외숙인 장군 전흥(田兴, 雷镇语 분)이 간언하자 절도사 전계안은 진노하여 전흥을 귀양 보내라고 명하고 섭은낭의 아버지 섭봉은 군기 담당관 도우후(都虞侯)로서 호송의 명을 받아 임청(臨淸)으로 가는 길에 자객들이 나타나 섭은낭은 왜나라(일본) 남자의 도움을 받아 아버지와 외숙을 구출했다.
 

신하의 간언을 듣지 않고 분노를 표출했던 흉포한 관리 전계안은 섭은낭을 버리고 떠난 약혼남이었다. 섭은낭은 그와의 인연을 소중히 여겨 혼인 서약의 예물인 옥결을 전계안에게 건네주고 그가 자신을 배신한 것을 용서했다. 섭은낭은 원씨(元氏) 일가에서 파견한 여자 자객 정정아(静静儿)를 물리치고 정정아의 사부인 공공아(空空儿)가 요사스런 술법으로 임신한 전계안의 애첩을 죽이려고 하자 그 사람을 구했다.

섭은낭은 어머니가 전계안을 죽이면 그의 부인 친족 원씨 일족이 틈을 타서 천하를 어지럽힌다는 말을 듣고 나서 심산유곡의 도관(道观)에 있는 사부를 찾아와 결별을 선언하며 전계안을 죽이면 그의 아들이 어려서 세상은 더욱 혼란하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사부는 검술은 익혔지만 인륜의 정을 끊지 못했다고 섭은낭을 꾸짖으며 사사로운 감정을 버려야 정의를 실현할 수 있다고 강조하지만 섭은낭은 무력을 행사하면 세상의 혼란을 종식시키지 못하고 오히려 혼란을 가중시킬 거라고 여겼다.
 

영화의 마지막 결투신은 사부와 그의 제자 섭은낭 사이에서 벌어졌다. 사부가 하산하는 섭은낭을 향해 먼저 거세게 공격하지만 섭은낭은 이를 막아내고 심지어 이제는 고수가 돼 사부의 옷자락에 칼집을 내지만 차마 베지 못하고 돌아서서 묵묵히 내려갔다. 사부는 어쩔 수 없이 제자 섭은낭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섭은낭은 사랑하는 사람과 스승을 잃고 혼란스러운 당나라 어느 곳도 발 디딜 곳 없어 새로운 곳을 찾아 나섰다. 섭은낭은 왜나라에서 건너오는 남자를 돕기 위해 함께 신라로 먼 여행을 떠났다. 그는 당나라로 파견하는 선박의 장인으로 바다에서 조난을 당해 거울을 닦아주는 것을 업으로 삼고 천하를 유랑하다가 섭은낭의 아버지와 외숙이 자객한테 봉변을 당하는 것을 목격하고 도와주어 인연을 맺었다.
 

섭은낭은 사람의 목숨을 앗아가는 살인(杀人)보다는 사람을 살려서 문제를 해결하려는 활인(活人)의 방법을 선택했다. 설령 폭도, 배신한 인물, 탐관오리라도 자신의 가족에게는 그의 목숨이 소중하다. 허우샤오셴 감독은 지난해 7월 BBC와의 인터뷰에서 어떤 이유에서든 살인은 용인할 수 없다고 밝히고, 영화 속에서 피 한 방울도 흘리는 장면을 연출하지 않아 다른 무협영화와의 차별화를 시도했다. 기존 무협영화와 달리, 하늘을 날아다니는 것을 모방하기보다는 지구의 중력과 사실에 기초하여 《자객 섭은낭》을 제작했다. 허우샤오셴 감독은 술이부작(述而不作), (《논어》)이란 공자의 말을 인용하며 “서술할 뿐이지 창작하지는 않는다.”라고 천명했다.
 

전국시기 대표적 법가인 《한비자(韩非子)》에서는 “협객은 무력으로써 법을 위반한다(侠以武犯禁)”고 하여 협객을 범법자로 규정하고 비판했다. 유가는 문치(文治) 즉 예로 실천 강령을 내세우고 법가는 법치로 사회질서를 바로잡으려고 했다. 협객은 사회의 위법 행위지만 대중의 인기를 얻어 문(文)이 아니라 무(武)로 정의를 실천했다. 사마천은 전한시기 협객에 대한 기존의 관념을 전복하는 소신을 발언했다. 《사기》에 「유협열전」, 「자객열전」을 편찬하여 성공하거나 실패했으나 정의를 내세워 세상을 비추려 했던 협객의 족적을 높이 평가했는데, 그중에서도 진시황을 시해하려던 형가(荆轲)는 후대에 널리 알려진 인물이다. 협객은 법가에서 불용하는 폭력의 수단으로 기존질서에 대항하여 개인의 원한보다 천하에 공분을 사는 세력을 제거하기 위해 존재하며 공적 정의를 구현했다.
 

사마천이 역사가로서 무력을 통해 정의를 구현한 협객을 정당화하는 일에 앞장섰다면 허우샤오셴 감독은 비폭력, 무혈혁명을 지향하여 기존의 무협영화에서 주로 다루던 폭력성을 제거했을 뿐만 아니라, 영화 《일대종사(The Grandmaster, 2013)》에서는 무술의 미학조차도 축소하거나 심지어 거부했다.
 

그는 무술을 내세우는 힘의 미학을 따르지 않고 자연과 사람이 하나 되고 사람 사이에 화해를 추구하는 이상세계를 추구했다. 영화의 후반부에 아름다운 자연과 동물, 그리고 정겹게 서로 도우며 사는 작은 마을을 앵글에 담았다. 자객에게 부상을 당한 섭은낭의 아버지와 외숙은 왜나라 사람의 도움을 받아 작은 시골마을에서 안식을 취하고 크고 작은 염소들이 한가로이 풀을 뜯고 아이들은 낯선 외국인과 함께 어울리며 웃음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이러한 도화원은 사람에게 상처를 주는 칼의 날을 세우기보다는 자신을 성찰하는 거울을 닦는데 애쓰는 사람들이 모여 살아가는 곳이다. 시편 기자의 말이 떠오른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그가 나를 푸른 풀밭에 누이시며 쉴 만한 물 가로 인도하시는도다.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시편 23편1-3절) ▤



♣ 김영철 | 한양대학교 ERICA캠퍼스 중국학과 교육전담교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