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공산화 이전 중국 내 몽고인들을 대상으로 선교사역을 하였던 제임스 길모어 선교사의 일생에 관한 내용이다. 몽고는 현재 중국에 속한 내몽고(內蒙古)와, 중국에서 외몽고(外蒙古)라 부르는 몽골공화국(Mongolia)으로 구분된다. 현재 중국 내에 있는 몽고인은 공식적으로 중국 내 55개 소수민족에 포함되며, 표준 중국어로 ‘멍구족’이라고 불리운다. 그러나 이 글에서는 한국인에게 익숙한 용어인 ‘몽고인’으로 통일하였다. _편집자 주
「멀리서 들려오는 소리가 있네 황량한 몽고 사막에서, 신장(新疆), 티벳(藏), 먀오(苗)족 변방의 황무하고 건조한 땅엣, 미얀마, 인도 각 나라와, 중앙아시아의 각 족속들이 간절히 외치는 소리 ‘어서 와 우리를 도와달라’」-頌主聖歌 381장-
이 유명한 선교 찬송곡의 맨 첫 부분은 원래 ‘그리인란드의 얼어붙은 땅에서’라는 가사로 되엉 있었다. 그런데 영문으로 된 본문을 중국어로 번역을 하면서 이 부분이 삭제되었다. 그리고 원래는 신장, 티벳, 먀오족과 나란히 나열되어 있던 몽고가 앞부분으로 옮겨져 지금의 가사가 되었다. 누구에 의해 이렇게 정리되었는지는 모르지만 잘한 것 같다. 이 찬송가가 불리워질 당시의 중국 그리스도인들에게 그리인란드는 들어보지도 못한 아득히 먼 상상 속의 땅일 뿐이었다. 오히려 만리장성만 넘으면 바로 닿을 수 있는 몽고가 더 현실감과 도전성이 있는 땅으로 느껴졌을 것이다.
반 생애를 몽고인과 함께 제임스 길모어라는 젊은 영국 그리스도인도 이 찬송을 자주 부르곤 했다. 비록 그는 그리인란드가 앞에 있고 몽고가 뒤에 있는 영문가사로 불렀지만, 결국 그는 빙산이 아닌 사막을 자신의 목적지로 선택하였다. 48세라는 짧은 생 가운데 21년을 몽고인을 위해서 산 그를 우리는 ‘몽고인의 사도’라고 불러도 좋을 것이다.
제임스 길모어(중국명 李雅各)는 스코틀랜드의 글래스고우에서 멀지 않은 캐스킨(Cathkin)이라는 곳에서 여섯 형제 중 셋째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당시 유명한 장인(匠人)이었지만 아침, 저녁 두 차례씩 가정예배를 인도하는 등 온 가족이 그리스도 안에서 경건한 생활을 하도록 이끈 영적 가장이기도 하였다.
19세가 되었을 때 길모어는 글래스고 대학에 입학하였다. 그는 특히 라틴어와 헬라어에 뛰어나 여러 번 상을 받기도 하였다. 글래스고 대학을 졸업한 길모어는 런던 선교회(London Missionary Society)에 가입하였으며, 체스헌트(Cheshunt) 대학에서 2년, 하이게이트 선교신학원(Highgate Missionary Seminary)에서 6개월 더 공부하였다. 공부를 마친 그는 1870년 홀로 중국으로 건너갔다.
글래스고 대학하면 유명한 중국 선교사 몇 명이 떠오를 것이다. 윌리엄 번즈(William C. Burns), 더글라스(Cartairs Douglas), 버클레이(Thomas Barclay), 그리고 「광학회(廣學會)」를 창시한 윌리암슨(Alexander Williamson), 타이완에서 30여년 동안 사역한 닐슨(A. B. Nielson)등이 모두 이 대학 졸업생들이다. 이로 볼 때, 글래스고 대학은 중국 교회와 관련하여 ‘캠브리지 7인’을 배출한 캠브리지 대학에 결코 뒤지지 않을 것이다.
몽고인을 향한 뜨거운 마음 몽고는 청대에 와서 내몽고와 외몽고로 나뉘어졌는데, 만리장성 북쪽과 고비사막 남쪽 지역을 내몽고라고 하고, 고비 사막 북쪽에서 바이칼 호수 남쪽을 외몽고라 한다. 해변에서 가까운 내몽고의 동남쪽(동몽(東蒙)이라고도 함)은 비교적 윤택하여 농경지가 있지만, 이 지역을 제외한 다른 광대한 지역은 모두 목축에만 적합한 땅이다.
원(元)대 이래로 라마교가 몽고에 들어와 가장 큰 세력을 가진 종교로 성장하였다. 청(靑)대에 이르러 몽고족의 세력을 잠식시키려는 목적으로 청 정부는 몽고족에게 적극적으로 라마교를 제창하였다. 이에 따라 승려의 수가 점차적으로 증가하자 몽고족의 출생률은 감소하기 시작했다. 과거 용맹스럽고 호전적이던 몽고족의 민족성은 점차 그 기세가 수그러져 영원히 일어서지 못하고 말았다.
런던선교회는 19세기 초부터 일찍이 몽고족 선교를 시작했다. 1817년 두 명의 선교사가 바이칼 호수 남쪽에 있는 사이렁진스커(塞 등지에 와서 러시아 통치 아래 쓴 몽고인들에게 1841년까지 복음을 전했다. 그 중 한명인 스완(W. Swan) 선교사의 미망인이 1869년 길모어에게 이 역사를 이야기 해 주었을 때, 길모어의 내면에서 몽고인들을 향한 뜨거운 마음이 강하게 일기 시작했다.
1870년 5월, 길모어는 영국을 떠난 지 3개월 만에 베이징(北京)에 도착하였다. 그가 속한 런던선교회는 베이징에서 본격적인 사역을 진행하고 있었다. 윌리엄 록하트(William Lockhart)가 개원한 진료소를 비롯하여 이미 사역의 기초가 잡힌 상태였다. 이 진료소는 나중에 아시아 최대 규모의 병원인 협화의원(協和醫院)이 되었다. 그 후 20년 동안 길모어는 베이징을 기반으로 계속 몽고족을 향해 복음을 들고 나아갔다.
유목민들 사이에서 중국에 온 첫 해 8월에 길모어는 첫 번째 몽고 여행을 시도했다. 베이징을 출발하여 장자커우(張家口), 쿠룬(庫倫), 챠커투(克圖), 사이렁진스크, 이르쿠츠크에 도착하였다. 그리고 돌아올 때도 역시 같은 경로였다. 이 여행을 하는 데 총 1년 반이 걸렸다. 장자커우와 챠커투에서 머무는 날이 가장 많았다. 그는 이 여행을 통해 몽고의 언어, 문자와 생활습관을 배웠을 뿐 아니라 몽고인의 사상과 정신을 이해할 수가 있었다. 또한 그는 여행 중에 많은 몽고인 친구들을 사귈 수 있었는데, 그들의 집인 파오(包: 몽고인들의 이동식 천막집)를 직접 방문하여 그들로부터 몽고에 대한 모든 것을 배울 수 있었다. 물론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기회도 놓치지 않았다.
그러나 길모어는 여행 중에 죽고 싶은 생각이 들 정도로 뼈아픈 고독을 느낀 적도 있었다. 그의 일기장에는 “오늘 내 자신은, 바알의 선지자들과 싸워 이겼지만 도리어 하나님께 죽기를 구하였던 광야의 엘리야처럼 느껴진다. 어떤 상황이든지 간에 선교 사역은 정말 두 명, 두 명씩 움직여야 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후에도 그에게는 오랫동안 동역자가 없었다. 그러나 끝없는 고비 사막을 혼자서 오가며, 그는 조금씩 홀로 있는 생활에 익숙해지기 시작했다.
겨울은 장거리 여행에 적합하지 않기 때문에 대부분 베이징에서도 몽고인들에게 복음 전하는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당시 베이징에는 몽고인들이 사는 두 지역이 있었는데, 길모어는 자주 큰 보따리 두 개에 복음서적을 짊어지고 가서 그 지역에서 장사를 했다. 매번 사람들이 몰려 들여 구경을 했고, 그는 군중들에게 책의 내용을 소개했다. 책을 사고 싶지만 돈이 없는 사람에게는 대신 물건을 받고 팔기도 했다. 그래서 그는 항상 책을 다 팔고 버터나 빵, 양고기 등의 식료품을 가득 지고 돌아오곤 하였다.
아픈이별, 그리고 새로운 사역의 시작 4년의 고독한 사역 이후 길모어는 드디어 1874년 말에 가장 이상적인 동역자를 얻는다. 두 명씩 사역하길 바라던 그의 소원이 드디어 이뤄진 것이다. 그 동역자는 다름 아닌 그의 아내였다. 그들은 1년 동안 편지를 왕래한 끝에, 결혼하기 1주일 전에야 비로소 첫 대면을 할 수 있었다. 어린 예비신부는 혼자 영국에서 배를 타고 중국으로 왔다. 참으로 큰 용기가 팰요했을 것이다.
결혼 후 길모어 부인은 그 용기를 더욱 발휘하여 여러 차례 남편과 함께 몽고 지역을 여행했다. 그들은 천막을 집으로 삼는 등 힘들고 고단한 생활을 해야 했지만, 그녀는 한 마디의 불평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녀의 육체는 점점 쇠약해져서 마침내 의사의 권고에 따라 온 가족이 1882년 영국으로 돌아가 휴양할 수 밖에 없었다.
길모어는 본국에 머무는 동안, 12년 동안 중국에서 계속 써오던 원고를 정리하여 「몽고인 속에서(Among the Mongols」라는 제목의 책을 발간하였다. 이 책은 인쇄되어 나오자마자 큰 호응과 좋은 평판을 얻었다. 「로빈슨 표류기」와 견줄만한 대작이라고 호평하는 평론가도 있었다. 어떤 사람은 길모어가 다시 몽고에 들어갈 필요없이, 영국에서 문서사역을 하면 반드시 성공할 것이라고도 말하였다. 하지만 그의 생각은 달랐다. 자신이 직접 몽고인들에게 가서 복음을 전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일은 없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는 가족을 이끌고 이듬해말에 다시 베이징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여전히 건강이 회복되지 않았던 길모어 부인은 1885년 병으로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영국에서 휴양을 마치고 돌아온 길모어는 유목민 몽고인을 중심으로 하던 사역을, 동몽고에 있는 농경민 몽고인 중심으로 옮기기로 결정했다. 아내가 세상을 떠나고 3개월이 지나, 그는 새로운 사역지에서 첫 사역을 시작했다. 첫 사역을 시작했다. 따청즈(大城子)를 중심으로 시작된 그의 새로운 사역은 점차 주변으로 발전해나갔다. 그는 이지역에 사는 몽고인들은 다른 곳보다 많이 한화(漢化:한족화)되어 있다는 놀라운 사실을 발견하게 되었다. 그래서 이 지역에서는 몽고어로된 복음서적보다 한어(漢語)로 인쇄된 서적이 더 많이 팔렸다.
잠시 베이징(北京)으로 돌아온 길모어는 두 아들을 영국으로 보내 공부를 하게 하고, 자신은 잠시 휴식을 취한 후 다시 동몽고로 돌아가 따청즈 외에 차오양(朝陽)을 두 번째 사역 중심지로 삼았다. 8개월 동안의 사역을 통해 5천 여 명의 환자를 돌보고, 2만여 명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다. 3천여 권의 복음서적이 팔렸으며, 4천여 장의 전도지를 사람드에게 나눠주었다. 그는 이기간 동안 총 1,800여 리의 길을 걸었다.
생의 장막을 거두다 1891년 길모어는 톈진(天津)에서 런던선교회 화북지역 연회를 주최하였다. 연달아 매일 열린 회의가 끝났을 때, 그는 고열에 시달리기 시작했다. 의사는 특수한 장티푸스에 걸린 것이라고 진단하였다. 처음 1주일 동안은 그럭저럭 지탱할 수 있었으나, 두 번째 주부터는 40°C 이상 열이 올랐고 의식도 희미해졌다. 마지막 이틀 전, 길모어는 계속 여행을 가야 한다고 중얼거리면서 침대에서 일어나려고 안간힘을 썼다. 주위 사람들이 이제 천국에 가서 주님 얼굴을 볼 것이라고 위로하자 비로소 조금 안정되었다. 5월 21일, 오랫동안 몽고 사막을 고생스럽게 오가던 제임스 길모어 선교사는 마침내 그의 다리를 쉬고 생의 장막을 거두었다. 영원한 하나님의집에 거하게 된 것이다.
사역하는 동안 그는 종종 본국에 있는 친척과 친구들에게 부지런하고 생동감 있는 편지를 써 보내곤 하였다. 마침내 그의 편지와 일기, 선교 보고서 등을 편집하여 「몽고의 제임스 길모어(James Gilmour of Mongolia」라는 책이 편찬되었다. 세상을 떠난 지 1년 만에, 몽고족과 함께 했던 그의 일생이 잘 정리된 귀중한 자료가 출판된 것이다.
출처 | 대만 캠퍼스 선교지「校園」66년 8월호, “蒙古的使徒-李雅各” (원문은 인터넷에서 볼 수 있습니다.) http://galilee.campus.org.tw 번역 | 곽숙 · 편집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