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기의 전환은 사람들로 하여금 미래에 대해 각양각색의 전망을 하도록 뜨거운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새로운 세기에 대한 전망은 모든 분야에서 가장 중심적인 화제가 되고 있다. 미래에 대한 대부분의 전망은 긍정적인 면과 부정적인 면들에 관한 것이다. 그렇다면 교회는 어떠한가? 예수님의 몸인 교회는 당연히 하나님의 뜻에 따라 인도되는데, 과연 인간이 교회의 장래를 전망할 수 있을 것인가? 이 글에서는 금세기 이래의 중국 교회 상황을 회고해 보면서, 이에 따른 몇 가지 상황을 다시 한번 생각해 보고자 한다.
지금으로부터 백 년 전, 의화단의 횡포에 직면하여 생명의 위협을 받았던 중국의 기독교인들은, 목숨을 잃을지라도 신앙을 지킬 것인가 아니면 구차하게 목숨을 부지할 것인가 하는 생사의 기로에 서 있었다. 그런데 당시 수많은 신도들은 우리에게 아름다운 믿음의 증인들로서의 모범을 보여주었다. 즉 생명을 걸고 신앙을 지켰던 것이다. 그들이 믿음을 지켰기 때문에 중국 교회는 사라지지 않았고, 이어지는 세월 속에서 오히려 빠른 속도로 회복하고 성장해 갈 수 있었다.
50년 전, 중국 교회는 또 다른 선택의 기로에 서야 했다. 중국 공산 정부의 정치적인 간섭을 받아 들여 교회를 정부의 선전 도구로 전락시킬 것인가 하는 문제였다. 이 때는 생사 여부와 직접적인 관계는 없었지만, 사람들이 볼 때 생사의 선택과 마찬가지로 매우 중요한 순간이었다. 심각한 결과를 초래할 수도 있는 이러한 선택에 직면했었기 때문에, 오히려 미지근한 신앙을 가졌던 적지 않은 수의 신도들로 하여금 성경으로 돌아가서 하나님의 뜻과 가르침을 구하게 하였다.
그래서 그들은 교회가 오직 위대하신 하나님께만 순종해야 하며, 하나님의 명령만이 우리가 따라야 할 유일한 길임을 알게 되었다. 많은 성도들이 이에 대한 대가를 치루기 위해 자신의 생명과 자유와 장래를 포기하였다. 믿지 않는 사람들이 볼 때 이들이 정치 권위자의 뜻을 거스리는 것은 계란으로 바위치기이며, 스스로를 죽음의 골목으로 몰고 가는 것과 다를 바 없었다. 뿐만 아니라 이들은 예배당을 잃어버렸고, 전임 목회자도 다시는 나올 수 없었다. 다만 집에서 은밀하게 가정교회라고 불리우는 불법집회를 열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사실 이들 가정교회는 하나님이 중국에서 일으킨 복음 사역이라고 해야 더욱 적합할 것이다. 이들의 특징은 모두 열정적으로 복음을 전하고 복음 사역을 위해서 기꺼이 대가를 치른다는 사실이다. 이처럼 하나님의 영광과 위대하심을 나타내는 복음 운동으로 말미암아 중국 교회는 그 후 수십 년 동안 극도의 불리한 환경 속에서도 여전히 부흥하였고, 구원받는 사람의 수도 놀랍게 증가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하나님을 대적했던 사람들도 하나님의 위대하신 능력 앞에서 놀라움으로 할 말을 잃었고, 결국 부득불 전략을 바꾸는 방침을 세우게 되었다.
그리고 또 50년이 흘렀다. 세기의 전환을 맞은 중국 교회는 또 다시 갈림길에 놓여있는 것 같다. 이번의 선택은 100년 전 개인이 신앙의 절개를 지키느냐 했던 것과, 50년 전처럼 교회가 정절을 지키느냐 했던 것과도 다르다. 그것은 바로 중국의 가정교회가 복음사역을 효과적으로 이루어 나감으로, 하나님의 능력이 이 복음으로 인해 계속 나타낼 수 있겠는가의 문제이다. 표면적으로 볼 때 어떤 중대한 결정을 내려야 할 필요는 없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질적으로 가정교회는 다방면에서 교회를 동요시키는 조류의 영향에 직면하고 있다. 만약 한층 더 강화하여 이러한 영향에 대비하지 않는다면, 결국 가정교회는 복음운동 고유의 특징과 역할을 잃어버리게 될 것이다. 이러한 조류 가운데 비교적 큰 영향을 미치는 것은 다음과 같다. 이단의 거센 물결 복음 운동을 훼방하는 이단의 영향은 일반적인 교회사에서 볼 때 그리 이상한 현상이 아니다. 그러나 신도 수가 급격히 증가한 중국 교회는 신앙의 기초가 비교적 약하며 문화 수준도 비교적 낮기 때문에, 이단 선지자들에게 넓은 활동 공간을 제공하였다. 지금도 각양 잘못된 이단사설들이 끊임없이 사방에서 출현하여 사람들을 미혹시키고 있다. 사단의 목적은 복음의 내용을 왜곡시키는 것이다. 만일 복음 운동에서 전하는 것이 순전한 복음이 아니라면 이는 벌써 방향을 벗어난 것이며, 마땅히 증거되어야 할 진리와 가치를 잃어버린 것이다.
최근 몇 년 간 중국 복음 사역에 있어서 지도자 훈련(培訓事工)이 보편적으로 가장 중시되고 있다. 사실 지도자 훈련은 더할 나위 없이 매우 중요하다. 그러나 과연 훈련의 내용이 성경의 진리와 순수한 복음의 가르침으로 된 것인지, 아니면 그저 단편적인 내용이나 개인의 경험, 방법의 전수인지를 잘 분별해야 한다. 새 천년에 사단은 전력을 다해 더욱더 다양한 방법을 동원하여 복음 운동이 고수하는 순수한 진리를 훼방하려 할 것이다. 우리는 이 치열한 영적전쟁에 충분한 대비를 해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와 그 분의 십자가, 말씀을 높이 들고 나가는 것만이 거짓 선지자를 대항하여 이길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 교회관의 수정 1930년대에 이미 중국 교회에 강력하게 역사하신 하나님은 이후 가정교회의 부흥을 위한 진리의 기초를 준비하셨다. 당시 주님을 사랑하는 많은 성도들은 유형의 조직과 건축물이 교회의 필수 요소가 아니라, 성도들이 영으로 교제하며 서로 섬기는 것임을 깨달았다. 그러므로 50년대 초 가정교회라는 형식이 생겨났을 때, 형제 자매들은 예배당과 목사님을 잃게 된 것을 그리 안타깝게 여기지는 않았다. 오히려 교회가 형식의 굴레에서 벗어남으로 사역 전개에 있어서 더욱 자유로워졌다. 이로써 중국의 복음 사역은 교회에서 모이고 목사님이 인도하는 전통적인 형식으로부터 탈바꿈하게 되었다.
오랜 세월동안 그들은 자신들의 교회를 스스로 ‘가정집회’라고 불렀지만 뚜렷한 자아 의식은 없었다. 가정교회라는 명칭은 70년대 말 해외의 형제 자매들이 가지고 들어온 것이다. 사실 명칭이 그다지 중요한 것은 아니지만, 가정교회에게 ‘교회’라는 이름을 붙임으로서 사람들은 쉽게 자신들이 갖고 있는 교회의 기준으로 이를 판단하게 된다. 물론 신학적인 교회관으로 볼 때, 가정교회가 완전한 면모를 갖추지 못하였고 사역면에서도 균형을 이루지 못한 점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러나 이것은 중국이라는 특별한 상황에서 하나님께서 일으키신 특별한 역사이다. 하나님의 목적은 교회 명칭이 지속되는 것이 아니라 복음이 효과적으로 전파되는 데 있다. 영적인 교회는 소멸할 리가 없기 때문에 외적인 명칭이 지속될 필요는 없는 것이다. 특수한 조건을 갖추고 있는 환경에서 융통성 있고 민첩한 가정교회의 복음 사역이 중국에서 계속되는 것을 하나님께서 원하실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이러한 특별한 역사를 이해하지 못하는 해외의 일부 크리스천들은 기존의 신학적 교회관의 기준에 맞춰 가정교회를 개조하려고 한다. 가정교회의 신세대 지도자들은 자신이 처해 있는 복음 사역의 특징을 깊이 체득하지 못한 채, 외부의 영향을 받아 단편적으로 알게 된 신학적 교회관의 개념으로 쉽사리 중국 가정교회를 정형에서 벗어난 미성숙한 교회로 간주해 버린다.
그리고는 신학에서 말하는 교회의 형식에 따라 이를 수정하고 개조할 것을 요구한다. 이러한 흐름은 종종 가정교회를 조직화, 규범화하며 일정한 의식, 예절을 갖추는 데서 구체적으로 표현된다. 교회의 참된 의미에서 볼 때 이러한 요구는 필수적인 것도 아니고, 또한 크게 비난할 필요도 없는 것이다. 그러나 필자의 과거의 경험을 종합적으로 돌이켜볼 때 개인적 견해로는, 가정 집회가 신학에서 말하는 교회관의 기준에 도달하지 못했기 때문에 ‘교회’라고 불리우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반면 가정집회가 조직화, 규범화되지 않았다고 해서 복음사역의 활력과 생명력이 없다고는 말할 수 없다. 새로운 세기에 중국의 사회적, 정치적 상황이 여전히 변함이 없다면, 가정교회를 조직화, 규범화 하는 것은 교회 전통의 표현은 강화될지 몰라도, 복음사역이 보다 활발하게 확장되는 장점을 잃어버리게 되어 결국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게 될 것이다. 과연 이것이 하나님의 중국을 향한 뜻인지에 대해서는 장담할 수 없다. 사회조류의 영향 20세기 후반은 세계적인 격변의 시기였다. 정치, 경제, 과학 방면을 불문하고 하루하루 변화를 가져왔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변화는 중국 교회에도 영향을 미치지 않을 수 없었다. 이것은 주로 다음 두 가지 면에서 나타나고 있다. 1) 사회생활 : 중국이 경제적으로 개방되고 서구의 생활 방식이 들어옴에 따라, 중국 사회는 이에 상응하는 변화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보다 풍요로워지고 생활 조건이 개선됨에 따라 중국의 크리스천들은 새로운 시험과 유혹에 부딪히게 되었다. 과거 익숙해져 있던 영성 추구 방식에도 충격이 가해지게 되었다.
따라서 어떻게 하면 현실 생활과 영성 생활 간에 균형을 이룰 것인가 하는 새로운 과제가 중국 교회 안에 대두되었다. 아마 이 문제에 대해 교회 내 장년층과 청년층 간에는 생각이 조금은 다를 수 있을 것이다. 만일 이 문제가 잘 해결된다면 성도들을 올바른 영성의 길로 이끌어 갈 수 있을 것이지만, 잘 해결되지 못한다면 양극 분화되거나 혹은 소극적인 자세로 신앙생활을 한다든지 아니면 거기까지 도달할 힘이 없어 신앙을 포기하여 결국에는 세속에 동화되어 그 물결에 휩쓸리게 될 것이다. 2) 사상의식 : 20세기 인류 최대의 수확은 아마도 인권의 발전일 것이다. 자유 민주주의는 이미 사람들의 의식 속에 널리 퍼지게 되었고, 전세계 사회에서 가장 강한 호소력을 지니게 되었다. 모든 성도들이 인간의 선천적인 양심에 기초하여 민주와 자유를 쟁취하기 위해 전력을 다하는 것은 정당한 것이다. 하지만 교회라는 곳이 과연 이것에 책임을 지고 종교적 교리를 나타낼 수 있는가에 대해서는 신학 관점에 따라 서로 다른 견해를 가지게 마련이다. 사실 교회의 궁극적인 임무가 순수하게 복음을 전하는 것인가 아니면 사회 참여도 포함되는가의 문제는 오래 전부터 계속되어 온 논쟁이다. 그러나 특수한 국정에 처해 있는 중국 교회가 당장 사회 운동에 개입하는 일이 지혜로운 방법인지, 과연 효과적인 복음 사역에 유리한 것인지에 대해서는 잘 생각해봐야 한다. 최근 교회 간행물에 실린 글들은 나로 하여금 몇 가지를 다시 한번 돌아보도록 만들었다. 가정교회의 이름으로 신앙의 자유를 요구하는 호소가 과연 합당한 것일까? 돌이켜보면 지난 50년 동안 가정교회는 줄곧 압제의 환경에 처해왔다. 이들이 오직 굳게 잡고 있었던 말씀은 복음을 위해 고난을 당하는 것을 기쁘게 생각하고,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힘을 다해 복음을 전파하자는 것이었다. 때를 얻지 못할 처지에 놓여있을 때에, 때를 얻게 될 기회가 올 것을 소망하지 않을 수는 없었겠지만, 어떻게 해야 때를 얻을 조건이 형성될 것인지에 대해서는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그래서 최근 몇몇 가정교회들이 자신들의 이름을 걸고 정부를 향해 대화를 요구하며, 신앙 자유의 권리를 달라고 호소하는 문장을 발표하는 것을 보고 좀 놀라웠다. 나는 그 글의 내용을 반대하지는 않는다. 다만 가정교회의 이름으로 발표하는 것은 좀 보류해야 하지 않나 생각한다. 왜냐하면 그렇게 되면 사람들은 가정교회가 조직화되어 간다고 간주하게 될 것이며, 정치적 색채를 띤 요구를 제시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현재 중국의 환경과 조건을 보면 그렇게 되는 것은 교회의 복음 사역에 어려움을 가져다 줄 것이 분명하다.
물론 어떤 혁명이든 노력과 희생이 요구되기 마련이고, 개개인이 이를 위해 기꺼이 대가를 지불하는 것은 경탄할 만한 것이다. 그러나 가정교회의 궁극적인 사명은 무엇인가? 이렇게 되면 복음 사역에 미칠 영향이란 얻는 것보다 잃는 것이 더 많을 것이다. 미래의 세기에는 자유 민주의 개념이 사람들의 요구사항 가운데 더욱 중요한 자리를 차지할 것이다. 새로운 세대의 가정교회 지도자들도 이러한 개념을 관념상으로만 지향하던 것에서 더 나아가 실제적인 노력을 기울이는 방향으로 전환할 것이다. 아마도 언젠가는 가정교회도 중국 사회에서 강한 조직의 면모를 갖추게 되어 결코 간과하지 못할 목소리를 낼 수 있을 것이고, 그렇게 되면 기독교는 민주 운동의 힘을 실현시킬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일단 복음사역이 사회운동의 색채를 띄게 되면 분명히 그 작용과 효과에 있어서는 큰 영향을 받게 될 것이다. 어떤 면에서는 가정교회의 발전이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더욱 중요한 면에서 이는 복음사역의 손실이라고 할 수 있다.
중국 교회가 100년 전과 50년 전, 두 차례에 걸쳐 생사기로의 선택을 내렸던 때를 돌이켜보면, 주님 안에 있는 우리 믿음의 선배들은 유일하고 존귀하신 주님의 명령을 따르는 길을 선택했다. 그래서 한 세기 동안 하나님의 축복이 폭포수처럼 중국 교회에 임했으며, 어떤 권세도 이를 막을 수 없었다. 그러나 이제 새로운 세기를 맞이하면서 중국 교회는 분명히 또다른 갈림길에 서 있다. 성도들이 계속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고 성경이 가르치는 것을 지키기만 한다면, 중국에서의 복음운동은 분명 중단되지 않을 것이며, 중국 교회는 하나님의 돌보심 아래 반드시 부흥하고 성도들도 날로 증가할 것이다. 삼자교회는 중국의 정치적 기후와 밀접한 관계가 있기 때문에, 삼자교회의 미래에 대한 평가를 하기에 앞서 중국 정세에 대한 예측이 있어야 하므로 필자가 뭐라 말할 수 있는 범위는 아니다. 하지만 점차 과학기술이 발달하고 전 세계가 점점 개방되는 형세를 띔에 따라 중국 정부도 좀 더 지혜롭게 종교 정책을 강구해야 할 중요성을 깨닫게 될 것이다.
그리고 분명히 점차적으로 교회 사역 부문에 있어 삼자교회에게 더욱 많은 자주권을 줄 것이다. 그러나 신학 교리에 있어서는 사회주의 선전에 걸맞는 수정 작업을 더욱 강화하도록 요구할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작년 좥톈펑(天風)좦에 실린 딩광쉰(丁光訓) 주교의 “어떤 하나님을 믿을 것인가? ” 라는 글을 보면, 삼자신학의 수정 작업은 이미 그 서막이 열렸을 뿐 아니라, 새로운 사회주의 신학을 위한 조정이 진행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아마도 그들은 이미 때가 무르익었으므로, 신앙의 내용을 어떤 식으로든 수정하든지 오늘날 개방된 신학계 속에서는 일반적인 일이라고 여기는 것 같다. 대부분의 복음주의 교회조차 이미 모든 민주 기풍을 수용하는 법을 배웠기 때문에, 삼자신학이 또 어떤 식으로 수정을 한다해도 서양 교회와 이미 성립한 교류 관계에 영향을 미치지는 않을 것이다. 새로운 세기에도 삼자교회는 해외에서 더욱 많은 활동 영역을 확보할 것이다. 그러나 가정교회에 있어서는 하나님의 마음을 얻는 것이 가장 중요한 것이다. 메이쩡즈(梅增知) | 중국 가정교회 사역자 번역 | 김경아 · 자원봉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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