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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를 접해본 적이 있는 홍수전(洪秀全)이 창립한 ‘배상제회(拜上帝會)’와 그가 이끈 ‘태평천국(太平天國)’은 기독교와 공통점이 있으면서도 차이점이 있었다. 홍수전과 태평천국에 대한 선교사의 태도와 선교사역에 있어 태평천국의 영향은 상호 관련이 있었다. 이에 본고에서는 홍수전과 기독교, 배상제회 및 태평천국과 기독교의 공통점과 차이점, 선교사와 태평천국의 관계 등에 대해 간략히 소개하고자 한다.
1. 홍수전과 기독교
청나라 비밀결사 활동의 모토는 ‘반청복명(反?復明)‘이었다. 가경(嘉慶)연간부터 ‘천지회(天地會)’가 광동, 광시, 푸젠, 장시 등지에서 세력을 얻기 시작했는데, 특히 외국상인과 선교사가 많은 광저우와 그 인근지역에서 뚜렷한 성장세를 보였다. 도광(道光) 말엽에 이르러 홍수전이 풍운산(馮雲山) 등과 함께 천지회와 기독교를 혼합한 ‘배상제회(拜上帝會)’를 창립하고 ‘태평천국(太平天國)’을 건립하게 된다.
홍수전은 가경(嘉慶) 18년인 1814년 광저우 화현(花縣)에서 출생한 객가인(客家人)이다. 도광 16년인 1836년 두 번째로 과거에 낙방한 그는 광동 유학자 주차기(朱次琦)로부터 유교와 전통사상을 배웠다. 또 거리에서 <권세양언(勸世良言)>을 배포하며 선교활동을 하는 선교사 스티븐과 그의 중국인 동역자를 만나게 되면서 예수님을 믿으며 악신과 악마를 배척한다는 교의를 처음으로 접하게 되었다. 하지만 집에 돌아온 그는 9권으로 엮인 <권세양언>을 자세히 읽어보지는 않았다. 1837년 세 번째로 과거에 낙방한 뒤 심히 낙심한 그는 몽환적인 상태가 지속되는 급성 정신병을 40일 동안 앓았다. 야사 <천왕본(天王本)>의 기록에 따르면 그는 병중에 다음과 같은 환상을 보았다고 한다. ‘그날 그는 와병으로 인해 병상에서 급사했지만 정신은 또렷했다. 처음에는 용 한 마리, 호랑이 한 마리, 닭 한 마리가 방 안으로 들어왔다. 이어서 한 부대(部隊)가 음악에 맞추어 다가오는데 꽃가마가 그 뒤를 따라오다가 방 입구에서 멈춰서더니, 한 사람이 다가와 가마에 오르기를 청했다. 가마를 타고 밝고 화려한 궁전 입구에 이르니 수많은 남녀가 그가 오는 것을 보고서는 허리를 숙여 인사했다. 한 노부인이 그를 연못으로 인도하여 몸을 씻게 했다. 또 다른 노인들이 작은 방으로 그를 인도한 뒤 그의 배를 열어 심장을 꺼내고 새로운 심장을 집어넣은 뒤 봉하자 아무 흔적도 남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궁전 내부를 둘러보았다. 사면 벽에는 권선의 글귀가 적혀있었다. 정전(正殿)에 이르니 금발머리에 검은 옷을 입은 노인이 장엄하고 찬란한 보좌 위에 앉아 가까이 오라고 손짓하더니 눈물을 흘리며 그에게 말했다. “세상 사람들을 내가 창조했다. 옷과 음식 등 모두 내가 주지 않은 것이 없다. 하지만 인류는 은혜에 보답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나를 버리기까지 하고 악마와 가까이 지낸다. 네가 하루빨리 악마를 멸하고, 진리의 편에 서서 인류가 다시 돌아오게 하기를 원한다.” 말을 마친 뒤 악을 멸하고 정의를 수호하기 위한 증거물로써 보검 한 자루와 금 도장 한 개를 그에게 주었다.’ 홍수전은 또 와병 중 한 중년 남성을 만났다고 했다. ‘장형’이라고 부르는 그는 홍수전을 도처로 데리고 다니며 악마와 악신을 찾아 징벌하도록 도와주었다. 이러한 환상과 꿈을 통해 홍수전은 자신이 하늘로부터 명을 받았으며, 하늘을 대신해 뜻을 펼쳐야 한다고 여기게 되었다.
도광 23년인 1843년, 홍수전은 네 번째로 과거시험에 낙방하게 된다. 화가 난 그는 집으로 돌아와 책을 내팽개치며 “차라리 내가 과거시험을 열어 선비를 뽑겠다.”라고 말했다. 하루는 사촌 형 이경방(李敬芳)이 왔다가 <권세양언>을 우연히 발견하여 빌려가 읽은 뒤 크게 흥미를 느끼게 되자, 이를 계기로 홍수전 역시 이를 자세히 읽어보게 되었다. 그제야 그는 책에 나오는 천부상제(上帝)가 6년 전 정신병을 앓았을 당시 만났던 노인이고, 예수그리스도가 악마를 징벌하도록 가르쳐 준 중년의 장형이며, 악마는 악신과 우상이고, 구해야 할 형제자매는 세상 사람들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래서 그는 상제만을 경배하고 우상을 제거하는 것을 자신의 임무로 삼게 되었다.
2. 배상제회와 본색교회(本色敎會)
홍수전은 과거시험에 낙방해 극도로 낙담한 나머지 몽환상태에서 환상을 보았던 경험으로 <권세양언>을 해석했고, 이를 기반으로 본색화(本色化) 신학을 발전시키고 본색화 교회인 배상제회를 창립했다. 우선 그는 사촌 형 이경방과 ‘죄악을 씻어버리고 새롭게 되자’고 외치며 서로 머리에 물을 뿌려 세례를 줌으로써 그들 스스로 만들고 명명한 종교의 신도가 되었다. 먼저 자신의 글방에 있던 공자 위패를 없애고 집안에 있던 우상과 조상 위패를 모두 태운 뒤 열심히 포교활동을 벌였다.
친족 홍인간(洪仁?)과 사촌 동생 풍운산(馮雲山)이 먼저 세례를 받았고, 그 후 여러 친족과 온 집안의 남녀노소가 속속 귀의하기 시작하였다. 입회한 사람들은 우상을 버리고 상제만 섬겼으며, 물세례를 받고 죄를 고백하는 주장(奏章 - 상소문)을 태웠다. 그들은 또 악신을 섬기지 않고 악한 일을 하지 않으며 천조(天條)를 준수할 것을 다짐했다. 홍수전과 이경방은 ‘참요검(斬妖劍)’이라고 새겨져 있는 삼척 길이의 보검을 차고 다니며 상제의 도움으로 큰일을 이루기를 간구했다. 큰일이란 종교혁명을 통해 민족 정치혁명과 사회문화혁명을 추진하고자 하는 것이었다.
도광 27년인 1847년, 홍수전은 홍인간과 함께 광저우 남 침례회 로버트 목사에게 성경을 배웠다. 이는 로버트 목사의 동역자 주도행(周道行)의 소개로 이루어졌는데, 한 달 간 학습 후 집으로 돌아온 홍수전은 또 혼자서 두 달 간 성경을 공부했다. 그 후 돈이 다 떨어지자 로버트 목사에게 금전적인 도움을 부탁하기도 했다. 로버트 목사는 홍수전이 진정한 기독교인이 아니라 여기고 세례를 베풀지 않았다. 또 홍수전이 병상에서 겪은 일을 들려주었을 때도 믿지 않았다. 홍수전은 로버트 목사와의 성경공부 중 새롭게 번역된 성경과 각종 전도책자를 읽고 교회조직과 예배의식에 대해서도 학습할 기회가 있었다. 특히 그가 접한 ‘송영’은 후에 천조(天朝) 찬송가의 저본이 되었다. 풍운산은 일찍이 1844년부터 구이핑(桂平) 자형산(紫荊山) 산지에서 혁명기지를 물색하며 포교에 힘썼고, 많은 주민들이 귀의하며 배상제회를 조직하게 되었다. 홍수전이 자형산에서 풍운산과 합류할 무렵에는 이미 3천여 명의 신도가 있었고, 교세가 빠르게 확장되면서 서강(西江) 유역 일대 많은 사람들의 활발한 참여가 이루어졌다. 홍수전은 풍운산을 교주로 임명했고, 풍운산은 집회를 이끌었다. 귀의하는 사람들이 많아질수록 교세가 확장되었다. 얼마 후 배상제회는 정치적, 혁명적 성격의 종교단체로 변모되었다. 각지에서 신도가 순식간에 크게 늘어났는데 일가, 마을 전체, 가문 전체, 또는 노동자단체가 한꺼번에 가입하는 경우도 있었다. 대부분이 농민이었고 부호, 지주, 토호도 일부 포함되어 있었다. 신도들은 천부상제만 경배하고 구세주 예수를 숭배했으며, 10개 조항으로 이루어진 천조(天條 - 십계명을 모방)를 지키고 아침저녁으로 예배하고 기도했으며, 죽은 뒤 착한 사람은 천국에 올라가 영원한 복을 누리는 반면 악인은 지옥에 떨어져 형벌 받을 것을 굳게 믿었다. 서로를 형제자매라 부르며 사랑하고, 기율을 엄수하고 교주에게 충성을 다하고 명령에 복종했다. 아편, 살인, 불효, 다툼, 음주, 도박, 간음, 절도를 금하고 서로 간에 선을 행하고 사사로움을 없애기 위해 힘썼다.
홍수전과 풍운산은 또한 본토화된 예배의식을 만들었다. 그들은 특별히 건축된 예배당이 아닌 큰 홀에서 예배를 드렸다. 단 위에는 밝은 등 두 개와 차(茶) 세 잔을 놓았으며, 남녀 신도가 좌우 양측에 나누어 앉았다. 예배는 찬송가 한 장을 부르는 것으로 시작되었는데, 집례자가 설교한 뒤 회중 모두가 햇빛이 들어오는 방향을 향해 꿇어 앉아 눈을 감은 상태에서 한 명이 대표기도를 했다. 새로 귀의한 사람은 우선 꿇어 앉아 참회문을 낭송한 뒤 이를 불태웠으며 집례자가 참회, 하나님 경배, 천조 준수 여부를 물은 뒤 머리 위에 물 한 그릇을 부어 세례를 주었다. 세례를 받은 신도는 일어나 물 한 잔을 마시고 물로 가슴을 씻음으로써 철저히 회개했음을 보여주었다. 신도들은 자주 강물에 들어가 전신을 씻으며(침례교의 영향을 받은 듯함) 죄를 고백하고 용서를 구하는 기도를 하기도 했다. 신도들은 또 홍수전과 풍운산이 특별히 작성해 준 기도문을 받아 아침저녁으로 낭송했다. 길흉화복이나 중대한 일이 있으면 음식을 제물로 삼아 제사의식을 거행했고, 제사가 끝나면 함께 음식을 나누어 먹었다. 이는 모두 중국의 전통적인 제사 형식을 도입한 것들이었다. 홍수전과 풍운산은 기독교의 성찬예식에 대해서는 알지 못한 듯싶다.
배상제회의 신도 수가 계속 늘어 만여 명에 이르게 되자, 수십 명에 달하는 간부들이 생겨나게 되었다. 그 중 양수청(楊秀淸), 소조귀(蕭朝貴), 위창휘(韋昌輝), 석달개(石達開) 등 4인방이 중심인물이 되었다. 홍수전과 풍운산은 이들 4인과 의형제를 맺고 상제를 천부로, 예수를 큰형(천형이라 부름), 홍수전을 둘째 형, 풍운산을 셋째 형으로 삼고, 나머지는 연령대로 서열을 정했다. 다섯 명은 홍수전을 국가 원수로 삼고 천왕이라 불렀으며, 새로 세운 나라를 함께 소유하고 다스리기로 서약했다. 당시 배상제회는 귀신이 인간의 몸에 들어올 수 있다는 사람들의 믿음을 바탕으로 상제가 양수청의 몸을 입고, 예수가 소조귀의 몸을 입고 세상에 내려와 설교하는 것이라고 여겼다. 이는 처음에는 홍수전에 대한 배상제회 신도들의 믿음과 충성심을 굳게 하는 데에 일조했지만, 후에 일어난 내분의 불씨가 되었다.
3. 태평천국과 본색기독교(本色基督敎)
태평천국이 함풍(咸豊) 원년(1851년) 광시에서 수립되고 홍수전이 공식적인 천왕이 되었다. 태평천국은 기독교와 유사점이 있었지만, 엄밀한 의미의 기독교는 아니었다. 홍수전은 국호를 태평천국이라 정하고 아들을 태자가 아닌 ‘유주(幼主)’라 칭했다. 자신을 황제로 자청하지 않은 것은 천부인 황상제의 호칭을 감히 가로챌 수 없기 때문이었다. 국호는 중국의 천하태평 사상에서 따왔는데, <권세양언>에 등장하는 태평에 관련된 내용과 신약성서 마태복음에 나오는 현세에서의 천국도 인용한 것이다. 그는 오늘날 복음주의가 현세에서 천국을 실현하려고 하는 것과 유사한 사상을 가지고 있었지만,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않는다.”라는 예수의 말에는 주목하지 않았다. 홍수전이 아들을 태자라 칭하지 않은 이유는 예수를 황상제의 황태자로 존칭했기 때문이었다. 이 밖에도 조정을 천조(天朝), 군대를 천군(天軍), 역법을 ‘천력(天歷)’이라 일컬었다. 그들은 경천(敬天)을 건국의 기본으로 삼으면서도, 한편으로는 태평천국의 위세를 크게 떨치고자 했다. 태평천국은 기독교와 유사했으나 실상은 진정한 기독교라 할 수 없다. 이는 태평천국의 기본신앙과 법령제도를 통해 명확히 알 수 있다.
1) 태평천국의 기본신앙
태평천국의 기본신앙은 홍수전이 몽환상태에서 본 환상으로써 <권세양언>을 해석해 얻은 ‘고정관념’이다. 홍수전은 후에 로버트 목사로부터 가르침을 받고 성경을 읽을 수 있었지만, 선입견에 사로잡혀 구약의 율법에 집착하고 신약을 소홀히 다루었으며 참다운 예수그리스도의 복음을 깨닫지 못했다. 그는 기독교의 삼위일체를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태평천국은 하나님을 ‘천부’라 부르며 천왕(곧 홍수전)과 그의 큰형인 예수를 모두 ‘천모(天母)’가 낳았다고 여겼다.
그들은 또 하나님을 ‘황상제(皇上帝)’라 불렀는데, 이는 귀츨라프(Karl Friedrich August Gutzlaff)목사의 성경 번역본에 따른 것이기도 하지만, 더 거슬러 올라가면 서경(書經)에서 나온 말이기도 하다. 따라서 그들은 상제를 중국 고대에 섬겨지던 상제와 동일한 대상으로 간주했다. 그들은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고 만물을 주재하는 유일한 참신이며 공평하고 공의롭고 사람과 교통하는 존재라 믿긴 했으나 하나님의 분노, 전투, 귀신 물리침, 악에 대한 증오를 강조한 나머지 하나님의 가장 중요한 속성인 사랑을 말살해버렸다.
태평천국은 또한 예수그리스도를 하나님의 독생자로 여기지 않았으며, ‘우리의 주가 되시며, 성령으로 잉태되어 동정녀 마리아에게 나심’을 믿지 않았다. ‘우리를 대신하여 죽임 당함으로 죄를 사하시고, 우리를 위해 부활함으로 사망의 권세를 이기시고, 다시 오셔서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시고, 마귀의 일을 멸하고 의가 있는 곳인 새 하늘과 새 땅을 세우신다’는 기독교의 기본신앙은 모두 태평천국의 신앙이 아니었다. 태평천국은 또 성령이 그리스도를 위해 증거하고 사람으로 하여금 죄를 깨닫고 회개하고, 믿고, 의롭게 되고, 거룩함을 입게 한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그들은 오히려 양수청을 성령으로 간주했다. 즉, 모리슨이 번역한 삼위일체 중의 성령을 양수청이라 여긴 것이다. 태평천국은 기독교의 참다운 세례예식과 성찬예식을 알지 못했다. 앞서 말했듯 그들은 자의적인 세례의식을 진행했으며, 성찬예식은 아예 존재하지 않았다. 이는 홍수전 자신이 기독교 세례를 받은 경험이 없고, 성찬도 받은 적이 없기 때문이었다.
태평천국이 기독교 신앙에 관련되어 보여준 자유 · 평등 · 박애 정신은 그저 겉모습만 있을 뿐 알맹이가 없는 것이었다. 따라서 그들의 법령제도는 기독교와 유사한 듯 보이나 속 모습은 달랐다.
2) 태평천국의 법령제도
태평천국은 법령을 제정하고 새로운 제도를 반포· 시행했는데, 기독교와 유사하나 실제는 다른 부분이 많았다. 이는 다음의 예를 통해 알 수 있다.
① 천조(天條)와 도조(道詔)의 반포
앞서 밝혔듯이 배상제회에는 천조를 지키고 아침저녁으로 예배해야 한다는 규정이 있다. 천조는 수도를 천경(天京)으로 정한 뒤 반포되었는데, 첫 번째는 회개와 관련 조항이고, 다음은 세례와 기도에 관한 내용이다. 또 모세의 십계명을 본떠 열 개 조항으로 이루어진 천조를 만들기도 했다. 이 밖에도 ‘원도구세조(原道救世詔)’를 반포해 실제로 ‘천하는 한 집안(天下一家)’이라는 사상을 기반으로 남녀평등도 주장했다. 그 내용은 대부분 유교의 수신지도(修身之道)에 관련된 것들이었고 기독교의 도덕적 교훈과 유사했다. 또 부대에서 도를 가르치게 하고 지방에서 민중을 불러 모아 도를 전파했다.
② 악습 근절
태평군은 대부분 광동과 광시 지역의 객가인이었고, 부녀자들은 어릴 때부터 전족을 하지 않았다. 홍수전은 난징에 정착한 뒤부터 강남(江南) 부녀자들의 전족을 금지했고 도박, 음주, 간음, 강탈, 절도, 미신, 흡연을 엄금하며 위반한 자는 사형에 처했다. 또 평등사상과 기독교 교의에 위배된다는 이유로 노비매매, 첩 두기, 매음 등을 엄격히 금지해 여성의 지위를 크게 높였다. 그러나 사서에 의하면 아이러니하게도 천왕은 난징에 들어간 뒤부터 여색에 빠져 수십 명의 후궁을 두고 조정을 돌보지 않았다고 한다.
③ 향토정치 추진
25호 마다 예배당을 두고 일요일이 되면 모두 예배당에 모여 예배하고 설교를 들었는데, 향토 관리가 돌아가며 예배를 인도했다. 이는 정교일치의 향토정치를 표방한 것이었다. 모든 어린이들은 매일 학교에서 학습했다. 하지만 이러한 향토정치는 이상에 그쳤을 뿐 실현되지는 못했다.
④ 천력(天歷) 도입
태평천국은 수립 이듬해부터 새로운 역법을 도입하고 과거 역서에 나오는 택일, 길흉, 생극(生克), 음양, 화복 등 미신을 모두 마귀의 궤계인 그릇된 것으로 여기며 철폐했다. 또 서양의 역법에 따라 7일을 한 주로 묶어 요일 개념을 도입했다.
⑤ 새로운 토지제도 반포
홍수전은 상제를 천부로 삼는 사람들은 모두가 형제자매라는 사상에 따라 공평의 원칙을 강조했다. 이에 함풍 3년인 1853년, ‘천조전묘제도(天朝田畝制度)’를 반포해 토지와 재물을 공유하도록 했다. 공동으로 경작하고 음식을 나누어 먹고 의복을 나누어 입으며 재산도 공동으로 관리했다. 이로써 배를 곯는 자가 없도록 했으며, 남녀 동등하게 대우함으로써 천하가 천부의 복을 함께 누리도록 했다. 하지만 이것 역시 이상에 그쳤을 뿐 실현되지는 못했다.
⑥ 과거시험을 통한 인재 선발
천왕, 북왕(北王), 익왕(翼王) 등은 모두 과거시험에 낙방한 경험이 있었는데, 천하의 인재를 직접 선발하고자 했다. 홍수전은 함풍 3년에 조서를 내려 과거시험을 개최하도록 했다. 태평천국의 과거시험에는 두 가지 특색이 있었다. 첫째는 남녀 모두 응시가 가능하도록 하는 남녀평등의 원칙이다. 하진천(何震川)과 홍선교(洪宣嬌)가 각각 남자 및 여자 응시자들을 위한 감독관을 맡았다. 둘째는 사서오경이나 기타 고서가 아닌 성경이나 조정의 서적에서 시제를 출제했다는 것이다.
3) 태평천국의 종교에 대한 간우문(簡又文) 교수의 견해
태평천국 연구의 전문가인 간우문 교수는 그의 저서 <청사홍수전재기증정본(淸史洪秀全載記 增訂本)>에서 태평천국에 호감을 보였는데, 특히 태평천국의 종교제도를 높이 평가했다. 이는 다음과 같은 서문에 잘 나타나 있다.
「‘천왕은 늘 신교(新敎) 전파에 힘썼다. 조정에는 경전출판 책임관리 4인을 임명해 성경과 전도서적 인쇄를 담당하도록 했다. 조정의 모든 관리와 병사들은 매일 아침저녁과 식사 전에 천부상제에게 예배했다. 길흉, 건축, 출행, 전쟁 등의 대사(大事)에는 늘 천부상제에게 제사로 알렸다. 예배 시에는 밝은 등과 차를 놓아두었고 주장(奏章-상소문)을 불태웠다. 일요일이 되면 군대의 교전과 방위를 제외한 모든 일을 멈추고 쉬었다. 천경과 각 성에는 예배당이 없었지만 각 관아에는 집단예배를 위한 ‘천부당(天父堂)’이 마련되어 있었다. 천경에서는 예배일 전날 삼경 무렵이 되면 ‘내일은 예배일이니 우리 모두 경건합시다’라고 적힌 큰 깃발을 거리에 세워두었고, 이러한 말을 외치며 징을 울리고 거리를 다니는 사람도 있었다. 예배의식에는 무릎 꿇기, 기도, 성경낭독, 찬송, 세례, 설교, 주장 연소 등이 포함되어 있었다. 단지 기독교의 성찬예식은 알지 못했던 관계로 전혀 존재하지 않았다. 설교는 군대 내부에서도 자주 이루어졌다. 높은 연단을 쌓고 병사들을 소집해 둘러서서 설교를 듣게 했는데, 군대의 지도자가 설교를 하면서 혁명사상을 전했다. 따라서 여기에는 순수한 포교가 아닌 정치적인 선전의 목적이 포함되어 있었는데, 이러한 설교는 예배 당일에만 이루어진 것이 아니었다.」
「‘이교(異敎) 배척과 우상 철폐는 날이 갈수록 강화되었다. 천경 안팎에서부터 진강(鎭江), 금산(金山), 장강(長江)이북 각지에 이르기까지 모든 사당, 불교 및 도교 사원, 우상이 허물어지고 사라졌다. 승려와 도사들은 억압을 받았으나, 미리 다른 지역으로 피신했던 터라 죽임을 당한 자는 없었다. 만약 그들의 혁명이 성공을 거두었다면 불교와 도교는 필히 사라졌을 것이다.’」
「‘당시 천주교가 장강 남북에 널리 전파되었는데, 태평군 중에는 성당에서 숭배하는 성모, 성자 그리고 여러 다른 상들을 사교의 우상으로 오해하고 이 역시 훼손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이는 프랑스 정부와 천주교가 태평혁명을 반대하게 된 큰 이유가 되었다.」
「‘유교의 조상숭배 관습 역시 반대하면서 사서오경을 금서로 정했고, 후에는 ‘산서아(刪書衙)’라는 부처를 두어 사서오경을 수정하도록 해 독서를 허용했다. 그러나 유교의 도덕과 윤리는 모두 수용했다.’」
4. 선교사와 태평천국의 관계
1)선교사와 홍인간
앞서 말한 내용 가운데 기독교와 가장 유사한 부분들은 대부분 홍인간이 끼친 영향으로 인한 것들이다. 홍인간은 일찍이 청원(淸遠)에서 태평천국 봉기에 참여했으나 실패하자 1854년 홍콩으로 피신한 뒤 스웨덴 선교사 햄버그(Rev. hamberg)의 보호를 받으며 요양하게 된다. 홍인간은 홍수전이 봉기 전에 겪은 여러 경험들을 햄버그 선교사에게 이야기했으며, ‘홍수전의 이력’을 직접 써서 건네주기도 했다. 햄버그 선교사는 영문으로 된 소책자 <홍수전의 환상과 광시(廣西) 반란의 기원>을 집필해 홍콩에서 출간했다. 홍인간은 그 후 동관(東莞)으로 옮겨가 홍콩의 유명한 목사 장축령(張祝齡)의 조부 장채정(張彩庭)의 집에 피신해 있었다. 그 후 다시 홍콩으로 건너가 세례를 받고 기독교인이 되었다. 얼마 뒤 천경에 들어가기 위해 상하이로 갔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 다시 홍콩으로 돌아온 그는 약 4년간 전도활동을 하면서 선교사들을 도왔다. 1859년 4월 22일, 마침내 그는 홍콩 런던선교회 찰머즈 선교사의 자금 지원에 힘입어 천경에 들어가게 된다. 천왕이 그를 간왕(幹王)에 봉하고 내정과 외교를 담당하도록 함으로써 태평천국 후기의 중심인물이 되었다. 홍인간은 천경에 들어간 뒤 천왕을 돕는 한편 태평천국의 기독교를 개혁하고자 했다. 간우문 교수는 다음과 같이 밝혔다.
‘구교를 개혁하고자 했던 마틴 루터와 같이 되고자 했으나…… 천왕이 날이 갈수록 고집스러워지고 신앙이 광기를 띠게 되자 단시일 내에 개혁하기가 어려웠다. 간왕은 인내로 지혜롭게 대처하며 개혁의 고삐를 늦춰야 했다. 그러나 군정(軍政)이나 국가정책 등에 있어서는 자신의 능력을 과감하게 발휘했다.’ 간왕은 <자정신편(資政新篇)>을 저술해 천왕에게 바치며 정치, 경제, 사회, 종교에 대한 획기적인 의견을 제기했다. 그러나 전쟁이 그치지 않아 태평한 환경이 이루어지지 않았을 뿐 아니라 다른 관리들의 반대에 부딪혀 그의 건의는 결국 실현되지 못했다. 간우문, 사흥요(謝興堯), 팽택익(彭澤益), 소일산(蕭一山) 등의 학자들이 태평천국이 멸망하지 않고, 간왕이 <자정신편>상의 정책을 실시했다면 중국이 일찍이 현대화되고 부강해졌을 것이라고 말한다.
2) 태평천국에 대한 선교사들의 태도
초기에는 외국인, 특히 선교사들이 태평천국에 매우 큰 기대를 걸었다. 영국 감리회 선교사 콕스는 1853년 작성한 보고서에서 태평천국이 좋은 결과를 낳을 것이라고 밝힌 바 있다. 런던선교회 선교사 길레스피는 1854년 출간한 책 속에서 태평천국에 대해 언급하며 “만약 이러한 새로운 운동이 성공을 거둔다면 중국 전역에서 기독교 선교사들에 대한 문이 열리게 될 것이다. 이 운동은 희망적이다.”라고 예측했다. 그리스피 존 목사는 여러 차례 천경에 들어가 간왕의 도움으로 선교사의 자유를 허락한다는 천왕의 조서를 받아내기도 했다. 그리스피 존 목사는 런던선교회에게 쓴 서신에서 “하나님께서 현재 반역자들의 손을 빌려 이 땅의 우상을 뿌리 뽑고 계시며, 그들과 외국 선교사 간의 관계로 인해 기독교가 이곳에 심어질 것이다.”라고 말한 바 있다. 당시에는 영국의 많은 사람들이 태평천국이 큰 행복을 가져올 것이라고 생각했다. 영국성서공회에서도 최대한 빠른 시일 안에 중문 신약전서 백만 권을 인쇄하기로 의결했다. 이에 많은 사람들이 기부에 참여했고 오래지 않아 현금 52,368파운드가 모금되었는데, 이는 영국성서공회가 향후 중국에서 20년 간 필요한 경비에 다다랐다. 그리스피 존 목사는 1860년 상하이에서 런던선교회에 보내는 보고서를 통해 태평천국으로부터 선교사가 그들의 관할지역에 거주하며 선교하는 것을 허가 받았다는 사실을 전했다. 그는 “태평천국은 사당을 비웠을 뿐 아니라 사람들의 마음도 비워놓았습니다. 그들은 지금 채워지기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반역자들을 통해 이 나라의 우상을 뿌리 뽑으시고, 선교사들과 함께 우상 대신 기독교를 심으실 것으로 확신합니다.”라고 전했다.
하지만 태도를 바꾸거나 이와는 완전히 상반된 의견을 가진 일부 선교사들도 있었다. 1860년 영국 감리회 선교사 콕스가 간왕의 초청으로 선교를 위해 난징에 이르렀지만, 자유로운 선교활동이 불가능하자 실망하며 떠났다. 미국해외선교국의 윌리엄스는 1864년 “나는 이번 반역이 진리를 확대시키는 도구가 되리라고 처음부터 아예 믿지 않았다.”라고 말한 바 있다. 감리회의 알렌은 1860년 중국에 들어간 뒤 천경에 이르러 간왕과 식사를 함께 하며 두 시간 동안 대화를 나눈 적이 있었다. 당시 간왕은 자신들의 성공은 무력이 아닌 천명에 의해 이루어졌다고 말했다. 이에 알렌은 자신이 과거에 그들이 저지른 갖가지 잘못과 잔혹한 행위에 대해 추궁하길 원하지 않지만, 인내로써 미래를 기다리겠다고 말했다. 런던선교회의 윌리엄 뮈어헤드는 1861년 초반 한 달 간 난징에 체류하면서 반역자들이 건설보다는 파괴를 더 많이 자행하고 있다는 보고서를 작성했다. 홍수전은 일찍이 미국 남 침례회의 로버트 목사에게 성경을 배웠다. 1860년 10월 천경에 들어간 로버트 목사는 큰 환영을 받으며 외교대신에 봉해졌으나 이를 고사했다. 1861년 1월까지 천경에 머물렀던 그는 결국 크게 실망하며 떠났다. 로버트 목사는 난징에 체류하고 있던 1861년 12월 30일 다음과 같은 중요한 글을 남겼다.
“이곳의 일은 완전히 상반된 두 가지 측면이 존재한다. 하나는 밝고 희망찬 측면이고, 다른 하나는 어둡고 절망적인 측면이다. 불행히도 나는 밝은 면만을 예상했기에 어두운 면을 알고 나서는 크게 실망할 수밖에 없었다. 밝은 면은 우상숭배, 매음, 도박이 없고 비도덕적인 것이 용납되지 않는다는 등 주로 소극적인 측면의 것들이다. 그러나 혁명의 종교, 정치의 사악함과 같은 어두운 측면은 나를 가슴 아프게 하고 여러 차례 그들을 떠나고 싶은 마음이 들도록 한다. 그러나 우리는 가난한 사람을 긍휼히 여기고 있다. 그들은 진실로 고통 받고 있고, 이생에서 그리고 영원히 불쌍히 여김을 받아야 한다. 천왕은 매우 열심히 포교활동을 하고 있으나, 그들은 하나님 앞에서 대부분 가증스러운 존재들이다. 사실 나는 그가 미쳤다고 생각한다. 특히 종교에 있어서 그렇다. 나는 그가 모든 일에 있어서 이성적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는 자신의 아들을 어린 구세주라 부르고 자신은 예수그리스도의 친동생이라고 자청한다. 성령은 삼위일체에서 완전히 사라진 듯 보이고, 회개하고 바른 길로 돌아오게 하는 성령의 역사를 거의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그들의 정치제도는 그들의 신학과 마찬가지로 불쌍하다. 나는 그들에게 정부가 있다고 믿지 않는다. 그들은 정치에 대해 잘 모르고 있다. 악한 폭군의 통치하에서 그 어떤 좋은 것이 나오리라고 믿지 않는다. 그가 나를 이리로 부른 것은 예수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함으로써 모든 이들이 하나님께 돌아오도록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나로 하여금 그들의 교리를 전파하게 함으로써 외국인들을 포섭하기 위함이다. 그들은 사실 마음으로는 복음에 반대하면서도 정치적인 이유로 복음을 용인하는 것이라고 나는 믿고 있다. 그들은 복음이 실현되는 것을 막고 있다. 최소한 난징에서는 그렇다. 나는 또 나의 선교사역이나 기타 나와 함께 주를 위해 일하는 선교사들이 성공하리라는 희망을 찾아볼 수 없다. 따라서 나는 그들을 떠나기로 결심했다. 지금보다 앞으로가 더 희망차리라는 보장이 없는 한……”
홍수전, 배상제회, 태평천국을 여러 각도에서 관찰하고 연구해볼 때, 물론 좋은 점도 있었음을 부인할 수 없지만 수많은 단점이 치명적인 약점으로 작용하고 있다. 홍수전은 봉건사상을 떨쳐버리지 못하는 야심가이자 정신질환을 앓고 있던 듯하다. 배상제회는 기독교의 모양새를 본뜨고 민간의 미신을 첨가해 탄생한 비밀사회이다. 태평천국은 결국 종교를 빙자한 전제폭정이었다. 따라서 선교사들의 기대가 실망으로 바뀔 수밖에 없었다. 영·미국인이 참여한 상승군(常勝軍)과 영국 장군 고든이 만청을 도와 교전에 참여하고, 여기에 태평천국의 실책과 내분이 더해져 중국의 전통문화를 보존하자는 정궈판(曾國藩)의 호소 하에 태평천국은 결국 멸망의 길을 걷게 되었다.
3) 기독교에 대한 태평천국의 방해
홍수전과 배상제회의 창립, 태평천국의 수립은 기독교의 도움 하에 이루어진 것이 아니고, 더구나 일부 기독교인이 참여하지도 않았지만 청나라 시기 기독교 사역은 이로 인해 두 가지 측면의 방해를 받았다.
첫째는 해당지역에서 일시적으로 받은 방해인데, 이는 기독교의 활동 범위가 개항지에 국한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태평군은 상하이 함락을 기도했으나 성공을 거두지는 못했다. 1860년부터 1861년까지 닝뽀 일대를 점령하기도 했으나 이러한 지역에서 나타난 기독교 사업에 대한 훼방은 일시적인 것이었고, 1862년에 이르러 위기는 곧 지나가게 되었다. 그러나 개항지 이외 지역에서의 기독교 사업은 최대 10년가량 지연되는 결과를 낳았다.
두 번째는 심각하면서도 장기간 받았던 방해이다. 중국정부, 사대부, 국민은 기독교와 기독교인에 대해 전혀 모르고 있었기 때문에 기독교와 배상제회 및 태평천국을 분간해낼 능력이 전혀 없었다. 그들은 본래 기독교에 대해 의심의 눈초리를 보내며 거부하는 입장이었다. 기독교가 중국의 고유한 문화를 파괴하고 혼란을 야기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배상제회와 태평천국이 기독교와 유사한 점을 보이자 중국인들은 이러한 의심을 확신하게 되었다. 또 청나라 조정에서는 중국인 기독교인들이 비밀종교단체를 통해 모반을 꾀할까 두려워 기독교도를 불순한 사상을 가진 이들로 간주했다. 따라서 홍수전, 배상제회, 태평군을 모두 모반을 위한 것들로 여겼다. 그 결과, 조정이나 일반 국민들을 막론하고 한결 같이 기독교와 기독교인들을 극도로 혐오했다. 티모시 리처드는 태평천국이 멸망한지 반세기가 지나서도 기독교에 대한 이러한 인식은 사라지지 않았고, 특히 정궈판의 고향이자 시양군(湘軍)의 근거지인 후난지역이 심각했다고 말한다. 불평등조약과 태평군의 혼란이 19세기 후반 기독교의 최대 장애물로 작용했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탕칭 | 중국 현지사역자
번역 | 이수아·자원봉사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