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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6.2  통권 274호  필자 : 김영산  |  조회 : 811   프린트   이메일 
[기획]
한중선교의 다리 역할을 한 전도지, 그리피스 존의 《셩교촬리(聖敎撮理)》에 관한 소고

[목차]
 1. 그리피스 존(Griffith John)은 누구인가?
 2. 언더우드가 사용한 그리피스 존의 전도지와 저서 7권
 3. 《셩교촬리》의 주요 내용들


《셩교촬리(聖敎撮理)》는 영국 웨일스 출신의 중국 선교사 그리피스 존(Griffith John, 楊格非, 1831∼1912)이 한문으로 만든 전도지이다. 한국에 온 미국 북장로교 선교사 언더우드(Horace Grant Underwood)가 1890년 한글로 번역한 첫 전도지로서 한국 초대교회 당시 사용하였다. 언더우드는 《셩교촬리》 전도지를 통해 전도와 교회 개척 그리고 성경 번역과 문서선교에 힘쓴 한 개척자이다.

이 전도지는 여러 차례 출판되어 사용하였다.1) 이미 중국에서 사용되고 있던 전도지 《셩교촬리》와 함께 다양한 기독교 서적을 한·중 선교사들이 공유하였고, 기본적인 신앙의 기초를 놓는 데 중요한 문건과 문서들로써 한중선교의 중요한 가교 역할을 하였다. 한국선교의 개척자인 언더우드 선교사가 처음으로 번역한 첫 출판물이며, 첫 전도지인 《셩교촬리》를 살펴보는 것은 뜻깊은 일이라고 생각한다.

필자는 그리피스 존이 번역한 중국어 성경(신약전서)을 구매해 소장하고 있다. 그러면서 그리피스 존에 관하여 좀 더 깊이 생각하게 되었다. 이 성경책뿐 아니라 그가 쓴 여러 신학 서적이 중국교회는 물론 초기 한국교회에 깊은 영향을 준 사실을 알게 되었고 《셩교촬리》를 연구하는 기회가 되었다. 용환규(Yong Whan Kyu) 교수는 ‘《셩교촬리》(1890)를 통해 본 초기 한국 장로교회의 신앙 이해’라는 논문을 쓴 바 있다. 그리고 자매 편이라고 할 수 있는 그리피스 존의 《샹뎨진리》는 2020년에 안수강 교수가 ‘그리피스 존(Griffith John)의 《샹뎨진리》(上帝眞理)에 나타난 신관 및 개혁주의생명신학 관점에서의 함의’라는 제목으로 연구하였다.2)

그는 논문에서 이 주제 외에도 《셩교촬리》, 《셩교문답(聖敎問答)》, 《훈ᄋᆞ진언(訓兒眞言)》, 《구셰요언단(救世要言單)》, 《칠득(七得)》, 《진리이지(眞理易知)》 등 이와 관련하여 여러 방면에서 담론이 형성되고 확산하기를 바란다고 하였다. 《셩교촬리》에 대한 소고는 자매 책이라고 할 수 있는 《샹뎨진리》보다 먼저 소개된 기독교의 기본 진리를 담은 초기 전도지이기 때문이다.

그리피스 존은 누구인가?

그리피스 존의 생애
그리피스 존은 런던선교협회(London Missionary Society, LMS)의 파송으로 중국에 왔으며, 중부 중국에서 복음을 전파한 최초의 개신교도였다. 그는 중부 중국에서 교회를 세운 사람이었고 ‘중국 중부 선교의 아버지’로 일컫는다. 1831년 12월 14일 그리피스 존은 영국 웨일스 남부 지역의 스완지에서 평범한 노동자 계층 가정에서 태어났다. 그의 가족은 모두 회중교회 회원이었으며, 그리피스 존은 ‘그리피스 존 네스트(nest, 그 집안의 둥지)’이자 유일한 남자아이였다. 그리피스가 세상에 나온 지 불과 8개월 뒤 그의 어머니는 콜레라로 세상을 떠났다. 그를 키우는 일을 맡은 사람은 그의 이모였다. 그는 가족의 강한 영적 분위기 덕분에 신앙에 대한 열정과 열의를 가지고 잘 자랐다. 그의 집안은 가난하여 살기가 어려웠기 때문에 그리피스는 학교를 그만두고 열두 살 때 식료품점에서 아동 노동자로 일했다. 하지만 배우는 것을 좋아했던 그는 여가 시간을 최대한 활용하여 책을 읽으려고 노력했다. 그는 엄청난 근면함으로 학교 친구들보다 훨씬 더 광범위한 지식을 축적했다. 열여섯 살의 나이에 그는 이미 지역 교회에서 설교를 맡을 정도였다. 1850년에 그리피스 존은 브레콘(Brecon)기념대학에 입학했고, 3년 뒤에는 베드퍼드(Bedford) 신학대학에서 공부했다. 런던선교협회는 해외 선교사에 대한 시급한 필요에 따라 1855년, 뛰어난 성적으로 조기 졸업한 그리피스 존을 설교 목사로 임명하고 중국으로 파견했다. 그 당시 그리피스 존은 키가 크지 않았으므로 많은 사람이 그를 ‘그 아이’라고 불렀다. 어떤 사람들은 농담조로 그를 ‘중국을 그리스도께로 인도할 그 아이’라고 불렀다.



1855년 9월 그리피스 존은 아내와 함께 상하이(上海)에 도착했으며,3) 상하이 주변 지역에서 설교를 시작했다. 1857년 그는 조셉(Joshep)과 함께 태평천국이 점유한 지역으로 가서 연구를 시작했다. 1860년 그리피스는 간왕(幹王) 훙런쉬안(洪仁顯)과 충왕 리슈청(李秀成)을 만났는데, 태평천국의 기독교 교리에 대한 오류를 바로잡으려고 노력했지만 훙슈취안(洪秀全, 종교의 수장)과 다른 사람들로부터 거절당했다. 하지만 그는 태평천국이 점령한 지역에서 자유롭게 선교활동을 할 수 있는 권리를 보장받았다. 그리고 청나라 정부는 1861년 이후에야 외국인이 내륙으로 진출할 수 있게 점차 개방 정책을 추진했다. 그는 이를 활용하여 그해 6월 21일 후베이(湖北)성 한커우(漢口)에 도착하였는데, 중국 중부 지역에 입국한 최초의 개신교 선교사가 되었다. 그리피스 존의 복음 전도사역은 순조롭게 진행되었고 1862년 3월 16일 추종자들이 세례를 받았다. 그 후 많은 사람이 주님의 이름으로 믿음을 갖게 되었다. 그 결과 여러 교회가 세워졌다. 

1862년 그리피스 존은 한커우 화러우가(花樓街) 모(母) 교회(유명한 그리피스교회 또는 룽광교회)를 세웠다. 1863년 그는 한커우에 중국 중부 최초의 교회인 서우언(守恩)교회를 세웠다. 1864년 7월, 후베이성 ​​최초의 교회인 충전(崇真)교회가 우창(武昌)에 세워졌다. 우한(武漢)에서 확고히 자리를 잡고 강력한 기반을 다진 뒤 샤오간(孝感), 톈먼(天門), 황피(黄陂)에 교회를 설립하고 후베이의 다른 지역으로 사역을 확대했다. 그는 중국을 돌아다니면서 거리 설교와 순회 설교자로서 여행하면서 설교했다. 그는 각 장소에서 구전 전도 외에도 많은 복음 전도지 《셩교촬리》를 배포했다. 후베이, 후난(湖南), 쓰촨(四川) 등의 지역에서 ‘발자취’를 남기며 3,000마일 이상을 여행했다. 그리고 그의 발자취가 닿은 곳에 교회가 세워졌다. 그의 사역에 관한 연구에 따르면 그리피스 존이 후베이에서 지낸 기간에 적어도 100여 개의 선교지가 있었다.

1889년 그리피스 존은 영국과 웨일스의 회중교회 국가협회 회장으로 선출되었지만, 그는 저명한 지위를 차지하기 위해 돌아가는 것을 거부하고 한커우에 머물며 사랑하는 중국인들과 함께 살기로 결정했다. 같은 해 에든버러대학교는 중국 선교활동을 인정하여 그에게 신학 박사학위를 수여했다. 그리피스 존은 성경 번역 사역에 참여했다. 그는 영어 신약성경을 중급 고전 중국어(고전 중국어와 구어 중국어 사이의 필기 스타일 유형)로 번역한 최초의 번역자였으며, 이를 ‘쉬운 문리’라고도 한다. 

그는 1883년에 마가복음과 마태복음의 중국어 번역본을 출판했고, 1885년에는 신약성경 전체 번역본을, 1889년에는 창세기와 출애굽기를, 1898년에는 시편과 잠언을, 1905년에는 구약성경 전체를 출판했다. 게다가 그리피스 존은 《중국에 대한 기대》와 《중국의 목소리(A Voice from Chin)》 같은 책을 출판했다.4) 또한 그리피스 존은 과학, 교육, 예술, 의료 관련 업적이 높이 평가된다. 1866년 그는 중국 중부 지역에서 가장 오래된 서양 병원 중 하나인 한커우에 런지(仁濟)병원(한커우 연합병원의 전신)을 설립했다. 1899년(또는 1896년으로 추정)에 그리피스 존은 화러우가 모 교회 옆에 있는 차 상자 공장의 옛 부지에 대학, 중학교, 교사 교육시설, 성경학습 부서로 구성된 한커우 최초의 종합 기관인 그리피스 존 대학(博學書院)을 열었다. 이 박학서원은 현재 우한 제4중학교이다. 그는 또한 영국의 아편 무역에 격렬히 반대했고, 중국인의 신체적·정신적 건강을 위한 캠페인을 벌였으며, 1882년에 아편 무역의 악을 공격하는 ‘아편 무역에 대한 간단한 질의응답’을 썼다. 1905년 75세의 나이에 그리피스는 설교하다가 갑작스러운 뇌졸중 질환을 앓다가 그 후 마비가 왔다. 1911년 10월 우창 봉기가 발발했다. 보안상 이유로 그의 사위 스바오헝(施保恒)이 그를 한커우를 출발하는 배로 호위하고 1912년 1월 영국으로 돌아갔다. 귀국 직후 그리피스 존은 81세의 나이로 소천했다.5)

문서선교의 아버지 그리피스 존
런던선교회 소속으로 허드슨 테일러와 동시에 중국에 들어와 사역한 선교사이다. 그는 한커우 지역에서 화중셩교서국(華中聖敎書局)를 설립하고 이끌며 ‘문서선교의 아버지’라고도 불린다.6) 동시에 그는 경건하고 복음의 열정이 대단하여 중국에서 55년간 사역하면서 100여 개 이상의 교회를 개척했다. 그리피스는 모리슨이 번역한 중문 성경책을 다시 개인적으로 번역할 정도로 중국어에 정통한 학자이며 웨일스의 부흥운동의 영성을 소유한 선교사이다.

중국어 성경 번역
1) 그는 1885년에 고전 중국어를 사용하여 신약성서를 출판했다. 
2) 그는 1889년에 두 번째 신약성서 번역본을 출판했는데, 이번에는 중국어(쉬운 문리체)를 사용했다. 
3) 그는 1890년까지 시편과 잠언과 같은 구약성서의 다른 부분을 중국어(화합본)로 번역했다.

한문에 능통한 그리피스는 고전 한문은 서민들에게는 너무 어렵다고 믿었고, 표준 중국어는 현지 방언의 풍미가 강했기 때문에 중문체인 반고전 한문을 사용하여 개인적으로 성경을 번역했다. 1883년에 신약성경이 반문학적 중국어로 번역되어 1885년에 출판되었다. 개정판은 1889년에 출판되었다. 이 번역본은 최초의 반고전 중국어 성경이라고 할 수 있다. 그는 1889년에 영국과 웨일스 회중연합의 의장으로 선출되었지만, 그 영예를 거부하고 자신이 사랑하는 중국인들과 함께 한커우에 남아 선교사역을 계속하였다.7) 

그리피스 존, 1831년 12월 14일〜1912년 7월 25일 80세로 소천


그리피스 존의 별명은 중국 중부 지역의 전도자, 길거리 전도자이다. 그리피스 존 목사는 오랜 중국선교 기간 교회의 견고한 기초를 다지는 데 일조했다. 강력한 설교자로서 그는 신약성경의 핵심 메시지인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히심’, ‘십자가’를 강조했다. 그는 중국어로 찬송을 부르고, 많은 소책자를 쓰고, 성경을 번역했다. 중국 사람들을 위해 봉사하는 데 헌신한 그리피스 존 선교사의 삶의 특징은 다음과 같다.8)


1) 그는 어렸을 때 매우 재능 있고 총명했다. 
16세 때 설교를 시작한 그는 ‘소년 설교자’로 알려져 있다.9) “비교할 수 없는 것은 웨일스에서 가장 인기 있는 설교자라는 그의 명성이었다. 지적으로 그는 젊은이들의 평균보다 훨씬 높았다.” (Broomhall). 그의 능력은 웨일스의 기독교계에서 그의 명성을 보장해야 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를 타문화선교 사역으로 부르셨을 때 그는 기꺼이 그 부르심에 순종했다. “대학에 다니는 동안 그는 해외에서 일하고 싶은 열망을 키웠다. 이러한 열망을 촉발한 두 가지 요인은 이사야서 6장을 읽은 것과 전 마다가스카르 선교사10)인 데이비드 그리피스(David Griffiths)의 방문이었다.11) 그리피스 존의 삶에 대한 하나님의 부르심은 하나님께서 최고의 신자들이 열방에서 선교사로 봉사하기를 원하신다는 것을 깨닫게 해 주었다(행 13:1〜3).

2) 배움을 잘하고, 이끄는 사람을 존경한 자이다. 
그는 런던선교협회에 입학한 뒤 처음에는 마다가스카르에서 봉사하기를 희망했지만, 이사들이 그에게 중국으로 가도록 요청했고 그는 그 제안에 겸손히 동의했다.12)

3) 그는 중국어를 매우 진지하게 공부했다.
중국에서 그의 첫 번째 선교는 선교사역에 절대적으로 필요한 언어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6개월 안에 그는 사원과 거리에서 설교하고 전단지를 나눠주었다. 9개월 후에 그는 교회에서 30분 동안 설교했다. 또 그의 설교는 ‘상당히 쉽고 유창하며 청중이 이해할 수 있게’ 설교하였다고 말했다(Broomhall). 대부분 외국인이 그렇게 짧은 기간에 그가 이루고 가졌던 중국어 실력과 동일한 능력을 달성하려면 3〜5년이 걸릴 것이었다.

4) 그는 영혼에 대한 열정이 있었다. 
“1861년 그는 한커우에 도착한 첫날 전도하러 나갔다. 1862년 3월 16일에 첫 개종자에게 세례를 주고, 1863년 7월 19일에 첫 교회를 열었다. 그리하여 그는 한커우에 교회를 세웠다. 그 후 이 교회는 주변 지역에 대한 광범위한 선교활동의 중심지가 된 건물이 되었다.13)

5)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파하는 것을 믿었다. 
그가 선교 동료들에게 한 조언은 ‘전도하라, 전파하라, 전파하라’였다. 그는 설교야말로 하나님께서 사람들과 화해하시는 일반적인 방법임을 확신했다. 그에게 있어서 전도는 중국인에게 가장 큰 친절이었다. 왜냐하면 그것은 ‘생명의 떡을 주라’는 의미였기 때문이다. 멸망하는 자들에게 구원의 소식을 전하는 것이었다. 그는 자기 설교 방법을 다양한 상황에 맞게 조정했다. 때때로 그는 상점에 가서 사람들을 모으고 그들에게 설교했다. 때로는 설교 센터 밖에 앉아서 듣는 사람들에게 설교했다.

6) 그는 또한 말의 힘을 믿었다. 
그들의 전도지는 다양한 주제를 다루었다. 일부는 교리적이며, 또 복음적이었고 다른 일부는 더 실용적인 도덕적 가르침을 담고 있었다. 그는 기독교 교리를 과학과 연관시키기도 하고 또 중요한 저서인 ‘어린이 교리문답’을 썼다. 1889년에 그는 자신이 번역한 신약성경의 중국어 개정판을 출판했다.

7) 그는 사회적 양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아편 무역을 격렬히 반대했으며, 중국이 육체적·정신적으로 고통받고 있는 동안 영국이 막대한 재정적 이익을 얻고 있다는 사실에 경악했다. 그는 위원회의 의장을 맡고 왕립 아편위원회에 기념 문서를 제출하고 이러한 문제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발표했다. 

8) 그는 다음 세대에 투자했다.
그는 창사에 집을 지었고 곧 그곳에 교회와 신학교를 열었다. 그는 또 신약 연구와 목회 신학 과정을 가르쳤다. 또한 그는 성경 교육이 주요 특징인 선교 학교의 활동을 감독했다. 하나님의 종으로 한 시대 쓰임 받은 그리피스 존은 1912년 영국에서 사망했다.14) 1904년까지 항저우(杭州)에 100개의 런던선교협회 교회가 세워졌고 후난(湖南)에는 37개의 교회가 세워졌다. 같은 해 중앙평원선교협회는 250만 권의 출판물을 발행했다. 우한의 병원과 대학은 분명히 그의 사역 열매들을 상기시켜 준다. 그는 변함없이 열심히 구주를 섬기고, 선교사 생활 내내 씨를 뿌리고 풍성하게 수확하였다.

그리피스 존의 메시지
그리피스 존의 별명은 중국의 스펄전이다. 그는 예수님 십자가의 복음을 늘 전한 자이다. 그는 젊은 선교사들에게 “복음을 전하라.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는 서두르지 말고 경건해지도록 힘쓰라”라는 말을 자주 했다. 1877년 상하이에서 열린 선교 회의에서 그는 경건을 강조하였다.15)

“선교사는 무엇보다도 거룩한 사람이 돼야 합니다. 중국 사람들은 선교사들이 거룩한 사람이길 기대합니다. 나는 별로 경건하지 않은 채 큰 영적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목회자는 한 사람도 없다고 확신합니다. 목회자는 착한 사람이기만 해서는 안 됩니다. 그 지방 사람들의 언어와 문학을 익힐 뿐만 아니라 경건해지기에 힘써야 합니다. 형제들이여, 이것이 바로 이 큰 나라가 우리를 통해 변화될 수 있기 위해 필요한 일입니다.”

영성을 강조한 선교사
삼위일체시오, 거룩하신 분이신 하나님과 함께 시간을 보내십시오. 아버지와 함께 시간을 가지십시오. 하나님의 거룩하신 자, 그리스도와 함께 시간을 가지십시오. 거룩함을 나타내는 하나님의 영이시며 우리를 거룩한 성전이 되게 하시는 성령님과 함께 시간을 나누십시오. 이처럼 거룩한 교제를 위해 시간을 내어 드리십시오. 하나님은 친히 우리로 온전히 거룩하게 하십니다. 끊이지 않는 교제를 경험하십시오.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는 한 성령 안에서 하나님 아버지께 나아감을 얻습니다.”라고 했다.16)

좁은 측면에서는 그리피스 존의 저서들이 초기 한국 선교사들이 사용하여 신자들을 훈련한 것도 주님의 은혜이며 더 넓은 측면에서는 웨일스의 부흥운동의 본고장에서 배출된 걸출한 선교사의 신앙과 인품 그리고 그 영성이 신학 저서들을 통하여 초기 한국 성도들에게 전달된 것도 선교의 주인이신 하나님의 은혜라고 생각한다. 

2. 언더우드가 사용한 그리피스 존의 전도지와 저서 7권

한국 개신교 전례 초기에 내한하여 전도와 교육, 의료, 출판 등 다양한 면에서 중요한 행적을 남긴 미국 개신교 선교사 호러스 그랜트 언더우드(Horace G. Underwood, 1859〜1916)의 공헌은 다양한 연구가 이루어져 왔고 그 후손들이 대를 이어 한국선교를 해 온 것에 감사해 마지않는다. 언더우드는 아직 한글 성경이 완역되지 않은 상태에서 한문에 미숙한 지식인들을 만났을 때 중문 복음서와 소책자를 이용하여 전도하였고, 이때 중문 소책자가 한국인들에게 좋은 반응을 수차례 경험하면서 이미 중국에서 검증된 그리피스 존의 책을 번역하여 적극 활용한 것이다.17) 

1890년 장로교의 언더우드와 존 헤론(John W. Heron) 그리고 감리교의 프랭클린 올링거(Franklin Ohlinger) 세 사람의 노력으로 조선셩교서회를 설립하였다. 이 출판사는 기독교 서적, 전도지, 정기 간행물을 보급할 목적으로 만들었다. 그 첫 번 인쇄물이 《셩교촬리》이다. 물론 다른 저서들도 많이 번역하였지만 특별히 가장 많이 번역해서 사용한 인물이 그리피스 존의 저서란 점을 주목한다. 언더우드는 중국에서 오랜 기간 사역하며 중국을 잘 이해하는 대선배급 선교사들의 저술을 가져다 번역했다.

예를 들면 萬國公法의 중국어 번역자이자 베이징대학의 초대 총장이었던 윌리엄 마틴 (W.A.P.Martin), 산둥(山東) 지역에서 40여 년을 교육과 목회 사역에 헌신한 경험으로 한국의 젊은 선교사들에게 멘토 역할을 했던 존 네비우스 부부, 한커우 사역에서 화중셩교서국을 설립하고 이끌며 ‘문서선교의 아버지’라 불리던 그리피스 존이 여기에 해당한다. 마틴과 네비우스 부부는 언더우드와 같은 미국 장로교 소속이었고, 그리피스 존은 회중교회와 영국 런던선교회 소속 선교사였다.

언더우드가 번역해 사용한 그리피스 존의 전도지와 소책자18)

 연도

 한글 제목

 중문 제목

 영문 제목

 인, 발행처

 비고

 1890

 셩교촬리

 聖教攝理

 salient doctrines
of Christianity

 조선
셩교서회

 

 1981

 샹뎨진리

 上帝真理

 the nature of God

 그리스도
셩서

 상제

 1891

 권즁회개

 動眾悔改

 Exhortation to repentance

 미상

 

 1893 

 즁생지도

 重生之道

 Regeneration

 그리스도
셩서

 

 1893

 

 신자소득
지진복

 

 信者所得

之眞福

 True way of seeking happiness

 미상

 

 1893

 덕혜입문

 德慧入門

 Gate of virtue and wisdom

 상해
미학서관

 

 ?

 영혼문답

 靈魂問答

 Questions & answers to soul

 미상

 


그는 성경 번역 외에도 선교사들의 어학 교재로 韓英字典, 英韓字典, 韓英文法을 편찬했을 뿐 아니라 1890년대 전후 15종의 중문 기독교 문헌을 한글로 번역했다. 동료였던 미국 북장로교 소속 의료선교사 헤론(1856〜1890)과 함께 조선셩교서회(또는 예수교서회, 현 대한기독교서회)의 설립에 기여했고, 삼문활판소가 설립되기 이전부터 사비를 들여 자기 집에서 전도용 소책자를 발행했으며, 남대문과 자신의 집 앞 두 곳에서 서점을 운영하기도 했다. 조선셩교서회에서는 두 차례(1892〜1901년, 1908〜1915년), 총 17여 년간 회장직을 역임한 뒤 1916년 소천했다. 역대 서회 회장을 역임했던 선교사 중 언더우드만큼 오랜 기간 회장직을 맡았던 인물은 없었다.

언더우드는 1886년부터 교회 공동체와 고아원(경신학교의 전신)을 설립했다. 이곳에서 한국인들을 가르칠 교재가 긴급히 필요한 상황인지라, 분량이 긴 성경을 대신해서 간단히 기독교 교리를 전할 수 있는 교리서를 우선 번역해야 했다. 특히 초기 정착기의 선교사들에게는 현지인에게 세례를 주고 교회를 설립하기 위해 가장 필요한 것이 문답식 교리서이다. 또 언더우드는 엘린우드(Ellinwood)에게 문서 사업에 대해 보고할 때 세속적 출판물(사전 문법서)과 종교적 출판물(성경전도용 소책자)을 구분한 뒤 종교물에 대해서만 따로 보고할 정도로 보수적인 성향을 보였다.

언더우드의 초기 번역물 다수가 중국 한커우에서 사역하던 영국 선교사 그리피스 존의 저술이었던 이유는 영국성서공회의 북중국 지부 총무 브라이언트와 연결해 볼 수 있다.

에반 브라이언트(Evan Bryant, 18391918)
그는 영국 웨일스(Wales Glams) 출생이다. 1865년 런던선교회에서 목사안수를 받고 중국 후베이성의 한커우로 파송되어 1880년까지 활동하다가 아내가 아파서 영국으로 돌아갔다. 이후 1884년 영국성서공회에 의해 북중국 지부(톈진)로 파송되어 총무로 활동했으며, 1892년 아내의 병세가 악화하자 베이징으로 옮겨 1895년까지 활동하다가 영국으로 돌아갔다.19) 그가 1888년에 한국을 방문했을 때 언더우드에게 서울에서 베이징까지 육로로 여행하는 데 동행하기를 제안했다. 이때 언더우드는 약 4주의 여행을 계획했지만 실제로 이루어지지는 않았다. 브라이언트는 중국 한커우에서 활동했던 경력이 있었으므로 1876년에 설립된 한커우 서회와 연결되어 있었을 것이며, 당시 한커우 서회 회장이자 같은 영국 출신 선교사인 그리피스 존의 저작을 언더우드에게 소개해 주었을 가능성이 크다. 게다가 언더우드는 조선셩교서회라는 출판기관을 통해 중국의 기독교 출판사들과 연결될 수 있었다. 개항기 한국에서는 선교사들이 선박 경로를 통해. 그리고 셩교서회(the Religious Tract Society), 성서공회(the Bible Society)와 같은 초국가적 기독교 기관의 연결망을 통해 중국과 일본의 활자와 인쇄물을 국내로 유통하고 있었다.

언더우드는 1890년 조선셩교서회가 설립되었을 때 통신 서기(corresponding secretary)를 맡아 영국의 Religious Tract Society와 미국 American Tract Society에 후원을 요청했다. 이뿐 아니라 상하이 중국셩교서회의 지역 담당(Local secretary) 역할을 맡으며 중국과 한국 사이의 서적 유통에 관여하고 있었다. 따라서 언더우드는 기관의 채널을 통해서도 중국에서 책을 들여오거나 저자인 중국의 선교사들과 연결되기도 수월했을 것이다. 예를 들어 그리피스 존은 1894년 개최된 한커우 중부셩교서회 연례회에서 최근 자신의 저서가 한국어로 번역되었다는 점을 알리면서 한글 번역본을 그 자리에 모인 사람들에게 보여주기도 하였다.20)

언더우드 어학 교사 송순용
1890년까지는 언더우드의 번역이 그의 어학 교사였던 송순용과의 공동 작업으로 이루어졌고, 그 이후부터 번역자의 수가 증가했음을 알 수 있다. 송순용은 앞서 천주교 선교사들과 같이 한불ᄌᆞ뎐을 편집하는 데 관여하면서 축적했던 한국어 연구 결과를 개신교 선교사들에게 전달하는 역할을 했다. 덕분에 당시 언더우드는 사전과 문법서를 편찬하며 한국어를 빠르게 습득할 수 있었다. 그런데 언더우드가 1890년에 신약전서의 번역을 위한 위원회를 맡고, 북장로회 선교회의 기독교 문서사역을 담당하게 되면서 1891년에 이르러서는 송순용 외에 여러 명의 번역자를 고용한 듯하다.21)

3. 《셩교촬리》의 주요 내용들

이 전도지는 초기 장로교 선교사와 감리교 선교사가 같이 사용한 전도지로서 복음주의적 견해를 취하고 있는 것이었다.22) 셩교촬리는 신론(약 3면), 인간론(약 3면). 기독론(약 3면), 성령론(약 1면), 그리스도인의 생활(약 4면), 종말론(약 1.5면), 성경(약 0.5면)에 관한 설명으로 구성되어 있다.

1) 삼위일체 신앙을 강조하였다.
기독교 신앙의 핵심은 삼위일체 하나님을 믿는 신앙이다. 그래서 사도신경에도 성부 성자 성령님을 내가 믿는다고 고백하는 것이다. 《셩교촬리》 첫 부분에서 삼위일체 신앙을 가르쳐 준다.23)

“홀로 하나이요. 둘이 없는 하나님께서 계시니 이에 천지 만물을 맡아 만들고 다스리는 주시니라. 이 하나님은 이에 신령하시니 얼굴과 형상을 능히 뵈올 수가 없으나 계시지 아니한 곳이 없고 알지 못하는 바가 없고 능치 못한 바가 없으니, 참으로 영생하시는 대 주재시니라. 하나님은 한 몸에 세 위를 나누었으니 성부와 성자 성령이라. 그 위가 비록 셋이나 실상은 하나이니 한 성품이요, 한 뜻이요, 한 덕이요, 한 권세요, 한 영광이니, 위는 비록 셋이나 몸은 하나이시니라.”



 ▲《셩교촬리》

이 전도지는 다른 전도지와 달리 처음부터 신비한 삼위일체 교리를 선언하는 전도지이다. 삼위일체 교리는 설명하기가 매우 어려운 진리임에도 《셩교촬리》 전도지는 성경의 핵심 진리인 삼위일체 진리를 거침없이 담대하게 선포함으로 시작하는 전도지였다.

2) 인간은 영혼과 육체로 이루어진 존귀한 존재이다.
“하나님께서 세상 만인을 만드시며 한 혈맥으로 근본하시니, 태초 세상을 당하여 먼저 천지 만물을 만들어 거처할 바 있게 하고, 만물을 임의로 만드시매 남자 하나 여자 하나를 만드시니, 남자의 이름은 아담이요, 여자의 이름은 하와라 하니 천하만국의 시조가 된지라. 사람이 표시가 같고 종류가 같으니 마땅히 서로 친하고 사랑하여 착한 일은 서로 전하고, 악한 일은 서로 경계하고 일이 있거든 서로 도울 것이니라. 사람이 만물 중에 신령함이 되어 육신이 있고 영혼이 있어 합하여 사람이 되니 육신은 귀한 물건이라.”

당시 한국 사회는 남존여비의 사회로서 여자의 인권을 무시하고, 양반과 상놈 제도가 있어서 태어나면서 신분이 결정되는 봉건 사회였다. 그리하여 여자들은 이름도 없는 이가 많았고, 일부다처가 허용되는 사회이며, 백정과 같은 직업은 천시되는 사농공상의 사회였다. 그런 고요한 아침의 나라24)에 사는 백성들에게 달고 오묘한 생명의 말씀, 새로운 인생관과 세계관을 열어주는 전도지가 배포된 것이다.

3) 예수님은 구원사자 구세주이시다.
“천히 사람이 다 죄가 있어 하나님의 명을 거스르니 마땅히 하나님의 벌을 받아 지옥에 들어갈 것이로되 다만 하나님의 사랑하심이 심히 크사 특별히 예수를 보내어 세상에 내려 사람을 구하사 믿는 자로 하여금 길이 죽는 것을 연하고 길이 사는 것을 얻게 하시니라. (중략) 

예수는 성인이 아니라, 이에 하나님이시니 세 위 한 몸 가운데 둘째 위 성자라. 하나님의 정하신 날을 좇아 성령을 인하여 처녀 마리아께 잉태하사 나시니 천지 인물이 다 예수의 만드신 바이요, 맡으신 바니라. 고로, 사람이 다 마땅히 공경할 것이니라. 예수는 세상에 내려오시어 사람을 위하여 복음과 참 도를 전하여 베푸시고 착한 표양을 세워 사람을 화합하게 하시고 모든 놀라운 행적을 하여 그 사랑하는 마음을 드러내시고 또 십자가에 죽으사 사람을 대신하여 죄를 속하시고 마귀의 권세를 패하게 하시고 죽고 망하는 형제를 구원하시고 사람을 구하여 죄악과 죄악의 갚음을 벗어나게 하시니라. (중략) 

이 예수 아니시면 구주(세상 구하는 주)가 없으니 고로 뉘우치고 믿는 사람은 반드시 구하심을 얻을 것이요 믿지 아니하는 사람은 반드시 길이 죽는 괴로움을 받으리라.”

그 당시 온갖 미신과 유교 불교 그리고 도교와 샤머니즘에 영향을 받고 살아가는 자들에게 도성인신 하신 예수님의 사랑을 소개한 전도지인 것이다.25)

4) 성령님은 감동, 회복 치유자이시다.
“성령은 이에 하나님이시니 삼위일체 중 셋째 위라 그 공효는 곧 사람을 감동하여 착한 데 옮기게 하고, 사람이 어진 마음을 회복케 하고, 사람으로 하여금 행할 바를 행하게 하고, 고칠 바를 고치게 하시니라. 사람의 마음이 악한데 향하면 미혹함이 쉬운 고로 마땅히 하나님께서 성령을 주어 그 마음이 감화케 하심을 구하여 악한 것을 고치고 착한 것을 행하고 예수를 믿어 하늘의 뜻을 좇아 행하여 영혼 구함을 얻게 하니라.”

이 전도지에서 성령님은 감동, 회복, 치유 그리고 지도하시는 보혜사 성령님인 것을 잘 말해 주고 있다.

5) 교회 생활과 일상생활

세례와 언행 구별과 사랑의 삶 강조
“예수를 믿는 자는 반드시 세례를 받고 교회에 들어가 그 예수의 학도 됨을 밝게 드러내고 교우로 더불어 마음을 같이하고 덕을 같이 하여 교중 교칙을 지키고 교회에 들어간 후에 말과 행실을 단정히 하여 인륜의 도를 극진히 하고 하나님 사랑을 만물 사랑함보다 더하며 다른 사람을 사랑함을 제 몸과 같이 할 것이니라.” (중략)

준법 강조
“예수를 믿는 자는 어떤 사람일지라도 각각 그 나라 임금과 관원을 섬기고 또한 그 나라 법을 지키되 홀로 도리에 합당치 아니한 법과 착하지 아니한 규칙을 감히 좇지 못하나 예수를 믿는 자는 본국 풍속을 변하여 외국 풍속을 좇고 내 나라 어진 법을 버리고 다른 나라 이상한 법을 좇으라 함이 아니니라”

기독교의 복음은 개인적으로 내일에 천국에만 들어가는 삶이 아니라 이 땅에서도 모범적인 국민으로 살아갈 것을 가르쳐 준 전도지이다.

6) 영생론
“무릇 사람이 구주 예수를 힘입어 사후 영혼이 반드시 하늘로 올라가 영복을 누리니 세상 끝 날에 이르러 예수가 또한 반드시 육신으로 하여금 다시 살게 하여 영혼으로 더불어 두 번째 합하여야 하나 되어 한가지로 참 복을 누려 전당에 있어 영원토록 근심하고 민망하고 울고 슬프고 병들고 죽는 괴로움이 다 없느니라.”26)

바울 사도가 말한 것처럼 복음의 핵심은 십자가와 부활이다. 예수님을 힘입어 영생을 얻는 것과 장차 천국에 들어가 참 복을 누리게 되는 영생복락을 설명한 전도지이다.

《셩교촬리》의 요약
1890년에 발간된 《셩교촬리》는 거룩한 가르침의 모음이라는 뜻처럼 대주(大主) 하나님, 삼위일체, 예수님이 세상에 오신 목적, 기도의 의미 그리고 교회 생활과 영생 복락의 삶 등 기독교의 핵심 교리를 잘 정리해 놓았다.

특기할 사항은 예수를 믿는 자는 그 나라 법과 풍속을 지켜야 한다고 한 점이다. 

“예수를 따르는 자가 본국 풍속을 변하여 외국 풍속을 따르고 내 나라 어진 법을 버리고 다른 나라 이상한 법을 따르라 함이 아니니라.”

마지막에는 “누구든지 예수교를 알고자 하면 서울 정동과 각처에 있는 예수교회 교사를 찾아 물으면 자세히 알리라”라고 하여 전도의 길을 활짝 열어놓고 있다.

이 전도지는 기독교의 중요 진리를 모두 담고 있는 전도지로서 초창기 한국에 온 선교사들이 주로 사용한 전도지이다.

《셩교촬리》는 교인의 교리 습득을 이끌어 냈으며, 전도에도 사용됐다. 《셩교촬리》는 성공적 사명을 감당했고 그다음 해에 《샹뎨진리》27)라는 전도책을 출판 뒤 3년이 지나자 신앙문답사의 탄생으로까지 이어졌다. 장로교에서는 《그리스도문답》을, 감리교에는 《의경문답유히》를 출간하여 성도들을 건전한 신앙생활로 이끌었다.

나가는 말
중한선교와 한중선교는 하나님의 경륜 가운데서 서로 돕고 서로 세워가는 관계로 진행되었다. 중국 선교사들이 한국에 와서 선교한 대표적인 자들이 존 로스이고, 알렌 선교사이며 존 네비우스 같은 분들이다. 하나님은 조선을 이처럼 사랑하사 중국선교에서 사용되고 검증된 자료 들을 번역하여 한국 초기 선교에 이렇게 사용된 것은 놀라운 일이며, 감사와 찬양을 드리지 않을 수 없다.

《셩교촬리》의 의의 5가지
1) 《셩교촬리》의 그 내용들은 거시적인 개신교의 기본 진리의 공통성을 견지하고 있는 내용들이다.
2) 그 내용은 간단하지만, 조직신학의 틀과 순서들을 기본적으로 따르고 있음을 엿볼 수 있다.
3) 그 내용은 그 이후의 소책자 《샹뎨진리》라는 책의 핵심 내용을 담고 있는 전도지이다. 
4) 한국선교 초기에 언더우드가 한 사람의 책을 일곱 권이나 번역해서 사용한 것은 기록이다.
5) 문서선교의 아버지 그리피스의 전도지와 책이 영어권, 중국어권, 한국어권까지 두루 영향을 끼친 것을 볼 때 하나님이 사용하신 귀한 선교사임에 틀림없다. 그 문서는 선교사는 갔지만 은퇴도 없고 가장 광범위하게 지금도 사역하고 있기 때문이다.

셩교찰리! 聖敎撮理! 그것은 짧은 전도지 한 장이지만 선교의 영이신 성령께서 그 당시 유교와 미신 그리고 전통에 얽매인 자들에게 감동 감화하심으로 걸출한 기독교 신자들이 이 땅에 생겨난 것이다. 에베소서 4장 4〜5절 말씀처럼 “몸이 하나요 성령도 한 분이시니 이와 같이 너희가 부르심의 한 소망 안에서 부르심을 받았느니라. 주도 한 분이시오, 믿음도 하나요, 세례도 하나요, 하나님도 한 분이시니 곧 만유의 아버지시라.”

이런 복음의 역사를 다시 한번 되새기면서 냉랭해진 우리의 가슴에 그리피스 존처럼 다시 한번 십자가 복음의 감격이 되살아나기를 소원한다. 그리고 그리피스가 말한 ‘전도하라 전파하라 그리고 거룩을 힘쓰라 그리스도와 함께하는 시간을 가지라’라는 외침을 다시 한번 되새기고 기본으로 돌아가 자신을 점검하고 사역에 임하기를 소원한다. 



그리피스 존 (중국명: 陽格非) 선교사

아당 김영산


웨일즈 스완지서 1831 태어났다 
중국선교 비젼품고 베드퍼드 신대졸업 
상하이 1855년 도착 선교사역 시작을

한코우 롱광 교회 쇼엔 교회 세운 이후 
후베이 충전 교회 선교사역 기지 삼고 
백여개 교회를 세웠네 순회선교하였네

중국어 유창하여 문리판 성경 번역
1885 신약 번역 1905년 구약 번역
하나님 상제로 번역하니 문서 선교 아버지

그리피스 지은 저서 언더우드 번역하여 
장,감리교 선교사들 너도나도 사용했네 
놀랍다 셩교촬리 전도지 한반도에 사용을

한코우 연합병원 종합대학 설립하고 
인재들 양성하고 아편 무역 반대한 자 
팔십세 주님 부르셨네 별과 같이 빛나리


미주
1) 손인수. 원한경의 삶과 교육사상(연세대학교 출판부. 1992) p.26.
2) 안수강. 그리피스 존(Griffith John)의 《샹뎨진리(上帝眞理)》에 나타난 신관 및 개혁주의생명신학 관점에서의 함의 (생명과 말씀. 2020 볼륨 27. 개혁주의생명신학회). pp. 49∼85.
3) 그리피스 존보다 2년 앞서 선교사로 중국에 들어간 허드슨 테일러(James Hudson Taylor)는 1832년 영국의 반즐리에서 독실한 감리교 목사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는 21세가 되던 1853년 9월 19일 중국선교회(Chinese Evangelization Society)의 대표로 중국을 향해 떠난다. 상하이에 도착한 허드슨 테일러는 10여 차례 전도여행을 한다. 1855년 10∼11월에 최초로 내륙의 숭명섬에서 6주일을 지내게 된다. 윌리엄 번스(William Burns) 선교사와 7개월 동안 사역한 뒤 폭동의 와중에 닝포(寧波)에 정착하게 된다. 
4) 필자는 그가 번역한 신약성경을 소유하고 있는데 하나님을 상제로 번역한 것이 또 하나의 특징이다.
6) 김대진, 〈그리피스 존(Griffith John)의 문서 사역과 《진리편독삼자경(眞理便讀三字經)》의 이해와 평가〉, 《동서신학》 3-1, 계명대학교 동서신학연구소, 2021.
7) 그가 중국에서 보낸 55년은 청나라 말기의 태평천국의 난과 중화민국 초기 사이인데, 중국에서 보낸 가장 어두운 시기였다. 한커우(漢口)에 도착한 뒤 당시 사람들의 모습을 본 그리피스 존은 의료와 수술 시설을 갖춘 교회 병원을 세워야 함을 깨달았다. 1866년 4월, 그는 이 계획을 런던선교협회에 제출했고 승인되었다. 기록에 의하면 당시 런던교회는 작은 교회 조직이었지만 병원 건축을 위해 300파운드를 모금하고 가구와 의약품을 위한 기타 기금을 3일 만에 모금했다고 한다. 이는 당시로서는 상당한 수치로, 85파운드의 잔액은 처음 6개월 동안의 병원 비용을 충당하기에 충분했다. 이 병원은 현재 Hankou Union Hospital, Renji Hospital (영문 이름, London Mission Hospital)의 전신이다.
9) 1831년 12월 14일 스완지에서 태어난 그는 어린 시절을 에베네저 예배당에서 보냈고, 그곳에서 정기적으로 예배를 드렸으며, 불과 8살 때 회원이 되었다. 
10) 그는 청소년 시절에 듀라이스 밸리의 온윈에서 첫 설교를 했고, 곧 ‘웨일스의 소년 설교자’로 명성을 얻었다. 그는 브레콘기념대학에서 사역을 위한 훈련을 받았다. 그는 마다가스카르의 데이비드 토마스가 대학생들에게 연설하는 것을 듣고 이 방향으로 부름을 받았기 때문에 선교 사업에 전념했다.
11) 데이비드 그리피스(David Griffith, 1792∼1863)는 마다가스카르의 웨일스 기독교 선교사이자 번역가이다. 그는 성경과 그 밖의 책들을 마다가스카르어로 번역하였다. 1835년에 발행된 마다가스카르어 성서는 아프리카어로 인쇄된 최초의 성서 가운데 하나다.
12) https://chrisfieldblog.com/2008/12/14/griffith-john-impacts-central-china
14) 그의 첫 부인 Margaret(1873년 사망)과 두 번째 부인 Janet(1885년 사망)이 병원 개원과 유지에 큰 도움을 주었다.
15) 그의 생애에 관한 더 깊은 연구는 런던선교협회의 윌리엄 롭슨 지음, 그리피스 존, 한커우 선교부 설립자, 이 책은 1888년에 출판플레밍 G. 레벨 회사에서 출판한 것을 참조하라.
16) 기독교 일간지 신문 기독일보 https://www.christiandaily.co.kr/news/107602#share
17) H. G. Underwood to F. F. Ellinwood, 1886.7.9. 언더우드 자료집. 35-38:382〜384쪽. 
18) 이고은, 언더우드의 중문 기독교 문헌 번역(한국학 연구 제62집, 2021년), 141〜62쪽 참고.
19) 박형우 편역, 존 W. 헤론 자료집Ⅰ, 선인, 2017. 215쪽 참고.
20) Annual Report of the Central Chinese Religious Tract Society, 1894, p.23.
21) 이숙, 〈언더우드를 가르치고 국문연구소 위원으로 활동한 송순용〉, 기독교사상 722, 2019. 156쪽.
22) 용환규 (Yong Whan Kyu), ‘《셩교촬리》 (1890)를 통해 본 초기 한국 장로교회의 신앙 이해’ Early Korean Presbyterian Church's View of Faith Reflected in The Salient Doctrines of Christianity, 한국복음주의 역사신학회, 2011. 12.
23) https://story.kakao.com/_dOrVj/FDTVtwvKFD0
24) 노르베르트 베버 박일영 옮김, 《고요한 아침의 나라》, 매란 분도출판사, 2012, 참고하라.
25) 메리 스크랜튼(M. F. Scranton) 선교사는 1885년 여성해외선교회(WFMS) 보고서에서, “오르간(Organ)”을 요청하였고, 그의 첫 학생들에게 “예수 사랑하심은 거룩하신 말일세” 같은 찬송을 가르쳤다.
26) https://lewisnoh.tistory.com/entry/셩교찰리(聖教撮理)
27) 《샹뎨진리》는 경계선이 있고[有界]. 9행(行)으로 되어 있다. 각 행마다 16자(字)이고, 주는 쌍행(雙行)이며, 어미는 상하향흑어미(上下向黑魚尾)로 되어 있다. 표지를 포함하여 11장이고, 선장(線裝)으로 장정되어 있다. 표지의 가로 중앙에는 ‘샹데진리’라는 제목이 내려쓰기로 되어 있다. 왼쪽 상단에는 서력(西曆)으로 ‘구셰쥬강성일천팔백구십일년’이라고 적혀 있고, 오른쪽 상단에는 ‘죠션기국오백년신묘’, 하단에는 ‘그리스도셩셔’가 적혀 있다. 그래서 이 책이 1891년에 간행되었음을 알 수 있다.









▦ 사진 설명 및 출처 | (위) 픽사베이 (가운데 2장) 《덕혜입문 (德慧入門, The Gate of Virtue and Wisdom), Griffith John(그리피스 존, 楊格非)》, 김현우·서신혜·이고은 공역, 동서지행포럼, 2022년 8월 2일. 
▦ 김영산 | 전 고신대 선교목회대학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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