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선교사의 사역요청
J지역 최 선교사는 주로 대학에서 중국어를 배우면서 그 지역의 삼자교회 사역을 드러내지 않고 사역하는 한국인 선교사이다. 그는 나와 내가 속한 선교회가 중국의 삼자교회와는 사역하지 않으며, 가정교회를 주 대상으로 사역하고 있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러던 어느 날 최 선교사가 긴급하게 말씀 사역을 해 달라고 부탁해 왔다. 보안상, 그리고 관례적으로 우리가 전화와 팩스로 연락할 때에는 은어(隱語)와 상업용어를 사용하였기 때문에 우리가 「농촌 회사의 임원연수」라는 말을 쓸때 나는 그것이 당연하게 「농촌 가정교회의 교회 지도자 신학 훈련」으로 이해하였다. 사실 최 선교사는 나를 잘 알고 있기 때문에 그가 나에게 사역요청을 해올 때 사역대상이 농촌 가정교회라는 것을 의심치 않았다. 마침 그때 우리는 J지역 근처에 있는 I지역으로 사역을 가야 했기에, 최 선교사의 사역요청에 응하기로 하고 동역자인 천(陳) 목사와 함께 중국으로 떠났다.
J지역에 도착했을 때는 날이 이미 어두웠다. 최 선교사는 역 출구에서 우리를 반갑게 맞이해주었고, 곧장 택시를 타고 예정된 숙소로 향하였다. 숙소에 짐을 내려놓은 후 최 선교사는 우리를 데리고 인근 식당으로 갔다. 내가 사역 일정에 대해 물어보자 그는 내일 아침 일찍 이곳을 떠나 차로 7시간을 가야하고, 지역은 어느 외진 농촌 인근의 작은 도시라고 말해주었다. 나는 사역 대상자에 대해 더 물어보고 싶었으나 식당인 것을 감안해 더 이상 질문을 자제하고 일상적인 대화만 나누었다.
다음날 우리는 아침 6시에 최 선교사가 준비한 택시에 올라탔다. 택시를 타는 동안 우리는 택시 운전사를 의식해 대화를 극히 줄였다. 단지 날씨와 지역 물가에 대한 이야기만 나누었으며, 대부분의 시간은 눈감고 잠을 잤다. 약 8시간 후 우리는 J지역의 서북부 어느 조그만 도시에 도착하였다. 어느 상점 앞에 정차한 우리 일행은 차 밖으로 나와 최 선교사를 따라 걷기 시작했다. 약 15분 정도 간격 이동을 한 후 최 선교사가 들어간 곳은 어느 삼자교회였다. 나는 매우 당황했고 발걸음을 멈추었다. 순간 뒤에 따라오던 천 목사를 의식했다. 그도 놀란 얼굴이었다. 앞에 가던 최 선교사는 삼자교회 입구 계단을 올라가면서 우리가 뒤에서 따라오지 않는 것을 눈치채고 뒤를 돌아보면서 들어오라고 손짓하였다. 그 상황에서 나는 별도리 없이 따라 들어갔다. 입구에 「○○○ 基督敎會」라는 간판이 붙어 있었다
‘이거 혹시 사람 잡는 거 아냐?’
삼자교회로 들어가자 오른쪽 2층 복도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던 최선교사는 나에게 “여기요”라고 말하면서 손짓하였다. 나는 2층으로 올라가면서도 마음 속으로 ‘최 선교사가 도대체 무슨 일을 하고 있는 거야, 없는 거야. 이거 혹시 사람 잡는 거 아냐?’ 이런저런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사실 그때 천 목사가 어떤 심정으로 나를 뒤따라오고 있었는지에 대해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최 선교사의 뒤를 따라 우리는 2층 복도 끝에 있는 방으로 들어갔다. 최 선교사는 책상에서 일어나 우리를 반기는 노인 한 분을 소개하면서, 이 교회의 책임을 맡고 있는 장(姜) 장로님이라고 하였다. 최 선교사는 우리를 단지 왕 선생, 천 선생으로 소개하였다. 장 장로는 우리에게 오시느라 고생 많이 하셨다고 하면서 옆 방으로 가서 식사를 하자고 안내를 하였다. 방문을 나서기 전 나는 최 선교사에게 자초지종을 물어보려고 했는데, 이를 알아차렸는지 최 선교사는 재빨리 먼저 방을 빠져나갔다. 나는 속으로 최 선교사가 상황 설명을 해주지 않는 것에 대해 불쾌했고, 대낮인데도 어두운 복도를 거닐 때 마음이 어둡고 무거웠다.
식탁은 진수성찬이었다. 장로가 내게 식사기도를 청해 기도를 하고 나서 우리의 늦은 점심식사는 시작되었다. 그러면서 최 선교사는 나에게 한번도 눈길을 주지 않았다. 내가 애써 그를 바라볼 때 그는 장 장로에게 말을 걸어 주의를 분산시켰다. 식탁에 음식 담은 접시가 가득 있는데도 음식을 계속 가져 오는 것이었다. 내가 “너무 많아 다 먹을 수 없습니다.”라고 말했더니, 장 장로는 “많이 드세요, 많이 드셔야 우리를 많이 먹이실 거 아닙니까?라고 웃으면서 대답했다. 이 말을 듣고 나니 나는 더욱 먹을 수가 없었다. 속으로 ‘이거 잘못 앉아 있는데 어떻게 하지? 어떻게 이곳을 빠져나가지?’ 하고 계속 궁리하였다. 그러면서도 나는 천 목사와 눈을 마주칠까봐 음식만 삼키고 있었다. 천 목사 심정도 오죽하랴.
그때 한 사람이 들어오면서 장로에게 “소개편지(介紹信)를 갖고 오지 않은 사람들이 있는데 어떻게 하면 됩니까? 인근에 있는 농촌 사람들입니다.” 하고 물어 보았다. 장 장로는 식사 도중에 우리에게 실례한다는 양해의 눈빛을 구하면서 밖에서 들어온 그 사람에게 “괜찮아, 들으라고 해.”라고 대답하였다. 조금 있다가 또 한 사람이 들어오더니 장 장로에게 “인근 마을에 있는 우리 교회의 처소 사역자들이 아닌 사람들이 훈련을 받고 싶어 하는데 어떻게 해야 합니까?라고 했다. 장 장로는 그 사람에게 “괜찮아, 사람이 젖 먹자고 오는데 막으면 안돼.”라고 했다. 그때 나의 귀가 대뜸 솔깃하였다. “사람이 젖 먹자고 오는데 막으면 안돼.” 이게 무슨 말인가?
“사람이 젖 먹자고 오는데 막지 않습니다!”
나는 장 장로에게 “무수 일입니까?라고 물었다. 장 장로는 그가 시무하고 있는 삼자교회에서 교회 지도자 훈련을 실시한다고 하자 소문을 듣고소, 배우고 싶어하는 인근지역 비 삼자교회 계열의 가정교회에서 보낸 사람들이 훈련 받기를 원한다는 것이다. 보통 이러한 교회 지도자 훈련반을 개설할 때 반드시 지역 기독교 양회(兩會, 삼자애국운동위원회와 기독교협회)와 지역종교사무국의 직인이 찍힌 ‘소개편지’ 라는 것을 지참해야 참석할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들 삼자에 소속되지 않은 가정교회들은 ‘소개편지’를 발급받을 길이 없지만, 또 배우고 훈련받고 싶은 마음은 간절하기에 무작정 찾아와 사정한다는 것이었다. 나중에 알게 된 일이지만 장 장로는 인근 지역 가정교회 사람들에게도 존경을 받고 있는 믿음이 깊은 충성된 사역자였다. 그것을 알고 있는 가정교회들도 장 장로가 반드시 허락할 것이라고 생각해 사람들을 보낸 것이었다.
설명을 마치고 장 장로는 또 “사람이 젖 먹자고 오는데 우리는 막지 않습니다(有人來吃, 我 們不禁止).”라는 말을 하였다. 나는 솔직히 이 말에 충격을 받았다. 영(靈)의 양식에 갈급해 있어 배고파 먹고자 오는 사람들을 막지 않는 장 장로가 새삼 다르게 보여졌다. 그러면서 내 자신이 이 삼자교회에 들어서면서 계속 갖고 있던 생각들이 정리되어 가는 느낌이었고, 삼자교회에 대해 닫혔던 마음이 녹아들기 시작했다. 훈련을 받고 싶어하는 가정교회 사람들도 포함하여 신학훈련을 받게 하는 장 장로의 넓은 아량과, 급박한 영적 현실에서 가정교회를 도와 주려고 하는 그의 넉넉함에 감동을 받았다. 나는 새삼 이곳에서 ‘가정교회 사역 원칙론’을 주장하고 고집하는 것이 얼마나 초라하고 비현실적인 모습인지를 자각하게 되었다. 그러면서 마음 속으로 ‘사람이 젖 먹자고 달라는데 소속과 신분을 따져서는 안된다. 이번에 최선교사를 통해 하나님께서 나의 사역대상과 영역을 넓히시려는 계획이 있는데 감사해야 되지 않겠는가?라는 생각을 가졌다. 그러면서 옆에 있던 천목사의 얼굴을 살폈는데 그도 무엇인가를 깊게 생각하고 있는 듯했고, 최선교사도 우리가 식탁에서 대화를 나누는 동안 조심스레 나의 반응을 의식하고 있었다.
식사를 거의 마치자 장 장로는 나에게 “이번에 두 분 선생님들이 준비하신 말씀은 무엇입니까?”라고 물어왔다. 나는 로마서와 조직신학이라고 대답하였다. 우리가 강의하는 주제에 대해 이미 최선교사를 통해 알고 있으면서도 우리가 직접 말해주자 장 장로는 너무 좋아했고, 얼굴에 나타난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장 장로는 저녁부터 말씀을 시작하니 저녁식사 때까지 숙소에서 쉬라고 했다. 그때 시계를 보니 4시가 가까웠다. 숙소는 최 선교사가 안내해 주었다. 숙소는 같은 2층 복도 중간쯤에 있는 작은 방이었는데 위층 쪽에 가방을 올려놓았다. 짐을 올려놓고 자리에 앉자 최 선교사는 긴장된 어조로 나에게 이야기를 꺼내기 시작하였다. 최 선교사를 만나 처음으로 듣는 사역에 관한 이야기였다.
최 선교사의 갈등과 마음
최 선교사는 “사실 제가 왕 선생님의 사역과 사역대상을 잘 알고 있지만, 이쪽이 하도 말씀과 훈련을 갈급해 하기에 전후 상황을 다 말씀드리고 결정을 기다리기에는 너무 복잡하고 다급해서 실례를 무릅쓰고 왕 선생님을 강제로 모시게 된 것입니다. 왕 선생님도 아까 식사 도중에 나눈 대화에서도 알 수 있듯이 이곳에는 신도가 많은데 사역자가 부족하며, 헌신하려는 사람들은 있는데 그들을 훈련시켜 줄 수 있는 사람이 없습니다.”
나는 최 선교사의 말을 다 듣고 옆에 있는 천 목사의 눈치를 살폈다. 천 목사는 내가 무슨 말을 그에게 기대한다는 것을 알고, “장 장로 사역에 동참하는 일도 하나님의 인도하심인 것 같다.”고 조용하에 말을 꺼냈다. 천 목사의 말에 용기를 얻어 나는 최 선교사에게 “사람들이 배고파 젖을 먹자고 요청하는데 그들의 신분을 따져 묻는 것도 도리가 아닌 것 같습니다. 돌아가서 선교 보고나 잘 할수 있게 기도해 주세요.”라고 웃으면서 말하였다. 그때 최 선교사의 얼굴에서 환한 웃음이 만개(滿開)하였다. 마치 꽃이 활짝 핀 것 같은 모습이었다.
처음 서게 된 삼자교회 강단
우리는 저녁 7시가 되기 전 지도자 훈련장소로 사용되는 교회 본당에 들어갔다. 장 장로와 우리가 제일 앞자리에 앉자 찬양을 인도하는 형제가 찬양을 마무리하였고, 그 뒤로 장 장로가 강단 위에 올라갔다. 장 장로는 먼저 기도한 후 하나님께서 귀한 훈련의 기회를 주신 것에 감사한다는 인사말을 하고, 조직신학을 강의할 천 선생과 로마서를 강의할 왕 선생으로 간단하게 소개하였다. 처음 서게 된 삼자교회 강단이라 매우 떨렸다. 나는 목소리를 힘있게 주어 떨림을 없애려고 하였다.
가정교회에서 그랬던 것처럼 이번에 삼자교회에서도 로마서 강해를 하는 동안 듣는 이들이 강력한 흡인력으로 강의를 흡수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특히 로마서 5장에서 8장을 강해할 때 로마서가 주는 강력한 메시지와 더불어 성령님께서 우리 모두를 꼭 붙잡아 주시는 능력을 또 다시 체험하였다. 그것은 단순한 로마서 내용에 대한 석의(釋義)가 아니라, 말씀 속에 담겨져 있는 그리스도로 인한 승리와 나의 신앙고백적 외침과 환호가 섞여져서 로마서를 전하였다. 로마서 강해 시간 동안 나는 헨델의 「The Messiah」와 베토벤의 「The Song of joy」가 가장 많이 생각났고 부르고 싶은 충동을 억제하였다. 숙소에서 강의 노트를 보면서도 흥얼거렸고, 감격이 벅찰 때는 일어나 걷기도 하였다. 내가 이럴때마다 천목사는 항상 웃어주면서도 속으로 ‘저 친구 또 시작했구먼!’하고 말하고 있음을 눈빛으로 전달하였다. 천 목사는 조직신학을 강의하였는데 시간관계상 구원론과 기독론만 하였다. 그의 강의와 나의 로마서 강해의 핵심 메시지가 일치하였다. 천 목사도 마찬가지로 성령님의 역사하심을 체험하였다.
이번 지도자 훈련에 모인 사람은 5백여 명이나 되었는데, 모두 그 지역의 삼자교회와 삼자교회 예배처소 및 가정교회 지도자들이다. 특히 이 지역은 장 장로의 영적 지도력과 덕망 있는 인품때문에 삼자교회와 가정교회 사이의 갈등은 거의 없으며, 삼자교회 사람들이 가정교회를 고발하거나, 가정교회 사람들이 삼자교회를 무조건적으로 반대하는 일도 거의 없다. 또 종교사무국과 공안국의 간섭도 거의 없기 때문에 교회 내의 갈등과 교회 사이의 대립, 교회 발전의 외부적 압박이 극히 적다고 할 수 있다.
나는 이 삼자교회에서 사역하는 동안 삼자교회에 대한 인식을 새롭게 하였다. 즉 공인된 삼자교회가 제한된 범주와 한계성 속에서 나름대로 사역을 전개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았다. 삼자교회 사역의 가능성과 필요성, 이것이 하나님께서 최 선교사를 통해 천 목사와 나에게 제시해 주신 새로운 사역의 비전이었다.
첫날 밤 비록 긴 여행으로 인한 피곤함과 심적 갈등으로 인한 마음 고생, 그리고 삼자교회 강단에서 긴장을 떨쳐버리려고 괜스레 높였던 목청으로 인한 통증은 있었지만, 철제 침대에 누운 나의 마음은 매우 편안했고 뿌듯했으며, 하나님을 향한 감사로 가득 찼다.
왕쓰웨 | 편집위원, 중국복음선교회 〈중국교회와 선교연구소〉 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