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시작이라고 부르는 것들은 종종 끝을 의미한다. 끝을 맺는 것이 시작을 만든다. 끝이 우리가 시작하는 바로 그곳이다.” “What we call the beginning is often the end. And to make an end is to make a beginning. The end is where we start from.” —T. S. Eliot
이사야서 6장에서 이사야 선지자는 하나님을 예배하며 그 영광을 보게 되고 부르심에 응답한다. 의지하던 인간 왕 웃시야의 죽음은 왕이신 하나님의 통치를 보게 하고, 불의가 가득한 인간세상과 대비된 거룩함이 가득한 하나님의 임재는 신비와 저항의 길로 이사야를 인도했다. 이사야는 하나님과 만남으로 불의한 세상과 거기에 절어 있는 자신을 분명하게 보고 회개한다. 용서의 선언과 함께 보내심 받은 이사야가 들은 말씀, 곧 자신이 전해야 할 하나님의 말씀은 이스라엘 유다 왕국이 끝이 난다는 것이다.
“그중에 십분의 일이 아직 남아 있을지라도 이것도 황폐하게 될 것이나 밤나무와 상수리나무가 베임을 당하여도 그 그루터기는 남아 있는 것 같이 거룩한 씨가 이 땅의 그루터기니라” (이사야 6:13)
그 누구보다 놀랍고 깊은 영적 체험을 하고 분명한 부르심을 듣고 나서 마주하게 될 나라의 미래와 그 현실은 절망적이다. “파국이다! 이 나라는 망할 것이다.” 철저하게 끝장나서 그루터기만 남게 될 것이라고 전하는 것이 그의 첫 번째 말씀사역이다.
이 구절에서 그루터기에 사용된 원어는 성경 전체에 4개 구절에 6번 등장하는데 오직 이 구절에서만 그루터기라는 뜻을 갖고 있다. 여기서 그 의미는 그냥 잘리고 남은 나무 밑동보다는 그 본질을 간직한 것에 더 비중이 있는 것 같다. 결국 다시 맹아가 발생한다는 것을 강조한다. 나무가 베인다는 것은 원래 형태를 잃어버린다는 뜻이며, 기존의 나무 상태로는 더 이상 가치가 없고 기능을 할 수 없기 때문에 꺾이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꺾여 버린 나무는 그루터기로 지내는 일종의 휴식기를 갖고 어느 날 새로운 싹이 나게 된다. 근원적인 것이 소멸되지는 않는다. 완전한 죽음이 아니라 변화와 전환을 맞이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이사야를 통해 죽음과 같은 그루터기의 상태 그 너머를 바라보게 하시며 거룩한 씨라는 그루터기는 품고 있는 절대 소멸시킬 수 없는 새로운 생명에 집중하게 하신다.
코로나19 대유행은 모두에게 반성과 자성의 시간을 주었다. 코로나19로 거의 모든 것이 끝이 난 것처럼 보인다. 어쩌면 그래서 새로 시작할 수 있다는 소망을 갖게 된다. 인류 역사에서 변화와 개선은 언제나 앞으로 나갈 뿐 뒤로 돌아간 적이 없다. 잠시 이때를 넘어가면 예전처럼 돌아갈 거라는 막연한 기대는 변화를 따라가지 못하는 생각의 지연이 낳은 어리석은 집착이 될 가능성이 높다.
어려운 터널을 통과하는 사역자들에게 지금 가장 필요한 것은 과연 무엇일까? 여러 가지 대책들이 쏟아지겠지만 개인적인 견해는 사역자 자신을 돌보는 것이 우선되어야 한다고 본다.1) 지금은 사역자 자신과 가족, 가까운 지체들의 마음 깊은 곳을 들여다보고 함께 나누며 건강한 몸과 마음으로 회복하는 시간이라고 생각한다. 그동안 우리에게 배어 있는 오래된 사고 방식과 생활 습관, 사역의 방향이 바뀌어야 하는 이 현실을 진심으로 새로운 기회로서 받아들일 수 있기를 바란다. 앞으로 우리가 하는 사역은 얼마나 지구를 지켜내는 데 보탬이 될 수 있을지 고민해야 하고 떨어져 있지만 하나되어 연합하는 방법을 고안해 내야 하며, 우리가 섬기는 지체들의 가정은 학교, 교회와 더불어 신앙 형성과 실천을 위한 제일 핵심적인 기능을 담당하는 곳이 되어야 한다. 형식적이었거나 그다지 필요하지 않던 사이는 정리되고 가까운 친구 등 소수의 친밀한 관계에 집중하게 된 지금의 사회에서 그리스도인 공동체들은 바로 곁에서 살아가는 이웃들과 같이 호흡하며 깊이 공감하고 연대하는 관계가 되어야 한다. 느슨한 관계로는 복음이 복음으로 역할을 할 수 없는 시대가 왔다. 바꿔 말하면 복음의 능력이 자신의 인격과 가정의 삶에서 나타나기만 한다면 위선과 무기력함을 벗고 진정한 내면의 변화와 실천적 행동이 있는 교회다운 교회를 세울 수 있게 될 것이다.
조경을 위해 커다란 나무를 베고 나면 보기 흉한 그루터기를 없애야 한다. 그루터기에서 맹아가 계속 발생하는 경우 세 가지 방식으로 처리가 가능하다. 화학적인 약제 처리 방식으로 제초제를 사용하여 그루터기에 구멍 뚫고 도포하여 제거하거나, 소금(염분)이나 시멘트를 도포해서 싹이 나지 못하게 하거나, 중장비를 사용해 거대한 그라인더로 여러 번 나누어 잘라서 겨우 없앨 수 있다. 그루터기를 제거하기는 쉽지 않다.
중국교회의 긴 역사는 한 번도 멈추지 않은 하나님의 선교(missio Dei)의 결과물이다. 지금으로부터 그리 멀지 않은 과거인 문화대혁명 이후 그리스도인의 숫자가 1949년 이전과 비교해서 얼마나 늘어났는지 기억하기만 해도 중국교회의 성도들을 통해 친히 몸 된 교회를 세워 가시는 하나님의 역사를 충분히 기대하며 기도할 수 있다. 중국교회 역시 포스트 코로나 시대에 새로운 모습으로 하나님 나라를 세워 가는 역할을 감당하기 위해 함께 고민하고 있을 것이다. 우리는 그 고민을 공유하며 우리가 변화되어 가는 과정을 보여 줄 수 있으면 좋을 것 같다.
종이부시(終而復始) 중국 송나라의 주희(朱憙)와 여동래(呂東萊)가 지은 철학책 《근사록(近思錄)》(1175년경)에서, ‘천하의 이치는 끝나면 다시 시작된다(天下之理, 終而復始)’라고 했다. 이제 나를 비롯한 모든 사역자들이 밑바닥부터 다시 배울 수 있는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잘 붙들어서 하나님이 부어 주시는 새 포도주를 넉넉히 담아내는 새 부대가 되기를 소망한다.
미주 1) 《코로나19 치유핸드북》(CLC, 2020)에서 장보철 교수(부산장신대 목회상담학)는 7가지 상실- 유형적(有形的) 상실, 관계적 상실, 심리 내적 상실, 기능의 상실, 역할의 상실, 체계의 상실, 영적인 상실-을 설명하고 상실감 대면하기, 자신의 감정 살피기, 가족과 대화 나누기, 동료 목회자와 공유하기, ‘빨리’보다 ‘느림’의 미학으로, 과거나 미래보다 현재에 집중하기, 교인들의 이야기 경청하고 공감하기를 실천적 돌봄의 방법으로 제시한다.
사진 출처 | 픽사베이 김현정 | 창원 상남교회 교육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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