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가족은 2003년 1월부터 GMTI 선교훈련을 받았다. 그리고 그해 중국 4대 직할시 중 하나인 서부 대개발의 거점이기도 한 충칭(重庆)으로 부르심을 받았다. 2018년 9월 강제 추방이 되기까지 대학생선교를 통한 가정교회 개척사역에 주력해왔다. 9월 3일 월요일 이른 아침에 일곱 명의 공안이 다급하게 우리 집에 들어와 부랴부랴 우리 내외를 각기 두 대의 차에 태워 충칭 장베이(江北)구 다스바(大石坝)구치소로 연행해 갔다. 이어 한나절을 취조한 뒤 밤새도록 감시를 하고는 바로 이튿날 아침 공항으로 데리고 갔다. 그리고 신속히 우리를 비행기에 태워 본국으로 돌려보냈다. 구치소에서 각기 홀로 특별한 밤을 보냈던 우리 부부의 뇌리에는 약속이나 한 듯 똑같이 지나간 만 15년의 대학생선교가 주마등처럼 스쳐갔다. 중국 충칭 선교현장의 한 모퉁이에서 하나님의 심부름꾼으로 보낸 작은 이야기를 소개하고자 한다.
제1기: 2005-2007년 자저우(重庆市 江北区 加州花园)에서 가정교회 개척 구체적인 선교 비전을 품고 기도할 때부터 대학생선교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던 필자는, 젊고 희망찬 대학생들이 예수님을 믿고 인생이 바뀌어 한평생 주님의 제자로서 삶을 살기를 바랐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이들이 사회와 국가와 전 세계에 복음의 능력으로 지속적인 선한 영향력을 끼칠 수 있겠다는 확신이 들었다.
생기발랄한 젊은이들은 지성과 감성이 예민하고, 가치관과 세계관이 획기적으로 바뀔 수 있는 새로운 도전의 에너지가 충만하다. 또한 이들은 다양한 변화에 대한 유연성을 가지고 있다. 물론 선교사에게도 많은 역량과 열정과 끊임없는 도전이 필연적으로 요구된다. 젊은 시절, 오랜 시간 선교단체를 통해 신앙을 전수받고 여러 훈련들을 받았던 필자는 대학생선교에 관심이 쏠릴 수밖에 없었다. 하나님의 인도하심 가운데 현지어 연수 과정에서 너무도 자연스럽게 많은 대학생들을 만날 수 있었다. 아마 거의 대부분 선교사님들도 이와 비슷한 과정을 거치며 대학생들을 만나게 되고 선교의 첫발을 내딛게 되는 것 같다.
중국 대학생선교의 신호탄이 된 학생은 야융샤(雅咏霞)라는 필자의 중국어 보조교사였다. 자유롭게 허락된 초급 과정의 언어 연수였지만 수동적으로 언어만 배우고 있을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어느 날 중국어를 가르쳐 주던 학생 야융샤에게 복음을 전했다. 자매는 4영리를 이해하는 듯 선뜻 예수님을 영접했다. 그러나 아내가 우려했던 것처럼 야융샤를 양육할 수 있을 만큼 우리의 중국어 실력이 이때까지만 해도 충분하지 않았기 때문에 곧 양육에 많은 어려움이 뒤따랐다. 그리하여 한 학기 동안 야융샤를 위해 더욱 열심히 기도하고 사랑으로 대접하며 예수님의 사랑을 전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필자는 다음 학기가 되면 야융샤에게 우리와 함께 예배를 드리자고 제안하기로 마음먹었다. 야융샤는 2005년 2월 다시 충칭으로 돌아왔다. 야융샤에게 내심 기대를 걸고 예배를 제안했지만 이런저런 핑계로 별 반응이 없었다. 하지만 야융샤는 한류와 한국인이 좋아 쉽사리(?) 예수님을 영접했지만 초임 선교사의 언어적 한계로 인해 말씀양육이 제대로 될 수 없었던 것은 사실이었다.
언어 소통의 장벽을 잘 넘지 못한 야융샤는 실제적인 복음의 진수를 경험하기 쉽지 않았던 안타까운 상황이었다. 그 당시 한국에서 십수 년간 부교역자로서 목양 경험을 하고 40대 초반이 되어서야 선교사로 파송받았던 필자는, 당연히 언어적인 저항과 부담도 컸지만 그와 상반되게 사역에 대한 의지는 더 강했다. 간절히 기도하는 중에 전공을 살린 영어예배를 통해서라도 가정교회를 개척해야겠다는 열정이 솟구쳤다. 다행히 야융샤는 영어를 전공하였고, 그 밖의 중국 학생들도 한국의 여느 대학생들처럼 영어가 절실해 보였다. 야융샤에게 영어예배를 제안해 보았지만 내성적인 성격 탓에 속내를 잘 알 수 없었던 야융샤의 반응은 여전히 시큰둥했다. 아직까지 하나님의 시간이 도래하지 않은 듯했다. 예배하는 자를 찾기 위한 열망을 품고 다른 학생들을 찾아 나섰다. 우리 집 주변의 젊은 학생들을 유심히 지켜보던 어느 날 인근에 충칭전자대학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또다시 기도하면서 무작정 예배자를 찾아 나섰다.
때마침 몇몇 학생들이 캠퍼스의 잔디밭에 앉아 유쾌하게 웃으며 이야기꽃을 피우고 있었다. 생동감이 넘치는 그들의 모습을 바라보니 더욱 복음전파에 대한 열정이 솟구쳐 왔다. 이들이 예수님을 믿고 한평생 주님의 제자로 살아갈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너무나 젊고 저마다의 희망찬 내일의 꿈이 있지만, 예수님을 알지 못하다니 너무나 안타까운 일이었다. 이들 중에 유난히 한국 사람을 좋아하는 후징원(胡静文)이라는 자매가 있었다. 호의적인 이 여학생에게 다가가 우리 부부를 소개하며 곧바로 4영리를 전했는데, 그야말로 기다렸다는 듯이 예수님을 영접하는 것이었다. 우리는 너무나 기쁘게 자매와 다시 만나기로 약속했고 그 뒤에 몇 차례 집에 초대하여 교제를 나누었다. 그리고 우리 세 자녀들 덕분에 분위기가 화기애애했다.
적극적인 성격의 후 자매는 우리 자녀들과 한국 음식, 음악, 드라마 등 한국을 무척 좋아하고 우리 부부를 특히 잘 따랐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였다. 우리도 예수님의 사랑으로 그 자매를 정말 귀하게 여겼다. 천하보다 귀한 한 생명이 기쁘게 복음을 영접하고 신실하게 예수님을 따르려 하고, 부족한 복음 전도자인 우리 부부를 잘 따라주니 너무나 감사했다. 곧 예배가 시작될 것 같은 감동이 밀려왔다. 변변찮은 중국어 실력일지라도 생명을 얻게 하는 도구로, 영혼 사랑을 일깨우는 도구로 사용하시는 하나님의 크신 은혜에 감사하며, 선교사로서 보람을 경험하는 시간이었다. 갑자기 예배 모임이 시작되니 그동안 소극적이었던 야융샤 자매도 함께 열심을 내어 예배 시간에 잘 참석했다. 야 자매에게는 서로 의지하며 함께할 수 있는 믿음의 친구가 필요했던 것이다. 그렇게 1년간 영어예배를 드렸고, 그 후에는 중국어로 예배를 드리게 되었다.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와 섭리 가운데 우리 부부와 야융샤, 후징원 이렇게 네 사람이 2005년 2월 감격의 첫 주일예배를 드렸다.
반년이 지나자 첫 예배의 리더 격이었던 후 자매는 졸업을 하고 고향으로 돌아갈 계획이었다. 다시 충칭으로 돌아오는 것은 쉽지 않은 상황이었다. 겨우 시작된 주일예배였던 만큼 한 학기만에 없어지면 큰일이었다. 우리는 복음이 학생들에게 끊임없이 전해져서 예배가 중단되지 않기를 간절히 기도했다. 후 자매와 야 자매도 교회를 위해 함께 기도하면서 거룩한 부담감을 느끼고 있었다. 그런데 참 감사하게도 졸업이 얼마 남지 않았던 어느 날 후 자매가 몇 명의 후배들을 이끌고 왔다. 할렐루야! 그리고 약속된 날짜에 후 자매는 4명의 귀중한 생명들을 남겨 두고 광시(广西)성으로 돌아갔다. 지금도 후 자매와 야 자매는 아름다운 추억으로 남아 있는 자매들이다. 지금도 아내는 야 자매와 후 자매를 위해 기도하고 있다. 아마 천국에 갈 때까지 이들을 위한 아내의 기도는 멈춰지지 않을 것이다. 2005년 새 학기의 시작과 함께 후 자매가 남겨 둔 후배들인 리둥메이, 장징, 우팅 무리와 친구들이 우리 집을 찾았다. 신실했던 후 자매를 통해 거둬들인 복음의 열매들이었다. 우리는 이들을 잘 양육해야 했다. 이렇게 하나님의 선하신 인도하심 가운데 2006년 봄학기부터 주일예배에 참석하는 성도의 숫자가 부쩍 늘어났다.
설립 초창기에 헌신적인 도움을 주신 몇 분의 선교사님들과 부족하나마 우리 가정이 작은 헌신의 시간을 보냈던 충칭한인교회가 가까운 곳에 있었던 것은 하나님의 은혜요, 섭리였다. 한국인유학생 두 형제가 이 교회에 출석하고 있었는데 이들에게는 장래를 약속한 현지인 여학생들이 있었다. 공교롭게도 이 시기에 이들 두 자매가 예배드릴 곳을 찾고 있었는데 마침 우리 교회로 오겠다는 기쁜 소식을 전해왔다. 이들은 장나(张娜)와 톈옌(天燕)이라는 자매들이다. 그리고 몇 달 뒤 부활주일에는 세 명의 자매들에게 감동적인 첫 세례를 베풀었다. 할렐루야! 후 자매가 떠난 뒤 야 자매도 믿음이 크게 성장하여 세례를 받고, 영어교사로 발령을 받아 다른 성(省)으로 떠났다. 대학생 사역은 기쁨과 아쉬움의 눈물을 머금고 계속 떠나보내야 하지만, 떠나보내는 것 역시 사랑임을 일깨워 주는 사역이다.
2006년 신학기에 전도된 몇몇 학생들이 예배에 참석하기 시작했고, 이는 교회의 부흥으로 이어져 용기와 힘을 얻는 계기가 되었다. 그런데 2007년 봄학기가 시작되자 갑자기 충칭전자대학 학생들이 약속이나 한 듯 연락도 없이 교회에 나오지 않았다. 어찌 된 일인가 기도하면서 기다려 보았다. 그러다가 뒤늦게 알게 된 사실은 이 대학이 멀리, 새롭게 조성된 ‘대학성(大学城, 대학들이 밀집해 있는 지역)’이라는 곳으로 이전을 했단다. 대학성은 우리 집에서 버스로만 두 시간 이상 걸리는 멀리 떨어진 곳이었다. 아마 학생들은 어차피 너무 멀어서 예배에 참석하기도 어렵고, 앞으로 우리를 만나기도 쉽지 않을 테니 서로 힘들지 않게 당분간 연락을 하지 말자고 했던 것 같다. 우리 부부는 잃어버린 영혼들을 찾기 위해 그들이 좋아했던 음식을 정성스레 준비했다. 그리고 충칭 도심 서부 외곽 제일 끝에 위치한 대학성으로 그들을 찾아갔다. 15개 이상의 대학들이 밀집한 광활한 곳에 도착하여 몇 시간을 찾아 헤매도 그들이 머무는 기숙사를 쉽게 찾을 수 없었다. 잃어버린 양 떼를 찾기 위해 온종일 이리저리 헤맸지만 결국은 지친 몸으로 집으로 돌아왔다. 그렇게 주님의 은혜로 몇 주 만에 겨우 길 잃은 영혼들을 다시 찾을 수 있었다. 할렐루야!
제2기: 2008-2010년 사핑바 천자완(沙坪坝 陈家湾) 가나안교회 개척 2007년 봄, 우리는 시의적절하게 대학성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바로 그곳에 또 다른 교회가 세워지기를 소원했다. 대학성에 새로운 가정교회가 개척되지 않는다면 이곳에 있는 자매들과 수많은 대학생들을 예배자로 세울 수 없다는 생각이 번뜩 들었다. “주님, 꼭! 대학성에 교회를 세우게 해 주세요.” 우리 부부는 대학성에 남아 있던 네 명의 자매들을 생각하며 그곳에 가정교회를 개척할 수 있도록 지속적으로 기도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의 기도를 통해 믿음을 연단하셨고 그때부터 2년이 지난 2009년 9월에 드디어 교회의 개척을 허락하셨다. 그 당시 같은 소속 동료 선교사들도 대학생 사역을 통한 교회개척에 열과 성을 다하고 있었고, 가정교회를 개척한 동역자들 또한 바쁘게 사역하고 있었다. 우리 집에서 시작한 가정교회도 위치와 공간의 제약을 받았다. 다소 거리가 있던 쓰촨외국어대학(四川外国语大学)과 충칭사범대학(重庆师范大学)에서 예배에 참석하던 몇몇 학생들이 학년이 올라감에 따라 수업 시간의 부족과 거리상의 어려움을 토로했다. 지난 몇 년간 제한된 공간에서 늘 많은 학생들을 초대하여 식사하고, 교제하며, 예배생활을 한 우리 부부와 어린 자녀들도 그간의 고충을 털어놓았다.
2008년 5월 우리 가정을 세 번째 방문하신 장인어른이 우리와 함께 예배를 드리신 뒤 충칭사범대와 쓰촨외대 인근으로 교회를 이전할 수 있도록 재정적 후원을 해 주셨다. 그래서 제1기 자저우화원(加州花园) 가정교회에서 제2기 사핑바 천자완(沙坪坝 陈家湾)교회로 새로운 도약을 맞이하게 되었다. 이는 순전히 하나님의 선한 도우심의 결과였다. 당시 필자는 충칭대와 충칭사범대, 쓰촨외대를 돌아다니며 조심스럽게 4영리로 복음을 전하였다. 그도 그럴 것이 평균적으로 한 학기에 20-30여 명의 학생들이 주일예배에 잘 참석한다 하더라도 매년 몇 명의 학생들은 졸업과 아울러 타지로 떠나 버리기 때문에 사역을 일정하게 유지하는 것만도 쉬운 일이 아니었다. 매주 꾸준히 전도하지 않으면 다음 학기 사역을 장담할 수 없다는 강박 관념에 사로잡히기도 했다. 그때 중국 학생들은 그나마 복음 수용성이 좋았기 때문에 10명에게 복음을 전하면 적어도 한 명은 복음에 대해 관심을 보이거나 영접하게 되는 복된 시기였다. 그럼에도 우리의 사역은 정체되어 있었다. 복음전파와 주일예배와 정기 모임 이외에 더 넓고 다양한 사역을 개발하지 못했다. 여전히 필자는 언어적 한계를 느꼈고, 학생들도 더 많은 시간을 들여서 또 다른 양육을 필요로 할 만큼 믿음의 헌신이 부족했다. 아직 중국어 실력이 많이 부족한 한국인선교사가 직접 중국인교회를 목양하다 보니 저들의 신앙 성장이 느릴 수밖에 없다는 회의적인 생각이 들기도 했다. 그럼에도 작고 연약한 자를 돌보시는 긍휼의 하나님이 놀랍게도 신실한 형제와 자매들을 계속해서 보내 주셨고 주님의 사역이 유지되고 소망이 자라게 하셨다.
2008년 10월 충칭대학에서 4영리를 전하다가 어우롱보(欧龙波)라는 학생을 만났다. 자신이 충실한 공산당원이라고 밝히면서도 4영리에 큰 호감을 가졌고 예수님을 영접했다. 곧 다시 만날 것을 약속은 했지만, 필자는 착실한 공산당원인 그가 당연히 꺼려졌다. 석 달쯤 지나 그 학생에게서 전화가 왔다. “수수(叔叔; 숙부, 아저씨), 오는 주에 교회에 가도 될까요?” 마음 한편으로는 반가웠지만 염려도 컸다. ‘혹시 어우룽보가 나를 공안에게 신고한 것은 아닐까?’ 어찌 됐든 그는 주일예배에 참석했다. 그 동안 베이징(北京)의 한 대학원에 시험을 쳤는데 아쉽게도 떨어졌고 앞으로는 모임에 계속 참석하고 싶다는 것이었다. 우리는 그가 낙방한 것도 하나님이 개입하신 것이라고 생각하며 마음을 열고 감사했다. 유머러스한 어우롱보는 적극적인 성격과 리더십이 있는 청년이었다. 그리하여 어우 형제의 리더십과 전도로 가나안교회는 더욱 생기가 넘쳤다. 친구도 많아 아가페(전도만찬) 때는 10여 명의 친구들을 데려와서 사역에 큰 힘이 되었다. 그리고 이 무렵 칭하이(青海)사범대학을 졸업한 라오더젠(饶得剑)이라는 청년이 그의 친구들인 셰후이민(谢慧敏) 형제와 장링(张琳)과 왕페이(王妃)라는 자매들과 함께 가나안교회에 나오게 되었는데 이들은 직장을 찾아 충칭으로 왔다고 했다. 그 동안 떠나보낼 줄 만 알았던 우리 교회가 정말 반갑고도 귀한 식구들을 맞이한 것이다. 하나님의 크신 위로와 감사가 넘쳐났다. 할렐루야!
제3기: 2010-2011년 사핑바(沙坪坝 火车站) 가나안교회의 팀 목회 2010년 충칭에서 가정교회 개척 팀이 결성되었다. 하나의 큰 건물에 세 팀의 교회가 오전, 오후, 저녁에 각각 예배를 드렸고, 금요기도회 때는 다 함께 모였다. 우리 부부는 오전에 먼저 대학성교회로 가서 학생들과 예배를 드렸고, 오후에는 사핑바에서 가나안교회 형제자매들과 함께 예배를 드렸다. 사핑바연합교회에는 주로 충칭대, 충칭사범대, 쓰촨외대 학생들이 많았다. 2012년 우리 가족이 보안 문제로 안식년을 떠나면서 가나안교회의 형제자매들은 사핑바교회에서 공상대 가정교회로 모임장소를 옮겼고 대학성교회에서 동역했던 현지인 사역자에게 목양을 위임했다. (다음 호에 계속)
사진 출처(가운데) | 바이두 박제완 | 전 중국선교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