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중국교회-장지강-바이두.JPG) 지난 목차
서론
Ⅰ. 종교 문제 1. 종교에 대한 물음: 중국에 종교가 필요한가? 2. 기독교의 대안: 중국은 어떤 종교를 필요로 하는가
Ⅱ. 그리스도 중심의 메시지 1. 근대 기독교 복음 메시지에서의 변화 2. 그리스도 중심의 변증론(호교신학)의 등장 3. 신학적 평가
III. 기독교 신앙의 본색화 문제 1. 본색화를 위한 노력을 촉진했던 힘들 2. 오사운동 시기 지식인들의 전통문화에 대한 태도들 3. 본색신학의 건설을 향해 4. 신학적인 공통 기반, 공통된 원칙
IV. 민족주의: 반(反)기독교 운동에 미친 영향 1. 반(反)기독교운동: 초기의 발전, 1922년과 1924년의 반기독교 활동들 2. 제국주의의 도구라는 공격 3. 오삼십참안(五卅慘案, 5월 30일 사건) 4. 기독교 교육 - 민족주의의 걸림돌인가? 5. 국민당의 청천백일기(靑天白日旗) 아래의 기독교
V. 민족주의: 중국교회의 대응 1. 공산주의에 대한 대응 1) 자본주의에 대한 평가 2) 선교와 제국주의
3) 공존의 가능성 기독교와 공산주의는 중국에서 공존할 수 있을까? 공산주의를 지지하는 이들에게 이것은 결코 의문의 대상이 되지 못했다. 그들은 단도직입적으로 그럴 가능성을 부정하였으며, 이론상으로든 실제상으로든 공산주의와 기독교는 함께 언급될 수 없는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기독교 신자인 공산주의자 혹은 공산주의자인 기독교 신자라는 것은 모순된 말이라는 것이다. 소년중국학회(少年中國學會)의 지도자 중 한 사람이었던 이황(李璜)은 《사회주의와 종교》라는 글에서 사회주의의 기원은 순수하게 서방의 인본주의에 유래한다는 것을 확정하였다.1) 즉, 18세기 사회주의의 등장은 종교의 지배에 대한 지적인 투쟁에 말미암은 것이었고, 과학의 발전은 우주가 창조된 것이 아니라 진화된 것임을 보여주는 충분한 증거를 이미 제출하였으며, 인류는 어떤 신령(神靈)의 도움에 의지할 필요 없이 스스로 자유롭고 평등한 사회를 건설할 수 있는 역량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그는 말하기를 “18세기 이래 지금까지 유럽인들은 개인의 역량에 의지하여 부단한 창조의 작업에 참여해 왔으며, 그 평등과 자유와 인류 상호 부조의 원리에 근거하여 사회주의를 만들어냈다. 사회주의의 연원은 이미 이와 같은 것이니 어찌 그것이 종교에 반대하지 않겠는가?”2) 이황은 기독교와 사회주의 사이에 어떤 실천상의 유사성들이 있다는 것은 인정할 수 있으나 정신상에서는 둘 사이에 상당한 간격이 있다고 주장하였다. 그에 의하면 어떠한 종교적 담론도 더 나은 미래를 건립하기 위해 인간적 노력을 기울이는 데는 해가 된다. 왜냐하면 “사회주의의 정신은 전적으로 이 세계에 있으나 종교의 정신은 전적으로 하늘[天堂]에 있다. 사회주의는 현존하는 이 세계를 넘어서서 인간의 사상과 행동을 명령하는 공상적인(speculative) 세계를 창조하지 않는다. (……) 간단하게 말해서 사회주의는 합리적이어서 미신적이지 않으며, 과학적이어서 신비적이지 않기” 때문이다.3)
그에 반하여 공산주의와 기독교의 공존에 대한 중국 기독교인들의 관점은 둘로 나뉜다. 남경(南京)의 금릉대학(金陵大學) 교수 첨위(詹渭)는 중국의 개혁운동에 대해 분석하면서 중국공산주의에 대해 결코 호감을 표시하지 않았으며, 그것이 중국 사회에 적합하지 않다고 생각하였다.4) 그의 주장에 의하면 중국은 아직 경제적으로 미발전 상태에 있어서 자본주의가 성숙한 그런 국가가 아니며, 사회 구조는 아직 붕괴의 지점에 도달하지 않았다. 이는 서방의 국가와는 다른 상황으로서 공산주의자가 주창하는 사회·경제적인 혁명은 중국에서는 결코 필요하지 않다. 또 중국에 시급하게 필요한 것은 아직 개발되지 못한 나라 안의 풍부한 자원들을 개발하기 위한 충분한 자본이다.
첨위는 서구 국가들의 자본주의가 나름의 단점들을 가지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중국은 유익한 것은 선택하고 해가 되는 것은 피할 수 있다고 계속해서 주장하였다. 노동자들은 협동조합들을 조직하고 자신들의 재산을 축적하여 자신의 공장을 건설함으로써 자본가들과 경쟁할 수 있다. 현재 직면하고 있는 국가의 가장 큰 어려움은 재산의 분배가 공평하지 않은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자원을 충분히 발전시키지 못하고 있는 데 있다. 그는 만약 공산주의가 중국에서 실현된다면 현재의 자본가들이 자신들의 돈을 국제 조계나 외국으로 옮겨갈 것이며 그것이 국내의 빈곤 상황을 더욱 악화시킬 것이라고 경고하였다. 그리고 중국이 양과 질에서 높은 생산성을 기대할 수 있는 것은 자본주의 체제 아래에서라고 주장하였다.
첨위의 관찰에 따르면 공산주의 정부에서는 개인 기업들은 완전히 힘을 잃게 될 것이다. 서구의 산업 국가들에서 증명된 바와 같이 개인 기업은 자주 공산주의 체제에서는 결핍되기 쉬운 창조성과 진취성을 자극한다. 부의 분배가 성취(수행)가 아니라 필요에 따라 이루어진다면 많은 사람들은 게으르게 될 것이고 국가의 생산성은 저하될 것이다.5) 정부가 모든 기업들의 소유주가 된다면 정부 관료들에게 사람들의 복리(福利)를 조정할 수 있는 권한이 과도하게 주어질 것이다. 군벌들의 지배 아래에서 나타난 관리들의 부패와 당원과 정객들 사이의 상호 결탁 상황은 그러한 문제에 대한 예고편이라고 할 수 있다. 첨위의 결론은 비록 자본주의가 자신의 취약점을 가지고 있지만 중국의 경제생활을 재건하는 데에는 공산주의에 비해 더 나은 대안이라고 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기독교는 자본주의를 개량하여 그로 하여금 더욱 실제에 부합하도록 만들 수 있다는 것이다.
중국 기독교인들 중에는 또한 기독교를 전적으로 거부하는 입장과 마르크스 사회주의에 반대하는 입장들 사이에서 기독교와 사회주의 이론의 공통점을 지적하고 둘 사이의 차이점에 대해서는 강조하지 않는 이들도 있었다. 그들의 동기는 양자 사이의 상호 적대감을 누그러뜨려 화해시키고자 하는 데 있었다. 그들은 두 가지 운동 사이의 합작 가능성에 대해 매우 낙관적이었다. 사실 공산주의자들이 반(反)기독교운동을 강력하게 지지하고 있었던 때였던 만큼 기독교 변증가들이 다소간의 화해로 기울어지던 심리를 발견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장사장(張仕章)과 양균묵(梁均黙)은 모두 중국 사회주의에 대한 우호적인 발언을 하였다. 이들은 기독교와 사회주의는 주요한 지점에서는 일치하지만 사소한 점들에서만 다르다고 주장하였다. 장사장은 그 불공평한 경제적 상황 때문에 중국에서는 어떤 형태든 사회주의가 실현될 필요성이 있다고 주장하였다. 많은 서구의 사회주의자들, 예를 들어 프랑스의 푸리에(Fourier), 생시몽(St. Simon), 미국의 웰즈(H.G. Wells) 같은 이들은 모두 일찍이 기독교의 영향을 받은 적이 있었다.6) 기독교와 사회주의는 모두 인간의 내재적인 가치와 공동체에 대한 개인의 의무, 부의 분배, 모든 사람에게 동등한 발전의 기회가 주어져야 한다는 것을 확정하기를 원한다. 서보겸(徐寶謙)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 기독교와 공산주의는 관념에서 그리고 방법에서 충돌하는 점이 매우 많다. 다만 공산주의 중에는 확실히 기독교의 정신과 일치하는 몇 가지 점이 있다. 첫째, 세계에서 억압받는 민족들을 해방시키고자 한다. 둘째, 억압하는 자들에 저항하기 위해 세계의 억압받는 자들과 연합하고자 한다. 다른 말로 한다면 공산주의와 기독교는 모두 성격상 국제적(간국가적, 간민족적)이다.7)
어떤 기독교 지도자들은 사회주의의 약점이 삶(인생)에 대해 지나치게 유물론적으로 해석하는 데 유래한다고 지적하였다. 양균묵은 종교의 영적 차원(의식)이 그러한 물질화한 인생관을 보완할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종교는 내적이고 개인적인, 일종의 영적인 믿음이다. 반면에 공산주의는 외적·사회적·물질적인 삶의 방식을 강조한다. 따라서 그들은 결코 서로 배척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는 “만약 공산주의가 장래에 실행된다면 기독교운동은 훨씬 더 풍요로워질 것이다. 그때에는 현재의 물질적 삶의 신산(辛酸)함은 제거될 것이며, 영적인 헌신에 더 많은 주의가 주어질 것이다. 그래서 종교는 회피할 수 없는 것이 될 것이며 크게 환영을 받게 될 것이다.”라고 예견하였다.8) 그래서 “공산주의운동은 종교의 정신이 없이는 성공할 수 없는 것이다.”9)
기독교와 사회주의 사이의 합작을 추구하면서도 몇몇 기독교 지도자들은 사회주의가 급진적인(과격한) 수단을 제창하는 데에 대해서는 불안을 느꼈다. 힘을 다해 일체의 현존하는 체제를 전복한 뒤 건립한 새로운 조직이 더욱 완전하고 선하다는 것을 어떻게 보장할 수 있는가?10) 교회 인사들은 “장래에 이러한 두 강력한 힘들이 새로운 사회를 건설할 것이다. 그렇지만 사회주의는 그 의도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 자신의 근본주의를 억제하는 것이 필요하며, 그를 위해 기독교를 필요로 할 것이다”라는 희망을 가졌다.11) 중국의 기독교인들은 중국에서 계급투쟁이 폭발하는 데에 대해 두려움을 가지고 있었다. 마르크스주의는 계급투쟁에 대해 혁명이 진전하는 과정에서 반드시 거쳐야 할 과정이라고 생각하지만 폭력의 사용은 용서와 박애라고 하는 기독교의 원칙과 완전히 반대되기 때문이다. 어떤 이들은 급진적인 마르크스 사회주의는 월터 라우센부쉬(Walter Rauschenbusch)와 해리 워드(Harry F. Ward)의 기독교적 평화주의에 의해 순화될 수 있으며, 서구에서의 기독교 사회주의운동은 곧 폭력에 의지하지 않고도 성공한 개혁운동의 좋은 사례라고 주장하였다.12) 대부분의 중국 기독교 신자들은 당시의 상황을 국가의 중건을 위해 기독교와 사회주의가 연합할 수 있는 놓칠 수 없는 좋은 기회로 보았다.
2. 민족주의에 대한 대응
1) 정치적인 참여 1920년대는 민족주의 의식이 고양되고 널리 퍼져 일반인들에게 깊이 침투되던 시기이다. 이러한 거침없는 민족주의의 시대에 정치적 문제는 중국 기독교인들에게 다양한 반응을 불러일으켰다. 그러나 역시 대다수의 기독교인들은 그에 대해 무관심하였다.13) 보수 성향의 기독교인들은 정치로부터 물러나는 것이 마땅하다고 주장하였다. 왜냐하면 정치는 ‘더럽고’ ‘세속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그들 중 많은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전천년적 재림을 믿는 말세관과 내세의 복택을 강조하는 피세적인 신학사상을 가지고 있었다.14) 그들은 교회와 세상은 가치 관념에서 서로 대립하며, 어떤 형식의 정치적 참여도 신앙상의 타협에로 이끌어 결국 기독교를 분열시키고 위태롭게 할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기독교인의 책임은 세속적인 질서의 타락으로부터 자신을 오염되지 않게 지키는 것이다. 어떤 기독교 지도자들은 교회와 국가 사이의 상호 간섭이 좋은 시민으로서 생활과 영적인 삶을 향상시키는 것 모두에 해를 끼칠 수 있을까 두려워하였다. 교회가 번잡한 세상의 일에 얽혀든다면 자신의 고유한 선교적 사명을 망각하게 되기 쉽다는 것이다.
한편 다른 한쪽에는 자신의 기독교 신앙을 정치와 연결시키려고 한 이들이 있었다. 20년대 초반부터 손중산(孫中山)의 밀접한 동료였던 국민당 영수(領袖) 서겸(徐謙)15)은 일찍이 기독교를 통해 민족 구원[救國]의 사명을 고취하고자 하였다. 그는 기독교가 중화민국(中華民國) 입국(立國)의 기초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의 지도 아래 기독교구국회(基督敎救國會)가 정식으로 성립되었다. 그것은 구국(救國)이라는 협회의 목표에 찬동하기만 한다면 기독교 신자이든 아니든 관계없이 회원으로 가입하여 함께 일하는 것을 허용하였다.16)
1927년 무창(武昌)에서 열렸던 한 반기독교 집회에서 서겸은 반기독교운동에 대한 국민당의 입장을 설명하였다. 아울러 중국 기독교인들이 국민혁명군(國民革命軍)에 가입할 것을 촉구하면서 “反(반)기독교는 기독교인(의 신앙)을 반대하는 것이 아니라 기독교인들이 각성하기를 요구하는 것이다. 즉, 제국주의자들이 이용하는 도구로서의 기독교로부터 해방되어 국민혁명에 참가하라는 것이다.”라고 말했다.17) 그는 또한 주기도문에서 영감을 얻어, 신권(神權) 통치 아래에 일종의 기독교 무정부주의 제도를 건립할 것을 주장하였다. 그는 인민들이 신의 통치에 복종할 때 일체의 허위적인 군주제도와 민주입헌제도는 사라지게 될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현재의 세상이 변혁되기에는 너무 사악하다고 믿는 것이야말로 미신(迷信)이다. 우리는 마땅히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기 전에 현재의 세계를 변혁시켜야 한다. 그는 반기독교주의자와 민족주의자들에 맞서 기독교가 국가의 정치 건설을 돕는 역할을 할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그는 “구국이 되지 않는다면 우리는 영원히 구원받을 수 없을 것이다”라고 주장하였다. 그는 “어떻게 자신들의 나라를 잃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도록 허락받을 수 있겠는가?”라고 물었다.18) 이전의 보수 성향의 기독교인들이 정치 행동의 이점에 대해 회의적이었던 반면에, 서겸과 그의 추종자들은 정치화한 기독교의 장점에 대해 확신하였다. 서겸은 기독교인들에게는 혁명을 설교하고 혁명주의자들에게는 기독교를 설교하는 것이 자신의 소명이라고 느꼈다.
한편 오뢰천(吳雷川)의 정치사상은 서겸의 급진적 사상과 상당히 유사한 점을 가지고 있었다. 오뢰천의 노력은 먼저 기독교의 신앙을 검토하여 그중에서 실제에 부합하지 않은 전통 이론과 서방의 색채를 씻어내고 그런 다음에 기독교를 구국과 구민(救民) 사업상에서 응용하는 것이었다. 그는 정치 행동은 사회개혁의 일부분으로서 이상적인 사회 곧 약속된 하나님의 나라를 건립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거쳐야 할 과정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오삼십참안(五卅慘案)’이 교회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 낙관적인 견해를 표명하였다. 그를 통해 처음으로 중국의 기독교인들이 민족 문제에 대해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 그래서 민족(인종)적 멸시와 외국 열강들의 침략에 항의하기 위해 집단적 운동에 참여하게 되었다는 것이다.19) 마태복음 25장에서의 예수의 달란트 비유로부터 오뢰천은 정치적 개혁과 관련해서 하나님은 스스로를 돕는 자들을 도우실 것이라고 명제를 끄집어냈다. 예수는 자신의 나라를 구하기 위해서 전심을 다해 유대의 종교를 개혁하고자 하였다. 왜냐하면 유대 종교야 말로 유대인의 정치와 민족 전통의 중심이었기 때문이다. 예수가 그러하셨으므로 그를 따르는 그의 제자들도 마땅히 그의 정신을 본받아 민족의 미래를 위해 노력하며 또한 헌신하고 희생하여야 한다.20) 비록 그가 기독교와 정치(혁명)이 중국의 구원이라는 대전제 아래에서는 결코 서로 충돌하지 않는다고 보기는 하였지만 장개석(蔣介石) 정부에 대해서는 매우 비판적이었다. 그가 보기에 당시 남경 정부의 정책은 인민의 신뢰와 사기를 무너뜨리는 것이었고 또한 지식인들의 활동을 억압하는 것이었다.21)
국민당 내부의 일부 기독교인 관료들도 종교를 이용하여 정치적 목적을 달성하고자 하였다. 그들은 기독교를 혁명 프로그램 속으로 통합시키려고 하였다. 손중산(孫中山)의 아들인 손과(孫科)는 중국의 기독교인들이 국민당 운동에 참여할 것을 권유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한 바 있다.
국민당이 백절불굴의 기개를 가지고 있는 것은 순전히 일종의 신앙의 힘이다. 기독교도 일종의 신앙이며 인생에서 잠시라도 없을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 궁극에서 기독교와 국민당은 그 과업이 서로 다르지만 실은 동일한 목표를 가지고 있다. 그 때문에 우리는 강력한 중화민국을 건설함에 있어 장래에 그들이 협력할 것을 기대하는 것이다.22)
국민당 조직은 순수하게 정치적인 것이지만 그에 소속되기를 희망하는 모든 중국인들을 자신의 성원(成員)으로 포괄하였으며 그들의 종교적 배경은 묻지 않았다. 국민혁명군의 총수(總帥) 장지강(張之江)은 혁명에 참여하는 것이 기독교를 판별하는 시금석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는 예수의 삶에서 사회·정치와 유관한 행위와 말씀을 중시하였으며, 예수가 무산계급의 지도자로서 평생토록 혁명에 헌신하였음을 강조하였다. 예수는 중국 인민들을 위해 혁명 도덕의 기초를 형성하여 주는 박해(이타주의)와 헌신의 모델로서 마땅히 국민 혁명의 도덕적 표준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23) 예수의 참된 추종자는 혁명당의 충성스러운 회원이 될 것이다. 그런 사람은 결코 혁명의 책임을 마다하거나 반혁명적 활동을 할 수 없다.
전적인 분리와 전적인 참여라는 두 입장 사이에 우리는 또한 숙고된 참여의 정치를 주장한 중도파(中和派)들을 발견할 수 있다. 그들은 좌우의 양방향에 편향되는 것의 위험성을 알았다. 그러나 그들은 동시에 기독교의 복음이 정치·사회적 문제들을 소홀히 하지 않는다는 것을 믿었으며, 반대로 마땅히 기본적인 도덕 원칙을 제안하여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예를 들어 1924년에서 1927년까지 연경대학(燕京大學) 총장을 지냈던 홍업(洪業)24) 교수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우리는 한편으로는 냉담한 출세간(피세)적 무관심의 태도 혹은 오직 개인 복음만을 말하는 극단적 배타주의 정책을 유지하기를 원하지 않으며, 또 다른 한편으로는 교회와 국가(정부)를 완전히 동일시하는 것의 위험과 과도한 세속주의의 유혹을 피하기를 원한다.”25) 여일장(余日章)의 견해에 따르면 중국교회는 근대의 중서(中西)관계에서 (외국 세력에) 정치적 보호를 구했고 또한 외국 정부들이 자신들의 야심을 실현하기 위해 자신을 이용할 수 있도록 허용했다는 점에서 질책으로부터 면제될 수 없다. 교회가 국가(정부)의 정책들에 간섭해서는 안 된다는 것은 틀림없는 원칙이다. 그러나 만약 정치가 기독교의 기본적인 자유와 공평의 원리를 침범한다면, 교회는 여전히 수동적 태도와 불갑섭의 원칙을 계속 유지할 수 있을 것인가? 여일장은 유교에서 말하는 중용(中庸)의 도(道)로부터 중국교회가 선택할 수 있는 또 하나의 정치적 via media (중도, 중용)를 제안하였다. 그것은 “단지 극단적인 생각을 피할 뿐 아니라 사실을 면밀하게 탐색하여 발견한 길을 따라감으로써 전체의 최대의 이익을 구하는 것이다.”26) 여일장의 목적은 결코 기독교를 정치화하는 데 있었던 것이 아니며 오히려 정치를 그리스도화하려는 데 있었다. “우리 삶의 모든 국면들, 그것이 종교적인 것이든, 정치적인 것이든, 사회적인 것이든, 경제적인 것이든, 국제적인 것이든, 종족적인 것이든, 그 모두를 한 가지로 그리스도화하는 것이다.”27) 그는 인류 생활의 각 방면이 모두 하나님의 계시적 관여 아래 있으며, 기독교는 결코 인생을 종교적(영적)인 것과 비종교(세속)적인 것으로 나누는 분할(이원론)적 인생관을 전파하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였다. 만약 우리가 정치를 자신의 역사적 실존 속에서 자신의 가치와 의미를 추구하는 작업의 한 부분(방법)으로 인정한다면, 분명 하나님이 그 속에도 자리 잡고 계시며 일하고 계신다는 것이다.
1926년 여름 국민 정부가 북벌(北伐)운동을 시작했을 때 기독교와 정치의 문제는 더욱 첨예하게 되었다. 기독교회는 하나의 종교단체로서 마땅히 정치활동에 참여하여야 하는가 아니면 그로부터 피해 물러나 있어야 하는가? 이 정치적 문제에 대한 조자신(趙紫宸)의 반응은 상당히 보수적이었다. 그는 교회와 국가(정부)는 조직적으로는 분리되어 있으되 기능적으로는 협력하여야 한다고 생각했다. 교회는 본질상 종교 신앙의 단체로서 그 주요한 목적은 신도들이 하나님과 영적 관계가 깊어지게 하는 데 도움을 주는 것에 있다. 반면 국가(정부)의 기능은 사회질서를 유지하고 인민의 생명과 재산을 보장하는 데 있다. 둘 사이의 그러한 본질상의 차이 때문에 기독교회는 어떤 특정한 정치적 이념에 자신을 일치시키거나 어떤 특정한 정치적 당파에 가입해서는 안 된다.28) 조자신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교회는 정치적인 당파들과 조직들을 초월한다. 왜냐하면 그것의 목소리는 옳음과 그릇됨을 심판하는 것으로서 올바름을 지지하고 사악함을 반대하기 때문이다. 만약 정부가 사악으로 부패하였다면 교회는 가차 없이 그를 비판하고 그 잘못을 덮어주어서는 안 된다. 만약 정부가 그 정치적인 행위에서 선한 것을 하였다면 교회는 그를 칭찬하고 하나님께 그를 복 주시도록 청하여야 한다.”29) 그리고 어떠한 정치적 상황 속에서도 교회는 희생과 이타주의라는 예수의 원리를 실천하는 데 실패해서는 안 된다. 조자신의 정치적 보수주의는 그가 당시의 혁명적 분위기와 직면하였을 때 그에게 해소되지 않는 모순에 빠지게 하였다. 그는 일찍이 ‘전적인 참여’와 ‘전적인 무관심(분리)’ 사이에서 중용의 길을 유지하기 위해 힘껏 노력하였다. 그리하여 1930년대에 이르러서도 그는 여전히 “나는 정신에서는 혁명적이며, 실제 행동에서는 점진적인 정치 행보를 취하기로 결단하였다.”라고 말했다.30)
2) 정치에서의 도덕성 문제 중국의 기독교인들 중 정치적 참여를 기독교인의 시민적 의무의 일부로서 지지하였던 자들은 고조되고 있던 민족주의 사조를 환영하였다. 그들은 기독교가 민족주의운동과 결코 대립하지 않으며, 만약 중국인들이 분별 있는 민족주의를 실천하고자 한다면 가장 좋은 방법은 기독교 정신을 선양하고 초기 교회에서의 예수의 개혁을 본받는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열렬한 민족주의자들이 자신들의 정치적 목적의 실현을 위해 전력을 기울였을 때 중국의 기독교인들은 그들이 사용한 수단의 도덕성에 관심을 기울였다.
이론적으로 민족주의는 두 종류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좁은 의미에서의 민족주의’는 다른 민족들에게 피해를 입히면서 자신의 힘과 부를 구축하려고 하는 반외세주의의 한 형식이다. 이러한 형식의 민족주의는 쉽게 자기 국가의 경계를 넘어서 제국주의적 침략에로 자신을 확장시킨다.31) ‘넓은 의미에서의 민족주의’는 자신의 나라의 복지를 위해 충성하면서 동시에 모든 민족의 유익을 위해 자신의 자원과 전통을 발전시키는 데 헌신한다. 그것은 다른 민족들의 이익을 무시하지 않으며 국제관계에서 조화를 유지하기를 희망한다. 일반적인 중국 기독교인들은 넓은 의미에서의 민족주의는 기독교 신앙의 원리들과 부합하며 또한 중국의 미래 발전에 가장 적합하다고 믿었다.32)
그렇지만 서보겸의 관찰에 의하면 “중국에서의 현재의 운동은 비록 민족주의 운동이라고 불리지만, 실제로는 당시 유행하던 풍조의 영향을 받아서 형성된 것으로서 유럽과 미국의 낡고 낙후된 사상을 답습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33) 중국의 민족주의는 실천적으로 좁은 의미에서의 민족주의의 관점을 따라간 것이었기 때문에 기독교와 마찰은 불가피해 보였다. 연경대학의 외국인 교수 루치우스 샤핀 포터(Lucius Chapin Porter)가 말한 것처럼 그것은 우선순위에 관한 대립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는 “모든 중국 기독교인들 각자가 그에 대해 선택해야만 한다. 왜냐하면 대다수의 중국인들이 민족에 대한 충성을 첫 번째로 두고 그 다음에 개인적인 종교적 신념을 두 번째로 두기 때문이다.”34)라고 지적하였다. 중국의 기독교인들로 말하자면 그들은 실로 기독교인들이 아닌 이들에게 왜 자신들이 민족이 아닌 다른 것에 더 높은 충성을 바치면서 동시에 자신들이 애국주의자임을 주장하는 가에 대해 설명하기 위해 어려운 시간을 보냈다. 그들은 제국주의를 패배시키고 불평등조약들을 폐기하며 민족 자결권을 찾는다고 하는 민족주의운동의 목표에 대해 동의하였다. 그러나 기독교인들은 항상 민족주의자들을 향해 그들의 정치 행동의 도덕성 문제를 제기하였다. 서보겸이 비판한대로 “이 운동은 기껏해야 단지 강한 중국을 주장하는 것일 뿐이며, 그것이 얻기를 원하는 강함을 판단할 수 있는 기준에 대해서는 결코 연구하지 않는다.”35) 비록 교회의 기본적인 목표는 결코 정치적인 것이 아니며, 또한 교회는 어떠한 정치적 당파에도 가담하지 않아야 하지만 정치적 비판의 역할은 담당한다. 그와 관련하여 홍업은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성직자와 선교사로서 우리는 주님이 그렇게 하셨던 것처럼 정치적 활동들에 참여해서는 안 되지만, 우리는 또한 마땅히 우리 시대의 정치적 운동들에 대해 연구하고 이해해야만 한다. 그것들의 옳고 그름에 대해 우리 자신 나름의 신념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만약 우리의 판단이 현실(상황)을 개선하는 데 어떤 영향을 미칠 수 있다면, 우리의 의견을 표현하는 것을 피할 필요가 없다.36)
정치적 행동을 위한 ‘판단’과 ‘기준’을 강조하면서 기독교 지도자들은 정치에 도덕성을 공급하려는 시도를 하였다. 여일장(余日章)이 지적한 대로 “우리의 노력은 우리의 (정치적) 사상을 더 높은 정신적인 수준으로 높이는 데 있다.”37) 정치를 도덕화함에 있어 기독교의 근거는 무엇인가? 어떤 중국 기독교인들은 종교적인 배경이 어떠하든지 간에 인류는 모두 일종의 공동의 도덕의식(道德意識)을 가지고 있으며, 그러한 의식이야말로 민중들이 서로 협조하여 어떤 정치적 사명에 종사할 근거가 된다고 생각하였다. 나운염(羅運炎)의 관찰에 의하면, 인간의 마음에는 옳고 그름을 분별할 수 있는 일종의 정치적 정신이 내장되어 있으며 그것은 종교의 작용을 통해 배양되어 질 수 있다.38) 이러한 천부의 도덕 능력에 대한 믿음을 가지고 있었으므로 중국 기독교인들은 좁은 의미의 민족주의를 넓은 의미의 민족주의로 대체하기를 희망하였으며, 그에 따라 정의, 평등, 자유, 형제애의 원칙들이 정치적 참여를 위한 판단기준을 구성하였다. 민족주의자들이 민족의 이익을 다른 무엇보다 앞세우고 그러한 목적을 수단으로 앞세운 반면에, 기독교인들은 도덕적 원칙에 따라 일할 것을 주장하였으며 자신들의 방법이 장기적으로는 민족의 이익에 더 크고 길게 공헌하게 될 것이라고 확신하였다. 그러나 민족주의자들의 민족의 이익을 우선적인 고려 조건을 삼는 태도는 기독교를 반대하는 주요한 이유가 되었다.
중국의 기독교인들은 예수의 삶에서 자신들의 입장을 지지하는 증거를 찾으려 하였다. 예수의 애국심은 그의 전도사역과 동족 유대인들에 대한 연민에서 발견할 수 있다. 그는 복음 전파의 순서를 ‘먼저 유대인에게, 그 다음 이방인에게’로 규정하였다. 예수는 일생동안 구국을 위한 열심을 가졌으며, 그가 예루살렘을 위해 울었다는 것(눅 13:19)이야말로 바로 그가 얼마나 자신의 민족에 대해 강한 연민을 가지고 있었는가 하는 것을 보여준다.39) (그러나) 예수는 정치적인 목적들을 달성하기 위한 폭력의 사용을 거의 가르치지 않았다. 그가 비록 국가의 권익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있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가 민족적 권리와 종족적 특권을 절대적인 것으로 주장한 것은 결코 아니었다. 민족주의에 대한 그의 관점은 결코 다른 사람의 이익과 국제적인 협력을 무시하지는 않았다. 그의 민족주의는 구속적(救贖的) 개인주의와 협력적 국제주의에 의해 균형이 잡혀진 것이었다. 당시 교회 지도자 중 한 사람은 “그리스도는 민족주의가 절대적인 것이 아니며, 다른 주의-개인주의, 세계주의-와 서로 보완하면서 실행되어야 하는 것이라고 생각하였다.”라고 말했다.40) 많은 사람들은 기독교가 주장하는 ‘인류는 모두 한 형제’라는 가르침이 당시 중국에서 유행하고 있던 좁은 의미에서의 민족주의가 낳을 수 있는 병폐를 치유할 수 있을 것이라고 믿었다.
어떤 기독교인들은 민족주의 안의 자아 중심적 사상은 사실은 중국인의 정치 전통과도 위배되는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서보겸은 “그러한 민족주의는 아마도 중국 전통 문화의 내재적 정신을 현창하는 데 부족할 뿐 아니라 세계에 중국의 진정한 메시지와 공헌을 제공하기에도 부족하다.”라고 말했다.41) 《청년진보(靑年進步)》의 편집자 범자미(范子美)는 일찍이 공자의 정치 이론을 분석하면서, 이 중국 성인(聖人)의 정치적 비전은 민족(국가)의 경계를 넘어서 있으며, 세계 정치는 장차 ‘천하태평(天下太平)’의 최종적 단계에로 나아갈 것이라고 생각하였다.42) 실제의 정치적 실천에서는 두 종류의 통치 방법이 있을 수 있다. 즉, ‘왕자(王者, 聖人王)’의 통치가 도덕과 교육에 의지하여 시행된다면 ‘패자(覇者)’의 통치는 폭력과 강제에 의거하여 시행된다. 범자미는 공자의 ‘왕도(王道)’가 중화민국 건립 이래의 정치적 혼란을 해결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임에 틀림없다고 주장하였다. 호이곡(胡貽穀)도 유사한 노선을 취하여 중국의 고전적 이론을 운용하여 당시의 좁은 의미에서의 민족주의에 대항하려 하였다. 그는 중국의 정치적 전통 속에 도덕적 덕성들이 있으며 그것은 오늘날에도 보존되어야만 한다고 주장했다. 즉, 그는 중국이 오랜 세월동안 선(善)으로 악(惡)을 이긴다고 하는 종지(宗旨)에 따라, 이방 민족들과 우호적인 외교관계를 맺어 왔다고 주장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중국의 민족주의는 자기 자신에 엄격할 뿐 아니라 아울러 또한 충서(忠恕)의 도(道)로써 다른 사람들을 대하였다. 하늘과 땅 사이에 나라를 세움에 끝내 다른 나라들과 관계를 맺지 않을 수 없다. 중국은 옛날부터 왕도로써 나라를 다스렸으며, 세계 대동(大同)을 목표로 삼아 왔다.43)
이러한 정치 전통 중의 도덕적 우수성은 마땅히 보존되어야 하며, 당면하고 있는 근대 중국의 정치 현실에도 잘 적용될 수 있다는 것이다.
중국 국내의 치열한 애국주의의 강도를 조절하고 그것을 건설적인 방향에 연결하기 위해서 적지 않은 중국 기독교인들이 국제주의(國際主義)를 강조했다. 그들은 민족주의와 국제주의는 서로 보완적인 관계에 있다고 생각했다. 여일장은 국제주의는 국가들로 구성된 대가족 안에서 마땅히 있어야 할 보편적인 우의(友誼)를 가리키는 것이라 생각했다. 가족 안에서는 각 구성원들이 자신의 정체성을 잃지 않으면서도 또한 공동의 복지에 도움을 제공하며 또한 그로부터 유익을 얻기도 한다. 그와 똑같은 일이 서로에게 의지하지 않고는 아무도 존재할 수 없는 국제적인 가족관계에서도 발생해야만 한다. 그 때문에 여일장은 국제주의는 최상의 애국주의와 양립 가능할 뿐 아니라 또한 그것의 발전에 도움을 줄 수 있다고 깊이 확신하였다.44) 한 교회 지도자 또한 “기독교가 주장하는 국제적인 협력은 결코 중국이 부강한 나라가 되는 것을 방해하지 않는다. 오히려 중국으로 하여금 내적으로 강하게 만들 것이며, 중국의 국제적인 위상을 높여줄 것이다.”라고 말했다.45) 이러한 신념은 일부 기독교 공동체들이 오삼십참안 이후 열심히 외국 나라들을 향해 공감과 지지를 호소하도록 이끌었다. 사실 국제주의의 실천은 문학, 통상(通商), 산업, 과학 그리고 예술 분야에서는 근대 세계에서 이미 일반화한 것이었다. 그것은 한갓 꿈이 아니었으며 이미 하나의 현실이었다. 그러나 중국 인민들이 자신들의 눈앞에 펼쳐지던 정치적인 불일치의 시기에 그러한 견해를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먼저 반드시 ‘국제적인 심성’을 배양해야만 했다.46) 그리고 기독교는 이러한 임무에 가장 적합하였다. 왜냐하면 기독교의 정신은 곧 일종의 국제주의적 정신이었기 때문이다. 보편적인 왕국에 대한 예수의 가르침 위에 건립된 이러한 대동 관념의 종교 기초는 국제 정치 무대에서 보편적 통합의 정치를 실현하는 데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이다. 여일장이 말한 바와 같이 “오직 참된 민족주의자만이 참된 국제주의자가 될 수 있으며, 역으로 오직 참된 국제주의자만이 참된 민족주의자가 될 수 있다.”47) 일반의 교회 지도자들은 민족주의는 국제주의로 가는 데 거쳐야 할 필수적인 과정이며 그래서 국제주의는 민족주의의 최종목적지라고 믿었다.
그렇지만 이러한 국제 통합의 정치이론은 결코 민족주의자들의 환영을 받지 못했다. 그들의 사상에서 민족주의와 국제주의는 반대되는 말이었다. 기독교를 반대한 인사들의 상당수가 기독교가 말하는 국제주의는 국가에 위해를 가하는 국적 상실의 기만적 이론이라고 생각했다. 중국은 지금 외세의 침략에 맞서 싸우고 있는데 이러한 이론을 선전하는 것은 중국 인민들의 투쟁 정신을 잠식하는 것이요, 그것은 결국 민족(국가)의 미래를 팔아먹는 결과를 가져오고 말 것이다. 각 방면의 공격에 직면한 일부 교회 지도자들은 탈출구를 찾기 위해 노력하였다. 그들은 민족주의에 대한 손중산의 관점, 곧 민족주의를 국제주의의 전면에 세우고 이러한 순서가 국가 재건의 과업을 위해서는 가장 적절한 것이라는 생각을 끌어 들였다. 손중산은 ‘민족주의’에 관한 자신의 연설에서 국제주의를 당첨된 복권에 민족주의를 그것을 넣어둔 쿨리(coolie, 苦力)의 대나무 멜대에 비유하였다. 쿨리는 자신의 복권이 당첨되자 너무 흥분한 나머지 자신의 대나무 멜대를 바다에 던져버림으로써 그 둘을 다 잃어버렸으니, 복권뿐 아니라 생계의 도구마저 잃어버렸다는 것이다. 손중산은 다음과 같이 지적하였다. “우리는 세계주의(곧 국제주의)가 어디에서부터 발생하여 나왔는지를 알아야 한다. 그것은 민족주의로부터 발생하여 나온 것이다. 우리가 세계주의를 발전시키기 위해서는 먼저 민족주의를 공고하게 하여야만 한다. (……) 세계주의는 실제로는 민족주의 내부에 들어있다. 그것은 마치 쿨리의 당첨된 복권이 대나무 멜대 안에 들어있었던 것과 같다.”48) 만약 중국인들이 민족주의를 잊어버린다면 그들은 “국가의 상실과 종족(민족)의 소멸의 가능성에 직면하게 될 것이다.”49) “우리는 민족주의를 옹호하고 먼저 우리 자신의 통일을 이루어야 한다. 그런 뒤에 우리는 다른 이들을 고려하고 더 약한 자들, 작은 민족들이 공동의 투쟁에서 연합할 수 있도록 도울 수 있다. (……) 우리는 함께 외부 세력에 맞서 싸울 권리를 사용할 것이다. 그리고 외부 세력이 타도되고 이기적인 야망들이 사라지고 나면 그때 우리는 세계주의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을 것이다.”50)
당시 광주(廣州) 협화신학교(協和神學校) 교수이자 논리 정연한 기독교 변증가였던 초관해(招觀海)는 손중산의 견해에 십분 찬동하면서 먼저 국가(민족)가 자신의 질서를 찾아야 하며, 그런 다음에 국제주의를 말할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51) 예수의 사역도 유대 종족에서부터 시작하였다는 것이다. 민족주의자들이 민족주의에 배타(절대)적 우선성을 부여했던 반면에, 중국의 기독교인들은 선후의 문제로서 민족주의는 국제주의로 진전되어 가는 한 과정이며, 손중산의 가르침 또한 좁은 의미의 민족주의 사상은 아니었다고 생각하였다. 오뢰천은 기독교 안에는 민족주의와 국제주의 둘 다 발견된다고 생각하였다. 그것은 마치 불교에 대승불교와 소승불교가 있는 것과 같으니, 불교 신자들은 대승불교의 완미(完美)한 경계(境界)를 선망하면서도 소승불교의 교리 또한 무시할 수 없다는 것이다.52) 그는 국가(민족) 간의 경계가 남아 있는 한 우리는 국제적인 조화에 앞서 국가(민족)의 건설에 먼저 관심을 가져야만 한다고 주장했다. 그에 의하면 예수와 공자는 모두 세계 평화 이론을 가르쳤지만, 종교적인 애국주의와 정치적인 애국주의는 상당히 다르다. 정치적인 운동이 단지 일시적인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반면에, 종교는 생명력이 긴 문제들을 다룬다.53) 기독교의 애국주의는 좋은 시민을 길러 줄 것이니 그들은 국민혁명이 끝난 후에도 계속해서 국가에 공헌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쇠약한 중국은 반드시 먼저 강성해져야만 한다. 그렇게 힘의 균형이 이루어진 이후 그것을 기초로 하여 중국은 비로소 국제적인 평화 공존이라는 목표에 마음과 힘을 합할 수 있게 될 것이다.
미주 1) 李璜, 〈社會主義與宗敎〉, 《非宗敎論》, pp.1-6. 2) Ibid., p.4. 3) Ibid., p.6. 4) 詹渭, 〈基督敎與共産主義的中國社會改造觀〉, 《靑年進步》 94 (1926년 6월), pp.1-13. 5) Ibid., p.11. 6) 張仕章, 〈中國的基督敎與社會主義〉, pp.4-6. 7) 徐寶謙, 〈反基督敎運動與吾人今後應採之方針〉, p.5. 8) 梁均黙, 〈批評綺園的基督敎與共産主義〉, p.80. 9) Ibid., p.78. 10) 余牧人, 〈基督敎改造社會的方法〉, 《靑年進步》 66 (1923년 10월), p.32. 11) 汪兆翔, 〈基督敎對於最近時局當有的態度和措施〉, p.17. 12) Ibid., pp.17-18. 또한 cf. 王建猶, 〈基督敎與社會主義〉, 《生命月刊》 제6권 제5기 (1926년 2월), pp.1-6. 13) 余日章 (David Z. T. Yui), 〈基督敎與政治〉, 《靑年進步》 98 (1926년 12월), pp.8-13. 14) William Hung(Hung Wei-lien, 洪業), “Christianity and Politics”, Christian China 7.9 (1921년 7월), p.418. 15) 徐謙 (1871-1940)은 淸의 進士였으며, 翰林院에서 任職하였다. 民國 건립 이후 1912년 3월, 그는 공화국의 첫 번째 내각에서 監察院 副監察司의 직위를 받았는데 이는 곧 孫中山의 秘書長이었다. 후에 最高法院 院長에 임명되었다. 중국 개신교와 가톨릭이 北京에서 宗敎自由聯會를 설립했을 때 그는 會長으로 선출되었다. 1918년 그는 基督敎救國會의 創立을 주도하였다. 1919년의 파리평화회의에서 그는 山東省의 권익을 할양하는 조약에 조인하는 것을 반대하였다. 그는 孫中山이 공산주의자들과 동맹 맺는 것을 지지했으며, 1926년에서 1927년까지 武漢 정부의 領袖가 되었다. 16) 徐謙, 《基督敎救國主義刊行之三》 (上海: 基督敎救國會, 1920), pp.1-3. 그리고 그의 〈共和眞理〉, 《生命月刊》 제1권 제1기 (1919년 11월). 17) 《近來近十年來之宗敎思潮》, pp.401-405.에서 武昌의 반기독교 대중집회에서의 결의문들과 연설을 보라. 18) 徐謙, 《基督敎救國會成立之理由》 (上海: 基督敎救國會, 1920), pp.8-10. 19) 吳雷川, 〈滬案與基督敎的聯想〉, 《眞理週刊》 제3권 제13기 (1925년 6월 28일). 그의 또 다른 글 〈基督徒救國〉, 《眞理週刊》 제1권 제4기 (1923년 4월 22일)에서 吳雷川은 救國과 관련된 기독교 용어들에 대해 비판적이었다. 비기독교인들은 그것이 마치 오직 기독교에만 해당되는 것처럼 들리므로 ‘基督敎救國’이라는 말을 싫어할 수 있다는 것이다. ‘基督救國’이란 말도 또한 교회와 국가 사이의 분리를 주장하는 이들에게 불만을 사는 말이었다. 그래서 吳雷川은 두 가지 의미를 결합하여 ‘基督徒救國’이라는 말을 제안하였다. 20) 吳雷川, 〈國家主義與基督敎是否衝突?〉, 《生命月刊》 제5권 제4기 (1925년 1월), pp.4-5. 21) Cf. 吳雷川, 〈基督敎與革命〉, 《眞理與生命》 제5권 제4기 (1931년 2월), pp.4-5. 심지어 1930년대에도 吳雷川은 그의 저서 《基督敎與中國文化》에서 보이는 바와 같이 기독교와 혁명 사이의 관계에 대해 여전히 동일한 태도를 보유하고 있었다. 22) 孫科, 〈國民黨與基督敎〉, 《生命月刊》 제6권 제3기 (1926년 2월), p.2. 23) 張之江, 〈基督敎與國民革命〉, 《文社月刊》 제3권 제3책 (1928년 1월)을 보라. 24) <역주> 洪業(1893-1980) 號는 煨莲(畏憐,William), 名은 正繼,字는 鹿岑. 福建侯官(今閩侯)人. 당대의 걸출한 史學者이자 教育家이다, 1910년에서 1915년 사이에 鶴齡 英華書院에서 공부하였다. 1912년 부친 洪曦가 별세한 뒤에 基督教을 믿었다. 1915년 미국에 유학을 가서 1917년 오하이오주 韋斯良大學을 졸업하고, 1919년 콜롬비아대학에서 석사학위를 취득했다. 1920년에는 콜롬비아대학 協和神學院을 졸업,神學士를 취득했다. 뒤에 역사학을 전공하였으나 마치지는 못했다. 1923년 귀국 후 燕京大學에서 가르쳤다. 哈佛燕京學社引得編輯處를 主任했다. 1946년 봄에 미국으로 건거나 가르쳤으며 후에 미국에 정착하였다. 1948년에서 1968년까지 하버드대학 東亞語文系 研究員을 겸임하였으며, 1980년 12월 22일 미국에서 별세하였다. 25) William Hung(洪業), “Christianity and Politics”, pp.420-421.을 보라. 26) 余日章 (David Z. T. Yui), 〈基督敎與政治〉, pp.9-10. 27) Ibid., p.13. 28) 趙紫宸, 〈基督敎與政治〉, 《文社月刊》 제3권 제2책 (1927년 12월), pp.13-15. 29) Ibid., p.14. 30) 趙紫宸, 〈福音的小著解〉, 《眞理與生命》 제8권 제8기 (1935년 1월). 31) 胡貽穀 (Y. K. Woo), 〈中國的國家主義〉, 《靑年進步》 93 (1926년 7월), pp.3-5. 참조. 32) 余日章, 〈國家主義與國際主義〉, 《靑年進步》 99 (1927년 1월), pp.4-5, 또한 Lucius Porter, “Nationalism”, 《眞理與生命》제7권 제1기 (1932년 10월). 33) Hsu Pao-ch'ien(徐寶謙), “Christianity and Nationalism--a Plea for the Objective Attitude”, 《生命月刊》 제5권 제10기 (1925년 1월), p.3. 34) Lucius Porter, “Nationalism”, 《眞理與生命》 제7권 제1기 (1932년 10월), p.7. 35) Hsu Pao-ch'ien(徐寶謙), “Christianity and Nationalism--a Plea for the Objective Attitude”, p.2. 36) William Hung, “Christianity and Politics”, p.421. 37) 余日章, 〈基督敎與政治〉, p.13. 38) 羅雲炎, 〈傳敎條約與敎會之關係〉, pp.29-30. 39) 招觀海, 〈基督的國家觀念〉, 《靑年進步》 87 (1925년 11월), PP.31-34. 또한 徐寶謙, 〈再質國家主義者〉, 《眞理週刊》 제3권 제24기 (1925년 9월 13일). 40) 招觀海, 〈基督的國家觀念〉, p.34. 또한 余日章, 〈基督敎與政治〉, p12, 그리고 Frank Lee, “Christianity and Internationalism”, The Chinese Recorder 56 (1925년 6월), p.362. 등에서의 논의를 보라. 41) Hsu Pao-ch’ien(徐寶謙), “Christianity and Nationalism--a Plea for the Objective Attitude”, p.3. 42) 范子美, 〈孔子的政治觀〉, 《靑年進步》 96 (1926년 10월), pp.31-36. 43) 胡貽穀, 〈中國的國家主義〉, p.5. 44) 余日章, 〈國家主義與國際主義〉, pp.4-5. 45) Frank Lee, “Christianity and Internationalism”, p.361. 46) 巢坤霖, 〈愛國主義, 國際主義和基督敎會〉, 《生命月刊》 제3권 제1기 (1922년 9월) 참조. 47) 余日章, 〈國家主義與國際主義〉, p.5. Cf. 招觀海, 〈基督的國家觀念〉, pp.33-34.의 견해. 어떤 기독교 변증가들은 유교의 정치적 신조가 중국에서 국제주의를 선양하는 데 가장 적합하다고 지적했다. cf. 范子美, 〈孔子的政治觀〉, 그리고 胡貽穀, 〈中國的國家主義〉. 48) 孫中山, 《三民主義》, 臺灣正中書局 1976년 제19판, pp.45-46. trans. by F. W. Price and ed. by L. T. Ch’en(Shanghai: China Committee, Institute of Pacific Relations, 1927), p.75. 49) Ibid., p.76. 50) Ibid. 51) 招觀海, 〈基督的國家觀念〉, pp.35-36에서의 논의를 참고하라. <역주> 招觀海(1886-1968) 廣東 南海人이다. 1914년 嶺南大學附中을 졸업하고 叢桂堂의 파견을 받아 미국에 유학가서 神學을 공부하였다. 1919년 太平洋神學院과 예일대학교에서 神學博士學位를 취득하여 廣東교회에서 최초로 박사학위를 취득한 중국인이 되었다. 1919년 楊蘘甫 牧師가 별세하자 그 다음 해 부름을 받고 귀국하여 叢桂堂의 會務를 관정하였으며 아울러 牧師에 按立되었다. 동시에 中華基督教會 廣東大會(廣協會)의 조직에 참여하여 教會의 ‘本色化’를 촉진하였다. 1930년 廣州協和神學院의 교수가 되었다. 1945年 이후 惠愛堂 教職을 맡았으며, 아울러 中華基督教會 廣東協會幹事兼執行委員會 常務委員이 되었다. 中華人民共和國이 成立한 뒤에는 즉시 ‘中國基督教抗美援朝三自(自治、自傳、自養)革新運動’에 참여하였다. 그는 中國基督教〈三自革新宣言〉의 40인의 發起人 중 한 사람이었으며, 아울러 中國基督教 三自愛國運動委員會 委員에 피선되었다. 1950年에는 廣州市 第一屆人民代表에 당선되었다. 廣州市基督教三自愛國運動委員會가 성립한 뒤에는 ‘三自會’의 《革新》誌에 많은 詩詞文章을 발표하여 三自愛國運動에 대해 擁護하고 新中國에 대한 자신의 애정을 표시하였다. 그러나 1957년 右派로 몰렸다가 1960년 명예를 회복하여 계속 ‘三自愛國運動’에 투신하였다. 1968년 병으로 별세하였다. 52) 吳雷川, 〈反基督敎運動與國家主義〉, 《眞理週刊》 제3권 제39기 (1925년 12월 17일). 53) 吳雷川, 〈再論基督敎在中國的前途〉, 《生命月刊》 제5권 제10기 (1925년 7월), p.2.
사진 | 바이두 문석윤 | 경희대학교 철학과 교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