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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12.3 통권 208호     필자 : 문석윤 프린트   이메일 
[오늘의 중국교회]
중국 신학의 건설-기독교 신앙의 본색화 문제
-1920년대 반(反)기독교운동에 대한 중국교회의 대응-

지난 목차


서론


Ⅰ. 종교 문제

1. 종교에 대한 물음: 중국에 종교가 필요한가?
  1) 감정을 종교의 기원으로 보는 입장
  2) 초월의식을 종교의 기원으로 보는 입장
  3) 구원의 길로서의 과학
2. 기독교의 대안: 중국은 어떤 종교를 필요로 하는가
  1) 신문화운동과 기독교
  2) 중국 기독교인들은 신문화운동의 도전에 대해 어떻게 반응했는가
  3) 새로운 종교(新宗敎)의 건설
   <‘종교 문제’에 대한 당시 몇몇 교회 지도자들의 논점>
   <신종교 건립의 배경>
   <신종교와 과학 사조의 관계>
   <신종교와 민주 정신의 관계>


Ⅱ. 그리스도 중심의 메시지

 1. 근대 기독교 복음 메시지에서의 변화
 2. 그리스도 중심의 변증론(호교신학)의 등장
  1) 예수의 인성(人性)과 그의 인격
  2) 예수의 신성(神性)과 그 행한 초자연적인 기적들
  3) 예수의 사역
  4) 예수의 가르침의 현실적 합성
 3. 신학적 평가



III. 기독교 신앙의 본색화 문제1)


1. 본색화를 위한 노력을 촉진했던 힘들

신학의 본색화(本色化, indigenization)2)는 복음전도(evangelism) 사역에서 본질적인 문제이다. 선교사가 그리스도의 복음을 그의 청중에게 알리고자 할 때 양쪽 진영의 심리, 언어, 문화가 포함된 본색화의 프로세스가 시작된다. 서구의 선교사들은 오랜 세월 동안 기독교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온 서양 문화 속에서 성장하였으므로 그 내용과 표현이 자연스럽게 서양의 색채를 농후하게 띠고 있었으며, 그들의 생활 습관 또한 비(非)기독교 국가인 본지인(本地人)들에게는 낯선 것이었다. 선교현장에 그가 있다는 사실 자체 그리고 그의 삶의 스타일과 가치들은 종종, 정당하게 혹은 부당하게 그가 주장하는 종교와 동일시된다. 이는 불가피하게 기독교 메시지에 대해 현지인들을 노하게 하는 원인이 되는 낯설음을 제공한다. 낯설음을 싫어하는 것이 인간 본성의 구성 요소로 여겨질 수 있다면 그러한 싫음은 중국인들 사이에서도 쉽게 발견될 수 있었다. 중국선교사(宣敎史)에서 본다면 중국인들은 이 외래의 종교에 대해 그다지 흥미를 가지지 않았으며 심지어는 반감과 다툼을 일으켰다. 그 중요한 원인은 중서(中西) 문화의 충돌로 말미암은 것이었다.

사실 본색화의 노력은 일찍이 명대(明代)에 중국에 온 천주교 예수회 선교사들에 의해 적극진행된 바 있다. 그들은 중국의 자민족중심주의에 대해 민감하게 반응하였고, 문화 교류가 복음 사역의 발전에 크게 도움이 되리라는 것을 알았으며 그래서 적응적인 접근 태도를 취하였다.3) 그들은 중국 사회의 사대부 계급과 교유하였으며 중국옷을 입었고 중국말을 하였다. 또한 자신들의 메시지에 대해 중국인들이 확신을 가질 수 있게 하기 위해 서구의 진보된 과학 지식을 이용하였다. 비록 후에 ‘전례(典禮)논쟁[儀禮之爭]’이 발생하여4) 다년간 쌓아 온 예수회의 선교 효과들을 파괴하였지만 그들의 선교가 얼마나 성공적이었던가 하는 것은 논외로 하더라도, 그들이 중국 문인들의 경청과 칭송을 얻었던 것은 부인할 수 없으며 그들의 고심에 찬 노력은 우리들이 오늘날 본색신학을 연구하는 데 있어 배울만한 점을 적지 않게 제공하여 준다.

중국에서의 기독교 전파의 역사를 종관(縱觀)하여 볼 때 1920년대는 중국에서의 선교 사업의 발전이 고조에 이른 때로서 본색교회운동은 이 시기에 더욱 광범위한 지지와 찬조를 얻었다. 신학사상에서 말한다면 이 시기 이전에는 본색신학 관련 저작들이 많지 않았으며 소수의 사람들만이 중국의 전통사상에 근거하여 기독교의 도리를 표현해 낼 수 있었다. 교회에서 발언하는 사람들은 주로 서양의 선교사들이었으며, 그들이 전파한 복음은 서양인들이 인식하는 그리스도이기에 인본(人本)을 중시하고 실제(實際)를 숭상하는 중국인들의 마음속에 뿌리를 내릴 수 없었다. 그러나 20년대에 이러한 상황에 변화가 일어났다. 즉 본색교회운동에 계기를 주었던 일련의 중요한 사건들이 이 시기에 일어났다. 소년중국학회(少年中國學會)에서 종교 문제에 대한 토론이 일어났던 이래로 기독교는 점점 더 교육받은 중국인들의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1922년에 폭발한 반(反)기독교운동은 기독교를 한편으로 유명하게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는 악명 높게 만들었다. 성정이(誠靜怡)는 다음과 같은 말로 당시의 상황을 묘사했다.

한때 기독교는 중국 지식인들에 의해서는 대체로 무시되었다. 그들의 무관심은 일반인들 사이에 기독교 신앙이 전파되는 데 진정한 장애 요소를 이루고 있었다. 오늘날 상황은 바뀌었다. 기독교는 이전에 비해서 한편으로는 더 인정받고 있으며 한편으로는 더 비난받고 있다. 그것은 중국에서 가장 선호하는 종교이자, 동시에 가장 미움 받는 종교가 되어 가고 있다. 중국의 가장 지적인 아들과 딸들이 그리스도에 대해 충성을 선언하는 반면, 다른 한편에서는 최고 지성인들이 중국 연안 밖으로 그리스도 종교를 추방하기 위해 자신들의 최선을 다하고 있다.5)
 

의화단의 난이 진압된 이후 정부와 국민들은 서구 선교사들에 대해 어느 정도 존중하게 되었다. 중국교회는 짧은 성장의 시기를 만끽하였으며 그 등록 교인들은 빠르고 놀랍게 증가하였다.6) 비록 서구 사상들이 대중화하였으나 대부분의 중국 지식인들은 외국 종교에 대해서는 여전히 무관심하거나 적대적이었다. 기독교의 메시지는 중국인들의 인본적(人本的)이고 실용적인 정신에는 거의 호소력이 없었다.7) 그렇지만 반기독교운동의 시기 동안 기독교에 대한 그들의 반대는 그것이 어떤 동기 혹은 배경에서 나온 것이든 그들로 하여금 그 종교 곧 그것의 교리들과 조직에 대해 연구할 것을 요구했다. 대부분의 중국 기독교인들은 이것이 그 이전의 부정적 초연함에 비해 기독교 신앙이 전파되는 데 오히려 더 유익하다고 생각하였다. 어떤 이들은 그들의 반대를 바람직하지 못한 요소들로부터 교회를 정화하고 그것의 내적 실패들을 치유하는 기회로 받아들였다. 반기독교운동들은 중국 기독교인들이 기독교 신앙과 근대 중국에서 그것의 적합성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하는 촉매의 역할을 하였다.8) 1922년 5월에 열린 전국기독교회의(全國基督敎會議)는 그러한 신학적 반성을 잘 표현해주는 것으로서, 중국교회가 본색신학 방면에서 하나의 새로운 발전을 시작하였음을 상징하고 있다.
 

이때의 전국기독교회의는 중국교회 역사상에서 중요한 하나의 이정표가 되었다.9) 총 1,185인의 참가자들 중 반수 이상이 중국인이었다. 이 회의는 지난 50년간 거행된 전국적인 규모의 회의들 가운데서 중국 교인들이 가장 많이 참여한 회의였다.10) 회의의 주제는 다름 아닌 ‘중국교회’였다. 중국교회는 수년간 종파주의(宗派主義)로 말미암아 사분오열(四分五裂)되었고, 또한 교회의 중요한 일들이 서양선교사들에 의해 결정되었다. 중국교회는 외국 조직이라는 낙인과 종파주의의 혼란으로부터 고통을 받았다. 당시 서구교회에서의 근본주의(基要派, the fundamentalists)와 자유주의(自由派, the modernists) 사이의 신학적 대립이 또한 중국교회에서도 재현되고 있었다. 이 회의에서 언급된 핵심적인 내용은 이러한 시대적 상황에 대한 예언자적 메아리였다. 그것은 곧 본색교회를 건립하는 데서의 연합(unity)과 협력에 대한 열망이었다. 하나의 ‘통합되고 협력적인 교회’의 이상(理想)이 전체 회의에서 지지되었으며 출석한 교회의 대표들은 한결같이 단결하고 일치하는 것이야말로 미래 본색교회의 발전 방향이라는 것을 승인하였다.
 

그 신학적 측면에서 회의의 현저한 주장은 “기독교의 믿음은 기독교(회) 연합의 공동 표현에의 길을 확보하고 그것을 더 명료하게 드러낼 수 있게 표현되어야 한다.”는 것이었다.11) 신학사상에서 대부분의 대표들은 모두 교회의 행정 조직이 본색화하여야 할 뿐 아니라 기독교 신앙을 해석하고 전파하는 사역도 또한 본색화하여야 한다는 데 동의하였다. 유정방(劉廷芳)은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목전의 국내의 급격하게 변화하는 국면은 바로 본색교회를 건립하여 본색화 된 기독교를 전파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본색화한 기독교의 메시지는 전통교회와 여전히 연계되어 있지만 또한 동시에 중국 민족의 정신적 유산에 대해서도 고려한다.”12) 당시의 정치적이고 사회적으로 불안정한 상황 속에서 이 회의는 중국 사회에 대해 중국교회가 장차 힘을 합하여 민족의 발전과 재건 사업에 참여할 것이라고 하는 일종의 기독교 연합 선언을 한 것이라고 볼 수도 있다. 《교무잡지(敎務雜誌, The Chinese Recorder)》의 편집인 프랭크 롤린슨(Frank Rawlinson, 樂靈生)은 “가장 위대한 기독교 변증은 1922년의 중국교회이다.”라고 말하였다.13) 문제는 이러한 교회의 자성과 변증이 1920년대의 국가주의14) 사조의 충격을 견뎌낼 수 있었을까 라고 하는 것이다.
 

오사(五四)운동이 발생한 후부터 열강의 국가사상이 전국에 가득하였다. 청년 지식인들은 가슴 가득 열성을 가지고 모두 국가의 행복을 위해 노력하기 원했다. 비록 그들 각자가 실제 정치에 참여하는 방식은 다양하였지만 국가(민족)을 구원하고자 하는 공동의 목적에 의해 그 정신에서는 연합하였다.15) 그러나 그들은 내적으로는 군벌과 정부의 관료주의에 의해 그리고 외적으로는 외국의 제국주의에 의해 낙담하였다. 이 기간 동안 국가에 이롭지 못하거나 사회의 중건에 방해가 된다는 혐의만 있다면 그 어떠한 것도 매우 쉽게 민중들의 공적(公敵)으로 지목되어 비평과 공격을 받았다. 정치집단들은 더욱 기회를 잡고 인민을 선동하였으며 전복활동을 진행하여 자신들의 목적을 달성하고자 하였다. 20년대 반기독교운동의 폭발은 사실상 이러한 불안정한 시국과 밀접한 관계를 가진 것이었다. 1924년 6월에 이르러 북경에서 ‘반제국주의운동’ 선언이 나타나 전국적인 호응을 얻었으며, 오래지 않아 ‘반제국주의운동대연맹(反帝國主義運動大聯盟)’이 정식으로 창립되었다. 그것이 공언한 목적은 두 가지였다.16) 즉 첫째, 열강과 중국 사이에 맺은 일체의 불평등조약들을 거부한다. 둘째, 세계의 다른 억압받는 민족들과 연합하여 함께 제국주의에 대항한다. 이에 뒤이어 1년 내에 많은 수의 애국적 단체들이 분분하게 일어나 구국(救國)과 구민(救民)의 대열에 참여하였다. 국가주의단체연합회(國家主義團體聯合會)도 이 시기에 출현하여 다음과 같은 선언문을 발표하였다.

국가주의는 다른 것이 아니라 곧 한 나라의 인민이 공생(共生) 공영(共榮)하던 과거의 역사에 뿌리를 두고 영구히 자존(自存) 자구(自救)할 결심을 지니는 것이다. 한 나라의 주권은 외인(外人)의 침탈을 용인하지 않으며, 한 나라의 경제는 외인의 탈취를 용인하지 않으며, 한 나라의 문화는 외인의 간섭을 용인하지 않는다. 침탈하고 탈취하며 간섭하는 자가 있다면 전국의 인민들은 반드시 단결하여 사력을 다해 그에 저항해야 한다. 우리들의 오늘의 국가주의는 이러한 원칙에 역사에 뿌리를 두고  있다.17)


1925년 매우 불행한 사태가 상해(上海)에서 발생하였으니 곧 ‘오삼십참살안(五卅慘殺案, 5월 30일 살해사건)’이다.18) 이때 전 국가가 반(反)제국주의 정서의 열기에 휩싸였다. 20년대 국가주의운동이 최고조에 이르렀다. 인민들의 공분(公憤)과 서양에 대한 적개심이 다시 한 번 격동하게 되었으며 일시에 제지할 수 없이 퍼져나갔다. 그러한 격동과 충격의 시기에 중국교회는 어디에 서 있었던가? 국가주의운동은 실로 반기독교운동을 지지하는 주요한 힘이었고 중국교회는 이제 매우 심각한 위험에 처하게 되었다. 교회에 대한 영향력이 가장 극렬했던 것은 곧 대략 1924년 어간에 발생했던 교육주권회수운동이었다. 교회가 운영하던 교육 사업들은 제국주의의 위장 도구일 뿐으로 정부 교육 당국의 권리를 탈취하고 오랜 세월 이어오던 중국의 문화적 유산을 폐기하였다는 비난을 받았다. 이러한 일체의 비난과 공격 아래에서 교회는 당장 내일을 장담할 수 없는 매우 위급한 처지에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한 상황은 중국 기독교인들로 하여금 민족의 삶에 대해 기독교가 무슨 연관성과 의미가 있는 가를 검토하도록 압박하였으며 본색화 작업에 자극을 주었다. 교회 지도자들은 이러한 시대의 핍박 속에서 용감하게 일어나 기독교 신앙을 변호하는 언론 매체들을 통해 자신들의 견해를 분분하게 발표하였다. 그들은 중국인의 안목으로 당시의 정치적이고 사회적인 문제들에 대해서 기독교 신앙의 본질과 그것이 중국 문화에 대해 가지는 연관성과 의미를 검토하였다.

복음이 선교사를 통해 중국에 들어왔을 때 중국인들은 이미 자신의 유구한 문화 전통과 가치 관념을 가지고 있었다. 사실 선교사들이 전달한 복음 메시지를 자신들에 맞게 토착적으로 해석하고 응용할 책임은 중국인들에게 있었다. 선교사가 그들을 위해 그것을 대신 해 줄 수는 없었다. 왜냐하면 선교사는 그들과는 다른 문화적 배경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이다. 또한 선교사가 복음전파를 자신의 사업으로 삼아 그들 자신의 신학사상을 본지인(本地人)들에게 강요해서도 안 되는 것이었다. 서방의 기독교 신앙은 오랜 세월 그 지역의 문화·역사와 한 몸을 이루어 왔으며 그들 사상의 방법과 표현 형식이 이미 복음 메시지와 밀접하게 결합되어 있어서 분리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서구의 기독교 신학은 그러한 서구적 틀과 표현과 분리할 수 없으므로 중국인들에게 낯설게 느껴졌다. 서구 신학들은 자신의 구조와 논리에서 많은 부분 아리스토텔레스와 플라톤의 철학에 빚지고 있으며, 후대의 세속적인 사상가들 즉 칸트와 헤겔, 라이프니츠 같은 이들도 기독교 신앙에 심대한 영향을 주었다. 반면 중국인들은 그들 자신의 세계의 산물이며, 그들에게 복음 메시지가 의미 있게 전달되기 위해서는 그들의 언어 문자와 사상 구조를 통과해야만 한다. 많은 수의 현대 중국 기독교 지도자들은 중국교회가 서구로부터 경제적으로 그리고 행정상으로 독립해야 할 뿐 아니라, 신학사상에서도 서구에의 의존을 벗어버려야 하며 그때 비로소 새롭고 훌륭한 본색화를 창조해 낼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성정이는 기독교전국대회의 개막 연설에서 중국교회가 당면한 가장 심각한 문제는 경제적으로 외국교회의 지원에 의지하고 있다는 점이 아니라 사상과 조직과 사역 방법상에서 여전히 외국인들의 지도에 의지하고 있다는 점이라고 지적하였다.19)

하나님은 직접 혹은 간접적으로 모든 문명 속에서 일하고 계시므로 복음이 문화의 모든 것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그렇지만 많은 선교사들은 의식적으로 혹은 무의식적으로 그리스도의 복음 대신에 서구의 문화를 설교한다.20) 복음은 특정한 사회적 환경과 개인적 체험 속에서 이해되어야 하며 외부로부터 부가된 외국 이론으로서 이해되어서는 안 된다. 본색신학은 결코 외래의 이론을 기계적으로 본지인의 머릿속에 이식하는 것이 아니다. 그보다는 특정한 맥락 속에서 그리고 그것으로부터 제기된 문제들과 대화하는 가운데 발전된 신학이다. 즉 그것은 일정한 구체적 환경 속에서 일정한 구체적 문제에 대하여 복음 메시지(의 답변)가 자연스럽게 발전하고 성장하게 하는 것이다. 이렇게 기독교 신앙이 현지에 어떻게 적응할 수 있을지를 찾는 시도들이야 말로 신도들로 하여금 본색신학 사업에 종사하게 하는 추동력이다.

현대적 문제들에 대한 기독교의 연관성 혹은 적합성에 대한 탐색은 1920년대 중국 기독교도들의 본색화 작업을 지탱한 기본적인 힘이었다. 당시의 가장 대표적인 본색신학 사업은 북경증도단(北京證道團)의 창설과 그것의 주 기관지 《생명월간(生命月刊)》의 창간이었다. 그들은 항상 근대 과학과 철학의 이론을 이용하여 복음 메시지를 전달하려고 노력하였다. 그들은 기독교의 원리가 “포괄하지 못하는 것은 없으며, 시간적 제한 없이 영원하다”라고 확신하였다. 이미 기독교는 보편적 종교이며 따라서 그것의 원칙은 반드시 중국 사회의 역사적 상황 속에서도 구체적으로 적용될 수 있다고 믿었다. 증도단의 성명 중에는 “기독교의 발전과 전파는 다양한 나라들과 다양한 상황들 속에서 동일할 수는 없다. 그러므로 중국 민족은 기독교에 대해 다른 민족들과는 다른 해석을 가져야만 한다.”라고 되어 있다.21) 아시아교회는 자동적으로 그리고 자발적으로 그들 자신의 신학적 방향, 우선성과 강조점을 결정해야만 하며 그것은 서구 교회와 완전히 다를 수도 있다. 1920년대 중국교회의 지배적인 문제는 구국(救國)의 문제이었으며 결코 성경에 오류가 있는가 아닌가 하는 문제가 아니었다.

하지만 교회 내의 대부분의 신도들은 본색교회운동과 본색신학 사업에 대해서 잘 알지 못하였으며 관심 또한 많지 않았다. 교회 생활의 연륜이 쌓여가면서 많은 사람들이 이미 서양선교사들이 그들에게 전해준 것들에 익숙해져 있었다. 즉 종파주의적 신앙 방식과 성례(聖禮)의 의식(儀式)들, 신학적(神學的) 관점과 치회(治會)의 방법들을 습관적으로 받아들였다. 그리고 더 나아가 선교사들이 그들에게 사회적 위신과 전통적 가치의 상징들이라고 가르쳤던 것들은 받아들였으며, 어떤 이들은 자신들이 선교사와 동일하게 여겨지는 것을 영광스러운 일로 여겼다. 다만 소수의 개방적 신학사상을 지닌 지식인들만이 본색신학을 연구 모색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그들 중 일부는 1925년 기독교문사(基督敎文社)를 조직하여 본색 문학의 창작에 종사하였다. 그것은 기독교의 시각으로부터 민족 문제들을 다루고자 하였던 문예적 노력이었다. 거기에서 펴낸 잡지 《문사월간(文社月刊)》은 다음과 같은 목적들이 있음을 천명했다. (1) 당대의 생활을 개혁하고 미래의 새로운 삶을 개발한다. (2) 이 세대에 새로운 예수를 제시한다. (3) 진리 그 자체를 위해 진리를 표명한다. (4) 본색교회를 지원한다.22) 이 잡지가 본색화한 중국 신앙을 창조하는 데 끼친 기여는 결코 적지 않았다.

본색교회운동은 1920년대 중국교회의 주제곡(主題曲)이었다. 지금까지 서술한 것은 이 운동을 낳은 몇 가지 중요한 요인들을 지적하는 것이었다. 이 장(章, 제3장)의 목적은 역사적 각도로부터 이 시기 본색신학의 사조(思潮)를 분석하고 아울러 몇몇 대표적인 중국 기독교인들이 어떻게 서양으로부터 전래된 기독교 신앙과 전통 문화의 관계를 구축하여 갔는가를 연구하고자 하는 데 있다. 그렇다면 도대체 본색신학이란 무엇이었는가?

2. 오사운동 시기 지식인들의 전통문화에 대한 태도들

기독교는 19세기 이래 서구로부터 중국에 전해진 여러 가지 것들 중 하나일 뿐이다. 상인들과 외교관들 그리고 선교사들은 이 노후한 나라에서 각자의 야심을 실현하기 위해 노력하면서 이러 저러한 방식으로 중국 인민들에게 새로운 문화적인 자극을 주었다. 문헌을 통한 서구 사상들의 소개와 해외로부터의 중국유학생들의 귀국 또한 중국과 서양 사이의 문화적인 대면과 동화의 과정에 기여하였다.

본색화 문제는 동양과 서양 사이의 문화적 관계라고 하는 보다 넓은 맥락에서 살펴보아야 한다. 신학의 본색화 문제를 논하기 전에 먼저 오사운동 기간에 일반 중국 지식인들의 중국 전통 문화에 대한 견해를 알아보는 것이 도움이 될 것이며 반드시 필요할 것이다. 오사신문화운동은 중국 역사상 보기 드물게 지식인들이 적극 참여한 혁명운동이었다. 당시 중국 청년들은 서구화를 통해 쇠망해 가던 국가의 운명을 구해보고자 시도하였다. 그들은 전통의 가치 관념을 타도하고 서방의 과학과 기술을 적극 소개하고자 하였다. 중서(中西) 문화의 관계상에서 전통문화에 대해 중국 지식인들이 취한 노선은 적어도 세 방면으로 나뉘어졌다.

첫째 노선은 서화(西化, 서구화)를 강조하는 것이다. 민국(民國) 초기에 유교의 이념과 실천은 강력하게 공격 받았다. 진독수(陳獨秀)는 전통에 대항한 우상 파괴자들 중 지도적 인물이었다. 진독수는 《신청년(新靑年)》에 실린 자신의 도발적인 논문에서23) 중국이 서구 사회의 발전에 비해 낙후된 주된 원인은 사유 방식의 차이에 있다고 주장했다. 사유 방식은 사회적 행동 양식과 가치관을 결정하기 때문이다. 그에 의하면 중국의 전통적인 사유 방법은 서구의 그것보다 열등하며, 유교 윤리는 전통적인 봉건주의 산물로서 민주 사회와는 양립할 수 없다. 사람들의 삶을 지배해온 효(孝)의 체제는 독재체제를 영속화한다. 그것은 근대 국가에는 맞지 않은 것이므로 모두 폐기되어야 마땅하다. 진독수에게 중국을 근대화할 수 있는 유일한 희망은 싸이씨(賽氏, Mr. Science, 과학)와 더씨(德氏, Mr. Democracy, 민주주의)를 소개하는 것이었다.24) 나라를 새롭게 하는 것은 민족이 어느 정도까지 서구적인 방식을 채택할 수 있느냐에 달려 있다는 것이다.

‘전반 서화(total westernization)’의 가장 고명한 지지자는 북경대학 교수 호적(胡適)이었다. 그의 견해에 따르면 ‘동양 문화는 정신적이고 반면 서양 문화는 물질적이다’라는 주장은 단지 몰락하는 문명의 체면을 살리려는 억지 주장에 불과하다. 왜냐하면 “근대의 서구 문명은 결코 물질적인 문명이 아니며, 차라리 관념적이며 정신적이기” 때문이다.25) 동양과 서양 문명 사이의 차이는 인력거와 자동차의 차이와 같아서 중국은 근대화를 향한 길에서 수 마일이나 뒤처져 있다. 호적은 중국 문화가 자신의 독자적인 특성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은 인정했다. 그러나 독자성이 반드시 미덕인 것은 아니다. 중국인들은 과학과 정치에서 뿐만 아니라 심지어 도덕과 예술에서도 서구인들에 비해 열등하다. ‘서양으로 가자(往西跑)’라고 하는 것이 호적의 문화적 관점을 특징 지워 주는 구호였다.26) 호적이 언급한 바와 같이 “동양 문명의 가장 현저한 특징이 자기만족이라면 근대 문명의 특징은 불만족이다.”27) 서양 민족들의 야심은 가난과 문맹이라는 악과의 싸움에서 그리고 삶의 물질적 조건을 향상시킴에서 그들의 문명이 성공한 사실을 잘 설명해 준다. 그는 중국의 과학화와 민주화가 미래에는 확실히 이루어 질 것이라고 확신했다.28)

둘째 노선은 전통(傳統)에 열심을 내는 것이었다. 즉 전면적인 서구화를 주장하는 다른 한 편에서 유교 문화를 옹호하고 서구에 대해서는 비교적 낮게 평가하는 학자들이 있었다. 그들의 표어는 ‘동양으로 가자’였다. 양수명(梁漱溟)이 그 대표적인 인물이다. 그는 자신의 철학적인 저작 《동서 문화와 철학(東西文化及其哲學)》에서 세계 문화의 미래는 중국 문화의 부흥일 것이라는 자신의 기대를 표명하였다. 그에게 서구 문화는 합리성(reason)과 실용성(utility)에 기초한, 과학과 민주주의라고 하는 ‘빛나는 불빛들’이라는 말로 잘 설명된다. 그렇지만 이러한 두 가지 전제(곧 합리성과 실용성)는 물질적인 성취는 이루었으나 그에 사로잡혀 정신적으로는 궁핍에 시달리는 그러한 문화를 낳고 말았다. 서양에서의 삶은 이제 비인간화에 의해 위협받고 있다.29) 양수명은 같은 책에서 서양과 동양의 본질적 차이를 설명하려는 의도를 가지고, 세계 문명이 세 개의 연속적인 단계로 진전해 감을 분석했다. 서양 문화는 문화 운동의 첫 번째 단계에 있다. 그것은 생(生)을 향한 적극적이고 앞만 바라보는 태도로 특징 지워 진다. 중국 문화는 두 번째 단계에 속하는 데 비교적 소극적인 견해를 가지고 있으며 직면한 상황에 맞서 대항하기보다는 순응하려고 노력한다. 마지막 단계는 인도 문화에서 발견된다. 그것은 충돌과 좌절로부터 물러나는 태도와 그것들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는 피세적(避世的) 태도를 가지고 있다.30) 양수명의 견해에 따르면 서구 문화의 성공은 생의 문제에 대한 그 자신의 적응에 기인하며, 중국과 인도 문화의 현재의 실패들은 그들 자신의 내재적인 약점들 때문이 아니라 그들의 특성이 이 시대에 아직 적합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서양은 그 첫 번째 과정에서 그 종국을 향해 이미 움직여 갔으며 자신의 사회적이고 경제적인 위기들로 고통 받고 있다. 따라서 서양은 자신의 문화의 치유를 위해서는 중국의 길로 돌이켜야만 한다.31) 양수명은 서양과 동양 사이에는 본질적인 불일치가 있다고 생각하였으므로 문화적 통합의 가능성에 대해서는 동의하지 않았다. 그는 이제 유교적인 삶의 방식이 상승국면을 타게 될 것이며, 중국이 그래서 서양에 앞서게 될 것이라 전망하였다.

세 번째는 중도적인 노선으로서 문화 융합의 태도를 취하는 것이다. 그들은 중서문화가 각각 뛰어난 점과 열등한 점을 가지고 있으므로 마땅히 각각 장점은 취하고 단점은 버림으로써 더 나은 문화를 건설하여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이 노선을 걸어간 대표적인 인물이 신(新)전통주의자 양계초(梁啓超)이다. 당대의 논쟁에서 그는 그 자신이 자라난 중국 문화의 가치를 주장하기 위해 노력했다. 이것은 그가 1920년대에 과거(전통)를 새롭게 평가하여 영속적인 가치를 지닌 것은 보존하려고 노력하면서 중국 역사에 대한 연구에 헌신했던 것을 잘 설명해준다.32) 1차 세계대전 뒤 유럽을 방문하고 돌아온 후에 양계초는 서구 문명의 몰락을 비관적으로 묘사하였다.33) 그는 과학적 진보가 삶의 질을 개선시키는 것이 아니라 전쟁의 재앙에 기여하였다고 지적하였다. 그는 계속해서 물질과학은 인생에서의 가치의 형성에서 인간 정신의 위치를 강탈했다고 말하고 서구인들은 과학만능주의의 꿈에서 깨어나야 한다고 주장하였다.34) 양계초는 이러한 서양의 위기에 대해서 유교 중국이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중국 전통사상은 비록 낡고 시대에 적합하지 않은 면이 많지만 그 중에서 우수한 재료들은 마땅히 보존되고 발양되어야 한다. 그는 유교 문화의 더 나은 부분을 보존하기 위해서 고대 전통의 왜곡된 부분과 낙후된 삶의 양식을 일소하기를 원했다. 또한 중국 문화의 참된 평가를 위해서는 서양 학문의 방법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서양 학문과의 동반자적 관계에 대한 양계초의 믿음은 서양과 동양 모두에서 최고의 것을 종합한 ‘신문화(新文化)’에 대한 그의 비전에 의해 인도되었다. 서구의 학문 방법과 과학 태도는 중국이 미래의 신문화를 건설하는 데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이다. 그는 중국 청년들이 서방 국가들의 문화 붕괴를 구원할 신문화 건설의 대열에 참여할 것을 호소하였다.
 
나의 사랑하는 젊은이들이여! 확고하게 서라. 앞을 향해 행진하라. 대양(大洋)을 횡단하라. 거기에 수많은 사람들이 자신들의 물질문명의 파탄으로 고통 받고 있으며 절망적으로 도움을 요청하고 있다. 그들은 여러분이 자신들을 구원하여 주기를 기다리고 있다! 35)

중서 문화의 교류에 대해 관심을 가졌던 또 한 사람의 중도론자(中道論者)가 북경대학 총장 채원배(蔡元培)였다. 동양과 서양 모두에 걸친 그의 교육적 배경은 그로 하여금 그러한 작업을 하도록 준비시킨 것으로 보인다. 그의 견해에 따르면 유럽의 르네상스에 해당하는 중국의 문화적 운동이 막 시작되었다. 서양의 과학과 철학의 소개는 중국에서 혁신적인 경험을 가능하게 하였다. 서양 학문의 중국 전래는 교육적 각도에서 보았을 때 본토 문화 개선과 발전을 촉진할 수 있는 유익한 사건이라고 볼 수 있다.36) 채원배는 문화를 환경의 자극을 받아들이면서 새로운 현상을 낳는, 탄성과 흡수성을 가지고 있는 역량으로 보았다. 문화의 재배(栽培)는 결코 그것을 집 안에 가두어 놓고 보호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거리와 시장에 데리고 나가 다른 사물들과 많이 접촉하게 하는 것이다. 교육적으로 근대 사회에서 지속적인 접촉을 통한 문화적 흡수와 교환을 하는 것은 필연적으로 요청되는 것이다. 그는 ‘세계 교육(world education)’의 제창자로서 문화 교류의 필요성을 강조하였으며 동양과 서양 모두가 나름의 기여를 할 수 있다고 믿었다.37) 마치 문화가 보호받아야 할 무엇인 것처럼 문화적인 국경이 설정되어서는 안 된다. 근대 중국에서는 지적인 개방성이 실천되어야 한다. 분별력을 가지고 서양의 이데올로기와 기술을 기꺼이 받아들여야 하며 객관성을 가지고 중국의 전통을 평가하여야 한다. 중국의 문화유산의 정수는 과학적 탐구의 시험을 거쳐야 한다. 중국이 서양의 동료들로부터 배워야 한다는 것을 인정하면서 채원배는 중국 민족의 자존심을 보존하는 것보다는 보편적 가치들과 창조성에 더 관심을 가졌던 것으로 보인다.

지금까지 우리는 여러 계열의 생각들을 시기적 순서에 따라서가 아니라 내용의 상호 연관성에 따라 검토해보았다. 1920년대에 중국과 서구의 문화적 가치들에 대한 이러한 가지각색의 태도들은 중국에서 열정적으로 토론되었으며 중국 지식인들에게 영향을 주었다. 중국 기독교도들의 사상도 또한 시대의 산물이다. 본색신학에 대한 관심들이 발전했던 것은 이러한 배경에서였다. 그렇다면 그들의 전통 문화에 태도는 본색신학의 발전에 어떤 영향을 주었던가? 그들은 어떻게 복음의 도리를 중국인의 마음속에 뿌리내리게 하였던가?

미주       
1) (역주) ‘indigenization’의 번역어로서 우리나라에서 통상 ‘土着化’라는 용어를 많이 사용하지만 중국에서는 ‘本色化’라는 용어를 주로 사용하고 있다. 여기에서는 중국에서의 용법을 존중하여 조금 어색하지만 ‘본색화’라는 용어를 그대로 사용하기로 한다.
2) 현재의 선교 신학적 연구들에서 일부 학자들은 ‘本色化(indigenization, 土着化)’ 대신에 ‘狀況化(contextualization, 處境相連)’라는 용어를 사용한다. 다른 문화에로의 복음전파에서 선교 신학의 本色化는 필수적인 과정이다. 어떤 이들은 ‘狀況化’가 ‘本色化’가 가리키는 모든 것을 포함하며 또한 동시에 장래의 발전 가능성을 고려한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으로 비교적 적절한 신학 용어라고 생각한다. 예를 들어 Douglas J. Elwood, ed., What Asian Christians Are Thinking: A Theological Source Book (Quezon City, Philippines: New Day Publishers, 1976)을 보라. 그러나 1920년대에 사용된 중국 신도들 사이에 통용되던 용어는 ‘本色化’였으며, 당연히 나중의 이 두 가지 용어 사이의 구별에 대해서는 고려하지 않았다. 그들에게 本色化는 문화적 전통뿐 아니라 당대의 문제들을 다루고자 하는 신학적 노력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3)  K. S. Latourette, A History of Christian Missions in China, pp.78-101.에 보이는, 예수회 선교에 대한 논의를 참조하라.
4)  Ibid., pp.133-135.
5) C. Y. Ch'eng, "Problems of the Chinese Church", pp.99-100. 誠靜怡, 《中國基督敎的性質和狀態》, p.57.
6) K. S. Latourette, A History of Christian Missions in China, pp.567-616.
7) 중국 사상에 대한 현대 학자에 의한 훌륭한 분석으로 T. C. Chao (趙紫宸), "The Appeal of Christianity to the Chinese Mind", The Chinese Recorder 49 (1918): pp.287-296, pp.371-380.
8) 梁均黙, 〈我們對此次非基督敎學生同盟的感想和態度〉, in 《批評非基督敎言論彙刊全編》, pp.1-5; 그리고 劉廷芳, 〈基督敎在中國今日當如何自修以止謗〉, 《生命月刊》 제6권 제2기 (1925년 11월).
9) 회의에 대한 기록으로서 F. Rawlinson, Helen Thoburn, and D. MacGillivray, ed., The Chinese Church as Revealed in the National Christian Conference held in Shanghai, May 2 to 11, 1922 (Shanghai: The Oriental Press, 1922).
10) 이 회의 이전에 이미 네 차례의 전국적인 규모의 선교 회의가 1877년, 1890년, 1907년 그리고 1913년에 각각 개최되었다. 1913년의 회의에서는 전체 참석자의 약 3분의 1만이 중국인이었다. "Findings of the Continuation Committee Conferences Held in Asia, 1912-1913", (New York, 1913) 참조.
11) Conference Document, The Chinese Church, p. viii.
12) Timothy T. Lew (劉廷芳), "The Message of the Church", in Conference Document, The Chinese Church, p.502.
13) F. Rawlison, "Interpretive Introduction", The Chinese Church, p. xi.을 보라. F. Rawlinson은 중국에서 대표적인 선교정책가였으며, Presbyterian Mission Press의 《敎務雜誌》(The Chinese Recorder)의 편집인이었다. 그는 본색신학의 창조에서 다른 선교사들에 비해 더 많은 역할을 한 것으로 보인다. 그의 저서 Naturalization of Christianity in China (Shanghai: Presbyterian Mission Press, 1927)은 당시 선교사들 사이에서 지도적인 발언이었다.
14) (역주) nation과 nationalism에 대한 중국어본의 번역어는 國家와 國家主義이다. 이것은 우리나라에서는 통상 民族과 民族主義로 번역되는 용어이다. 여기에서는 중국어본의 용어를 존중하여 국가와 국가주의라는 용어를 사용하기로 한다. 
15) Chou Tse-tsung, The May Forth Movement, pp.218-228.의 분석을 보라.
16) 應元道, 〈近五年來中國基督敎思想之時代背景和其內容之大槪〉, 《文社月刊》 제1권 제9-10책 (1926년8-9월) pp.4-6.
17) Ibid., p.5. 또한 The National Christian Council: A Five Year's Review, 1922-1927 (Shanghai, n.d.), p.20.을 참조하라.
18) 5월 30일 살해사건에 대해서는 아래 제4장 제3절의 서술을 참고하라.
19) C. Y. Ch'eng(誠靜怡), "Chairman's Opening Address", in The Chinese Church, p.32.을 보라.
20) K. S. Latourette, "Christian Missions as Mediators of Western Civilization", in Christian Missions in China: Evangelists of What? ed. J. G. Lutz (Boston: D. C. Heath and Co., 1965), pp. 83-93.
21) "Christian Renaissance in China", The Chinese Recorder  51 (1920년 9월) p.637.에 있는 언명을 보라.
22) 應元道, 〈近五年來中國基督敎思想之時代背景和其內容之大槪〉, p.8.을 보라.
23) 陳獨秀, 〈東西民族根本思想之差異〉, 《新靑年》 제1권 제4기 (1915년 12월 15일) pp.1-4.
24)  Chow Tse-tsung, The May Fourth Movement, p.59.
25)  胡適, 〈我們對西洋近代文明的態度〉, 《胡適文存》三集 共4冊 9卷 (上海: 亞東圖書館, 1930) 제3책 제1권 p.8.
26) 胡適, 〈東西文化的界線〉, 《胡適文存》 제3책 제1권, pp.51-52. Cf. 郭湛波, 《近五十年中國思想史》補編 (香港: 龍門書店, 1966), pp.27-31.
27) 胡適, 〈我們對於西洋近代文明的態度〉, pp.20-21.을 보라.
28) 胡適, 〈讀梁漱溟先生的東西文化及其哲學〉, 《胡適文存》 제2책 제2권, p.83. 중국 문화에 대한 그의 비판에서 胡適의 태도는 경멸적이지는 않았다. 그는 또한 동양과 서양으로부터 최선의 요소들을 뽑아낼 것을 말했다. 그러나 그의 서양(서구화)에 대한 강조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Grieder, Hu Shih and the Chinese Renaissance (Cambridge: Harvard University Press, 1970) pp.151-169.
29) 梁漱溟, 《東西文化及其哲學》 (上海, 1922), p.199.
30) Ibid., pp.54-56, p.199.
31) Ibid., p.203. Cf. Grieder, Hu Shih and the Chinese Renaissance, pp.135-148.에서의 논의를 참조.
32) 梁啓超의 생애 마지막 10년의 주저로, 《先秦政治思想史》, 《淸代學術槪論》, 그리고 《中國近三百年學術史》의 三種이 있다.
33) 梁啓超, 〈歐遊心影錄 節錄〉, 《飮冰室合集, 全集》, 제5책 제23권, pp.1-162.
34) Ibid., pp.10-11.
35) Ibid., pp.37-38. Philip Huang의 견해의 의하면, 양계초는 과격한 우상파괴론자와 보수적인 전통주의자 사이의 中道를 취했다. Cf. Liang Ch'i-ch'ao and modern Chinese Liberalism (Seattle: University of Washington, 1972), pp.141-145. Huang의 저서는 일반적으로 Joseph R. Levenson의 Liang Ch'i-ch'ao and the Mind of Modern China (Cambridge: Harvard University Press, 1953)에서의 양계초 해석을 발전시킨 것이다.
36) Cf. 郭湛波, 《近五十年中國思想史》 補編, p.61, pp.75-77.
37) Joseph R. Levenson의 견해에 따르면 채원배의 문화적 조화에 대한 주장은 “문화적 패배주의의 고통을 완화하기 위한 진통제”에 불과한 것이었다. J. R. Levenson, Confucian China and Its Modern Fate: A Trilogy (Bekeley and Los Angeles: 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 1968), p.111.을 보라.  레벤슨은 채원배의 심리에서 너무 많은 것을 읽어낸 것일 수 있다. 그러나 채원배가 철저하게 유교주의자였던 것은 매우 분명하다. Tai Chin-hsiao, "The Life and Work of Ts'ai Yuan-p'ei" (Unpublished Ph.D. dissertation; Harvard University, 1952) pp.41-42.

 

 


 

사진 | Wikimedia Commons
문석윤 | 경희대학교 철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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