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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 이후 중국의 기독교에 대해 이야기할 때 시진핑(習近平) 정권의 기독교 탄압에 관한 내용이 빠지는 경우가 별로 없다. 아니, ‘최근 중국의 기독교에 관한 이야기는 시진핑 정권의 기독교 탄압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하는 것이 더 적합하고 정확하다고 해야 할 정도이다. 시진핑 정권의 기독교 탄압에 대한 소식을 들을 때마다 누구나 중국 성도들의 안위를 먼저 염려하게 된다. 그와 함께 ‘중국을 통한 통일선교 활동이 위축되지 않나?’ 하고 염려하는 분들도 있다. 중국이 한국교회의 통일선교 활동에서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웹진 <중국을주께로>에서도 중국과 통일선교 문제를 여러 번 다루었고, 중국어문선교회가 매주 정기적으로 제공하고 있는 ‘주간 중국을 위한 기도’에도 이 문제가 기도제목으로 종종 제시되고 있다. 시진핑 정권의 기독교 탄압은 한국교회의 통일선교운동에 어떤 영향을 미치고 있나?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나? 우리가 관심을 가져야 할 문제이고 또 해답을 찾기 위해 힘써야 할 과제이다.
기(起): 중국은 한국기독교와의 관계가 의외로 깊은 곳이다
지리적인 연접성(連接性) 때문에 중국과 한국은 정치·외교·국방·문화 등 여러 분야에서 많은 영향을 주고받으며 수천 년을 이어 왔으며, 지금도 그런 가운데 있다. 기독교 또한 예외가 아니다. 한국교회사와 관련된 서적을 열면 첫 부분에 ‘경교의 신라 유입설’이 자리 잡고 있는 것을 많이 보게 된다.
네스토리우스(Nestorius)를 중심으로 하는 경교(景敎)가 7세기 중반에 당(唐)에 전래되어 한동안 왕성하게 퍼져 나갔다. 이때 신라가 당과 교역이나 유학생 교류 등을 활발하게 하였고, 당나라의 문물이 신라에 많이 유입되었는데, 경교도 신라에 전래되었을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이를 뒷받침하는 일들이 여럿 있는데 대표적인 것이 ‘대진경교유행중국비(大秦景敎流行中國碑)’의 모조품이 금강산 장안사(長安寺)에서 발견된 일이다. 이 비는 경교가 어떤 종교인지 설명하고, 경교가 당나라에 전래된 내력이 새겨져 있는 것으로, 중국의 시안(西安)에 있는데, 중국교회에 대해 관심 있는 분들이 많이 찾고 있고, 그 탁본을 국내 여러 곳에서 볼 수 있다.
고려 시절, 교황은 원(元)나라에 사절을 여러 번 보냈다. 그들은 선교의 목적도 가지고 있었다. 그들 가운데 루브루크(Guillaume de Rubruc)가 있었다. 루브루크는 압록강까지 왔다가 그 너머에 ‘카울레(Caulej)’라는 나라가 있다는 말을 듣고, 교황청에 보낸 편지에 이 사실을 써 넣었다. 국제사회에서 통용되는 우리나라의 이름 ‘Korea’는 이 카울레가 영어로 옮겨진 것이라고들 말한다. 가톨릭은 중국을 주요 통로로 해서 한국에 전해졌다. 병자호란 때 볼모로 청(淸)에 끌려간 소현(昭顯)세자가 베이징(北京)에서 예수회의 아담 샬(Adam Schall, 湯若望) 신부와 교제를 나눈 것에서 시작해서 실학파 학자들이 중국에서 발행된 한문서적들을 통해 가톨릭을 수용하게 되었고, 이승훈(李承薰)이 1739년 베이징의 북당(北堂)에서 최초로 세례를 받았으며, 중국인 신부 저우원모(周文謨)의 입국과, 포교, 순교 등이 이어졌다.
1831년 9월 9일에 초대 한국주교로 임명을 받은 브뤼기에르(Barthèlemy Bruguiére, 한국 성 소[蘇]) 신부는 압록강을 건너지 못하고 중국땅에서 ‘선종(善終)’하여 그곳에 묻혔다. 한국에 들어온 최초의 서양인 신부인 모방(Maubant, 한국명; 나백도록[羅伯多祿])은 1837년 겨울에 중국을 거쳐 방갓에 삿갓을 쓰고 압록강을 건넜다. 한국가톨릭의 전래사는 중국을 빼놓고는 이야기를 할 수가 없다. 지금까지는 경교와 가톨릭의 이야기였지만 개신교의 경우에도 중국은 묵직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한국 개신교 최초의 순교자’라는 말을 듣고 있는 토마스(Robert J. Thomas) 선교사는 중국에서 선교활동을 하는 중에 조선에 대해 듣고 조선선교를 결심하였다. 그리고 제너럴 셔먼호를 타고 중국을 떠나 한국에 들어오려고 하다가 대동강변에서 목숨을 잃었다. 또 세례는 ‘기독교 입문식’인데 한국인들이 최초로 세례를 받은 곳도 중국이었다. 1879년 3월, 의주인(義州人) 이성하(李盛夏), 백홍준(白鴻俊) 등이 잉커우(營口)에서 매킨타이어 목사에게 세례를 받은 것이다. 단편적이어서 확인이 어렵기는 하지만 한국인에 대한 세례가 그 이전에 중국에서 행해졌다고 말하는 자료도 있다. 런던선교회 소속으로 상하이(上海)에서 일했고, 토마스 목사와도 가까웠던 조셉 어드킨(J. Edkins) 선교사가 남긴 글에 1864년 4월에 조선인 4명이 중국에서 세례를 받았다는 내용이 들어있는 것이다.
1889년에 언더우드 선교사가 의주에 갔을 때 의주의 교인들이 세례를 청원했다. 언더우드 선교사는 문답을 거쳐 그 가운데 33명에게 세례를 주기로 했는데 그때 조선국법은 이 같은 일을 허락하지 않았다. 결국 언더우드 선교사는 이들을 배에 태우고 강을 건너 세례를 주었다. 이것을 한국의 ‘요단강 세례’라고 부르는데, 강 중간을 국경으로 보는 관례가 있어서 중간을 넘어 강상세례를 베풀었을 것이라고 하는 분도 있고, 강을 건너 단동(丹東)땅에서 세례를 주었을 것이라고 하는 이도 있는데, 어느 경우였든지 간에 조선국법이 미치지 않는 곳에서 행해진 것은 확실하니 집단세례가 최초로 행해진 곳은 중국이라는 사실은 확실하다.
한글 성경이 최초로 발간된 곳도 중국이다. 로스(J. Ross, 羅約翰) 선교사를 중심으로 서상륜(徐相崙) 등 여러 조선 청년들이 합력하여 성경의 한글 번역에 힘써, 1882년 가을에 선양(沈陽)의 문광서원에서 <예수셩교 누가복음 젼셔>와 <예수셩교 요안네 복음젼서>를 발행했다. 성경 번역 사업은 꾸준히 진행되어 1887년에는 <예수셩교젼셔>라는 이름으로 신약성서가 완간되었다.
2년 전인 1887년,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가 ‘로스역 성경 발간 130주년 기념 로스의 선교 루트 탐방’을 실시했다. 필자도 이 탐방여행에 동참해서 선양, 단동, 고려문(高麗門-鳳城), 잉커우, 랴오양(遼陽), 그 밖의 중국 여러 곳들을 찾으면서 성경 번역에 헌신한 선배들의 노고를 깊이 새겼다. 최초의 해외 한인교회가 세워진 곳은 중국 지안(集安-裡陽子)이었다. 그 자리에는 지금도 자연석에 ‘耶蘇敎 初立碑 1898 됴선인’이라고 새겨진 높이 2.7m의 비가 냇가에 서 있다. 한국교회가 해외선교를 처음으로 실시한 곳도 중국이었다. 장로교는 1912년 평양에서 제1회 총회를 하면서 중국선교를 결의했다. 그리고 이듬해 세 명의 선교사를 산동성(山東省) 라이양(萊陽)에 파송했다. 최초의 순교가 중국과 관계가 있고, 최초의 성례, 성경 발간, 해외한인교회 설립이 중국에서 행해졌으니 중국은 ‘한국교회의 발원지’라고 해도 좋을 정도이다. 최초의 해외선교도 그곳을 대상으로 했으니 ‘선교한국’의 출발점 역시 중국이라는 말도 성립이 된다.
승(承): 중국은 한국교회 통일선교운동의 든든한 후방기지였다
1949년 10월, 중국이 사회주의 국가가 되고 교회에 여러 가지 제약이 가해지면서, 더구나 중국이 적성국이 되면서 중국과 한국교회의 관계도 단절된 상태가 되었다. 관계가 있다면 6․25 전쟁 때 반도지원군으로 참전했다가 포로가 된 중국인들을 대상으로 수용소에서 전도가 행해졌고, 1950년대부터 중국의 기독교인들을 대상으로 하는 선교 전파가 한국땅에서 송출되기 시작했다는 사실 정도일 것이다. 그런데 1990년대에 들어서면서 중국의 존재는 한국교회에 새로운 의미를 가지고 부각되기 시작했다.
분단 후의 북한교회를 연구하는 분들 가운데 1990년대부터는 지하교회를 중심으로 북한교회를 살펴보려는 이들이 늘어나고 있다. 송원근 박사는 그의 저서 《북한의 종교지형 변화》(이 책은 그의 박사학위 논문을 정리한 것이다)에서 북한교회역사의 시기를 구분하면서 1998년 이후를 ‘경제난 종교활동 확장기’라고 하였다. 북한인권정보센터는 《2012 북한종교자유백서》 발간을 기념하여 2013년 2월 14일에 국가인권위원회 배움터에서 세미나를 열었는데, 이 세미나에서 장은실 연구원은 ‘2012 북한의 종교 현황과 종교정책’이라는 제목으로 강연하면서, 1998년부터 현재까지를 ‘비공식 종교활동 박해 강화기’로 규정하였다. 여기의 ‘비공식 종교활동’을 교회의 용어로 바꾸면 ‘지하교회’가 되고, 이들에 대한 박해가 강화되었다는 것은 지하교회가 그만큼 늘어나고 활발해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북한교회사가인 유관지 박사(북한교회연구원 원장)는 이런 주장들과 그 밖의 여러 현상들을 종합하여 1998년 이후 현재까지를 ‘지하교회 활성화기’라고 명명하였다. 이들은 모두 북한교회의 중심에 지하교회가 자리 잡게 된 배경에 중국이 관계되어 있음을 빼놓지 않고 말하고 있다. 1990년대 중반부터 시작된 ‘고난의 행군’이라는 이름의 무서운 식량난 때문에 많은 북한 주민들이 강을 건너 중국으로 갔는데, 거기에서 남한의 선교사들 그리고 조선족교회를 통해 복음을 듣고 구원의 진리를 깨달은 사람들이 적지 않다. 그들은 북한의 일가친지들과 가까운 이들에게 복음을 전했고, 이들을 통해 지하교회가 확산되었다는 것이다. 필자는 북한에서 지하교회 활동을 하다가 탈북한 이들에게 ‘어떻게 해서 믿음을 갖게 되었느냐?’ 하고 물어 보았다. “먼저 탈북해서 중국에 있는 친척을 통해서요.”라는 대답을 여러 사람으로부터 들었다.
탈북민들이 한국에 오면 먼저 탈북민보호센터에서 조사를 받는다. 그곳에 종교활동 시간이 있는데 필자는 여러 해 그 시간의 설교를 담당했었다. ‘여러분, 이렇게 예배드리는 것 처음이지요?’ 라고 물으면 으레 그렇다고 한다. 그래서 그곳에서는 성경 본문이 어디라는 것을 말한 다음에 바로 설교하지 못하고 설교자, 기도담당자, 반주자 등 외부에서 들어간 이들이 모두 그들 사이로 들어가서 본문을 찾아주어야 한다. 성경을 찾을 줄 모르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어느 날, “아니요, 고향에 있을 때에도 이런 예배를 종종 드렸어요.” 하는 분을 만났다. 놀라서 “그 예배를 누가 인도했습니까?”라고 물으니까 “중국에서 장사하러 온 동포가요!”,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대답하는 것이었다. ‘신앙을 가진 중국 동포들 가운데 이렇게 귀한 일에 적극 발을 벗고 나서는 일꾼들도 있구나!’ 생각했다.
중국에는 남한의 선교사들이 세워 운영하는 탈북민들을 돕고, 성경을 가르치는 장소들이 여러 곳에 있다. ‘미션홈’이라고도 하고, ‘쉘터(쉼터)’라고도 하는데 동북지역뿐 아니라 중국의 중요 도시 여러 곳에 퍼져 있다. 그곳에 있는 분들은 정말 헌신적으로 탈북민들을 보살피고 있고, 탈북민들은 그런 사랑에 녹아 대부분 변화가 된다. 그래서 국내의 탈북민 관련 업무 종사자들 사이에는 ‘미션홈을 거쳐온 탈북민과 거치지 않은 탈북민과는 확연하게 차이가 난다.’는 말이 있다. ‘미션홈을 거쳐온 탈북민이 얼마나 변화가 되었느냐 하는 것을 가지고 그 미션홈의 점수를 매길 수 있다.’고 하는 분도 있다. 성경암송 사역을 중심으로 미션홈들을 운영한 최광 목사의 《내래 죽어도 ∼ 》 시리즈(전 3권)에는 미션홈의 치열한 선교활동이 자세하고 생생하게 담겨 있다.
중국에서 체포된 탈북민이 북송되어 심문을 받을 때 가장 엄하게 추궁 받는 것이 ‘중국에서 교회에 나갔느냐?’ 라는 것이라고 한다. 중국을 통해 기독교가 유입되는 것을 막으려는 북한 당국의 정책 때문임은 불문가지(不問可知)의 일인데, 이것은 중국을 통해 기독교가 북한에 많이 유입되었고, 영향을 많이 미쳤다는 사실의 반증이기도 하다. 중국은 이와 같이 통일선교의 듬직한 후방기지가 되어서 분단 후 북한교회의 역사에서 새 시기를 열어가는 귀중한 역할을 감당하고 있다.
북한땅은 가고 싶어도 갈 수 없는 곳인데 중국은 북한의 일부분이나마 잘 볼 수 있는 창구역할을 하고 있다. 북·중접경 여행이 바로 그것이다. 필자는 북·중접경 여행을 ‘신재중국 심재북한(身在中國 心在北韓)의 여행’이라고 부른다. ‘몸은 중국에 있지만 마음은 북한을 향한 여행’이라는 뜻이다. ‘답중망북(踏中望北)의 여행’이라고도 부른다. ‘중국을 밟으면서 북한을 바라보는 여행’이라는 뜻이다. 사람들은 이 여행을 통해 북한복음화를 더욱 간절하게 염원하게 된다.
중국은 이와 같이 통일선교를 자극하고 촉진하는 땅이 되어 있다. 통일선교 사역을 하는 이들 사이에는 ‘북한선교의 앞문은 굳게 닫혀 있지만 뒷문은 조금 열려 있다’는 말이 있다. 북한 주민들을 만나 직접 전도하는 일은 불가능하지만 중국을 통한 선교는 부분적으로 가능하다는 뜻으로 하는 말이다. 앞문이 굳게 닫혀 있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지만 뒷문이라도 조금 열려 있는 것은 다행한 일이고, 감사한 일이다. 전(轉): 촛대가 옮겨지나?
그런데 시진핑 정권의 기독교 탄압이 본격화한 이후에 이 뒷문이 삐걱거리며 좁아지고 있다. 작년 이후 중국의 교회가 외형적으로 볼 때는 전반적으로 위축되는 모습을 보이고 있는 것은 어쩔 수 없는 현실인데, 중국을 통한 통일선교 활동도 그런 흐름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느낌을 받는다. 중국교회는 지금 조심하고 삼가며, 돌다리도 두들기며 건너가는 것 같은데 중국을 통한 통일선교 활동 역시 마찬가지이다. 아니 중국을 통한 통일선교 활동이 제일 그렇게 하고 있는 것 같다.
중국을 통한 통일선교 활동이 위축되는 제일 큰 이유는 중국에서 이 일을 하던 선교사들이 비자발적으로 중국을 떠나야 하는 일들이 늘어나고 있기 때문이다. 참 많은 일꾼들이 중국을 떠나 한국으로 돌아오거나 제3국으로 갔다. 그들 가운데는 러시아 연해주지역으로 옮긴 분들이 많은데, 언어와 현지 적응 훈련 등 사전 준비가 불충분했기 때문에 일어나는 부작용에 시달리고 있다는 말도 들린다.
외국 국적을 가진 선교사들 가운데 북한의 라선을 출입하며 의료와 사회복지 등 여러 분야에서 일하는 분들이 많이 있다. 이들은 라선에 들어갈 때 중국의 휘춘(琿春)에 있는 취안허(圈河)통상구를 통해 들어가는 것이 관례였다. 몇 해 전에는 취안허와 라선을 연결하는 도로가 확장되어 출입이 더 편해졌다. 그런데 그들 가운데 많은 숫자가 더 이상 중국 입국을 할 수 없어서 러시아의 블라디보스토크로 가서 기차를 타고 국경도시인 하산시를 통해 두만강을 건너는 불편을 겪고 있다.
앞에서 북·중접경지역 여행에 대해 이야기했는데 요즘은 북·중접경지역 여행에 러시아 연해주가 포함되는 일이 많다. 아예 중국을 빼고 연해주지역만을 찾아가는 팀들도 생기고 있다. 틸북대학생들을 위해 일대일 맞춤식 교육을 하는 새일아카데미라는 기관이 있는데 이 기관도 지난달 중순에 7명의 탈북대학생들을 안내해서 연해주 역사탐방을 실시했다. 독립운동가 최재형 선생과 아상설 선생의 고택과 기념비, 신한촌, 발해성터 등을 방문했다고 한다. 이래저래 통일선교의 후방기지라는 촛대(계 2:5)가 옮겨지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중국을 사랑하고, 중국이 통일선교에 더 크게 쓰임 받기를 바라고 있는 우리들은 어떻게 해야 하나?

결(結): “뭇별을 셀 수 있나 보라”
뒷문이 닫히는 것 같은 현상은 가변적인 것이다. 과거에는 오랫동안 문이 아니라 담벼락이었던 때도 있었다. 중국은 무엇보다도 한국교회의 귀중한 신앙유산이 녹아 있는 곳이다. 중국에는 50여 소수민족이 있다. 그 가운데 조선족은 예수 잘 믿는 민족으로 자타가 공인하고 있다. 중국의 한 소수민족 전문가로부터 “조선족의 특징은 공식적으로는 쌀농(水農)를 잘 짓고, 축구(足球)를 좋아하고, 노래와 춤을 좋아하고 즐긴다(善歌能舞)는 것으로 되어 있지만, 저를 보고 말하라고 하면 지금의 조선족은 부지런하고, 예의 바르고 그리고 신앙심이 풍부한 민족이라고 말하겠습니다.”라는 말을 직접 들은 일이 있다. 북·중접경을 여행할 때 안내하는 분이 “처마가 곡선으로 되어 있는 집들이 많고, 교회가 있는 마을을 만나면 동포들이 사는 마을이라고 보아도 거의 틀리지 않습니다.”라고 말하는 것을 들었다.
중국에 살고 있는 우리 동포들의 이 같은 신앙심은 어디에서 온 것일까? 필자는 가장 큰 원인을 역사적인 배경에서 찾고 있다. 일제강점기, 중국의 동북지역은 한국교회의 중요한 터전 가운데 하나였다. 《1938년 조선예수교장로회 명칭 급 주소》에 따르면 그곳에는 봉천노회(38교회), 남만노회(26교회), 북만노회(28교회), 동만노회(74교회), 4개 노회, 166교회가 있었다. 그 후에 안동노회와 영구노회가 더 생겼다. 또 화북(華北)노회도 있었다. 같은 해에 발간된 감리교의 《기독교조선감리회에 속한 재산목록》에 따르면 감리교도 만주선교연회 안에 북만지방(5교회)과 동만지방(11교회)을 두고 있었다. 이 지역에는 성결교와 침례교(당시 이름 동아기독교)에 속한 교회들도 여럿 있었다. 그동안 풍파가 많았지만 이런 역사적인 신앙유산이 이어져서 ‘조선족은 예수 잘 믿는 민족’이라는 말을 듣고 있다는 것이 필자의 지론이다.
북한의 배후인 중국에는 이런 무형의 역사적인 신앙유산과 유형의 많은 동포교회들이 있다. 그것은 한국교회의 통일선교 사역을 보이게 또는 보이지 않게 도와줄 것이다. 앞에서 앞문, 뒷문 이야기를 했는데 한 번은 필자가 “윗문은 열려 있어요.”라고 한 적이 있다. 여기서 윗문은 방송을 통한 선교를 말한 것이다. 필자가 오랫동안 방송을 통해 중국과 북한에 복음을 전한 티를 좀 낸 것이다. 그랬더니 좌중의 한 분이 “영문(靈門)은 스물네 시간 무제한으로 열려 있어요.” 했다. 영문은 기도를 말한다. 그분은 기도운동을 하는 분이었다. 앞문은 잠겨 있고, 뒷문은 요즘 닫히는 것 같지만 찾으면 열려 있는 각자의 문을 이렇게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기도 이야기가 나왔으나까 이 말을 하고 싶다. 필자는 북한의 지역교회사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는데 자강도 중강군(中江郡)을 살필 때마다 고개를 갸우뚱하게 된다. 중강군은 압록강 중간에 있다고 해서 그런 이름을 갖게 되었는데 우리나라의 잘 알려진 오지(奧地) 가운데 하나이다. 이곳은 한반도에서 제일 추운 곳으로 알려져 있다. 중강진은 1933년 1월 12일에는 영하 43.6도까지 내려간 기록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북한의 속담 가운데 “삼수갑산을 갈지언정 중강진(중강군의 옛 이름)에는 못 간다.”라는 것이 있다. 삼수(三水)와 갑산(甲山)은 예로부터 대표적인 귀양지인데 중강군은 그보다 더하다는 뜻이다. 그런 중강군인데 여기에 교회들이 참 많았다. 중강제일교회, 중강제2교회, 건하교회(乾下敎會), 진평교회(陣平敎會)…, 스무 개 가까운 교회들이 있었다. 어떻게 해서 이런 벽고지에 그렇게 많은 교회들이 세워질 수 있었을까? 숫자만 많았을 뿐 아니라 영향력도 컸다. 중강에서 목회하던 주하룡(朱夏龍) 목사는 잘 알려진 장로교 지도자였다.
필자는 그 답을 로스 선교사의 기도에서 찾고 있다. 로스 선교사는 중국 동북지역에서 선교하면서 조선선교에 뜻을 두고 여러 차례 조선땅이 바라보이는 코스를 택해 선교여행을 했다. 그 코스 가운데 중강군 바로 건너편 림강(臨江)이 있다. 로스 선교사는 림강의 강기슭에 서서 건너편 조선땅, 바로 중강을 바라보며 그 땅의 복음화를 위해 간절히 기도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 열매로 중강이 그렇게 되었을 것이다. 낭만적인 추측이기도 하지만 부인하기도 어려운 일이다. 뒷문이 좁아질수록 영문을 더 많이 활용하자. 그러면 뒷문도 다시 열리고 머잖아 앞문도 열릴 것이다.
아브라함의 이야기로 마치려고 한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큰 민족을 이루게 하겠다고 약속하셨고(창 12:2), 자손을 땅의 티끌 같게 하겠다고 약속하셨다(창 13:16), 그러나 아브라함에게는 자식이 없었다. 아브라함은 하는 수없이 종 엘리에셀을 상속자로 삼으려고 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이끌고 밖으로 나가 “하늘을 우러러 뭇별을 셀 수 있나 보라” 하셨다. 또 “네 자손이 이와 같으리라” 하셨다. 아브라함은 이를 믿었고, 여호와께서는 이를 그의 의로 여기셨다(창 15:1∼7).
우리는 시진핑의 기독교 탄압이라는 어둠만 보지 말자. 14억이라는 뭇별과 같은 중국의 영혼을 보자. 그리고 하나님은 그 영혼들이 구원을 받도록 하는 귀한 사명을 우리에게 맡기셨음을 다시 한 번 확인하자. 그러면 하나님은 이를 우리의 의로 여기시고, 우리를 도우실 것이다.
사진 | 네이버 카페 나함에서 캡처 현덕손 | 아세아방송(현 제주극동방송) 초대본부장, 북방선교 전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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