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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8.2 통권 204호     필자 : 장쉰(江迅) 프린트   이메일 
[차이나 윈도]
고향에 돌아가고 싶은 6•4 망명자들, 텐안먼사건 30주년제

6•4사건 30년, 그날의 진상규명을 바라는 사람들은 희생자들에 대한 공정한 재평가가 이루어지기를 바라고 있다. 해외 민주화운동 인사들도 하루속히 중국으로 돌아가서 가족과 함께 살며, 중국의 발전에 기여하기를 바라고 있다. 6•4사건 이후 핍박에 못 이겨 해외로 떠난 망명자들은 5백여 명이나 된다. 이들 중 노년기에 접어든 사람들은 중국에 돌아가서 남은 생애를 보내기를 무엇보다도 간절히 바라고 있다. 젊은 시절에 해외로 떠난 이들의 부모들은 이미 자식의 돌봄이 필요한 나이가 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해외 망명자들도 고향에 돌아가서 가족과 함께 지내며 부모님께 효도하기를 원한다. 이들은 진상해명이 되어 그들의 명예가 회복되어 망명생활을 끝내고 중국에 당당하게 돌아가는 것이 이들이 추구하는 목표이다.

모든 역사는 영원한 순간입니다. 또 다시 찾아온 6•4사건은 올해로 벌써 30년째이다. 사람들은 6•4사건에 대한 성격 규정과 반성(反思)에 대하여 대체로 두 가지 측면에서 추진되기를 바란다. 하나는 반혁명폭동, 사회불안, 정치적 혼란이라는 성격 규정에 관한 것인데 여태껏 새로운 변화가 없다. 또 다른 하나는 서구의 자유민주주의적 가치관을 선전하고 보급하며, 중국공산당의 정치 체제를 부정하는 민주화운동이다. 중국 정부와 민간, 이 두 진영의 대립은 양보 없는 정면충돌을 해옴으로써 해결이 어려운 난제가 되었다. 이러한 충돌 가운데서 10년, 20년, 30년에 이르기까지 중국에 돌아가고 싶다는 목소리는 점점 더 커지고 있다.

6•4사건이 30년이 되는 이때, 한 가지 관점이 점점 자리를 장악해가고 있다. 지난 30년 동안 6•4사건의 성격 규정에 대한 근본적인 대립각은 각자의 정치적 필요에 따라 각자가 필요로 하는 특정 부분만 골라서 그들의 편으로 끌여들여 사건의 본질을 왜곡시켜 오고 있다. 마치 100년 전의 5•4운동처럼 각자의 가치관에 따라 사건의 성격을 규정짓고 있는 것이다. 만약 6•4사건의 진상과 화해를 할 수 있다면 다른 제도의 서로 모순되고 상반되는 점들을 해결하는 출발점이 될 수 있으며, 이것은 마침내 중국이 건강하고 풍요로운 미래로 나아가는 문을 열게 해줄 것이다. 

쉬쫑마오(徐宗懋)이 분리주의를 반대하다
대만 전문 언론인 쉬쫑마오(徐宗懋)가 최근에 쓴 글에서 “6•4사건 30년, 홍콩과 대만에서는 모두 이를 기념하는 활동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런 활동은 당시에 내가 목격하고 참여한 현실과는 다른 지난 10년 동안 변형된 것이기에 나는 이들 활동에 참여할 수 없었습니다. 사람들은 입술로는 중국의 민주화를 외치지만 그들의 행동은 민주화는 말할 것도 없이 오히려 분리주의 파시스트들입니다. 이는 지난 10년 동안 해외 민주화운동이 급속히 타락하는 진짜 모양새입니다. 30년 전 우리는 텐안먼(天安門) 광장을 짓밟는 전차와 대열을 이루어 진군해오는 군대를 보았습니다. 광장에서 총성이 크게 울렸고 얼마 지나지 않아 이미 피범벅이 되어 있는 광장에 나는 피를 흘리면서 쓰러졌습니다. 6•4사건에 참여한 것은 내가 중국을 사랑하기 때문이었습니다. 중국을 사랑한다는 사람이 어찌 중국을 분열시키고 야심에 찬 서구 세력을 도와 중국을 무너뜨리려고 하겠습니까? 이는 어디에서 굴러온 해외 민주화운동입니까? 양심이 있는 중국인이라면 누구나 할 것 없이 부끄러워할 것입니다.”라고 했다. 그리고 그는 “중국의 민주화는 단지 몇 번의 구호로 실현되는 것이 아닙니다. 더군다나 대만의 독립과 서구 세력을 위한 도구는 더욱 아닙니다. 이런 것들은 중국의 민주화와는 점점 멀어질 뿐입니다. 경제발전과 법제실천(法制实践)을 거쳐 한 걸음 한 걸음 헌정(宪政)민주주의를 향해 나가야 하지만 평화와 안정된 환경은 기본적인 조건입니다.”라고 했다.

우얼카이시(吾尔开希) 고향을 그리워하다
89년 텐안먼 민주화운동의 학생 지도자 가운데 한 사람이었던 우얼카이시(吾尔开希)는 “6•4 텐안먼사건이 일어난 때부터 지금까지 30년 동안 망명생활을 하고 있어요. 대만에서 생활한 23년은 중국 대륙에서 생활한 시간보다도 긴 시간이 되었어요. 대만은 편하기는 하지만 부모님과 가족들을 만날 수도 없습니다. 30년 동안 부모님을 뵙지 못한 것은 망명생활 가운데서 제일 고통스러운 일입니다. 저는 자주 이런 생각을 해봅니다. 이러다가 부모님을 영원히 만나지 못하는 것은 아닌지.”

 

탱크차가 텐안먼 광장에 진입한 지 하루이틀이 지나고 우얼카이시의 부모는 아직 아들이 살아 있다는 소식을 듣고 친구에게 안부를 부탁했다. “네가 살아 있기만 하면 우리는 10년, 20년, 30년이고 살아서 너를 기다릴 것이라고…”. 우얼카이시는 부모님이 그때 하신 말씀을 생각하기만 하면 “마음이 복잡해지고 이루 말할 수 없는 고민들이 마음을 힘들게 합니다.”라고 했다. 또한 그는 “부모님의 말씀은 ‘갈라지는 것은 괜찮으니 10년, 20년, 30년이든 너는 믿음과 희망을 버리지 말아라’하는 것이었는데 뜻하지 않게 그렇게 되어 버렸어요.”라고 말했다. 그리고 그의 말은 씨가 되어 타향에 망명하게 되었고, 연로하신 부모님은 그의 가슴에 제일 큰 근심이 되었다. 머리 속에 제일 떠올리고 싶지 않은 것은 살아 있을 동안에 부모님을 뵙지 못할 수도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다. 때로 부모님이 아프시다는 전화를 받거나 부모님의 전화기 저편에서 살아 생전에 만날 수 있겠느냐 하시면서 우시기도 한다. 인간 세상에서 이처럼 참혹한 일은 없을 것이다.

1968년 2월에 태어난 우얼카이시는 신장(新疆)위구르족이다. 베이징사범대학에서 교육학을 전공한 학생이다. 그리고 89년 학생운동을 하던 시절에는 베이징고등학교 학생자치연합회의 주석이기도 하였다. 6•4사건 이후 그는 학생운동의 지도자로 수배명단에 두 번째로 올랐다. 그래서 그는 비밀통로를 통하여 홍콩을 경유하여 프랑스로 망명하였다. 우얼카이시는 1994년에 대만 국적의 여자친구와 결혼해서 대만에 정착하였다. 30년 동안 자칭 ‘브로커’라는 사람들이 나타나 여러 차례 그를 찾았고, 집에 돌아갈 수 있는 조건에 대해 제안을 받기도 하였다. 예를 들면 돌아간 뒤에는 정해진 몇 년 안에는 아무런 정치적 발언을 하지 않는다든지, 또 베이징이나 우루무치지역 등에는 발을 들이지 않겠다는 것 등등이었다.

우얼카이시는 15년 전인 2004년에 홍콩에 성공적으로 입국하여 연예인 메이옌팡(梅艷芳)의 장례식에 참석하였는데 망명은 일종의 정신적인 고문이라고 했다. 그는 대만에서 지내는 지난 수십 년 동안 6•4사건에 대해 상당한 관심을 가지고 있었지만 홍콩에는 미치지 못하였다. 홍콩은 ‘89년운동’에서 참가자 수가 가장 많았고 관심도 또한 가장 높았다. 그리고 6•4사건 이후 매년 6•4사건을 기념하고 있다. 홍콩의 6•4사건 기념은 홍콩이 중국에 반환된 뒤에도 여전히 계속되고 있다. 이것은 중국 정부가 홍콩을 압제하는 것에 대한 저항의 상징이 되었다. 매년 빅토리아파크에서 열리는 이 집회는 홍콩 사람들이 6월 4일을 기념하여 자신의 권리를 지키기는 새로운 전통이 되었다.

장보리(张伯笠), 목사가 되다
6•4사건의 30주년이 되기 이틀 전인 6월 2일 장보리(张伯笠) 목사가 설교한 내용의 제목은 ‘복 있는 인생, 시편 23편’이었다. 그는 6•4사건이 그의 인생의 전환점이 되었다고 했다. ‘89년 민주화운동’ 당시 장보리 목사는 학생 지도자였다. 1957년에 태어난 그는 88년에 베이징대학교에 입학하였다. 89년 4월 15일, 그는 후야오방(胡耀邦)을 추모하는 첫 번째 시(诗) 《长相思.雨夜送耀邦》를 베이징대학교 캠퍼스의 중심 구역인 싼자오디(三角地)에 붙였다. 그는 6•4사건 후반부에 텐안먼학생운동의 부총지휘(副总指挥)와 단지 하루만의 톈안먼민주대학교(天安门民主大学) 교장직을 맡았다. 그리고 그는 공안이 지명한 수배자 21명 가운데 한 사람이 되었다. 그는 헤이롱장(黑龙江)성의 중•소(中苏)국경지대에서 숨어 다니다가 구소련으로 도망하였다. 그리고 비밀리에 중국으로 송환되었고 후에 헤이롱장의 황야에 숨어서 지냈다. 그러다가 1991년 비밀통로를 거쳐서 홍콩으로 도망을 갔고 홍콩 주재 미국 영사관에 정치적 망명신청을 했다. 결국 그는 미국으로 망명하게 되었고, 프린스턴대학교에 방문학자로 초빙되었다. 신학공부를 마친 뒤에 그는 목사가 되었다. 그리고 지금은 화인(华人)들에게 많은 사랑을 받는 복음 전도자가 되었다.

아무런 분노도 감정도 없이
장보리 목사는 “가끔 묘지에 가보면 인생은 참으로 짧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래서 영원한 고향은 어디일까 라는 생각도 해보게 되지요. 중국이든 미국이든 나에게는 모두가 고향입니다. 그토록 중국을 사랑하고 심지어 중국을 위해서라면 목숨도 내어놓을 수 있다고 생각한 우리였지만, 결국 수배자가 되었고 중국의 적이 되었습니다. 정말 이해가 안 되고 고통스러웠습니다.”라고 했다. 집을 떠난 뒤에는 집이 너무나 그리웠다고 한다. 장보리 목사는 동북(东北) 사람이다. 그는 망명을 하고 나서 특별히 ‘송화강에서(松花江上)’라는 노래를 좋아하게 되었다. 그는 프린스턴대학교에 있을 때 류스옌(刘实雁), 쑤샤오캉(苏晓康) 등 친구들과 모일 때마다 이 노래를 다같이 불렀다. 처음에는 모두가 눈물을 흘리며 집 생각을 했다. 하지만 시간이 흘러가면서 타국 생활에 서서히 적응해 갔다. 장보리 목사는 미국에 온 뒤로 매년 딸을 미국에 데려오려고 했지만 그때마다 바다에 돌 던지는 격이었다. 9년을 기다린 끝에 2000년에 와서야 딸을 데려오는 데 성공하였다. 지금 미국에 살고 있는 그는 전 세계에 다니면서 복음을 전하고 있다.

기억을 되살려 재출발하다
6•4사건이 발생한 지 30년이 되는 2019년 새해 첫날, 6•4사건 30주년을 위한 기념 행사의 서막이 올랐다. 학생운동의 지도자들이었던 왕단(王丹), 우얼카이시, 저우펑쒀(周锋锁) 등 56명은 ‘기억을 되살려 다시 출발하자 │전 세계가 협력하여 ‘6•4’ 30주년을 공동으로 기념할 것에 관한 외침(重建记忆,再次出发│关于全球合作,共同纪念「六四」三十年的呼吁)’이라는 공동성명을 새해 첫날에 발표하여 세계 곳곳에서 기념 행사가 진행됐다. 지난 5월 18일부터 20일까지 화인민주서원(华人民主书院)과 홍콩시민지원애국민주운동연합회(香港市民支援愛國民主運動聯合會, 支联会)는 타이베이(台北) 6•4사건 30주년 ‘중국민주운동의 가치 갱신과 경로 탐색(中国民主运动的价值更新与路径探索)’이라는 세미나를 열었다. 그리고 6월 4일 저녁, 홍콩 빅토리아공원에서는 약 18만 명의 사람들이 6•4사건 30주년 추모 촛불 저녁집회에 참여하였다. 그들은 조금의 두려움도 없이 손에 들고 있던 초에 하나씩 불을 붙여 나갔다. 계속해서 그들의 기억을 불러일으키고, 촛불이 불을 밝히고 있는 것같이 그들의 집으로 돌아가는 희망에도 불이 밝혀졌다.

 




 

 

출처 | <亚洲週刊> 第33卷 23期 (2019年 6月 16日)
사진 | 네이버 포스트(주간 동아)
번역 | 노은혜•본지 중국어자료담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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