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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3.2 통권 187호     필자 : 정암 프린트   이메일 
[특집] - 특집/ 나의 중국 사역 이야기(2)
일에서 사람으로

내가 섬기는 교회 원로목사님의 소개로 급한 원고 청탁을 하게 되었다는 실무자의 전화를 받고 극구 사양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우선 현장에서 떠난 지 이미 오래요 이 글을 읽게 될 일꾼들에게 누가 될 것을 염려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거듭되는 요청에 응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어려워지는 현장 분위기로 인해 조심스러워할 숨은 필자들로 인해 실무자가 겪을 어려움을 짐작하기 때문이다. 이렇게라도 도움이 될 수 있겠는가 싶지만 여하튼 마음 약한 고질병 때문에 수락을 하고 말았다.
 

사실 나는 내가 살아온 이력이 ‘일’ 중심이었다는 반성을 하면서 요사이 회개하는 날들을 보내고 있다. ‘실패는 성공의 어머니’라고 했던가! 나는 지금 천하보다 귀한 생명 하나하나를 섬기는 데서 내 영혼을 위무하는 법을 배우고 있는 중이다. 경기도의 한 작은 교회에서 목사로 섬기고 있는 가운데 교회를 찾아오는 노약자와 장애인, 병자를 먹이고 입히고 돌보는 일에 집중하는데 점점 장애인 중심의 교회로 변해 가고 있는 것만 같다. 하나님이 사역 마지막 시기에 접어들고 있는 나를 이렇게 위로하시고 인도하시는가?
 

1985년에 일반대학을 졸업하면서 신학교에 입학하였으니 2년 몇 개월의 군복무 기간을 더해 잠시 직장생활을 했던 시기까지 제외하더라도 사역생활이 30년 가까이 되었다. 정말 순식간에 지나버린 세월이었지만 사실 너무나 준비 없이 사역에 뛰어든 30년이었다. 그만큼 눈앞에 주어진 일에만 급급했고 무모하리만치 일에 몰두해 온 시간들이었다. 30년의 세월은 대체로 신학교와 선교지, 대학교, 목회지를 옮겨 다닌 시간이었지만, 그래도 한 가지 일관된 관심사가 있었다면 그것은 중국과 중국인이다.
 

내가 중국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고등학교에 다닐 때 한문을 가르쳐 주신 선생님 덕분이었다. 한문교과서의 단독 저자이기도 했던 선생님은 중국의 고사성어와 함께 한반도를 넘어선 대륙을 품는 호연지기(浩然之气)를 품으라고 역설하셨다. 호방하다는 것이 작고 연약한 것을 소홀히 대하라는 것은 아니겠지만 나도 일찍부터 유라시아대륙을 마음에 품었다. 그것이 대학과 신학교에서 중국사를 공부하게 된 계기가 되었다.
 

당시 제5공화국과 제6공화국의 시기에 청년들은 나라와 민족을 위한 거대 담론으로 밤을 새던 시기였다. 나는 좀 다른 방향으로 교단 청년회를 통해 나라와 민족을 위한 밤샘 산기도에 참여하였으며 운동회나 문화행사, 강연회, 교육행사 등을 조직하였다. 그러는 사이에 신학교를 졸업하게 되었고 중국에 대한 관심을 다시 불러일으킨 변화가 생겼다. 1992년, 한국과 중국이 갑작스럽게 수교를 하게 된 것이다.
 

마침 신학교 대학원을 마치던 그 해에 중국으로 들어갈 기회가 생겼다. 이미 일반대학에서 중국사를 전공하였던 나에게는 고민의 여지가 없었다. 그동안도 어느 정도 중국어를 배웠고 중국의 기독교와 전통사상에 대한 관심을 키워 온 터였다. 막 결혼한 직후였지만 아내를 설득하여 1995년 가을에 서둘러서 중국행 비행기를 탔다. 마침 외자와 기술도입을 위해서 복지사업 분야의 문호를 개방한 중국 정부의 이해와 맞물려 변방지역에 장애인복지관을 세워놓고 관리자를 찾고 있던 선교단체의 파송을 받았다.
 

그렇게 해서 나의 중국생활이 시작되었다. 그러나 앞에서도 말했듯이 솔직히 그곳을 찾아오는 현지 장애인과 그 가족들의 상한 마음을 어루만지고 돌볼 수 있는 마음과 믿음과 사역의 준비는 부족한 상태였다. 복지관을 간접선교의 채널로 이해하여 직접선교를 도모하려고 했던 파송교회와 기관에게는 더더욱 클라이언트(장애인과 가족)나 직원들이 눈에 들어오지 않았을 것이다. 복지관 자체를 세워내야 했던 나조차도 그들은 하나의 수단이이라는 생각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했다. 당시 나는 일종의 사업가였다. 그렇게 1년을 싸우다 지쳐서 결국 사임을 하고 말았다.
 

아쉽지만 나는 중국인의 역사적 상처와 아픔을 위로할만한 품성이 준비되어 있지 않았다. 그렇게 아쉬운 감정만을 안고 다시 기차를 탄 것이 꼭 1년 만이었다. 또다시 괴나리봇짐을 싸서 아내와 아이를 데리고 수도로 들어갔다. 그 후 10여 년 가까이 학교에 적을 둔 것은 우선 비자를 해결하기 위한 방안이었다. 그러나 그 덕분에 중국에 대한 학문적 접근이 거의 없었던 당시 한국인으로서 중국기독교사를 전공한 첫 번째 박사가 되었고, 연구회를 조직하였으며, 이로써 여러 학자들을 배출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었다. 나중에 내가 한국에 유학한 중국학생들을 돌보는 사역으로 초대받은 배경이 되기도 하였다. 무엇보다 이 시기에 나는 기독교로 인한 중국인들의 역사적 상처에 대해 깊이 생각할 수 있었다.
 

당시 주변에서는 광야에 학교를 세워 지도자를 양성하는 일에 매진하면서 성과를 내고 있었다. 직접 안수를 주는 경우도 생겨났다. 나도 일정 부분 협력하고 참여하였지만 나는 그것이 장차 지역에 뿌리내리는 교회로서 자리매김해야 할 중국교회가 해외로 향하려는 원심력이 되지 않겠는가 하는 고민과 염려가 있었다. 그러한 염려는 시진핑(习近平) 시대에 접어든 지금도 여전히 가지고 있다. 간신히 역사종교로서 뿌리내리고 있는 중국교회에 또 한 번의 거대한 시련이 올 수도 있는 일이다. 그러다 보니 간접적인 역할을 찾을 수밖에 없었다. 여기저기 강의를 다니고, 학교교육과 복지사업, 지원사업(북한)에 참여하였다. 이즈음 발표된 새로운 외국인 종교법에 따라 대학원생 집사님들과 함께 담임하고 있던 한인교회를 종교사무국에 등록하여 합법적인 외국인교회로 출범시켰다. 담당 공안들과 긴 줄다리기 과정을 거친 후였는데 아마도 합법적 한인교회로서는 거의 한두 번째일 것이다. 이것은 개혁개방 이후 종교개방의 수준이 1844년의 망하(望厦)조약 수준으로 회복된 것이라는 생각에 지금도 남다른 보람을 갖고 있다.
 

그러나 베이징(北京)에 거주하는 수년 동안 일반학교를 세우고, 장학금을 전달하며 교류하고, 교회를 지원하고, 북한 인민을 후원하는 사역들은 모두 ‘사람에 대한 갈증’을 갖게 하였다. 복음을 적극 전하고 지도자를 세우며 재생산구조를 만들어 내는 사역들에 부러움까지 생겼다. 마침 한국의 지방 기독교대학에서 유학생 담당 교목을 찾고 있었다. 그래서 10년을 채우지 못하고 현장을 떠나면서 아쉬움보다 직접 사람을 만나는 일에 더 큰 흥미를 가지고 돌아왔다. 이곳에서 나는 중국인유학생을 위한 기독교 개론서를 집필하고, 유학생을 위한 채플과 원어 강의를 시작하였고 유학생교회를 개척하였다.
 

그때 당시의 유학생들은 이제 고국으로 돌아가 사역자와 사업가, 교수, 직장인 또는 전업주부가 되어 다양하게 정착하였다. 약 7년 동안 캠퍼스의 교회와 숙소, 아르바이트하는 일터에서 찬양하고 기도하며 함께 식탁공동체를 이루었던 세월들이 아름다운 추억으로 남아 있다. 방학 때면 전국의 여러 곳을 돌아다니며 수련회를 가졌던 기억도 새롭다. 이들은 지금 온라인을 통해 안부를 주고받고 있으며 현지의 끈이 되어주고 있다. 한 사람 한 사람의 얼굴에 그리스도의 얼굴이 겹쳐 떠오를 때 더욱 감사하다.
 

이제 목회현장으로 떠나온 지 다시 7년이 되었다. 그런데 내게는 지난 학기부터 새로운 대학현장이 주어졌다. 서울의 모 대학에서 중국인유학생을 위한 기독교개론 강의 수업에 다시 참여하게 되었다. 한동안 잊고 지냈는데 이 학교에만도 천 명 넘는 중국인유학생이 재학하고 있다는 사실에 놀랐고, 국내에 중국어로 쓰인 유학생 교재가 내가 쓴 것 외에 아직 없다는 사실에 또 한 번 놀랐다. 마땅한 중국어 강의 전담교수가 부족하다는 사실도 의아하다. 하나님이 이때를 위해서 나로 하여금 중국어를 익히고 중국기독교 역사를 공부하게 하셨다는 생각에 다시 감사를 드린다.
 

지역교회와 협력 시스템이 모색되어야 한다는 것은 과제이다. 내가 아는 것은 이 학교뿐이니 다른 지역이나 학교, 교회에서 이미 이루어지고 있는 사역에 대해 내가 모르고 있을 것이다. 어쨌든 지난 학기에 만난 유학생 한 명이 얼마 전에 밤샘 아르바이트를 끝내고 두 시간 가까이 걸려 지하철을 타고 우리 교회 예배를 찾아온 적이 있다. 어제도 한 명이 찾아 왔고, 이번 목요일에도 약속된 방문자가 있다.
 

사랑에 갈급하여 찾아온 어린 생명들이다. 다음 학기에는 두 반 80명의 유학생을 맡았다. 이 어린 영혼들을 섬길 수 있어 정말 기쁘다. 나는 이들을 통해서 내 선교사역을 발전시키고 싶은 마음은 없다. 그저 기회가 주어지는 대로 예수의 마음을 품게 하고 싶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법에 대해 토론하고 그 마음으로 귀국하게 하고 싶다.
 

이제 지천명의 나이가 되었고 언제든 강의도 중단하라면 그만 둘 용기도 생겼다. 그래서 커리큘럼도 최대한 내 마음대로 만들었다. 주로 성경의 이야기를 읽고 음미하며 해석하고 현대사회에 함께 적용해보고자 한다. 탄압이 가해지고 장벽이 견고해지고 있다는 중국의 소식이 새삼스럽지는 않다. 중국의 반기독교 역사는 십자가를 지고 섬기신 그리스도의 마음이 아니면 그 마음자리에 들어갈 수 없음을 깨닫게 해준다. 중국은 원래 문화적으로 그런 나라였고 더욱이 사회주의 체제가 도전을 받고 있는 시점이다. 그러니 당연히 방어적이요 기독교에 대해서는 더더욱 그렇다.
 

중요한 것은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중국과 중국인을 깊이 알고 사랑하며 섬길 젊은이들이 나를 찾아오고 있다는 사실이다. “멀리서 친구가 찾아오면 이 또한 기쁘지 아니한가!”라고 그랬는데 찾아가지 않아도 미래의 친구들이 찾아드니 이 또한 얼마나 즐거운 일인가! 사람이 소중하다.
 

또 사순절이 시작되었다. 하나님이 겸손한 지혜와 용기를 주셔서 허망한 욕심과 후회할 일이 줄어들기를 바란다.





 


정암 | 전 중국사역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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