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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5.4 통권 177호     필자 : 배춘섭 프린트   이메일 
[선교일언]
종교개혁 500주년과 선교적 교회

종교개혁의 시작과 다섯 가지 솔라들
1517년 10월 31일, 독일의 비텐베르크대학 신학교수인 마르틴 루터(M. Luther)는 ‘성경으로 돌아가자’는 기치 아래 잘못된 교황청의 교리와 관습에 대항하여 종교개혁을 단행했다. 2017년은 종교개혁운동이 일어난 지 정확히 500년을 맞는 해이다. 그래서 한국에서도 종교개혁 500주년을 앞두고 이에 관한 준비행사와 신학적 논의가 활발하다. 그러나 종교개혁을 향한 교회의 관심은 어쩌면 더 이상 한국교회가 부정할 수 없는 침체와 위기상황을 직면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다. 한국교회는 제2의 종교개혁이 절실하다. 현재 한국교회는 종교개혁자들이 추구했던 진정한 교회의 회복이 필요한 상황이다. 소위 종교개혁자들은 ‘다섯 가지의 오직들’(Five Solas)을 부르짖음으로써 참된 교회의 표지와 정통 기독교 신앙을 회복하고자 했다. 쉽게 말해, 종교개혁자들은 로마 가톨릭교회의 가르침에 반대하여 개신교의 기본 믿음의 체계를 확립하고자 다섯 가지의 솔라(Solas)를 외친 것이다.
 

그렇다면 다섯 가지의 솔라들은 무엇인가
① ‘오직 성경’(Sola Scriptura)이다. 성경은 하나님의 영감으로 기록된 권위의 말씀이다. 성경은 기독교 교리의 유일한 원천으로서,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하나님 말씀으로서 믿음의 근거가 된다. 그런데 로마 가톨릭교회는 하나님 말씀인 성경을 신앙의 절대 표준으로 삼지 않고, 단순히 ‘우선적 성경’(Prima Scriptura)의 개념으로 가르쳤다. 이것은 거룩한 전승으로서 성경을 인정하지만, 성경 외에 얼마든지 신앙을 위한 다른 전승들이 존재한다는 것을 전제한다. 게다가 성경 외에 다른 전승들을 인정하고, 성경을 해석하기 위해서는 교회의 권위가 필요했는데, 당연히 그 교회는 로마 가톨릭교회라고 주장했다. 이런 점에서 ‘오직 성경’은 기독교의 모든 전통과 권위가 오직 성경 아래에 있어야 함을 외친 것이다.
 

② ‘오직 그리스도’(Solus Christus)이다. 종교개혁자들은 인간의 자연적 상태에 관해 확고한 인식을 가졌다. 그것은 모든 인간이 죄로 말미암아 타락하여 스스로를 구원할 수 없고, 참된 생명을 회복할 수도 없는 절망의 상태를 말한다. 즉 개혁자들은 인간을 이미 하나님과 원수가 된 자들로서 전적으로 타락한 인생으로 보았던 것이다. 그래서 인간은 죄의 종노릇을 할 수밖에 없고, 현세에서나 내세에서 하나님의 진노 속에서 심판과 영벌을 피할 수 없는 존재라고 그들은 믿었다. 따라서 이런 타락한 인간이 구원받는 유일한 길은 ‘오직 그리스도’ 밖에는 없었다. 그래서 타락한 인간이 구원받는 것은, 십자가에서 인류의 모든 죄값을 치르시고 하나님 언약의 의(义)를 온전히 성취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를 믿는 것 외에는 어디에도 없다는 것이 Solus Christus의 내용이다.
 

③ ‘오직 은혜’(Sola Gratia)이다. 종교개혁자들은 타락한 인간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덧입혀 주는 것은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이지, 인간의 행위적 공로나 노력이 아님을 주장했다. 믿음은 하나님의 은혜를 받는 통로이자 구원을 위한 선물이다. 따라서 인간은 엄청난 공로와 선행을 했다고 해서, 그에 합당한 대가로서 하나님께 믿음과 구원을 요구하지 못한다. 왜냐하면 구원은 인간의 죄로 인해 타락한 존재론적 문제이지, 단순히 행위적 관점의 기능적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오직 믿음과 구원은 하나님 은혜로만 주어질 뿐이다. 이것이 구원론에 있어서 개신교와 로마 가톨릭과 가장 큰 차이 중 하나라고 볼 수 있다.
 

④ ‘오직 믿음’(Sola Fide)이다. 그렇다면, 성경이 말하는 믿음은 무엇인가? 믿음은 질(质)적 차원에서 구분되는데, 기독교 믿음은 신본주의의 차원에서 ‘하나님 은혜로 주어지는 선물’을 말한다. 믿음은 인본주의의 입장에서 ‘인간의 행위적 공로나 의’를 뜻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믿음은 예수 그리스도(하나님의 존재와 구속행위)를 믿음으로 하나님의 은혜로 얻게 되는 것이지, 인간 스스로의 구원을 위해 의지나 자기 신념으로 취하는 믿음이 아니기 때문이다. 거듭 강조하지만 하나님의 구원은 오직 은혜로 주어진다. 타락한 인간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을 얻게 된다. 이런 하나님의 구원사역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주권적 행위로 나타난다. 그리고 이런 하나님의 구원은 역사 가운데 이미 실현되었고, 그러면서도 인간이 측량할 수 없는 신비스러운 방법으로 진행되고 있다. 성경은 하나님의 구원행위를 구속역사 가운데서 보여주고, 언약의 관점에서도 상세히 보여준다. 그러므로 인간이 구원받는데 필요한 조건은 오직 믿음이다. 믿음을 대체할 것은 그 어디에도 없다. 왜냐하면 인간의 구원을 위해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이 믿음 외에 그 어떤 다른 것을 요구하거나 대체조건을 허락하지 않으셨기 때문이다.
 

⑤ ‘오직 하나님께 영광’(Soli Deo Gloria)이다. 종교개혁자들은 교회 성직자와 교황청에 지나치게 집중되었던 권위를 개탄하면서, 오직 하나님께 모든 영광이 돌려지기를 원했다. 당시 로마 가톨릭교회는 성직자의 권위가 하나님한테서 왔음을 가르치면서 교황청의 중앙집권적 통치가 강화되었다. 하지만 개혁자들은 마땅히 하나님께 돌려져야 할 권위와 영광이 교황이나 성직자들에게 돌려지는 것을 반대했다. 왜냐하면 ‘구원사역의 주체는 인간이 아니라 성삼위 하나님이시다.’라는 사실을 그들은 믿었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종교개혁자들은 인간이 하나님의 구원사역에 있어서 단 0.0000001%조차도 참여하거나 공을 세울 수 없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모든 영광은 오직 하나님께만 올려드려야 한다고 외쳤다.
 

한국교회 실상과 종교개혁운동
이와 같은 종교개혁자들의 외침은 오늘날 한국교회가 반드시 들어야 할 울림이다. 단순히 한국교회의 성장세가 둔화되고 영향력이 쇠퇴하고 있기 때문만은 아니다. 그 어느 때보다 작금의 한국 개신교는 총체적인 측면에서 난국이다. 계속해서 감소하는 기독교인 수(数)와 젊은 세대들의 외면이나 교회에 대한 부정적 이미지 등, 이 시대의 그리스도인이 해결해야 할 난제들이 참으로 많다. 이런 모습들은 아마도 영적 감화력을 상실한 교회지도자를 비롯한 교세확장이나 세속의 성공신화를 위해 모든 열정을 바친 세속주의 신앙인들이 낳은 슬픈 참극일 것이다. 게다가 현재 한국의 개신교회는 대형마트와 소상공인들의 불협화음처럼 이미 양극화가 되었다. 소형교회는 해마다 수천 개의 문을 닫으며 ‘작은 공동체의 슬픈 자화상’을 그려낸다. 그러나 다른 한 쪽에서는 발 디딜 틈조차 없이 문전성시를 이루며 사람들로 붐빈다. 이런 내용은 단 몇 분의 관심을 가지고 멀티미디의 신문기사 내용을 접하면, 얼마든지 찾아 볼 수 있다.
 

이상과 같이 한국교회는 지금 양극화와 세속화의 현상으로 심각한 고통을 받고 있다. 그러나 그럴지라도 필자는 한국에 하나님 나라의 사명을 감당할 수 있는 크고 작은 교회를 세워주신 것에 관해 감사하지 않을 수 없다. 비록 대형교회로 인해 작은 교회들이 어려움을 당하고 있다는 일각의 견해도 듣지만, 교회를 서로 이원화해 비교하는 것은 온전치 않은 방식이라고 생각한다. 거듭 강조하지만, 먼저 우리는 한국에 주님의 몸된 교회들을 허락하신 하나님 은혜에 감사해야 한다. 그리고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의 구원사역을 위해 수고하고 헌신하는 것에 마땅히 기뻐하고 감사해야 한다. 하지만 동시에 어째서 한국의 개신교회가 오늘날과 같은 교회의 양상을 띠게 되었는가는 명확히 짚고 넘어가야 한다. 어째서 전과 같이 가족과 같은 아름다운 공동체의 교회의 자화상이 감소하고 있는 것일까? 무엇이 그토록 대형화를 위해 또한 구원이 아닌(?), 세속적 성공을 위해 기독교인들이 집단최면에 걸린 것처럼 믿음을 가지고 다른 목적을 위해 사용하는 것일까? 물론 쉽게 단정해서는 안되지만, 적어도 우리는 종교개혁자들이 목숨 걸고 진리를 위해 싸웠던 외침을 듣고 한국교회의 상황을 진단하고, 그 후에 나아갈 방향과 대안을 찾아야 할 것이다.
 

레밍의 집단주의에 빠진 한국교회
설치류 가운데 레밍(Lemming)이라는 쥐가 있다. 레밍은 비단털쥐과에 속하는 설치류로서 예쁜 털과 짧은 다리를 지닌 앙증맞은 모습을 지녔다. 또한 레밍은 노르웨이 레밍(Lemmus lemmus)의 종으로서 스칸디나비아 반도의 북유럽과 북아메리카 그리고 유라시아지역 등에 많이 서식한다. 그런데 이 쥐들은 3~4년에 한 번씩 큰 강이나 바다에 이르러 빠져 죽을 때까지 집단을 이루어 무조건 직진하며 이동한다. 주로 스칸디나비아 북부지역에서 발생하는데, 광경이 참으로 장관이다. 레밍의 쥐떼들이 왜 이런 괴이한 행동을 하는 것일까?
 

레밍은 먹이사슬에서 하위에 속해서 그런지 여러 마리가 안정감을 위해 스스로 떼를 이루어 어울린다. 소위 집단주의 의식을 지닌 동물이다. 그런데 이렇게 레밍은 떼를 지어 다니다가 3~4년 정도 지나면 갑자기 개체수가 증가된다. 그때에는 먹이가 없기 때문에 모든 쥐들이 불안해 한다. 이때를 맞추어 갑자기 어떤 쥐 한 마리가 막연히 한 방향으로 달린다. 그러면 이유도 묻지 않고 불안했던 동료 쥐들이 앞장 선 쥐를 따라 달라붙고, 또 달라붙어 함께 달린다. 누구도 어디로 가는지, 왜 가야 하는지 묻는 쥐가 없다. 그냥 집단으로 움직이니까, 그 길이 맞는 것 같아서 쥐들은 계속해서 달린다. 하지만 맨 선두에서 달리는 쥐는 멈추고 싶어도 멈출 수가 없다. 뒤에서 엄청난 쥐들이 자신을 밀어내고 있기 때문이다. 선두 쥐는 이제 직진밖에 할 수가 없다. 한참을 달리다 보니, 갑자기 강이 나타난다. 그리고 맨 앞의 쥐는 생각한다. ‘여기서 멈춰야 살 수 있는데, 멈춰야 하는데...,’ 그래도 이 쥐는 멈추지 못한다. 자신을 뒤따르는 쥐떼를 통제할 수 없기 때문이다. 결국 맨 앞의 쥐와 그를 따랐던 모든 쥐들은 물에 빠져 죽고 만다. 이것은 레밍의 쥐들이 자율 의지가 아닌, 군중에 의해 수동적으로 살다가 함께 공멸하게 되는 사람들의 일상을 아주 쉽게 설명해 준다. 쉽게 말해, 강력한 집단의식이 옳고 그름을 분별하는 판단력까지 상실하게 하여 결국에는 다 함께 죽음의 길을 걷게 되는 것이다.
 

한국교회를 설명하면서 무엇 때문에 레밍의 습관까지 언급하는 것일까? 그것은 우리 인간도 레밍 못지 않은 인습의 지혜에 이끌려 살기 때문이다. 우리는 대부분 보이지 않는 규칙에 따라 살아간다. 그것을 사람들은 가치관이나 세계관(Worldview)라고 부른다. 사람들은 공통되고 합의된 인식(Consensus) 속에서 살아가는데, 이렇게 집단 합의된 가치관을 갖게 되면 사람들은 그것을 곧 ‘진실’이나 ‘진리’로 믿어버린다는 것이다. 집단의 합의된 가치관은 무엇이 옳고, 그른 것인가에 관한 논란의 여지를 제공하지 않는다. 집단의식이 곧 옳은 것이며, 만약 그것에 대해 의문을 품는 자는 따돌림을 넘어 공동체를 해(害)하는 것으로 간주해 버린다. 이것을 우리는 ‘레밍의 재앙(Lemming’s catastrophe)'이라고 말한다.
 

예를 들어, 2004년 미국 상원 정보위원회는 그 당시 미국 정보국(Spy agency)이 “이라크가 대량살상무기를 입수했다.”라고 단정한 집단 사고를 신랄하게 비판했다. 미국 상원 정보위원회가 이와 같이 비판하게 된 이유는 간단했다. 오랜 시간이 흐르자, 당시 미국 정보국이 입수한 정보는 단순히 이라크 망명자들이 이라크 정권이 붕괴되기를 원해서 지어낸 유언비어(流言蜚语)로 드러났기 때문이다. 결국 소수의 거짓말을 믿고 싶었던 유럽연합국가와 미국 등이 집단 합의를 이루어 걸프전쟁이라는 참사를 일으키게 된 것이다. 마찬가지이다. 작금의 한국교회가 이 같은 현상을 맞이한 것은 합의된 집단주의가 한몫을 했다는데 있다. 합의된 비성경적인 집단의식이 한국교회로 하여금 종교개혁 기치의 눈을 가리고, 서서히 개혁주의 신앙의 기저를 무너뜨리고 있는 것이다. 예를 들면 다음과 같다.
 

첫째는 한국교회 안에 지나치게 성직자에 쏠린 권위주의이다. 한국교회는 무늬만 개혁교회일 뿐 중세의 가톨릭교회와 거의 다를 바가 없다. 개혁주의자들은 사제의 권위보다 ‘오직 하나님께 영광’(Soli Deo Gloria)을 위해 목숨을 걸었다. 그런데 그동안 한국교회 안에는 하나님보다, 하나님이 세우신 성직자한테 지나친 영적 권위를 부여해 왔다. 그래서 마땅히 그리스도인이라면 ‘만인제사장’으로서 하나님 나라를 위해 사명을 위해 살아야 했음에도, 적지 않은 신도들은 성직자에게 강력한 권위를 부여함으로써 정작 자신은 수동적인 신앙생활에 만족하고야 말았다. 이것은 굳이 비유하자면, 참정권의 권리를 스스로 내려놓음으로써 당면하게 되는 국민의 고통(?)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둘째는 한국교회 안에 합의된 믿음으로 말미암은 성공신화이다. 언젠가부터 한국교회 강단에서 ‘믿음이 좋은 사람은 축복을 받고, 인생을 성공한다.’는 공식이 통용되기 시작했다. 게다가 헌금을 많이 하고, 예수 믿고 성공해서 부자가 된 자들은 마치 ‘하나님의 특별사랑을 입은 그리스도인들’ 정도로 미화되고 있는 실정이다. 정말 그러할까? 그렇다면 어째서 예수님은 머리 둘 곳도 없어서 집도 없이 전도여행을 하시면서 공생애를 감당하셨을까? 어째서 하나님이 사랑을 가득 입었던 예수님의 제자들은 삶의 종말이 육신의 고난과 고통에 처했을까? 그뿐만 아니라 오늘날에도 하나님을 사랑하는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은 어째서 가난하게 살아가는 자들이 많을까? 본인이 아는 한, 적어도 진정한 그리스도인들이라면 ‘먹고 사는 문제’보다는, ‘어떻게 하면 죄를 멀리하고 예수님과 교제하며 믿음으로 살아갈까?’에 관해 최우선의 관심을 가질 것이라고 확신한다(눅 16:19-31).
 

셋째로 한국교회 안에 중세교회와 같은 영적 무분별도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개혁교회임에도 불구하고 한국교회에서는 ‘하나님의 축복을 십일조로 시험해 보라’는 목회자의 설교를 어렵지 않게 듣게 된다. 이것은 교회 안에 이미 물질만능주의, 기복주의, 중세교회의 면죄부와 같은 구원을 담보로 하는 매매행위가 발생하고 있음을 반증한다. 심지어 ‘중세교회도 이랬을까?’하는 의구심이 들 정도로 한국교회는 이미 타락한 중세교회와 같은 영적 양상을 보인다. 이것은 예배의 목적이 오직 하나님께 영광을 올려드리는 것과는 달리, 예배가 가인과 같은 다른 목적으로 변질되어 가고 있음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오직 하나님께 대한 감사와 신앙고백이 없고, 하나님을 내 목적에 맞추어 찾는 행위는 엄연히 말해 ‘우상숭배’이다. 따라서 우리는 예배의 본질의 회복과 그에 따른 사명을 위한 순종이 있어야 하겠다.
 

선교하는 교회만이 답이다!
그렇다면 현재 한국교회의 전반적인 문제와 병폐는 무엇인가? 그 해답은 중세교회 시대의 ‘기독교제국(Christemdom)'이 낳은 교회의 왜곡된 신앙관에서 찾을 수 있다. 역사의 측면에서, 초대교회 시대에는 기독교인을 핍박하는 수많은 박해가 있었다. 그러나 당시 적지 않은 그리스도인들은 극심한 박해 속에서 순교하면서도, 개인이 받는 고난을 오히려 복음을 전하는 기회로 삼았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들은 복음을 위해 받는 고난을 순결한 신앙으로 승화(升华)하여 오히려 하나님 나라 확장을 위한 선교의 동력으로 사용했다. 비록 초대교회는 기독교 문화와 사회적 국가체제는 갖추지 못했지만, 이런 개개인의 순결한 신앙 때문에 교회는 세상의 빛이 될 수 있었다.

반면 이런 순수한 교회의 모습은 중세말기에 접어들면서 색이 바래지고 말았다. 기독교가 제국화가 되면서 교회는 복음의 순수성을 점차 상실했고, 결국 교권주의를 비롯한 세속화에 무릎을 꿇고 말았다. 당시 교황의 교권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강화되어 갔다. 교회에는 쌓을 곳이 없을 정도로 물질과 재정이 넘쳐났다. 교회는 기독교 문명과 문화로 세상을 지배하는 것이 당연하게 여겨졌다. 물론 이런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은 자기의 택한 백성을 구원하는 은혜를 결코 멈추지 않으셨다. 어둠 가운데서도 하나님은 항상 빛의 자녀를 통해 구원사역을 이루셨고, 심지어 인간이 이해할 수 없는 불가항력의 방식까지 동원해서 택한 백성을 구원하셨다. 이때 주로 쓰임받은 자들은 ‘수도원운동’의 수도사들이었으며, 그 외에 ‘선교단체’를 통해 사역했던 선교사들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세의 교회는 근본적으로 타락을 벗어날 수 없었다. 기독교제국 시대는 ‘복음과 문화’에 관해 성경적인 바른 신학을 정립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당시의 비(非)복음적 요소는 다양한 국면에서 왜곡과 변질을 불러왔다.

첫째는 교회와 국가의 잘못된 관계에서 비롯된 그릇된 가치관이다. 교회가 세속 국가보다 우위에 있어야 한다는 주장은, 결국 추후에 교황청의 굴욕인 프랑스 작은 마을 ‘아비뇽 유수(幽囚)’로 이전하게 되면서 교황청의 분열과 수치심을 안겨주며 교회와 국가의 잘못된 그 관계는 깨어졌다.

둘째는 전통과 문화적 요소를 성경과 견줄 정도의 위상에 올려놓은 사상이다. 복음에 대한 그들의 그릇된 이해는 결국 ‘면죄부’를 비롯한 ‘죽은 성인들에게 기도’라는 비성경적인 사상을 교회 안으로 끌어들였다. 더 나아가 선교에 있어서도 상황에 맞춘 복음화가 되어 혼합주의를 양산하게 되었다. 이렇게 교회가 그릇된 방향으로 나아갈 때 하나님은 성경의 진리를 통해 종교개혁운동이 일어나게 하셨다. 그리고 종교개혁자들을 통해 성경이 바르게 해석되게 하시고 복음의 본질이 회복되게 하심으로써, 교회가 다시 세상의 빛이 되고 선교를 위한 모달리티(Modality)와 소달리티(Sodality)의 역할을 담당하게 하셨다.
 

이와 같이 하나님은 교회가 세상의 어둠을 비추는 빛이 되기를 원하신다. 하나님은 교회가 ‘기독교 선민의식과 탐욕’에 사로잡혀 배타적이고 부패한 모달리티의 공동체가 되기를 원치 않으신다. 오히려 교회는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예배를 위한 모달리티가 되어야 한다. 그리고 개개인의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절대주권 신앙’을 배우며 하나님 나라를 확장을 위한 선교하는 교회로서 소달리티 공동체의 사명을 이루어야 한다. 이런 점에서 중세시대 기독교제국의 타락한 교회의 모습은 오늘날 우리에게 잊을 수 없는 교훈을 준다.

그러므로 이제 한국교회는 종교개혁운동을 기념하여 복음의 본질을 회복하는 선교하는 교회의 모습을 회복해야 한다. 이것이 답이다! 한국교회는 인간이 주권을 움켜쥔 채 이기적이고 부패한 모달리티의 모양을 취해서는 안된다. 한국교회는 더 이상 사사기시대의 아픔과 고통이 현 세대에 재현되지 않도록 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교회 안에서 인본주의, 성공주의, 물질만능주의, 종교다원주의 등과 같은 기독교제국의 욕망을 자극하는 비(非)복음적인 사상도 단호하게 쫓아내야 한다. 그리고 복음의 순수성을 회복하여 ‘예배가 살아있는 모달리티’, ‘선교의 사명을 다하는 소달리티’ 교회의 참된 모습과 지표를 되찾아야 한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복음만이 살 길이다.
 

“이와 같이 주께서도 복음 전하는 자들이 복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명하셨느니라”(고전 9:14)

 





배춘섭 | 서울성경신학대학원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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