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작페이지설정   사이트맵    사역에 동참하시려면  
    HOME  |  선교회소개  |  교육.훈련  |  중국을주께로  |  중국기도  |  중국어교실  |  자료나눔  |  커뮤니티  |  도서·음반
   
중국을 주께로는
전체보기
이번호보기
지난호보기
주제별보기
  특집/기획
  선교전략
  중국교회
  중국사회와 문화
  지역 및 종족연구
  중국뉴스
  중국어관련
  선교일반
  선교나침반
  중국 기독교
  기획
정기구독안내
해외정기구독안내
HOME > 중국을주께로 > 주제별보기
2017.4.3 통권 176호     필자 : 왕빈 프린트   이메일 
[선교나침반]
초기 한국교회의 순수한 선교 열정을 배우자

한국 그리스도인은 원래부터 선교지향적인 공동체를 꿈꿨다는 것을 교회 역사를 통해 잘 알 수 있다. 1902년 12월 22일 미국 하와이에 홍승하 전도사를 파송한 데 이어 1907년 장로교회 독노회를 설립하고 탐라(제주도), 일본 도쿄,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 등지에 자민족 타문화권 선교를 비롯해 현지 동포와 유학생선교를 위해 목회자들을 계속해서 파송했다. 1884년 서양선교사를 통해 복음을 전달받은 지 20여년 어간에 이룬 성과였다.
 

1912년 9월 1일 오전 10시 30분, 평안남도 평양 경창문안 여성경학원에서 시작된 조선예수교장로회 제1회 총회의 첫 번째 안건은 황해노회가 내놓은 (해외)선교사 파송 청원이었다. (1907년) 로회(노회)를 시작할 때에 졔쥬(제주도)에 선교사를 보냄으로 신령한 교회를 세워 하나님께 영광을 돌림으로 우리에 깃븜(기쁨)이 충만한 바이온즉 지금 총회를 시작할 때에도 외국전도를 시작하되 지나(支那·중국) 등지에 선교사를 파송하기를 청원하오며.”
 

타민족선교를 결의한 1912년 당시 통계를 보면 우리나라의 교인 총수는 14만4260명, 세례교인은 5만300명이었다. 이는 제주도선교가 시작된 1907년에 비해 교인 수 8만7317명, 세례교인 3만4927명이 각각 늘어난 것. 1912년 통계에 따르면 목사 66명, 장로 225명, 교회 총수 2054곳에 달했다. 그중 가장 먼저 중국선교사로 선택된 박태로(朴泰魯) 목사는 1912년 평양신학교 5회 졸업생이었다. 황해노회는 선교사 파송 청원서를 내는 데 그치지 않고 인물 선정까지 책임졌다. 아울러 총회가 선교사 파송을 받아들이면 선교사 재정까지 담당하겠다고 했다.
 

당시 황해노회원에 윌리엄 블레이어 헌트(韩韦廉, William Blair Hunt)가 있었다. 그는 1915년 더 코리아 미션 필드란 잡지에 한국장로교단의 미션워크라는 제목의 글을 통해 중국에 선교사들을 파송하려는 아이디어가 수년 동안 한국교회에 어필됐다.고 말했다. 다른 선교사들도 한국의 위치가 중국선교를 하는 데 유리하고 한국이 아시아 복음화에 공헌하는 날이 올 것이라고 예상했다. 그의 중국선교 의지를 읽을 수 있는 대목이 적잖다. 그가 세운 황해도 재령 명신학교의 1909년 추수감사절 행사에서 강대상 앞에 커다란 중국지도를 걸어놓고 학생들이 기념사진을 찍었다.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 전도국은 창립 총회의 헌의위원이자 전도국 위원인 그에게 적합한 선교지를 물색해줄 것을 요청했다. 이에 헌트 선교사는 직접 산동(山东)성으로 가서 중국교회 지도자들뿐 아니라 중국 주재 미국선교사들과 한인선교사를 받아들일 수 있는 지역에 대해 심도 있게 논의했다.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는 선교사 파송과 함께 1년 중 한 주일을 특별히 정해 각 교회에서 기도와 헌금을 할 것도 결의했다. 지금의 선교주일 헌신예배가 100년 전부터 시작된 것이다. 당시 교회 규모가 컸기 때문에 눈을 외부로 돌릴 것이 아니었다. 더욱이 재정이 풍족해서도 아니었다. 어린이들은 자신의 저금통을 깨고 선교비를 내는 걸 주저하지 않았다. 초기 선교사 중에는 총회 부총회장, 서기 등 교단 정치 거물도 적잖게 포함돼 있었다. 이들은 선교사가 되는 걸 거부하지 않았고 오히려 자랑스럽게 여겼다.
 

찰스 알렌 클락(郭安连, Charles Allen Clark) 선교사는 한국교회의 초기 중국 산동성선교사 선발 과정을 이렇게 묘사했다. 교회의 모든 목회자가 스스로 해외 근무 직원이 된다는 것은 한국의 흥미로운 현상이다. 이러한 외지의 선교사역을 위해 사람을 선정할 때는 각 경우마다 담당 위원회가 선교지에 있는 선택 가능한 사역자들을 조사하여 그 선교과업에 가장 적합하다고 생각되는 사람을 선정하기만 하면 되었다. 이때 선택된 사람은 어느 누구도 선교사로 가는 것을 거부하지 않았다.”
 

선교사들은 현지어를 배우는 걸 당연시했다. 현지인을 통한 통역설교를 상상하지 못했다. 어떻게 하든지 현지어를 자유자재로 사용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런 뒤 현지인에게 복음을 전하며 교회를 개척했고 미래 교회 지도자를 양성해나갔다. 1912년 9월 총회 결의에 이어 1913년 9월 실제로 선교사가 정식으로 파송되기까지 적잖은 과정도 필요했다. 박태로 김찬성(金灿星) 목사가 1913년 5월 산동선교 문제를 협의하기 위해 옌타이(烟台)에 도착했을 때의 일이다. 마침 중화예수교장로회 화북(华北)대회가 열리고 있었다. 두 사람이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의 중국선교사 파송 의지를 밝히자 중국인들 사이에서 처음엔 불가능할 거라는 곱지 않은 반응이 나왔다.
 

중화(中华)는 고대의 문명국이오 역사가 심장한 대국(大国)이며 세계 4분지 1의 인구를 가진 국가라 교만과 자존심이 많아 자칭 대국이라 하야 소국을 멸시하는 고래적 습행이 있으니 중화와 조선(朝鲜)은 자고로 관계가 되어 대소와 조완의 차별을 두는 관계로 조선교회가 중화에 선교는 다방으로 고난이라.”  분명한 반대의사였다. 나라 잃은 민족과 교회가 파송한 선교사라고? 너무나도 생소하고 자존심이 상하는 일이었을 거다. 이처럼 삐딱하게 나오던 중국 목회자들은 결국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의 산동선교를 허락하게 됐다. 선교지 배정 과정에 있어 윌리엄 블레이어 헌트 선교사의 사전 조율이 힘이 됐고, 한국교회 또한 겸손히 현지교회와 협의를 통해 협조를 구한 게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미국 북장로회는 1861년 덩저우(登州, 현재 펑라이·逢莱)에서 산동선교를 시작했다. 이어 1862년 옌타이, 1872년 지난, 1882년 웨이셴(威县), 1890년 이저우푸(沂州府), 1890년 지닝저우(济宁州), 1899년 칭다오, 1905년 이셴(沂县), 1913년 텅셴(藤县) 등 선교지역을 9곳까지 확장해나갔다. 원래 산동성을 밟은 개신교 최초의 선교사는 칼 프리드리히 아우구스트 구츨라프(郭实猎, Karl Friedrich August Gutzlaff)이다. 그는 1831∼34년 몇 차례 중국 동해안을 여행하면서 산동 사람들에게 성경과 기독교 서적을 나눠주었다. 구츨라프의 선교가 개인적, 단회성이었다면 미 북장로회 선교는 보다 집단적이고 지속적으로 이뤄졌다. 미 북장로회 대표 선교사로 존 리빙스톤 네비우스(倪维思,·John Livingstone Nevius), 칼빈 윌슨 마티어(狄考文, Calvin Wilson Mateer), 왓슨 맥밀런 해이스(赫士, Watson McMillen Hayes), 헌터 코벳(郭显德, Hunter Corbett) 등을 꼽을 수 있다.
 

네비우스 삼자(자립·자전·자치)정책’으로 널리 알려진 네비우스는 원래 1854년 저장(浙江)성 닝보(宁泼)에서 활동하다가 1861년 덩저우로 이동, 산동 선교의 기수가 됐다. 그는 1890년 6월 7일 주한 서양 선교사들의 초청을 받아 내한, ‘네비우스의 선교사역의 방법이란 책을 나눠주며 삼자원리를 설파했다. 그 결과 주한 장로교 선교공의회는 네비우스 이론을 선교정책으로 채택하기에 이르렀다. 네비우스에 이어 상하이(上海)에서 약 5년 동안 활동하던 찰스 로저스 밀스(梅理士,·Charles Rogers Mills)가 1862년 덩저우에 합류한 뒤 38년 동안 활동했다. 1864년에는 마티어 선교사가 덩저우에서 중국 내 최초의 현대 고등교육기관을 세웠고 1908년 칭다오에서 죽기까지 45년 동안 산동 복음화에 힘썼다. 1882년 중국으로 파송된 해이스 선교사는 마티어가 설립한 학교를 지난대학교로 발전시켰다.
 

옌타이 선교는 1862년 닝보에서 온 의사 디비 베툰 매카티(麦嘉缔, Divie Bethune McCartee)에 의해 시작됐지만 꽃을 피운 사람은 코벳 선교사다. 1864년에 옌타이에 도착한 그는 2년 뒤 첫 장로교회를 설립했다. 그의 전도를 통해 처음으로 예수님을 믿은 중국인은 왕즈(王治)이다. 왕즈는 200여 리의 먼 길을 찾아와 코벳 선교사에게 도(道)를 물었다. 그의 밑에서 2개월 동안 공부한 왕즈는 집으로 돌아가 친구들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전했다. 왕즈의 부인은 조급하고 화를 잘 내던 남편이 복음을 통해 온유한 사람으로 변화되자 놀라 이렇게 고백했다. 기독교가 만약 이 같은 변화를 일으킬 수 있다면 기독교가 사람들에게 사악(邪恶)하다고 할 수 없다. 나 역시 기독교인이 되겠다.
 

코벳 선교사는 옌타이를 중심으로 활동하던 선교 초기엔 중국인들에게 배척을 당하기 일쑤였다. 한지에서 밤을 지새우기도 했지만 복음을 전하는 열정을 막을 수 없었다. 1917년에 산동 선교사로 파송되었던 홍승한(洪承汉) 목사는 1920년 신학지남 제3권 제2호에 실린 ‘중국 산동성 래양 선교소식’에서 코벳 선교사가 사역 초창기 경험했던 어려움에 대해 이 같은 기록을 남겼다.
 

산동성인(山东省人)은 본시(本是) 본국인(本国人)이라도 타성인(他省人)이면 일층하대(一层下待)하는 습속(习俗)이 유(有)한 중(中)에 모양(貌样)과 언어(言语)와 의복(衣服)이 부동(不同)한 외국인(外国人)은 불언가상(不言可想)이라 고(故)로 오십여 년(五十馀年) 전(前)에 미국(美国) 목사(牧师) 곽현덕(郭显德) 씨(氏)가 초래(初来) 전도(传道) 시(时)에 무한(无限)한 묘시(藐视)와 능욕(凌辱)과 핍박(逼迫)을 당(当)하였도다 혹(或) 한지(寒地)에서 경야(经夜)하기도 하고(객점(客店)에서 응접(应接)지 아니함으로)….코벳 선교사는 최초의 한국선교사들을 보고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1916년 당시 82세였던 그는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 파송으로 선교지 시찰을 온 심익현(沈益賢), 이일영(李一永) 목사를 만나 49년 전 경험을 이렇게 털어놓았다.
 

자기(自己)는 지금(至今) 팔십이세(八十二岁)요 오십삼년전(五十三年前)에 옌타이(烟台)에 래(来)하였으며 사십구년전(四十九年前)에 평양성(平壤城)에 래(来)하여 선교사(宣教师) 살해(杀害)한 사건(事件)을 문사(问查)하여 보았는데 기시(其时)에는 조선국(朝鲜国)에 신자(信者) 일인(一人)이 무(无)하더니 지금(至今)은 교회(教会)가 왕성(旺盛)하여 중국(中国)에 선교사(宣教师)까지 파견(派遣)을 하였으니 실(实)로 감사(感谢)하다.(기독신보 1916년 8월 23일자)
 

이는 토마스 선교사의 순교로 이어진 1866년 제너럴 셔만(General Sherman)호 사건 진상을 규명하기 위해 코벳 선교사가 1867년 1월 23일에 조선에 온 적이 있다는 고백이다. 제너럴 셔만호 사건이 발발하자 중국 베이징 주재 미국 공사 윌리엄스는 미 함대사령관 로완(Rowan)에게 사건 규명을 명령했다. 이에 로완 사령관을 와추셋(Wachusett)호를 급파했고 코벳 선교사는 와추셋호 슈벨트 함장의 통역관으로 조선에 왔다. 토마스 선교사를 살해했던 조선이, 그것도 일제 강점기에 중국에까지 선교사를 파송했다는 사실에 코벳 선교사는 매우 놀랐고 하나님께 이를 감사해했다.
 

조선예수교장로회는 선교사를 파송했지만 선교사 자녀교육, 안식년제도 등을 고려하지 못했다. 1915년 제5회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에서 선교사 자녀교육 문제가 언급됐지만 구체적 방안은 나오지 못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매월 선교사 자녀교육비 항목을 두고 비용을 지출했다. 지금도 선교사 자녀교육 문제로 인해 수많은 선교사들이 어려움이 겪고 있듯이 초기 선교사 역시 그러했다. 한 서양선교사의 언급을 통해 당시 선교사 자녀교육 문제를 어렴풋이 느낄 수 있다. 동료 선교사의 자녀들이 거리로 나가 싸우기도 하고 저속한 말을 배워도 별다른 교육 방안을 세우지 못하고 있었다….안식년 규칙이 마련된 것은 1918년이었다.
 

수많은 난관 속에 있는 선교사들을 볼 때마다 가슴이 미어지는 것 같다. 한국교회가 초기 그리스도인들 열정을 배워 어떠한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의 결정판인 선교를 포기하지 않기를 바란다. 모든 것이 갖춰져 있을 때야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것은 결코 아니다. 종교개혁 500주년을 맞이하는 한국교회가 보수, 진보라는 낡은 이념의 틀에서 벗어나 주님의 재림을 온전히 준비하는 선교공동체가 거듭나기를 기대한다.






 

왕빈 | 중국전문가

 

       인쇄하기   이메일보내기   
   
110-812 서울시 종로구 창경궁로29길 25, (명륜3가 명륜빌딩 202호)   Tel : 02)745-0780~2, 070-8236-1270   Fax : 02)745-0786    E-mail : sinim@chol.com
Copyright 중국어문선교회 All Rights Reserved.     Product by gmglor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