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 상인의 중국 진출 중국 명나라가 16세기 이후 산업의 발전과 은(銀) 경제의 진전으로 말미암아 커다란 사회 변혁을 이루고 있을 때, 국외로부터 새로운 물결이 도전하여 왔다. 유럽 상인의 중국 입항이 그것이다. 예로부터 서방제국이 중국과 끊임없이 접촉해 왔지만, 15세기 말 ‘바스코 다 가마(Vasco da Gama)’ 에 의한 인도항로 발겨 이후, 유럽인의 중국 진출은 그 때까지의 교섭과는 완전히 성격이 달랐다. 르네상스를 경험하고 이른바 대항해 시대를 맞이한 그들은 조공무역의 형식이 아니라 통상(通商)을 요구하였으며, 이것은 글자 그대로 항상적인 관계를 맺는 것이었다.
이 때 유럽 국가 중 다른 나라보다 인도양을 지나 중국으로 진출한 나라는 포르투갈이었다. 1517년, 포르투갈 사절단이 광둥(廣東)에 상륙하여 베이징(北京)에까지 올라가 황제 무종(武宗, 正德帝, 1505~21)을 알현하고 통상을 요구하였다. 물론 명조는 조공의 형식이 아니면 교역을 인정하지 않았으나, 포르투갈 상인들은 계속 줄지어 배에 물건을 싣고 들어와 괴롭혔다. 그들은 선박과 대포를 가지고 중국을 위협하였다. 이로 인해 그들은 명조 해군과 무력충돌을 일으킨 적도 있지만, 화남 연해 지방의 해적 소탕에 기여한 사실이 인정되어 중국은 보상의 의미로 그들에게 마카오에 근거지를 설치하여 주었다. 1557년 포르투갈은 마카오의 거주권을 확보하였는데, 이후 마카오는 포르투갈의 조차지가 되었고 중국 및 일본 무역의 거점이 되었다.
이어 스페인, 네덜란드, 뒤늦게 영국이 동양무역에 진출하였다. 스페인은 포르투갈과 경쟁 관계에 있었기 대문에 서쪽으로 대서양과 태평양을 건너 우회하여 동양에 진출한 후, 필리핀의 마닐라를 근거지로 삼아 동방 무역에 종사하였다. 그들도 사절을 보내어 중국과 통상하려 하였지만 포르투갈의 방해로 뜻을 이루지 못하였고, 다만 마닐라에서 중국 상인들과 접촉하여 교역하였다.
당시 유럽 상인들이 중국에서 수입한 물건은 비단, 도자기, 차, 금속제품, 진주 등이었다. 대신 그들은 대량의 신대륙산 은을 가지고 변제하였기 때문에 중국 은(銀)경제의 발전에 크게 기여하였다고 할 수 있다. 이리하여 유럽 상인에 의한 중국 무역은 크게 발전하였고, 이와 동시에 카톨릭 선교사들이 중국으로 활발히 진출하였다. 카톨릭 선교사의 입국 이 무렵 유럽에서는 카톨릭 교회의 부패와 타락을 비판하면서 루터, 캘빈 등에 의한 종교개혁이 일어나 프로테스탄트 활동이 활발히 진행되고 있었다. 이에 대응하여 카톨릭 교회에서는 내부 개혁운동의 일환으로 예수회를 조직하였다. 이 교단은 1540년에 이그나티우스 로욜라(Ignatius Loyola)를 중심으로 조직된 단체로, 카톨릭의 자기 혁신 및 교세 확장의 운동에 힘썼다. 그리고 쇠퇴한 카톨릭 교세를 만회하기 위하여 유능한 선교사를 동아시아 각지로 파견하고 있었다. 물론 중국에 서양의 기독교가 들어온 것은 당(唐)대였지만, 이 때 전해진 네스토리우스파, 즉 경교(景敎)는 정통 기독교가 아닌 이단에 속해 있었고, 원대에 몬테코르비노 등이 전한 카톨릭 신앙은 이미 흔적도 없이 사라져 선교사들이 새롭게 포교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예수회 선교사로 동아시아에 최초로 들어온 사람은 프란시스코 자비에르(Francesco Xavier, 1506~1552)이다. 그는 먼저 일본에서 포교를 성공적으로 완수한 후 중국으로 들어가는데, 광둥에 도착한 지 3개월만에 병사하여 큰 성과를 얻지 못하였다. 그의 유지를 계승하여 중국에 들어 온 선교사가 유명한 마테오 리치이다.
마테오 리치(Matteo Ricci, 利瑪竇, 1552~1610)는 1552년 이탈리아의 중부 마체라다시에서 태어났는데, 그의 집은 약초를 파는 집이었다. 16세에 로마로 나와 예수회가 세운 로마대학에서 신학과 철학을 공부하면서 당시 유럽 최신의 과학지식인 수학과 천문학을 습득하였다. 이때 그는 베리냐노 교수의 영향을 받아 동양선교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1582년, 마카오에 도착한 마테오 리치는 내지(內地)로 들어가 포교하기 위해 광저우(廣州)로 갔다. 중국 포교를 위해서는 먼저 언어를 익히는 것이 선결문제라고 생각하고, 광둥성에 있는 짜오칭(肇慶)에 머물면서 중국어를 착실히 공부하였다. 이어 이름을 중국명으로 리마떠우(利瑪竇)라 하고 포교 활동에 들어갔다. 1589년에 쑤저우(韶州), 1959년에 난창(南昌府), 1599년에 난징(南京)을 거쳐, 1601년 베이징으로 들어갔다. 베이징에 오는 도중 관리들에게 붙잡혀 고생을 당하기도 했는데, 이 소식이 황제의 귀에 전해졌기 때문에 황제가 그의 입경을 허락한 것이다. 마테오 리치는 명나라 신종(神宗, 萬曆帝, 1572~1620)을 배알하고 황제에게 자명종(탁상시계)등 유럽에서 가져온 다수의 토산품을 헌납하여 신임을 얻고 마침내 베이징에 머물러도 좋다는 허락을 받았다. 신종이 여러 선물 중 특히 2개의 자명종이 마음에 들어 리치의 베이징 체류와 포교를 허락하였다고 한다.
베이징 선무문(宣武門) 내에 거주지를 마련한 그는 근처에 카톨릭 성당을 세우고, 주로 중국의 고관들과 친교를 맺으며 그들을 카톨릭에 들어오게 하였다. 그들 중 대표적인 사람은 서광계(徐光啓), 이지조(李之藻), 양정균(楊正筠) 등 고위 관리들이었다. 고관을 비롯하여 사대부들을 중심으로 카톨릭을 소개하려는 것은 예수회의 포교 활동의 방침으로, 그는 고관과 사대부들에게 카톨릭을 이해시키기 위하여 스스로 「사서오경(四書五經)」 등 유교 경전을 공부하여 주자학의 논리를 가미한 독특한 기독교 철학을 전개하였다. 또한 복장도 중국 사대부의 복장을 하고 다니면서 중국인들에게 이질감을 느끼지 않게 하도록 노력하였다. 그는 1610년 베이징에서 57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27년간 중국 포교에 온 열정을 쏟으면서 서양문물 및 서양 실정을 중국인들에게 알리는 다리 역할을 하였다.
마테오 리치 다음에 활동한 선교사는 이탈리아 사람 롱고바르디(Longobardi, 龍華民), 독일 사람 아담샬(Adam Schall von Bell, Johann, 湯若望, 1591~1666) 등이다. 이들의 열성적인 포교 활동으로 명조 멸망까지 5 ∙ 60년 동안 신자 수는 2~3만 명에 달했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명조가 멸망되고 청조가 들어선 다음에도 카톨릭 선교사는 그대로 청조에 중용되었다. 아담샬은 베이징 천문대의 책임자가 되어 역법 개정에 공을 세웠고, 벨기에 선교사 페르비스트(南懷仁)는 ‘삼번의 난’(1673~1681) 때에 신식대포를 주조하여 성조(聖祖, 康熙帝, 1661~1722)의 신뢰를 두텁게 받기도 하였다.
그런데 청대에 들어오면 중국의 카톨릭 선교 활동에 변화가 생기게 된다. 그동안 선교사들이 유교와의 충돌을 일으키지 않으려고 카톨릭의 내용을 상당 부분 유교에 맞추려 한 데 반하여, 그 뒤에 중국에 들어온 도미니크회나 프란시스코회 등은 예수회의 이러한 유교와의 타협이 카톨릭 교리에 어긋난다고 주장하였다. 이로 인하여 청나라에서는 강희제 때 마테오 리치 입장을 인정하는 선교사들에게만 중국에 머물 수 있도록 하였다. 한편 로마 교황청은 중국인 카톨릭 교도가 유교의 제사를 지내는 것을 못하도록 했다. 그 후 옹정제 때에 선교사들을 추방하고 카톨릭 교회 자체를 금지시켰다. 선교사 중 몇 명은 궁중 내의 기술자나 화가 등으로 남아 있었으나 포교활동을 할 수 없게 되었다. 그후 중국에서 기독교 활동의 자유가 인정된 것은 ‘애로우 전쟁’(1856~1860)으로 맺은 베이징 조약(1860)부터이다. 유럽 문화의 전래 명 중기 이후 중국에 진출한 카톨릭 선교사들은 그저 성경만 가지고 중국에 온 것이 아니었다. 다른 한 손에는 우수한 유럽의 과학 기술 및 여러 학문을 가지고 들어왔다. 그리고 중국 전통 사상과 풍습을 참작해, 기독교 교리와 교묘하게 조화시켰다. 그들은 당시 지식인층의 환심을 사기 위해 우수한 서양 학술의 소개에 노력을 기울임과 동시에 대포, 소총 등 무기의 주조에도 협력하였다. 그리하여 카톨릭 세력은 점차 신장되어 갔으며 동시에 천문학, 역학, 지리학, 수학, 물리학, 화학 등의 자연과학과 미술 등이 중국에 전해졌다.
중국 카톨릭 선교의 아버지라 불리는 마테오 리치는 중국 포교를 위해서는 사대부층의 신임을 얻어야 한다고 믿고 서양 학술을 중국어로 번역하였다. 그 중에서도 가장 유명한 것이 세계지도인 「곤여만국전도(坤輿萬國全圖)」와 유클리드 기하학의 역서인 「기하원본(幾何原本)」이다. 그가 제작한 「곤여만국전도」는 1602년 베이징에서 간행된 최초의 과학적인 세게지도로, 한자로 기록되어 있다. 6폭 1조로 5대주(五大洲)를 그려 목판으로 인쇄하였는데, 세로 179cm, 가로 414cm나 되는 커다란 지도이다. 오르텔리우스 도법을 써서 전세계를 타원형 지도로 나타내었는데, 지도 중앙에는 중국을 그려 놓고 베이징을 경(經)도로 삼았다. 지도 바깥에는 천문학에 관한 설명이 있고, 지도안에는 세계의 지지(地誌)를 간단히 넣어 제작한 것이 특징이다. 이것은 중국인의 중화의식을 만족시켜 주기 위한 의도로 보이나, 결국은 이 세계지도가 중화의식에 사로잡혀 있던 중국인들에게 새로운 세계관을 갖게 하였던 것이다. 마테오 리치의 또다른 저서인 「천주실의(天主實義)」는 한국의 천주교 성립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쳤다.
마테오 리치의 이러한 학문은 중국 지식인층의 관심을 끌어 서광계 등 유력한 관료가 개종하여 그이 포교사업에 크게 도움을 주었다. 서광계는 마테오 리치에게 세례 받고, 그와 함께 유클리드의 기하학을 번역하여 「기하원본」이라는 책을 내었는데, 이것은 중국인들에게 처음으로 기하학의 사고에 접하게 한 것이다.
선교사 아담 샬은 명 ∙ 청대에 벼슬하면서, 천문학 ∙ 기계학 등의 학식으로 전도 사업의 기반을 구축하였다. 1622년 중국 시안(西安)에서 포교하던 중 1630년 베이징으로 초빙되어 많은 천문 관측 기계를 만들고 서양 천문학 책을 번역하였다. 그가 「숭정역서(崇禎曆書)」를 완성한 이후 중국에서는 서양 역법이 중시되었다. 그는 명나라를 위해 대포도 주조하였는데, 이러한 그의 해박한 학식과 기술 그리고 포교의 영향으로 많은 신자를 얻게 되었다. 특히 황실과 고관 중에서 많은 신자가 나왔다. 명이 망한 후 청조에서도 벼슬하여 1644년에는 흥천감(欽天監: 천문대장)에 취임하여 활동하였으나, 수구파 학자들의 무고로 투옥되고 고생하다가 1666년 베이징에서 세상을 떠났다. 1688년 루이 14세의 명으로 선교단의 일원이 되어 중국에 건너온 예수회 소속의 프랑스 선교사 부베(Boubet, 白晋, 1656~1730)는 강희제에게 기하학 등을 가르치면서 궁정에서 활동하였다. 강희제의 명을 받아 중국 전역을 실지 측량하여 지도를 만들었는데, 그것이 유명한 최초의 중국지도인 「황여전람도(皇輿全覽圖)」이다.
1699년에는 「강희제전」을 지어 루이 14세에게 바치기도 하였다. 그리고 이탈리아 사람으로, 예수회 수도사이며 화가인 카스틸리오네(Castiglione, Giuseppe 朗世寧, 1688~1766)는 서양화에 흥미를 느낀 청나라 강희제의 초청을 받아 1715년에 베이징에 도착하였다. 그는 궁정에 자주 드나 들면서 꽃, 새, 초상화 등을 많이 그렸는데, 연꽃을 그린 「취서도(聚瑞圖)」, 100마리의 말을 그린 「백준도(百駿圖)」 등은 특히 유명하다. 그림을 그리는데 중국 물감을 사용하였기에 자유자재로 실력을 발휘할 수는 없었으나, 서양화법의 사실(寫實), 명암, 원근법 등을 도입함으로써 중국 회화에 큰 영향을 주었다. 원래 건축에는 문외한이었으나, 건륭제의 요청으로 12년 간이나 노력하여 원명원(圓明園)에 프랑스의 베르사이유 궁전을 본떠 아름다운 유럽풍의 궁전을 세웠다. 그러나 1860년 애로우호 전쟁 중에 영 ∙ 불 연합군의 침략으로 불에 타 없어져 지금은 석재만 남아 있을 뿐이다.
이처럼 선교사들을 통하여 천문, 역법, 지리, 수학 등 자연과학과 화포 만드는 기술이 전해지고 서양화법이 소개되었다. 그뿐만 아니라 이 시기에 신대륙 원산의 고구마, 감자, 옥수수, 땅콩, 담배 등의 농작물도 유입되어 중국의 농업에 커다란 영향을 주었다는 사실도 간과해서는 안 된다. 그러나 선교사를 통해 중국에 들어 온 유럽의 학술은 일부의 위정자들이나 지식인들 사이에서만 그 가치가 인정되었을 뿐 일반 대중에 널리 보급되지는 못하였다. 서양학문도 그저 기술상의 실용성만이 인정되고 실제 사회에 적용되지는 못하였다. 서양문물의 영향은 중국의 지배체제 유지에 필요한 정도에 머물러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전순동 | 충북대 역사교육과(중국사) 교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