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에 도착한 베네치아 형제 상인 「동방견문록」과 함께 우리에게 잘 알려진 마르코 폴로(Marco Polo, 1254~1324)는 이탈리아 베네치아의 부호 보석상인의 아들로 태어났다. 마르코 폴로가 6살 되던 때, 무역으로 크게 재미를 보고 있던 아버지 니코로 폴로와 숙부 마페오 폴로(혹은 마테오 폴로)는 유라시아에 걸친 대제국 몽골 제국이 동방에 있다는 것을 알고 그 나라에 여행하고자 콘스탄티노풀(오늘날 이스탄불)을 출발하였다.
두 사람은 6년 간의 세월을 허비하여 원나라의 수도 대도(大都, 오늘의 베이징)에 도착하여 쿠빌라이 칸(世祖 1260~94)의 융숭한 대접을 받았다. 당시 몽고지상주의를 택하고 있던 원나라는 색목인(色目人), 즉 서방의 백인 ∙ 서역인 ∙ 이란인과 같은 사람들을 후대하고 있었기에 베네치아 상인 역시 크게 환영을 받았다. 수년 간 중국에 머문 두 형제는 쿠빌라이의 주문을 받고 1269년 9년 만에 이탈리아로 귀국하였다. 그들이 쿠빌라이로부터 받은 주문은 학자 ∙ 문인 ∙ 예술인 등 100명의 유럽 기독교인을 교황에게 부탁하여 보내달라는 것과, 성지 예루살렘의 기독교회에 켜 있는 램프의 성유(聖油)를 가져다 달라는 것이었다.
원래 쿠빌라이는 일찍부터 기독교와 깊은 관계를 가지고 있었다. 칭기즈칸이 기독교와 관계가 있었다고 하며 쿠빌라이 생모가 기독교도였다고 전해지고 있다. 쿠빌라이의 동생 훌라구의 부인도 기독교인으로서 몽골인이 바그다드를 공격할 때 그곳의 기독교도를 죽이지 말라고 남편에게 신신당부하였다고 한다. 원대는 이슬람교, 도교, 라마교(티벳불교), 경교(景敎) 등 여러 종교에 대하여 비교적 관대하였는데, 기독교의 한 일파로서 당대(唐代)에 유행했던 경교(景敎)가 오랫동안 중국 사회에서 탄압을 받아오다가 원대에 다시 부활되기 시작한 것도 이러한 종교적 관용성 때문이었다. 마르코 폴로, 25년만의 귀향 호기심 많은 소년 마르코 폴로는 아버지와 숙부로부터 동방에 대한 여러 가지 이야기를 자주 들으면서 중국에 가보고 싶은 욕망이 강하게 일어났다. 아버지 니르코와 숙부는 17세의 마르코 폴로를 데리고 1271년 베네치아를 출발하여 재차 중국 여행길에 올랐다. 성유는 쉽게 구할 수 있었지만, 학문과 예술에 통달한 100명의 기독교인을 구하기란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다. 교황 그레고리우스 10세의 알선으로 어렵게 두 사람의 기독교인을 얻어 동행하였으나 이 두 사람마저도 도중에 귀환하고 말았다.
일행은 해로(海路)로 예루살렘에 도착한 후 교역로를 따라 이란, 중앙아시아를 거쳐 타클라마칸 사막의 남쪽 오아시스 여러 도시를 지나 하서(河西) 지방에 도달하여 간저우(甘州)에서 1년간 체류하다가, 3년 만에 쿠빌라이 칸의 여름 궁전이 있는 상도(上都: 현 네이멍구자치구의 남부인 돌룬노르)에 도착하여(1274) 쿠빌라이를 알현하였다.
쿠빌라이는 마르코 폴로 일행이 약속을 다 지키지 못하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노고를 격려한 후 벼슬을 주어 궁정에서 생활하도록 하였다. 그들은 원조로부터 우대되어 17년 간 관직을 가지고 살면서 여러 곳을 여행하였다. 쿠빌라이는 그들을 명령 전달자나 사신으로서 중국 각지에 파견하였다. 재기 발랄한 청년 마르코 폴로는 몽골어 ∙ 중국어를 열심히 익히고 중국 여행을 즐겼다. 이때 마르코 폴로는 방문한 지역의 실정을 조정에 상세히 보고하는 임무를 띤 것 같으며, 파악된 각지의 사정은 정확하게 일일이 황제에게 보고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마르코 폴로 일행은 중국 각 도시를 여행할 뿐 아니라 오지인 윈난(云南)성이나 미얀마에도 여행할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
원나라에 체제하기 십 수년이 지난 후, 향수병에 걸린 부친과 숙부의 권유가 있어 마르코 폴로 일행은 귀국하지 않을 수 없었다. 때마침 일한국의 아르군 칸이 본처를 잃고 쿠빌라이칸에게 후처를 물색해 달라는 요청이 있었다. 아르군칸은 쿠빌라이의 동생 훌라구의 손자이다. 원래 칭기즈칸의 혈통은 형제간에 우애가 좋지 않았지만 쿠빌라이와 훌라구만은 예외로, 둘 사이는 좋은 편이었다. 쿠빌라이가 지배하는 원나라와 이란 지역에 세력을 펴고 있는 일한국이 서로 멀리 떨어져 있어 직접적인 이해관계로 부딪칠 문제가 없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된다.
아르군칸의 혼인 알선 요청을 받은 쿠빌라이는 17세된 자기 딸 코카친을 그 곳에 시집보내기로 하고, 마르코 폴로 등 베네치아 상인 세 명으로 하여금 호송하도록 하였다. 황녀를 실은 배는 1290년 푸젠(福建)성의 취엔저우(泉州)를 떠나 말래카 해협을 지나 실론섬, 인도양 서안을 거쳐 일한국 이란 땅에 도착하였다.
그러나 마르코 폴로 일행이 이란에 도착하여 보니 이르군칸은 이미 죽은 후였다. 일행은 코카친의 혼인을 기다리고 있었는데, 1년 후 코카친은 아르군칸의 혼인을 기다리고 있었는데, 1년 후 코카친은 아르군칸의 아들 가잔칸과 결혼하였다. 아버지의 후처로 선발된 여성을 자기의 아내로 삼는 것은 유교 문화권에서는 ‘금수와 같은 행위’라 하여 있을 수 없는 일이지만, 몽골민족은 그러한 것이 별 문제가 되지 않았다. 코카친의 입장에서 보면, 늙은 아르군칸보다는 젊은 그의 아들과 결혼한 것이 더 바람직한 일이었을 것이다. 그 후 마르코 폴로 일행은 1295년에 귀국하였으니 베네치아 출항 25년 만에 다시 고향에 돌아온 셈이다. 감옥 생활의 산물 동방견문록 베네치아로 돌아 온 마르코 폴로는 그 후에도 지중해와 중근동 무역에 종사하였는데, 1298년 베네치아와 제노바 사이에 전쟁이 반발하자 베네치아 해군 갈레선을 지휘하면서 싸우다가 불운하게도 제노바 군에게 포로로 잡히게 되었다. 포로로 잡혀 감방에서 지루하고 단조로운 생활을 하던 마르코 폴로는 중국 생활 및 여행담을 시리즈 형식으로 흥미진진하게, 때로는 허풍을 떨면서 감방에 있는 동료 친구들에게 매일 들려주며 나날을 보내었다. 그런데 그 옥중에 피사의 문인 루스티치아노가 함께 생활하고 있었다. 그는 마르코 폴로가 아시아 생활에서 경험한 진기한 여행담에 감동하여 옥중에서 그의 이야기를 꼼꼼히 기록하기 시작하였는데, 이것이 바로 마르코 폴로의 여행기 「동방견문록」(본래의 이름은 「세계의 기술」)이다. 그러므로 이 여행기는 마르코 폴로가 직접 썼다기보다도 그의 옥중 친구가 쓴 것이며, 그렇기 때문에 이 책에는 과장된 표현도 많이 들어 있다고 한다.
이 책은 좀 과장된 표현이 있긴 하지만 13~14세기의 서아시아 ∙ 중국 ∙ 남해(南海) 등에 관한 역사, 지리, 생활 및 민속 등에 관한 기사가 풍부하고 비교적 정확하여 이 지역 연구의 귀중한 자료로서 높이 평가되고 있다. 그 내용이 매우 신기하여 처음에는 유럽인들이 잘 믿지 않았으나, 그 후 많은 사람들이 아시아 여행을 함으로써 이 책에 기록된 기록이 지리나 주민의 생활 ∙ 풍속에 이르기까지 상세하고 정확함이 증명되었다. 물론 자신이 직접 여행하지 않은 지팡그(일본)에 관한 서술 등은 황당무계한 내용들이 보이고 있기도 하다. 이를테면 “온통 황금으로 뒤덮인 지팡그(일본)는 기와집과 수저, 그릇까지 모두 황금이고 사람들은 모두 풍족하고 궁전은 모두 황금으로 지어졌다”라든지 “인도의 코끼리는 귀가 길어 귀를 이용해 하늘을 날아다닌다”는 등 믿어지지 않은 과장된 표현도 있으나, 그가 직접 체험한 지방의 지리적 지식이나 각지의 풍속 ∙ 습관의 기술은 그 후 탐험가들에 의해 정확성이 입증되어 이곳 여행자들에게 많은 호기심을 불러일으키었다. 서양인의 눈을 뜨게 한 동방견문록 마르코 폴로의 「동방견문록」은 처음에는 단순히 재미있는 읽을거리로 읽혀졌으나 15세기 말에는 여행 가이드북으로서 이곳을 찾는 사람들의 필독서가 되었다. 특히 콜럼버스는 「동방견문록」을 구해 밑줄을 긋고 토를 달아가며 탐독하면서 마침내 이 신비한 동방의 나라를 찾아갈 결심을 하였다. 이것이 콜럼버스의 아메리카 대륙 발견 계기가 되었다. 「동방견문록」은 15, 16세기 서양인의 동양에 대한 호기심을 자극하여 지리상의 발견에도 큰 역할을 하였음은 익히 잘 알려진 사실이다. 루스티치아노가 쓴 원본 「동방견문록」은 없어졌으나 원본을 윤색 ∙ 가필 ∙ 삭제한 많은 사본들이 만들어져 전해오다가, 1934년 물과 펠리오에 의해 여러 사본을 혼합하여 단행본이 편집되어 오늘의 우리들에게 읽혀지고 있다. 마르코 폴로는 석방 후에도 무역에 종사하여 진기한 내용을 담은 여행담을 사람들에게 많이 들려주었지만, 사람들은 그를 신용하지 않고 그의 말에 별로 귀기울이지 않았다. 도리어 사람들은 그를 “백만 가지 거짓을 지어내는 마르코”라 불렀다고 한다.
온갖 어려움과 외로움을 이기고 끈질긴 노력과 불타는 모험심으로, 아시아에 대하여 거의 아무 것도 모르고 있었던 중세 말 유럽인들에게 아시아의 여러 가지 지식을 풍부하게 전달한 상인 마르코 폴로의 공적은 참으로 위대하다 아니할 수 없다. 그가 정확한 지식과 체험으로 소개한 중국의 지리, 주민의 생활 ∙ 풍속, 도시의 화려한 모습, 다양한 산물, 세계적인 신기술, 독특한 문화 등은 상대적으로 낙후되었던 중세 말의 유럽인들에게 그야말로 신비의 세계였다. 그러나 이 모든 이야기들을 보지도 않고 그대로 믿어버리기에는 중국의 문물은 너무도 새롭고 선진적인 것이었다. 중국사정이 상세히 기록되어 있고, 우리나라에 대해서도 소개되어 있는 「동방견문록」은 당시 유럽인들의 호기심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하였으며 그것은 서양인의 동양진출에 큰 자극제 역할을 하였던 것이다.
마르코는 젊은 날의 대 모험을 추억으로 삼으면서 70세의 일기로 베네치아에서 조용히 인생의 막을 내리었다. 당시는 그의 여행담을 들으려 하지 않았으나 오늘날 중국을 찾는 사람들은 그의 여행기에 많은 것을 들으려 하고 있다.
전순동/ 충북대 역사교육과(중국사) 교수 |